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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신기 - 왜(Keep Your Head Down) 리패키지 이것만은 알고 가
동방신기(東方神起) 노래 / SM 엔터테인먼트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 TRACKS (Regular Album)

1. 왜
2. 믿기 싫은 이야기
3. Maximum
4. Crazy (Featuring By 제이 From 트랙스)
5. Honey Funny Bunny (정윤호 Solo)
6. Rumor
7. 고백 (심창민 Solo)
8. Our Game
9. She
10. 아테나
 
~ TRACKS (Repackage Album)
1. 이것만은 알고 가 (Monologue)
2. 이것만은 알고 가
3. 왜
4. Maximum
5. 믿기 싫은 이야기
6. Crazy (Featuring By 제이 From 트랙스)
7. Honey Funny Bunny (정윤호 Solo)
8. Rumor
9. 고백 (심창민 Solo)
10. Our Game
11. She
12. 아테나
13. Journey (Featuring by 서현 From 소녀시대)
14. 이것만은 알고 가 (Monologue)(Instrumental)
 
1CD (정규, 리패키지) / 35:28 Mins (정규), 49:20 Mins (리패키지) / 레이블: SM 엔터테인먼트
 
 
'...제가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인데 더 넓고 높은 산을 올라가려면 잠시 쉬다가 올라가는 거래요! 여러분~ 이제 저희들과 두 손 꼭 잡고 올라갈까요?? 정말 너무나 고맙고 또 고마워요...'

 

- 앨범에 포함된 사진 카드 뒷면에 적힌 정윤호의 말 중 일부

 

 

(2012, 6, 29)

 

많고 많은 아이돌이 존재하는 한국에서 동방신기의 존재 의의는 분명 중요하다. SM의 아이돌 대부분이 초기에 그랬듯 이들 역시 사장의 취향이 십분 반영된 듯한 심히 기괴한 스타일을 앞세우며 나타났다. (당대 한국사회를 걱정하고 H.O.T. 때 하고 나온 헤어스타일을 하는 것. 동방신기에 이르러서는 마치 <평화의 시대> 속 인물들이 실제로 활동하는 느낌을 줄 정도였다.) 아이돌 보이밴드치고는 드물게 '동방의 신이 일어난다'는 토속적 영의 세계관을 도입한 동방신기의 행보 역시 여느 다른 아이돌들과 다르지 않았으나 이들은 곧 차별성을 가진 위치에 도달하게 된다. 정확히는 자신들의 이름을 건 개성적 스타일을 보여줬다고 생각하는 게 옳을 것이다. 이 점은 분명 중요하다. 언제부터인가 그들이 부르는 타이틀곡들은 따라 부르기에 다소 어렵고, 단순히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자율학습시간에 들으면서 공부하기도 애매해졌다. 곡의 멜로디와 진행방향은 마냥 흔들면서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조금 단정짓듯 얘기하자면 그들의 타이틀곡은 시류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시류가 되고자 했다. 태양에 비유해 지지 않겠다는 자신들의 모습을 오글거리는 가사로 설명했지만, 참 멋있었던 2집 의 'Rising Sun', 이후에 등장한 4집 은 앨범 자체로 아이돌에서 진정 아티스트의 영역을 노려볼 수 있는 정점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정점에서 동방신기는 '0도'로 다시 내려왔다. 정확히는 두 명의 동방신기, 그리고 세 명의 JYJ가 된 것이다. 거기에 이르게 된 과정에 대해서는 대강 들은 것들이 있다만 공판에 직접 방청을 간 것이 아니었으니, 결국 나 역시 입소문과 인터넷에 있는 공판기록 일부에 의지해야하는 상황이다. 그런 사정들을 제외한다면 개인적으로는 이들이 두 명, 그리고 세 명으로 갈라져 활동하게 된 것을 오히려 좋게 보는 입장이다. 다섯명의 동방신기만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들으면 몽둥이 들고 때리러 올만한 발언이겠군. 음.. 사실 유튜브, TV, 혹은 라디오와의 타협점을 찾아 4분은 커녕 3분 초반대에서 끝나는 타이틀곡을 만들어야 하는 아이돌 음악계에서 다섯명이나 되는 멤버들이 도대체가 노래를 불러봐야 몇 소절을 부르겠는가. 5분 분량의 곡이라면 각각 해서 1분이라도 부르겠지만 그것도 사실 우스운 일이다. 이런 실태는 아이돌 그룹이 멤버를 증원하는 추세로 기울어 지면서, 소위 가수라고 하는 이들이 아예 노래 부르는 역할 자체를 거의 포기다하시피 하는 희한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대규모의 인원들이 무대를 채우고 이끌어가는 연출을 '보는 재미'는 있으나 그것이 음악을 듣는 재미로까지 이어지는 것은 흔치 않게 되어버린 셈이다. 드물게 그 모든 재미들을 고루 유지한 동방신기는 이제 정윤호와 심창민만이 남아있다. 그리고 그들은 비어있는 자리들을 모두 메워야만 했다. (JYJ의 입장에서는 두 명.) 힘들겠지만 음악을 하는 사람으로서는 이전보다 더욱 확실하게 자신의 모습을 어필할 수 있는 기회가 된 셈이기도 하다. 아이돌치고는 드물게 2년이란 공백기를 가진 동방신기는 음악가들의 지원을 받아 그렇게 다시 돌아왔다. 유영진이야 원래 그들을 비롯해서 SM 아이돌들의 거의 모든 음악을 도맡아 했던 음악가지만, 켄지, 박창현, 이트라이브, 작곡팀인 아우시다즈까지 끌고 들어온 것이다.

 

복귀 당시, 영화를 상영해야 하는 극장에서까지 예고편 대신 그들의 광고를 틀어준 바 있는데, 한국어로 직접 외치기는 다소 민망했는지 영어로 '왕의 귀환'이 도래했음을 알리는 건 서비스였다. 그러니까 당시에는 내가 지금 끄적이는 리패키지 앨범이 아닌 본 정규 앨범의 실질적인 타이틀곡인 '왜'를 배경음악으로 삼아 하던 것이었는데, '왜' 같은 경우엔 안타깝고 'Maximum' 에 대해서는 사실 개인적인 인상이 그리 좋지 못하다. 곡 발표 당시에도 있던 얘기였지만 팀을 새로 꾸린 다른 세 명에 관해 의식하듯 만들었다는 성향이 굉장히 강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왜'의 강력한 크럼프 안무는 그러려니 해도 'Maximum'의 경우에는 곡은 가벼우나 중반부의 랩은 지나치게 박력을 추구하고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다'고 말해주는 건 고마운데 너무 힘을 줘서 강요하니 그것이 오히려 웃음만 유발하고 있는 것이다.) 안무 역시 기존의 동방신기의 음악을 생각하면 지나칠 정도로 절도있고 날렵하게 보이려고 애쓴다. 그래서 라이브 무대는 가수의 공연을 본다기 보다는 의상을 비롯해서 흡사 기예단의 기예공연을 본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런 괴리감이 있는데 음원은 '어기야디어라차' 같이 한국적인 맛을 살리려는 듯 '얼쑤' 등의 추임새가 들어가 더 어울리지 않는다.

 

'왜'의 경우에는 가사가 의외로 문어체의 비중이 높은데, 이 곡의 매력이라면 사실 곡의 내용이 실연, 혹은 배신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라 볼 수 있겠다. 거기서 절도있는 춤과 더불어 중반부를 향해 가면서 추임새처럼 등장하는 의도적 웃음이 마치 해당되는 대상을 향한 조소와 냉소를 담았다는 느낌을 주는 위치에 이른다. 비의 2집인 <태양을 피하는 방법>에 수록된 '내가 유명해지니 좋니' 를 들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고 하면 설명이 더 원활해질 듯 한데, 그 곡은 이미 유명해진 상태에서 아래를 보고 한껏 비웃어 주는 것이라면 동방신기가 노래한 '왜'의 경우엔 어떤 대상을 향한 조소와 냉소를 넘어 이 아이돌들이 잠시 니힐리스트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런데 이 곡이 전 멤버 세 명의 부재에 관한 문제와 겹쳐져 남은 이들이 그들의 부재를 의식하고, 또 그들 없이도 잘 하려는 것을 애써 보여주려 한다는 생각이 들 때, 곡의 맛은 떨어진다. 그것이 한 없이 진지한 두 남자의 모습을 보며 도리어 웃게 되는 역효과를 낳고 마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듣거나 보면 굉장히 멋있는데, 어쩔 수 없이 그런 부분들을 논외로 놔둘 수가 없다는 것이 본의 아니게 '왜'의 단점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또다른 타이틀곡인 '이것만은 알고 가'의 존재는 중요해진다. 2인이 된 동방신기가 어떻게 새로운 음악적 판도를 모색해야 하는가. 이 문제는 리패키지 앨범의 1번 트랙인 모놀로그 버전의 '이것만은 알고 가' 를 듣게 되면서 해결된다. 한 여자를 떠나보내는 남자의 심정을 다섯명이서 표현해야 한다면 그건 굉장히 난잡해진다. 그러나 한 여자를 떠나보내는 노래를 두명이서 한다면, 이 부분은 굉장히 드라마틱해지며 애절하기 그지 없는 연가가 된다. 이 두 남자 중 그 누구도 그 여자를 차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리메이크 곡인 '풍선' 등을 제외하면 활동을 더해가면서 주로 무겁고 건조한 톤의 댄스음악을 타이틀곡으로 내세웠던 동방신기가 2번 트랙인 '이것만은 알고 가'에서 자극적인 전자음을 내세우지만, 동시에 발라드에 가까운 정서를 가진 채로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그 순간 이 곡은 두 명이 불렀기에 더 애절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이 곡이 '지금의' 동방신기에게 딱 맞는 수트마냥 달라붙는 것이다. 라이브 공연의 경우엔 SBS 방송국의 <인기가요>가 무대 앞쪽과 뒤쪽에서 화염을 발사하기는 하지만 (아마 그 라이브 무대를 할 당시 구성 면에서 '왜'와의 연관성을 생각했던 것 같다.) 안무를 비롯해서 전체적인 면모가 상당히 많이 절제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는데, 여기서는 더이상 공백에 대한 강박없이 무대를 자유롭게 휘어잡는 이들의 무대에 집중할 수 있다. 그리고 특히 스튜디오 녹음에서는 인지하지 못했으나 라이브로 노래를 부를 때 음정이 조금 불안한 정윤호의 보컬과 더불어 심창민의 샤우팅 역량이 상당하다는 것을 다시 인지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의 안무는 전체적인 태는 고우나 어딘지 모르게 비어있다는 인상을 받기도 하는데, 이 비어있는 부분을 채워주는 것은 정윤호의 안무다. 물론 이건 개인적 시각의 차이일 수 있다. 전문 안무가도 아니면서 그걸 어떻게 아냐고 물어볼 수 있겠는데, 하여간 내 눈에 그리 보이니 일단은 이렇게 써본다. 혹여 춤을 더 잘 추는 멤버, 가창력이 더 뛰어난 멤버를 내가 잘못 알아서 지명을 번복해야 한다 해도 상관없다. 두 사람이 서로를 보완해가며 하나의 곡을 진행해 가고 있다는 것이 청자에게도 느껴진다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앨범 자체는 사실 SM을 비롯한 대다수의 아이돌 기획사가 보여주는 길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 타이틀로서 시선을 끄는 곡들과, 다른 이들은 어떻게 느끼는지 모르겠지만 트랙 수를 채워야 한다는 듯 당연히 들어가 있는 발라드 곡들, 타이틀곡이 되지 못한 댄스 곡들 같은. 인상깊은 트랙들이 있지만 그렇지 못하고 마냥 평이한 곡도 많이 있다는 것이 앨범의 단점이다. 가령 기존곡인 '믿기 싫은 이야기'와 리패키지 앨범임에도 불구하고 '이것만은 알고 가'의 모놀로그 버전과 본 음악 버전을 제외하면 다른 추가곡인 'Journey' 는 솔직히 듣고 나면 바로 휘발되어 버릴 정도로 어떠한 호응이나 비판도, 혹은 최소한의 감흥조차 느끼지 못해서 도대체 왜 트랙에 포함되어 있는지 의문을 가질 정도다. 전자는 SM 유일의 록 밴드인 트랙스의 존재감을 어떻게든 심어주기 위해서 만든 것 같고, 후자는 어울리지 않게 과할 정도로 발랄해서 화가 나기 때문이다. 피처링으로 아무리 소녀시대가 참가한들 애초에 이 앨범과 어울리지를 않으니까 별 소용없더라. 이 두 곡을 제외하면 다른 곡들은 어떤 아쉬움들이 있어도 나름의 완성도를 갖춘 감상용으로 듣기에 무리가 없다. 아이돌에게 '감상용 음악'이라는 것이 득이 될런지, 혹은 독이 될런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한 앨범을 A부터 D까지 네 개의 버전으로 내놓고 파는 장삿속을 자랑하는 SM의 시각에서 보자면 분명 독일테지만, 아이돌 역시 자신들이 부르고 춤추는 곡들이 한 번 듣고 잊혀지는 것을 바라지는 않을테니 장기적으로 보자면 득이 될 가능성이 크다. 착착 감기는 'Crazy' 나 'Rumor' 도 괜찮지만, 사실 그런 점에서 볼 때 무엇보다 괜찮은 건 멤버들의 솔로곡이다. 'Honey Funny Bunny' 는 정윤호의, '고백'은 심창민의 솔로인데 둘 다 판이하게 다른 스타일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에서 주목할만하다. 전자는 작곡가인 이트라이브의 지원을 받아 슬로우 잼 스타일로 진행되고, 후자는 피아노로 시작되어 곧 대규모 오케스트레이션으로 거듭나는 진행방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본인이 직접 작사를 했다는 점도 주목할만하다.

 

아이돌이 솔로 곡에서 선전하는 것은 큰 의의를 지닌다. 멤버 수가 많을수록 이들은 그들의 음악을 담당하는 프로듀서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강한데, 그럴수록 오래 간다는 보장이 없는 아이돌 음악계에서 이들의 생존 여부는 굉장히 불투명해지는 이유가 있어서이다. 당연한 순리처럼 받아들여지기에 이들이 그렇게 기를 쓰고 음악 이외의 활동에 발을 넓히는 것일터, 솔로곡도 결국엔 개인의 역량을 보여줌으로 인해 대중으로부터 잊혀지지 않고자 하는 쪽으로 귀결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동방신기의 솔로곡은 다행히도 이러한 장르를 무난하게 넘나들 수 있다는 쪽으로 개인의 역량을 자랑하고 감탄하게 만드는 편이다. 예능 프로그램에 그리 많이 출연하지도 않는 편인데 (예능 몇 번 출연한 것을 제외하면 정윤호와 심창민은 각각 <맨땅에 헤딩>, <파라다이스 목장>이란 드라마에 출연했는데, 둘 다 시청률이 좋지 않았다.) 그룹의 존폐를 생각하지 않게 만드는 선의 인상에서 멈추게 만드는 것은 분명 상당한 실력이고 들을 가치가 있다.

 

이제 동방신기는 결성된지 거의 9년에 이르렀다. 9년은 커녕 사실 4년 정도만 넘어서도 대다수의 아이돌들은 침체기를 겪곤 한다. 허나 이들은 정반대로 시간이 지날수록 역량을 더 많이 인정받는 쪽이다. 향상되어 가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멤버 수가 줄어들고, 곧 팬덤 측도 갈려서 이들을 '이방신기', JYJ를 '삼방신기'라 지칭하기 시작했다. 처음 들을 때는 이 표현이 꽤나 재밌다고 생각했는데 (한글은 참 과학적이면서도 창의적인 문자가 아닐 수 없다.), 생각해보니 이것은 현재의 그들을 온전하게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다섯명이 다 모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리 부르는 것 같다만, 동시에 그것은 다섯명이 아니면 개개인은 절대 존중될 수 없다는 단호한 거절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사실상 이들이 다시 합칠 수 있는 가능성이 당분간 없을 것이라는 점에서 결론적으로는 당사자들을 불완전하다며 조롱하고자 하는 말에 진배 없다. 그렇다면 이들은 정말 불완전한가? 글쎄. 이 앨범으로만 봤을 때 현재의 동방신기는 더 나아갈 수 있는 여건을 얻은 것 같다. 물론 지금의 앨범은 이전 앨범과의 큰 변화를 알아채지 못하게끔 그 정서를 유지하는 쪽에 무게를 뒀기 때문에 그냥 딱 기대치와 현재 위치만큼의 만족감을 준 정도다. 하지만 이들은 정규 다음의 이 리패키지 앨범 활동을 통해서 무대연출을 비롯하여 2인조로 기억될 수 있는 것에 대해 감을 잡은 듯하다. 가수로서의 동방신기는 오히려 작가적인 폭이 넓어진 셈이다. 어차피 드물게 독자적 시류를 만들어가던 이들이었다. 아이돌이라는 영역에 한정 짓는다면 다소 위험할 수 있지만, 그들의 음악적 진폭은 더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p.s. - 아이돌 앨범의 패키지는 보관하기가 참 힘들어요. CD 패키지면서 크기는 LP 수준으로 해서 내는 경우도 많고.. 그나마 이 앨범의 리패키지 버전은 크기가 무식하게 크거나 하지 않은데다, 일단은 튼튼하기라도 해서 다행이다 싶습니다.

 

 

* 이것만은 알고 가 *

 

작사: 유영진

작곡: 유영진, 유한진

 

그대만 바라보는 것이 부담스럽다고 느낀다면 난 이제 그만 떠날게.
내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 그댈 괴롭게 했던 거라면 이제 난 물러날게.

 

난 그대가 훅-하고 내 곁에서 날아가 버릴까
단 하루도 휴-하고 쉴 수조차 없었단 말야.
내 이런 바보 같은 집착이 널 아프게 할 줄 난 미처 몰랐다.

 

이것만은 알고가 너만 사랑했었던 단 한 남자였다고
너무 미련해서 너조차 지키지도 못했던 바보등신이었다.
너 끝까지 내 곁에 남으면 더 힘들고 쓰러질지도 몰라
아주 잘한 거야 너를 자유롭게 해줄 사람이 네 곁에 올 거야, 네 곁에 올 거야.

 

사소한 어떤 변명도 이제 하지 않을게 그런 표정 짓지 마 (슬퍼..)
나는 단지 입을 닫고 너의 행복만을 바래주고 싶었어. 그런 게 아닌데

 

찬바람에 후-하고 차가운 네 손 덥혀주던 날
내 가슴에 푹-하고 안겨 나눈 1년만의 첫 키스
난 나를 주고 말았다. 언제라도 그렇다.

 

이것만은 알고가 너만 사랑했었던 단 한 남자였다고
너무 미련해서 너조차 지키지도 못했던 바보등신이었다.
너 끝까지 내 곁에 남으면 더 힘들고 쓰러질지도 몰라
아주 잘한 거야 너를 자유롭게 해줄 사람이 네 곁에 올 거야, 네 곁에 올 거야.

 

행복한 추억들을 내게 줘서 고맙다. 넌 잊고 살아. 넌 모두 잊어버리고
걱정스런 눈빛으로 보지 마 난 괜찮아.
언젠가 이 심장의 상처들은 아물겠지 언젠가 나도 좋은 사람 만나게 되겠지.
잊어! 그래, 모두 떨쳐버리고 어서가라.
내 이런 마음 다시 돌려 너를 잡아두기 전에...

 

습관처럼 나도 모르게 네게 전화 할지도 몰라. hello? hello? hello? hello?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네 집 앞에 있어도 냉정하게..

 

이것만은 알고가 너만 사랑했었던 단 한 남자였다고
너무 미련해서 너조차 지키지도 못했던 바보등신이었다.
너 끝까지 내 곁에 남으면 더 힘들고 쓰러질지도 몰라
아주 잘한 거야 너를 자유롭게 해줄 사람이 네 곁에 올 거야, 네 곁에 올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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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날의 꿈 : 한정판 커피북
안재훈 외 감독, 박신혜 외 목소리 / 아트서비스 / 2012년 12월
평점 :
품절


 

 


HD / Color / 110분 (부산국제영화제 상영), 98분 (극장판)

 

(2012, 5, 30)


나는 아직 충무로에서 직접 굴러볼 배짱이 없는 탓에 사실 얘기거리로 삼아 거들먹거릴 입장이 못 된다. 허나 들은 바로는 한국의 충무로에서 영화감독으로 데뷔한다는 것은 '너무 어렵다'고 한다. 그리고 애니메이션은 그보다 더 하다. 2011년에 개봉한 또다른 애니메이션인 <마당을 나온 암탉>을 제작한 명필름조차도 오랜 시간 살아남은 영화제작사이지만 이 작품에 한해선 어떤 주제의식이나 미학적 지향점보다도 '우리가 이것을 만들었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 (명필름이 만들었지, 디즈니가 만든 건 아니니까.) 을 제일 힘줘서 말했다. 한국에선 한 편의 영화보다, 한 편의 애니메이션을 만들 때 어떤 흥행 관련 전망이나 가십과는 상관없이 그 자체에 의미가 부여된다.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 노미네이트 된 박세종 감독의 <버스데이 보이>, 프랑스 칸 영화제에 초청된 연상호 감독의 <돼지의 왕>을 제외하고서라도 김청기 감독의 <로보트 태권 V>, 오성윤 감독의 <마당을 나온 암탉>을 제외하면 한국 애니메이션이 어떤 관객동원으로서의 상업적 이윤을 보장받는다는 것은 상당히 힘들었다. 우리가 만들었다는 자부심이 실질적으로 해당 제작사의 수고를 모두 보상해주지 못한 셈이다. 그런 상황에서 여전히 한국 애니메이션의 제작은 몇십년째 '제작하는 것 자체가 기적' 이라는 의의만으로 버티는 중이다. <소중한 날의 꿈> 역시 그런 현실적 무게를 견뎌내야만 했다. 11년간..


작품은 여주인공인 이랑의 달리기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체육, 특히 달리기를 잘 하며 스스로도 자부심을 갖고 있던 이랑은 그 날 생애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추월당한다. 당혹감을 느낀 이랑은 결승선을 앞두고 갑자기 넘어지기를 자처한다. 실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피치못할 불의의 사고로 졌음을 연출하고 또 어필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스스로와 타인들에게 지레 겁먹고 거짓을 한 대가였을까. 이랑은 달리기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그런 시점에서 두 사람을 만난다. 한 명은 서울에서 작품의 배경이 되는 장소로 전학을 온 여학생인 수민이며, 다른 한 명은 후에 만나게 되는 같은 학교의 학생인 철수다. 그들을 만나게 되면서 이랑의 일상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많이 알려진 사실이지만 <소중한 날의 꿈>은 2007년경에 티저 포스터를 한 번 공개한 적이 있었다. 그 때는 지금에서 완성된 것과 다른 그림체로 그려져 있었는데, 이후에 한 번 뒤엎고 새로 만들어졌다. 작품의 메인 포스터는 철수가 이랑에게 노란 우산을 수줍게 건네주는 것이며 한국 개봉제목과 달리 영문제목은 였다가 로 바뀌었다. 작품을 보면 시작하자마자 철수가 바로 나올 것만 같으나, 이랑의 눈에 바로 들어오고 초반에 또다른 주인공처럼 행세하는 이는 수민이다. 도대체 이 작품은 뭘 다루려 하는 걸까? 작품이 대답한다. 전부 다!

 

 


작품의 외피는 학창시절의 행복한 순간들, 그 중에서도 첫사랑을 부각시켜서 관객들의 공감을 사는 길을 택한 추억팔이용처럼 보인다. 특히 인물들의 복장이나 분위기를 체험해 보지 않은 세대의 입장에서는 2011년이 <써니>의 성공 덕에 복고의 문화가 잠시 뜨겁게 (...군대는 확실히 그랬다. 뭐, <써니> 라기 보다는 티아라의 영향이 더 컸겠지만서도.) 달아올랐던 시기를 떠올리며 잠시 그런 생각을 해 봤다. 과연 저런 류의 작품들이 묘사하는 풍경이 정말 1980년대가 맞는가? 한국에는 이상하게 왜곡되어진 80년대를 다룬 작품들이 많이 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소중한 날의 꿈>을 감상하는데 있어 큰 오류로 작용한다. 작품을 다 보고 자전거를 타며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문득 이 작품이 그러한 일시적 열풍이 불기 전부터 이야기를 뒤엎고 만들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작년에 보여줬던 그러한 경향으로부터 많이 자유로운 편이다. 그리고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굉장히 불분명하다. 당시 학생들이 입었던 교복이야 60~70년대까지 거의 동일한 디자인으로 일관됐으니 그렇다 치고, 작품은 시대와 추억을 상징하는 문화적인 코드들을 하나씩 제시하고 있다.


이랑이 철수의 존재를 처음 인식하게 되는 계기는 두 가지 사건이 있어서이다. 하나는 철수가 날아보겠다며 학교 옥상에서 행글라이더를 만들어 비행을 시도하는 장면이다. 다른 하나는 이보다 전에 등장하는 장면인데, 여러명의 남자들이 수민을 좋아해서 치근덕대듯 장난치는 장면이다. 물론 그 전에도 한 장면이 존재한다. 이랑과 수민이 모기 잡는 방역차의 매캐한 연기에 숨을 못 쉰 다음 터널로 들어갈 때다. 그들은 거기서 방역차와는 다른 독특한 디자인의 차량을 한 대 보게 되는데, 이제보니 그것은 차라기 보다는 일종의 전동 자전거같은 것이다. 그리고 곧 또래의 남자아이가 뒤에 웬 안경 쓴 남자를 태우고 낑낑거리며 그것을 몬다. 이랑과 수민은 그 광경을 신기하게 바라본다. 사실 학교 복도에서 이랑과 철수가 눈을 마주치는 장면을 제외하면, 철수가 등장하는 두 장면은 굉장히 현실성 없다. 그러니까 내 생각은 그렇다는 거다. 내 학창시절의 기억을 아무리 복기해봐도 주위에 그렇게 미래지향적인 운송수단을 몰고 고물을 모으는 사람, 혹은 학교 옥상에서 거대한 연을 만들어 비행을 시도하는 애는 본 적이 없다. (그러고는 추락했는데 멀쩡하기까지 하다.) 허나 거기서 시대의 불분명함이나 비현실성을 지적할 필요는 없다. 왜냐면 오히려 보고 있는 동안엔 현실적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건 사실 작품의 배경미술이 뛰어난 덕이기도 하다.


한국 애니메이션의 취약점은 어느 문화권의 작품인지 그림으로 볼 때 섣불리 알아채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나친 비약일지 모르겠다. 허나 일본 쪽의 작품이거나 미국, 프랑스, 중국 등의 작품일 경우 그림체나 배경으로 '훅' 하면서 그 쪽 동네의 작품이라며 금방 알아챌 수 있을 때가 많다. 그런데 대체적으로 한국 애니메이션임을 아는 것은 일러스트와는 많은 차이가 나는 본편 작화와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색감을 보고 그리 느낄 때였다. 이건 분명 좋지 않다.

 

 


<소중한 날의 꿈>은 그런 문제점들이 해결된 한국 애니메이션 중 한 편이다. 어느 정도냐면 실제 배경을 사진으로 찍은 다음, 스캔하여 모조리 그림으로 옮긴 콘 사토시 감독의 <도쿄 갓파더즈>의 작업방식을 연상시킬 정도로 배경이 보여주는 세밀함과 정서적 감흥은 경악할만한 수준이다. (게다가 시네마스코프 화면비의 애니메이션이다! 5~60년대에 디즈니와 도에이에서 제작한 이후로 2000년대에 픽사의 작품을 제외하고 시네마스코프 애니메이션을 보기가 힘들었다는 걸 생각하면, 한국에서 이 화면비의 작품을 본다는 것 자체가 흔치 않은 경험이기도 하다.) 주로 밤 시간대를 배경으로 진행되며 극도의 리얼리즘을 추구했던 <도쿄 갓파더즈>와 달리 <소중한 날의 꿈>은 멋진 화구도와 세밀함 속에서 파스텔 톤의 따뜻한 색감을 고수한다. 이성강 감독의 <마리이야기>에서 발전한 듯한 인물작화와 더불어 이런 점들이 '한국의 토양에서 꽃을 피운 애니메이션' 이란 생각을 갖게 한다. 이 점의 이 작품의 기이함이다.


이 작품은 외형적으로만 봐도 좋은 의미로 한국에서 제작됐다는 것을 알게 한다. 시대를 정확히 말하지도 않는다. TV에서는 김일의 레슬링 장면이 중계되는데 이랑이 보는 작품은 <러브 스토리> 다. (1970년에 만들어졌다.) 그리고 레코드 가게에서는 '산울림'의 앨범이 꽂혀져 있다. (산울림은 1978년에 데뷔했다.) 그런 뒤죽박죽의 세계지만 비현실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왜냐면 작품이 더욱 힘을 주고 다루고자 하는 것은 시대상이나 주인공들이 풋풋한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랑, 철수, 그리고 작품이 알고자 하는 것은 자아성찰이다. 보통 대다수의 작품들이 남녀 간의 사랑이야기 속에 부수적으로 자아성찰의 요소를 집어넣는 반면, 이 작품은 반대로 진행하는 것이다. 만약 인물들이 걸어가는 장면을 롱 쇼트로 구성하는 부분이 있었다면, '만행의 애니메이션' 같은 비유를 얻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이래서 작품을 보면 구태여 시대상을 끼워 맞추려는 노력은 헛된 것이라는 걸 알게 된다. 인물들이 고민하고 있는 것들이 현재의 나, 혹은 누군가가 고민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이다. 그 점이 20여년의 시간이 응축된 듯한 이 괴이한 페러렐 월드에 현실성의 무게를 더한다.


허나 이랑이 자신은 이 세상에서 무엇인지를 알아가고, 또 꿈을 찾아가는 과정을 풀어나가는 부분은 아쉬움이 남는다. 조금이 아니라 많이. 이랑이 더이상 계주를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뒤에 철수만큼이나 많이 동행하고 또 일종의 롤 모델처럼 여기는 사람은 수민이다. 처음에 이랑은 전학 첫 날에 노래 불러보라는 학급의 짖궃은 요구에 거리낌없이 한 곡조 뽑아주는 대담함과 더불어 의외의 가창력을 가진 수민에게 반해 동경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리고 그 즈음에 기계장비를 잘 다루고 한국 최초의 우주비행사가 되고 싶어 하는 철수를 만난다. 거기서 우산을 빌려주고 음료수를 사 주는, 그러니까 여성에게 애정을 담아 호의를 베푸는 것이 생전 처음이라는 철수와 순진하기 그지 없는 사랑을 나누기도 한다. 청력장애를 앓고 있지만 솜씨 좋은 비행조종사이자 과학자인 철수의 삼촌, 그리고 철수라는 캐릭터 덕에 작품 속에는 우주의 모티브가 별 다른 이질감 없이 자연스럽게 들어와 자릴 잡는다. 물론 '사이언스 픽션'으로서의 SF가 아닌 '사이언스 판타지' 로서의 SF다.


철수는 이랑과의 첫 데이트 장소로 자신과 삼촌의 아지트에 데려가야 겠다고 마음먹는다. 동네 꼭대기에 위치한 아지트는 그냥 일반적인 주택집이다. 안에 있는 각종 장비들이 놀랍긴 한데, 그것들이 배치된 이유는 삼촌이 외계에서 오는 신호를 수신하기 위해서란다. 자신만만한 철수의 설명을 들으며 이랑이 보이는 표정은 그저 당혹감 뿐이다. 물론 외계의 신호가 수신될 리가 없다. 공무원의 횡포로 재개발 지역권에 들게 되면서 동네 일부가 철거되고, 거기에 포함된 철수와 삼촌의 아지트는 산산조각 난다. 공상가들이 현실에서 이뤄놓은 것들은 죄다 망가진다. 결국 작품 속의 우주는 그저 인물들의 공상에서만 구현된다.

 

 


그러나 작품은 구태여 현실과 공상의 경계를 명확히 나누려고 하지 않는다. 애니메이션이 극영화와 다른 이점이 있다면, 극영화만큼의 현실성을 가질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랑은 우주복 없이 인공위성에 앉아있을 수 있으며, 말을 할 수 없는 삼촌이 거기선 이랑에게 조언을 해 주기 위해 말을 한다. 작품은 그런 것에 걸맞게 우주로 나아갔다가 공룡이 살던 시대로 넘어가는 등, 시공간을 마음대로 오간다. 그리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이미지들이 이랑이 더 성장할 수 있게끔 큰 도움을 준다. 세상이 됐든, 한 사람이 됐든 뭔가에 큰 영향을 끼치는 이들은 공상가들이다. 뭐.. 꼭 다 영향을 끼쳤다는 건 아니겠지만 어쨌든 철수는 이런 점에서 남자 주인공이면서도 동시에 작품을 애니메이션으로서 긍정하게 만드는 큰 힘이다.


반면 여주인공인 이랑에 관해서는 아쉬움을 보인다. 작품은 이랑이 이전의 자기 자신을 완전히 버리고 새롭게 거듭나는 이야기를 말하지 않는다. 현재의 자기자신을 긍정하고 그만 뒀던 거 계속 하는 이야기를 말한다. 수민을 동경하던 이랑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애가 허세덩어리에 가깝다는 것을 알게된다. 예술가의 삶을 꿈꾸는 수민은 정확히 뭘 하겠다는 목표없이 미술관에 있는 배철수 닮은 아저씨 (그것도 '송골매' 초창기 시절의 배철수가 아닌 <배철수의 음악캠프>가 막 시작됐을 시점의 모습을 닮았다. 그러니까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시점이라는 거다.) 를 사랑하며 30대 초반에 자살하는 게 목표라고 얘기한다. 수민이 이랑에게 위대한 예술작품 마냥 특별히 보여ㅈ는 거라며 건네는 자작 시집의 시 일부는 이상 시인의 <오감도>의 영향권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수민은 이상이나 목표로 하는 30대 보다도 더 일찍 세상을 떠난 3J (지미 헨드릭스, 재니스 조플린, 짐 모리슨) 를 꿈꾸는 얼치기에 불과하다. 일찍 요절하여 불멸의 아이콘이 된 사람들이지만, 이들은 모두 요절하고 싶어서 한 사람들이 아니다. 수민은 그들의 예술적 감각을 따라갈 수 없으며 죽음이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이랑도 언제부터인가 그것을 느끼게 되고, 이후로는 더이상 수민의 말에 동조하지 않는다.


문제는 수민이란 아이가 실은 그닥 대단하지 않다는 것이 보여지고 나서도 끊임없이 작품에서 중요하게 마냥 등장한다는 점이다. 정확히 이랑은 자아성찰을 하게 된 근원에 여태까지 자신이 잘 한다고 믿어왔던 것에서 패배를 맛보고, 자신감이 결여되어 도망다니는 것에 있었다. 그리고 같은 체육부원이자 앞질렀던 아이가 이랑을 설득하려고 계속 찾아온다. 자아성찰에 관한 갈등이 실질적으로 다른 체육부원을 통해서 부각됐어야 했다. 허나 이런 장면들은 인상적으로 연출되지 못한데다 많이 등장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이랑이 달리기를 잘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릴 정도다. 언제부터인가 수민은 곁가지에 가까운 인물로 남게되고, 큰 주제의식을 다루다 보니 정작 기본설정이 자칫하면 망각될 위기에 처한다. 우주와 공룡이라는 거대한 이미지들이 이랑의 꿈을 은유하듯 중요한 순간에 등장하지만 어떤 때는 연관성을 짓기가 모호할 때가 있다. (어차피 제작 시점이 다르니 큰 상관없겠지만 애니메이션 계의 <트리 오브 라이프>가 되고 싶었는지 물어보고 싶다.) 앞에서 공룡이 등장할 것이라는 암시는 거의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철수가 해남 땅끝마을에서 삼촌이 비행을 시도할 거라는 사실과 공룡발자국 정도를 언급하다 그 곳에 직접 가보는 정도다. 뛰어난 배경미술은 해남 지역의 유적지에 사실감을 더한다. 허나 이런 지역학적 사실감과 더불어 지극히 현실적인 고민과 방법을 말하는 캐릭터들 앞에서 많은 사전설명을 거치지 않은 공상은 설 자리가 없다. 그래서 뒤쳐진 공룡이 남기던 발자국 하나는 함축성을 가졌다기 보다는 웅변의 도구로 보여 어째 좀 거북스럽다. 이 거북스러움은 이랑이 다시 달리기를 시작할 때도 사라지지 않아서 많이 아쉽다.

 

 


이런 아쉬움들을 그나마 상쇄시켜 주는데는 작품의 유머가 큰 몫을 한다. '포항 아트필름 페스티발'에서 조그만 강당에 다른 관객들과 함께 작품을 보며 느꼈던 점은, 코미디 장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관객을 향한 유머의 적중률이 상당히 뛰어나고 꽤나 그 발생빈도가 많다는 것이다. 또래의 여자아이에게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몰라서 존댓말을 쓰는 철수와 이랑의 서먹서먹함은 어딘가 귀여워 보이고 재밌다.


하지만 진짜 재밌는 부분은 이 작품이 어떤 언밸런스함에서 유머를 포착해낼 때다. 처음엔 차가운 매력만을 풍기던 수민이 작품이 진행될수록 능력도 안 되면서 도도하기만 하다는 것이 드러나 웃음을 주는 게 그렇다. 그 외에는 레슬링을 좋아하고 남자다운 장난꾸러기지만, 누나를 향해 '언니'라 부르는 이랑의 남동생, 유년기의 미숙한 사랑의 감정을 나훈아의 '무시로'를 배경음악으로 삽입해 묘사하는 괴이쩍은 센스는 착하기만 해 보이는 작품에 또다른 신선함을 부여한다. 가장 압권인 것은 중반부가 넘어서고 나서까지 아지트로 쓰는 집의 철거를 놓고 철수와 삼촌을 찾아오는 공무원 캐릭터다. 작품에서 그나마 악역에 속하는 이 캐릭터는 특유의 철두철미함으로 이들을 괴롭히는데, 본디 선과 악의 강한 대립을 다룬 작품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 그의 비중은 그리 크지 않다. 허나 작품은 현실세계였다면 철저하고 우수한 관료주의 엘리트로 보였을 그의 성격이 애니메이션의 세계에서는 충분히 희화화될 수 있는 여지가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잘 활용하여 이 캐릭터를 귀엽게 만든다. 자신의 꿈을 찾는다고 다른 거 둘러볼 정신도 없는 캐릭터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끼니 걱정을 하는 이 남자는 (아지트를 비롯한 여러 건물들을 철거하는 현장에서 그는 굉장히 진지한 목소리로 "10시 정각이야! 12시 정각에 밥 먹어야 돼! 우리 엄청 배고프다구!" 를 외친다.) 사실 어찌보면 악역임과 동시에 철수나 이랑, 수민같은 이들이 되고자 했던 수많은 꿈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래서 작품이 그에게도 유머러스함을 부여했는지 모른다. 쉴새없이 큭큭대다 보면 뭐든 기분 나쁜 것들도 덜해지는 법이다. 이 작품의 유머는 그런 유연함을 발휘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것은 이 작품의 '친절함'을 단점에서 장점으로 끌고온다.


"난 달리기를 할 줄 알지만 세계에서 1등 정도는 아니다. 내가 할 줄 아는 것들은 다 그렇다. 그렇다고 근사한 어른이 될 수 없는 건 아닐 것이다. 어쨌든 나는 지금 어른으로 가는 길에 있다. 그 과정 중에 지쳤을 때 어떤 일을 할지 모르던 시시한 때를 기억하려고 한다. 누가 가는 길이든 처음 가는 길이든 스스로 다다르기 위해 내딛는 지금, 내 작고 힘없는 발자국이 기특할 때가 있을거라 믿는다. 그런 것들을 꿈꾸는 나와 철수는, 하찮지 않다. 1등은 기분 좋은 거다. 그러나 내가 만날 꿈들이 등수가 매겨지는 일이 아니었으면 한다..."

 

 


달리기 장면까지가 사실 좀 작위적인 느낌이 있지만, 저 나레이션을 들을 때 잠시 마음 속에서 울컥했었음을 고백해야 겠다. 관객을 향해 외치는 듯한 결말이 뜬금없어서 달리기 장면에서 끝을 냈어도 됐을거란 생각이 드는데..사실 저 나레이션의 뒤를 생략시켰는데, 뒤로 갈 수록 나레이션 역시 굉장히 두서가 없다. 하지만 그래도 멋있는 건 멋있는 법이다. 세상에는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런 사람들이 스스로를 긍정하는 법은 사즉생에 가까운 길을 걷는 것만큼 힘들고, 만약 그 길을 통과했다 하더라도 그렇게 자길 깎아내렸던 원인이 사실 굉장히 사소하다는 걸 알고는 공허에 사로잡힌다. 동네 이곳저곳과 학교, 그리고 해남 공룡 유적지를 오가며 이랑이 결론내린 건 다시 달리는 것. 요즘 들어 더욱 성숙한 여성미를 뽐내시는 윤여정 선생의 말을 인용하자면 '답 없는 길을 그냥 가는 것' 이다. (윤여정은 임상수 감독의 <하녀>에 관해 <씨네 21>과 2010년에 인터뷰하며 위의 말을 했다.) 이랑이 달리고 있을 그 시간에 철수의 삼촌은 한국 최초의 항공기인 부활 호를 타고 해남 공룡유적지 위를 날고 있다. 앞에서 쓰다 깜빡한 게 있었는데, 철수가 이랑을 비밀기지에 데려오고 나서 부활 호를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고물로 주워왔다는 것 말이다. 결국 삼촌은 성공한다. 이랑 역시 더 나은, 그리고 동시에 하찮아 보이는 꿈의 강박에서 벗어나 다른 상대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달리는 중이다.


작품은 이랑이 결승선을 통과했는지, 혹은 1등을 했는지를 가르쳐주지 않는다. 철수의 삼촌이 무사히 비행을 하고 착륙했는지의 여부 역시 보여주지 않는다. 불안함과 관련된 암시? 당연히 아니다. 결승선을 통과함으로 인해 꿈을 이뤘는지 아닌지는 무의미하다. 작품이 보여주는 것은 그저 꿈을 향해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그냥 달리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힘을 내어 달릴 수 있는게 행복하다고 얘기한다. 거기에는 어떠한 패배자도 없기 때문이다. 계속 뭔가를 향해 달릴 수 있다는 것. 혹은 날아 보자는 것. 작품은 중요한 건 이런거라며 격려한다. 나는 울컥했고 이야기는 몇 분의 사족을 펼쳐 보이고는 끝을 맺었다.

 


p.s.1 - 그러나 이랑의 달리기 장면과 교차되는 인물이 철수의 삼촌이 아닌, 철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계속 했습니다. 왜 철수가 막판에 나오지 않았는지 모르겠어요. 이랑과 같은 학교 학생이니 달리기 참가한다고 그랬을까요..


p.s.2 - 작품은 개봉 당시 관객들에게 기념으로 원화를 나눠주는 행사를 했다고 합니다. 10만여장이 넘는 원화가 대기 중이었고, 이 원화들이 모두 사라지면 작품이 손익분기점을 넘는 것과 같다고 했다더군요. 그런데 결국 원화가 남았습니다. 흥행에 실패한 것입니다.


개인적으론 이 작품의 원화를 소유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작화가 참 마음에 들어요. 호소다 마모루의 작품들과 스타일이 비슷한 것 같기도 한데 그림자 부분을 아끼는 것에서 저는 <소중한 날의 꿈> 정도로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런 그림체가 제 취향인가 봅니다. 작화에 관해선 개봉에 맞춰 이뤄진 안재훈 감독님과의 인터뷰 중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소중한 날의 꿈>의 캐릭터는 딱히 정해진 스타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스탭 모두가 각자의 생각대로 그리면서 출발했어요. 그렇게 진행하는 과정 중에 그림을 수정하고, 또 수정하고 그런 작업을 반복, 지금같은 복고적 느낌이 가득한 동그란 캐릭터로 완성됐죠. 그런데 <소중한 날의 꿈>의 투자를 위해 우리가 그렸던 버전들을 많은 회사에 보냈습니다. 그러다 우리 작품을 마음에 들어한 회사가 그걸 자신들 회사에 업데이트를 한거죠. 한 마디로 많은 분들이 보셨던 예전의 포스터는 '유출' 된 건데, 그야말로 선의의 유출이죠. 오히려 그 유출로 <소중한 날의 꿈>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니까요.


다만 그렇게 스타일을 수정하면서 많은 의견들이 오갔습니다. 첫 컨셉은 일본 애니메이션의 느낌과 비슷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스타일로 계속 발전한다면 3~4년 뒤에 일본 스타일을 따라잡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스탭 중 한 분이 "감독님은 연기를 하고싶은 캐릭터를 그리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하지만 이런 스타일로 가면 CF만 할 수 있는 캐릭터가 될 뿐입니다." 순간 그 말을 듣고 얼마나 반성했는지 모릅니다. 그 말 한 마디가 <소중한 날의 꿈>의 작화를 바꾼 중요한 포인트였으니까요. 그래서 일반화된 애니메이션 스타일을 따라하지 않고 우리만의 스타일로 다시 가자고 했습니다. 한 테이블에서 각자의 개성에 맞게끔 하루 종일 그림을 그리고 의견을 나누고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런 뒤 드디어 CF가 아닌 '연기'를 할 수 있는 캐릭터를 만들 수 있었고, 그것이 지금 <소중한 날의 꿈>의 캐릭터가 됐습니다....'


p.s.3 - 이랑의 성우를 맡은 배우인 박신혜 님의 연기력은 아쉬움이 남는 편입니다. 전체적으로는 무난하게 흘러가는데,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이나 어느 정도 애니메이션 특유의 과장이 필요한 시를 읊는 장면에서의 연기는 관객으로서 작품에 몰입하는데 방해가 될 정도더군요. 반면 철수의 성우를 맡은 송창의 님은 개인적으론 전문 성우님들과 맞먹을 정도로 잘 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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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자 2013-07-03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연히 글을 보게 되었네요. 저 또한 굉장히 인상깊게 본 애니메이션 이기에 많은 부분을 공감하고, 또 새로운 시각을 얻어갑니다. 아마 아시겠지만, 현재 영상자료원에서 <소중한 날의 꿈> 레이아웃 전시전이 있습니다. 원화들과 피규어, 스틸샷, 포스터 등 꽤 많은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글 쓰는 현재 시점에서도 계속 되는지는 확인해봐야 겠네요) 쨌든, 좋은 글을 읽은 감사로,,, 혹시 도움이 될까해서 짧게 댓글 남깁니다.

홍준호 2013-12-09 18:55   좋아요 0 | URL
..여기에 글을 남겨주시는 분이 계실 줄은 몰랐네요. 블로그와 병행하려고 천천히 남기고 있었던건데, 사람들이 들어오는 것 같지도 않고 해서 짜증나서 놔두고 있었거든요. Memories 님,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중한 날의 꿈> 전시전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서울에 살지를 않는 관계로 전시전 하나를 보려고 원정 가기가 좀 그랬어요. 매번 그렇게 가긴 했었지만, 그리 할 때마다 돈이 많이 들었거든요.

여튼 이 블로그에 들어오셔서 글도 남겨주시고, 정말 감사합니다. 답글 늦게 달아서 죄송합니다.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 디지털 리마스터링
정지영 감독, 독고영재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5년 6월
평점 :
품절


 


감독: 정지영

주연: 독고영재, 최민수, 신혜수, 윤수진, 김일우, 홍경인, 김정현, 정순례, 황동섭, 전정로, 김교준,

노석래

특별출연: 이덕화, 이경영, 김혜수, 허준호, 김미미

촬영: 신옥현

음악: 신병하

15세 관람가 / Color / 115분

 

 (2012, 12, 25)

 

누구나 자신의 인생을 슬로우 모션으로 만들고 싶을 때가 있다. 말하자면 남들과는 다르게 '인생을 잠깐이라도 영화처럼' 살고 싶어 한다는 거다. 예컨대 바위에서 뛰어내려 강으로 빠져들 때 그렇게 살고 싶은 누군가는 자신의 또래들이 뛰어내린 위치보다 훨씬 더 위에서 시도한다. 그 곳에서 뛰어내리면 죽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그 순간에 벌어지는 남들과의 차별성 그리고 높이의 차이만큼이나 순간의 시간은 곧 확장된다. 그것은 자신에게, 그리고 바라보는 사람들 모두에게 있어 한 편의 영화로 승화된다. 안정효 작가의 동명소설을 영화화 한 정지영 감독의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는 영화같은 인생을 살아가려고 노력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물론 이 작품에서의 노력은 무조건 한다고 다 좋다는 게 아니라는 방식으로 이야기되지만 말이다. 어쨌든 어른이 된 명길의 머리 속에서 그 순간은 분명히 한 편의 '영화'로 남아있다. 그리고 그는 읊조리기 시작한다. 내가 임병석을 처음 본 곳은 지금은 그 밑에 강변도로가 생겨 바위만 볼품없이 남아있는 마포 강변의 벼랑창에서 였다고.

 

작품의 첫 시작은 주인공에 해당되는 명길과 병석이 성인이 되어 경찰서에서 만나는 장면부터다.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의 기본 장르는 미스테리다. 병석이 사는 집에 화재가 발생한다. 그러나 어쩌다 화재가 났는지 그 원인을 알지 못한다. 문제는 병석이다. 집에 불이 났는데, 아들내미를 구해내지 않고 어릴 적부터 모아온 영화 프로그램들만 가지고 나온 것이다. (이후에 밝혀지지만 자신이 쓰고 있었던 시나리오도 가지고 나온다.) 그럴 수도 있다고 넘기기에는 사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경악할만한 상황이다. 병석은 혼이 빠진 사람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심지어 자기가 집에 불을 질렀다고 진술하기까지 한다. 대답은 커녕 척 봐도 사람이 오락가락하는 것처럼 보이니 다행히 형사들은 그 말을 믿지 않는다. 명길이 물어봐도 병석은 묵묵부답이다. 안정효 작가는 병석이란 인물의 이름에 '병석에 누운 사람'이란 의미를 담았다. 말하자면 병든 사람. 그는 왜 병이 들었을까. 작품은 그 때부터 50년대 후반에서 시작해 90년대가 막 도래하기까지의 시간을 연대기 순으로 이어 나간다.

 

 * "<알프스 소녀>가 <신데렐라>와 함께 <산장의 밤>을 보내고 <태양은 가득히> 빛나는 아침에 <회전목마>를 타고 <북북서로 가는 길>을 내려갔는데, 도중에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이 쫓아와서 하는 말이 <7인의 신부>가 필요한데 <세 자매>는 이내 <제 17포로 수용소>에 잡아놨으니 <황야의 3상사>가 <로마의 휴일>을 만나..."

 

병석이 맨 처음 선보인 이 암기법은 곧 명길을 비롯해서 반 아이들 전체에게 퍼져나가고, 그들은 병석에게 이 암기법을 배우고 싶어한다. *

 

 

과거 장면에서 눈에 띄는 것은 병석이 어느 누구에게나 다 주목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미 강물로 다이빙 할 때부터 몇몇 애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던 병석은 명길의 학교로 전학을 와서 영화에 대한 지식을 뽐낸다. 그는 해박한 지식으로 같은 반 아이들의 존경을,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들 즉, 기성세대의 주목도 함께 받는다. 그러나 그들이 주목하는 방식이 마냥 호의적인 것은 아니다. 가령 병석은 자신의 현실적인 나이를 고려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나이란 등급과 직결되기도 한다. 더구나 오래 전 한국에서는 학생이 영화를 보러 갔다 선도 교사에게 적발되면 정학 처분을 받지 않던가. 병석은 커티스 베른하르트 감독의 <비에 젖은 욕정>을 보려고 시도했다가 제대로 눈도장이 찍히고야 만다. 그리고 이런 일도 있다. 선생들은 영화단체관람을 준비하면서 무엇을 골라야 할 지 난감해진다. 학생들이 봐도 무방한 작품들은 많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기성세대의 과도한 검열에서 비롯된 노파심일 뿐, 사실 그렇게 막는다고 해서 애들이 다 모르는 건 아닌데.. 그 때 이들은 병석을 부른다. 그리고 병석은 이들의 기대에 부흥하며 모든 학생들이 같이 볼 수 있는 건전한 작품에 관해 백과사전처럼 술술 풀어놓는다. 물론 그렇게 추천해줘 놓고 본인은 다른 작품 보러 몰래 도망가는 것이 반전이긴 하지만.

 

언뜻 보면 병석의 태도는 제도권에 잠식당하지 않겠다는 반항의 자세나 다름없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병석은 기성세대에게 이용당하는 것과 같다. 단지 본인이 모를 뿐이다. 왜냐면 병석이 있었던 그 곳은 50년대 대한민국이지, 앙리 랑글루아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를 운영하고, 이후 그 곳을 사수하기 위해 병석과 같은 영화광들이 투쟁을 벌였던 프랑스가 아니기 때문이다. 병석은 튀는 돌일 뿐이다. 경직된 한국의 사회는 그와 같은 인물을 싫어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초반부는 학창시절의 추억을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다소 무거운 현실을 다루고 있더라도 독고영재와 최민수, 신혜수가 등장하는 중반부에 이르기 직전까지는 나름대로 꿈을 꾸는 학생들의 발랄하고 향수어린 기운을 잃지 않고 진행된다. 실제로 정지영 감독은 안정효 작가의 동명소설에 많은 변화를 주지 않고, 이야기를 거의 그대로 진행시킨다. 말하자면 소설을 나름대로 충실하게 영상화시킨 셈이다. 나름대로. 물론 감독만의 시각과 변화가 약간, 아주 약간 들어가기도 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런 잠깐의 변화들이 이후, 주인공들이 중학생에서 고등학생으로 커 가고 배우가 교체되면서 점점 소설과 평생선을 달리는 영화가 선로를 달리 하는 계기를 제공해준다. 그리 하여 해석의 결이 점점 달라져서 최종적으로 조금 다른 함의를 가진 작품이 되기에, 굳이 더 많은 변화를 줄 필요가 없었던 듯 보인다.

 

그러니까 이 작품이 '안정효의 소설'이라기 보다 '정지영의 영화'라고 끝끝내 생각하게 되는 것은 사실 바로 보여지는 오프닝 시퀀스부터다. 감독 본인에게는 극장에서 뱀 풀었다가 구속 당한, 조금은 씁쓸한 과거가 있는 헐리우드 영화 직배 반대투쟁의 실제 풍경을 담은 영상이 등장하는데 (현재는 절필 후, 대목장이 됐다고 하는 이정하 전 평론가가 촬영한 영상이다.) 이는 안정효 작가의 원작소설에는 없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안정효 작가는 이런 변화를 상당히 신기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왜냐면 작가 본인이 소설에 담아낸 관점은 상당히 개인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영화를 만들고 그처럼 살기를 꿈꿔왔던 한 '개인'이 결국엔 현실과 영화와의 괴리감을 느끼고, 결국엔 도피해서 영화의 환상 속에 매몰되는 과정에 집중했다. 그래서 안정효 작가는 병석이라는 인물의 성격을 형성하는 과정 중에 오손 웰즈 감독을 많이 떠올렸다고 한다. 시대를 앞서나간 불행한 천재의 이미지를 기본적으로 떠올린 뒤, 그 천재가 될 수 있는 삶을 꿈꾸다 그의 그림자만을 쫓아가 버리는 삶으로 최종 완성형이 된 것이다.

 

 

* 마지막 캡쳐 사진은 임권택 감독의 뒤통수 *

 

그러나 정지영 감독은 첫 장면에 직배 반대 투쟁 촬영 영상을 삽입함으로 인해 개인보다는 한국영화 산업 전체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지영 감독이 바라보는 작품 속의 '헐리우드 키드'는 병석 한 명만이 아니라 명길을 포함해서 94년 당시에 한국에서 영화판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헐리우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의미를 가지게끔 만든다. 그리고 때로는 정지영 감독 본인도 주인공들의 어린 시절을 다루는 이야기 전체에서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음을 은연 중에 고백하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내가 정지영 감독이 이 작품에 관해서 어딘가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전혀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표기해 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주인공들의 학창시절을 다룬 작품의 전반부를 감상하다 보면 너무나 자연스럽게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시네마 천국>이 떠오른다. 그래서 아마도 정지영 감독이 영향은 받되, 그걸 자신의 입으로 얘기하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은연 중에 관객이 느낄 수 있게끔 이런 방식으로 연출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이렇듯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를 보는 가장 큰 재미는 하나의 이야기를 가지고 그것을 쓴 작가와 영화로 옮긴 감독이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느냐를 관객으로서 구경하는 것에 있다.

 

작품의 DVD 타이틀에 스페셜 피처로 실린 음성해설에서, 안정효 작가와 정지영 감독이 대화를 나누다 이승만 정권 시기에 관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부분이 있다. 음성해설에서 안정효 작가가 언급하는 이승만에 관한 이야기는 다름아닌 자신의 과거의 추억에 관한 것이다. 그의 유년시절 시기엔 툭하면 전기가 끊기곤 했는데, 딱 하루만 전기를 풍족하게 쓰는 날이 있었다고 하니 그것이 바로 이승만 전 대통령의 생일날이었다는 것. 반면 정지영 감독은 그 시기에 작품 속의 등장인물들과 나이가 비슷했다. 그래서 유년시절에 더 인상깊게 기억에 남은 것은 4.19 혁명이었고, 그 부분을 이야기하고 있다. 실제로 작품 속에서는 이 혁명 장면이 짧게 등장하고 언급되는데 이는 안정효 작가의 원작소설에는 존재하지 않는 부분이다. 안정효 작가의 작품철학은 '내가 겪었던 일들을 들려주자' 였고, 정지영 감독은 반대로 그 일들을 통해서 어떤 발언을 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감독은 한 개인의 인생을 역사라 칭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해방 이후의 대한민국의 역사를 인물들에게 투영하고 있는 것이다. 명길과 병석, 그리고 다른 친구들을 포함한 '영화동아리 4인방'을 한국영화 그 자체로 의인화 시킨다면, 정지영 감독의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는 동시에 등장인물들을 통해 한국영화계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작품이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장 인상깊게 남는 것은 다름아닌 폭력이다. 유년기 시절의 명길과 병석은 영화를 본다는 행위를 위해서 자신의 온 몸을 내던진다. 일단 기본적으로 선도 교사에게 적발되면 정학처리 아니던가. 그리고 영화 한 편을 보기 위해 조직 폭력배가 표를 받고 있는 (일제강점기 때도 그랬지만 이승만 정권 시기까지도 극장을 소유하고, 영화산업의 실세가 됐던 조직폭력배들이 있었다.) 검표소에 들어가 코피가 터질 때까지 얻어맞기도 하고, 사금파리들이 박힌 담장을 위험하게 뛰어 넘어가기도 한다. 사람의 기억이라는 것이 참 잔인해서, 별 탈 없이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 때 그 시절을 추억거리로 미화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 순간의 이 소년들은 영화 한 편을 보기 위해 목숨을 건 상태다. 그리고 영화를 보다 들킨 댓가는 회초리나 나무몽둥이로 손바닥이나 몸 전체가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얻어맞는 것이다. 어떻게든 자신들의 통제권 안에 넣고자 체벌이라는 이름의 폭력을 휘두르는 작품 속 선생들에게 당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꼭 엄혹했던 군사정권의 검열 속에서 여러 수난을 당하는 한국영화를 은유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물론 비판의 여지 역시 동시에 엿보이기도 한다. 가령 혁명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한 편의 어떤 영화에 비하면 지금 저것은 혁명도 아니라며 비판하는 시각과 해박한 영화 관련 지식을 갖췄지만, 자라나는 그 시기의 모든 소년들이 그렇듯이 영화동아리 4인방도 어느새인가 성적 호기심에 더 치우치는 '애들같은'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마냥 특별한 영웅으로 보였던 병석의 존재도 이 즈음부터 실망을 주기 시작한다. 토드 브라우닝 감독의 <드라큘라>에 담겨진 에로티시즘을 분석하고,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최근작' 이라며 <새>를 보러 가던 병석은 동시에 나이를 속이고 집창촌에 가며, 학생 감독이 되어 영화를 찍을 때는 주연으로 캐스팅한 동년배의 여학생인 현숙을 '자빠뜨리려다가' 영화적 동지라 여겨왔던 세 사람의 실망을 사게 되는 것이다. 결국 병석이 명길의 주먹 맛을 보는 것으로 이 사태는 마무리된다.

 

사실 10대 시절 특유의 주체할 수 없는 성욕 때문인 것도 있지만, 병석은 현실의 모든 순간들이 영화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쪽이다. 집창촌에 들어가서도 그는 옷을 벗는 창녀를 영화 속 주인공으로 만들어 보려는 듯, 자신이 원하는 여러가지 동작들을 주문해 본다. 말하자면 자신이 그런 영화적인 순간의 주인공이 될 수 있고 동시에 작가 정신에 입각해 자신의 의도대로 뭐든 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 것. 하지만 그런 믿음이 7~80년대의 한국에서는 이용 해먹기 좋은 순진함에 불과했다. 그늘진 곳에 사는 여성들의 현실을 사실주의 영상으로 포착했다고 하지만 보다 보면 전혀 그런 생각은 들지 않는 유진선 감독의 <매춘> 같은. 혹은 김호선 감독의 <영자의 전성시대> 같은 작품, 이두용 감독의 <뽕> 같은 작품들이 이후 원전을 만든 감독이 전혀 관여하지 않은 상태에서 제작사와 다른 감독들이 이상한 속편과 모방작들을 우후죽순으로 생산해 냈던 것을 생각해보라.

 

 

 물론 그 감독들도 나름의 의도는 있었겠지. 그래서 이런 의도를 생각하고 만들기 시작했는데...

 

 

 최종적인 완성품은 매번 이렇게 됐다고나 할까?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가 만들어진 시기는 한국영화계의 그런 암흑기와 이별을 고한 지 몇 년 되지도 않았을 때였다. 이것과 더불어 80년대란 해를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스릴러 장르로 필모그래피를 쌓아왔던 정지영 감독은 스스로에게도 작품 속에서 향수를 가장한 차가운 냉소를 보내고 있다. 환상에만 젖어서 살고 있었다고.. 적어도 전반부는 따뜻하기라도 해야 하는데 결국 그것은 겉껍데기에 불과한 것이다. '행복해 보이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아닌' 이 전반부는 결국 영화보기에 목숨을 걸다 결국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으로 끝이 난다. 살아남은 아이들은 다시 피투성이가 되고, 그들은 그렇게 어른이 된다.

 

 

 1시간 55분이라는 상영시간 중 독고영재와 최민수, 신혜수가 등장하는 것은 거의 1시간이 넘어서다. 고로, 이 유명배우들이 등장하는 시간이 1시간이 채 되지 않는다. 그리고 당대 주목받는 아역배우였던 홍경인과 김정현도 20분 정도이며 초반 30분은 거의 신인 아역배우들이 이끌어간다. 이것은 사실 연기했던 배우들에게는 미안한 얘기일 수 있는데, 나는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의 가장 크고 유일한 단점이 초반 30여분에서 신인 아역배우들이 보여주는 연기력에 있다고 생각한다. 요즘 아역배우들의 연기가 대단한 것도 있긴 하지만, 이 작품에서 명길과 병석의 아역을 맡은 두 배우, 장문과 박봉석의 연기는 감상하면서 전혀 몰입이 안 될 정도다. <하얀 전쟁>이야 워낙 오래 전에 봐서 기억이 가물가물하고 <남부군>은 딱히 그런 것이 없었다만, <부러진 화살>이나 이 작품의 경우에는 초반부가 여러가지 의미로 몰입이 되지 않을 정도의 산만함을 가지고 있어서 감상할 때 꽤 버거웠다. 법정 공판에 들어가기 위해서, 혹은 영화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우정을 쌓고 또 갈등을 쌓는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적당한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배우들이 좀 더 이해할 수 있을만한 연기를 보여주면 그나마 나을까 싶기도 했는데 어찌됐건 이 부분만큼은 영화제목 암기법 등을 가르쳐주고, 헐리우드로 가겠다고 무단으로 여행을 떠난다는 재밌는 설정이 들어있는 원작소설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아마 그런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초반부를 나름대로 비중을 크게 둬서 지독스럽게 이끌고 간 것은 아마도 이 장면 하나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제대한 명길이 학창시절 이후로 소식이 끊긴 병석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다 한 술집으로 간다. 손님과의 실랑이 도중 눈알이 빠져 애꾸가 된 호스테스인 양순이 호탕하게 웃다가 그를 반기고, 병석의 얘기를 듣자 갑자기 진지해진다. 조금 있으면 올테니 기다리라고 얘기하고 그녀는 상다리 부러지게 안주거리를 거나하게 차려와서 들여놓는다. 그녀가 병석의 아내인 것이다. 작품은 명길이 병석의 방을 둘러보는 순간 초반부에서 활용했던 황갈색 톤의 영상을 다시 잠시동안 보여준다. 그리고 어디선가 데이비드 린 감독의 <콰이강의 다리> 사운드트랙에 등장했던 'Colonel Bogey's March'가 휘파람소리로 들려오자 명길은 문풍지 바깥에서 뭔가를 하고 있는 사내의 모습에 집중한다. 사내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곧이어 어딘가로 이동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 시퀀스는 굉장히 강렬하다. 찰라의 빛과 초반부를 연상케하는 색감때문에 세상의 때가 진하게 묻은 어른이 잠시 유년시절로 되돌아 간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더구나 바깥쪽 병석의 모습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명길이 상상하는 효과는 이 순간 더욱 커진다. 나는 시간의 흐름과 세상에 의해 이렇게 변했지만 저 아이는 끝끝내 변하지 않았겠지. 어린 시절 그 때 그대로겠지. 바깥에 있는 병석의 이동방향에 따라 카메라가 우측으로 패닝할 때 화면에 보이는 건 병석이 중학생 시절부터 소장하고 있었던 영화 프로그램들이 벽면에 붙여진 모습이다. 그것이 향수어린 정서를 더욱 부각시키는데, 잠시 그것에 취해있는 순간 절묘하게 등장하는 병석의 충격적인 현재의 모습이 압권이다. 아마도 그 원인의 일부로 병석을 연기한 최민수가 록 스피릿을 되살리는 듯한 가발을 착용하고 나온 것도 있을텐데, (개봉 당시에도 이 가발 때문에 급작스레 웃는 관객들이 많았다고 한다. 당시 관객들의 눈에도 이게 상당히 웃겼나보다. 감독은 이 반응을 꽤나 곤혹스러워 했다. 가발의 헤어스타일이 비슷해서 그런지 개인적으로는 최민수가 <레옹> 시절의 나탈리 포트먼과 한 번 붙어보고 싶었다는 식으로 이해하려 한다. 그리고 그냥 이건 내 생각이지만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에서 누들스가 벽돌 건물 안에서 발레 연습을 하는 데보라를 훔쳐보는 초반 장면이 떠오르기도 한다.) 오히려 그 덕분에 이제는 초반부의 그 사건과 겹쳐져 병석이 자유로운 감성의 영화소년보다는 정신병자처럼 보이기까지 하니 말이다.

 

 

 

* 이 시퀀스에서 병석은 이마에 반창고를 붙이고 있다. 명길은 병석에게 다쳤냐고 묻는다. 그러자 그는 대수롭지 않게 자신의 첫번째 아내에 해당되는 양순이 한쪽 눈을 가리고 살기 때문에 자신도 붙인 거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여기서 더이상 관객은 병수를 어린 시절의 이미지로 바라보지 못한다. 한결 같다면 나쁜 게 아닌데, 어째 여기서 그가 풍기는 이미지는 마치 어디 문제가 있어서 더 자라지 못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병석에게는 누나가 한 명 있다. 초, 중반부에 등장하는 그의 누나는 미 8군에 스카웃 된 댄서인데, 그녀가 미군과 사귀며 미국에 갈 상황이 생기면서 병석도 미국 헐리우드로 갈 수 있을 거라는 꿈에 부푼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고도 그는 미국에 가지 못한다. 헐리우드에 간다는 일은 어떻게 됐냐는 명길의 물음에 병수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 누나 초청장 기다리고 있잖냐." *

 

 

그리고 이후의 전개는 실로 고통의 연속이다. 병석은 양순과 헤어진 이후, 운명처럼 현숙을 다시 만나 결혼을 하고 자신의 자식이 아닌 아이를 아들 삼아 또 오랜 시간을 보낸다. 가족을 먹여살려야 하는 처지이고, 그래서 조감독이 된 명길을 찾아가 영화판에 일자리를 얻는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한국영화계의 열약함만이 보일 뿐이고, 그것을 모른 척하고 살아가기에 그의 가슴은 너무 뜨겁다. 그렇다면 발언하면 되잖아! 하지만 그가 원하는 위치는 단순히 비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실을 타개해낼 수 있게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창작자의 자리다.   하지만 작품이 만들어진 1994년이나 지금 2012년이나 충무로에서 영화감독으로 데뷔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설사 데뷔한다고 해도 앞날이 어떻게 될 지도 모르기 때문에 자신이 잘 하고 있다는 자존감을 가지지 않는다면 버티기도 힘든 직업이다. 그런데 병석은 여태까지 실질적으로 아무것도 해 놓은 것이 없다. 아무것도.

 

그러다 제 성질 못 죽이는 순간이 찾아오고야 만다. 정확히는 한국영화계의 우스운 단면이기도 하다. 버스가 움직이는 장면을 표현해야 하는 부분인데, 헐리우드처럼 스크린 프로세스를 활용하면 될 것을, 바깥쪽에 있는 스태프 두 사람에게 나뭇가지를 들어 이리저리 움직이게 해서 마치 버스가 움직이는 것처럼 표현하는 것이다. 더이상 참지 못한 병석은 자신이 하던 일을 박차고 나가 버린다. 이 때 벼랑창에서 뛰어내린 이후 처음으로 다시금 '영화같은 순간'이 찾아온다. 화면의 질감이 약간 달라지고 초점이 흐릿해 지는 게 그것이다. 나는 이 작품을 개봉 당시에 필름으로 보지 못했고, 이렇게 DVD로 봤기 때문에 정확히 이 부분이 감독의 의도인지, 아니면 필름의 손상으로 복원을 해도 이 정도가 한계였던 것인지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음성해설에서조차도 이 부분에서 이뤄진 화면 상태의 변화에 관해서 어떤 언급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좀 과하게 자의적인 해석을 한 감이 있지만, 여하튼 내게는 이 장면이 벼랑창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에서의 슬로우 모션 효과만큼 인상적으로 보인다.

 

 

 

 

 이 장면 이후 작품의 이야기는 도입부의 경찰서 장면으로 전환되는데, 병석은 일부러 실어증에 걸린 양 연기를 하다 정신병원에 입원조치되며, 이후 자신이 써 왔던 시나리오를 명길에게 건네준다. 생각해보면 그는 어떤 결정적 한 방이 오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세상이 자신을 먼저 알아봐줄 것이란 생각. 그리고 자신이 세상을 상대로 놀래켜 보겠다는 치기 어린 생각같은. 그러나 시간과 세상은 나 좀 봐 달라고 호소하지 않는 이상, 그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는 법이다. 설사 된다고 해도 그 기회는 흔치 않다. 작품 속에서 병석이 쓴 시나리오가 그 일 이후로 처음 쓴 것인지, 아니면 그 전부터 꾸준히 시나리오를 쓰면서 기회를 모색하고 있었는지는 설명해주지 않는다.

 

과연 그는 최소한의 노력이라도 해 본 것일까. 자신을 배신하고 떠나간 누나의 오지도 않을 청첩장만 기다리고 그저 영화만 보는 것 외에 말이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이 잘 났다는 자존감만 지키고 있지 않았을까. 일단 <가면고>라 이름지어진 병석의 시나리오는 탄탄하다는 극찬을 받고 명길의 감독작이 된다. 그러다 병석이 사라지는데, 그와 반대로 시나리오는 매스컴의 주목을 받으며 촬영 기간 내내 화제작의 반열에 오르고 영화화 된 후 연말시상식에서 상도 타게 된다.

 

원작 소설을 그대로 따른 영화판 속 병석의 작품은 사실 자신이 예전에 봤던 헐리우드 작품들을 몽땅 표절해서 짜집기 해 놓은 것에 불과하다. 존 맥티어난 감독의 <다이 하드>,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스파르타쿠스>, 애드리안 라인 감독의 <나인 하프 위크>, 루이지 코지 감독의 <라스트 콘서트> 등등.. 그런 작품을 만들어 놓고서 그는 명길의 촬영현장에서 몰래 엑스트라로 출연한다. 생각해보면 이건 굉장히 섬뜩하고 서글픈 시도이다. 남에게 자신의 시나리오를 영화화 하게 만들어 놓고, 그 속에 원작자 본인이 감독과 상의도 없이 매 순간순간마다 출연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는 작품과 자신이 일체화 되도록 하려는 집착이다. 동시에 더이상 자기 스스로도 뭔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자존감을 포기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작품에서의 독고영재와 최민수는 적어도 절대 우리가 보편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인상으로 연기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연기를 잘 하는 배우들이라는 것을 새삼 다시 한 번 깨닫게 되고, 그 중 최민수의 연기가 여러모로 인상적이다. 그리고 그가 마침내 이 대사를 이야기할 때 작품은 그냥 속절없이 무너져내려 버린다. "..네게 피해를 주려고 했던 건 아니야. 나도 이게 다 내 것인줄 알았어. 내가, 이 임병석이가.. 헐리우드 키드에게 속은거다."

 

 

 * 이전작인 <하얀 전쟁>에 출연해놓고 바로 여기서 깨알같이 카메오로 등장 * 

 


김영삼 정부에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쥬라기 공원>을 자동차 수출과 연관지어 그 수익성의 가치를 설명했을 때, 갑자기 한국의 영화계는 천대시했던 장르에 헐리우드라는 '신성한 가치를 지닌 단어'를 조합시키며 발전에 열을 올렸다. 그렇게 열을 올리는 와중에도 순수하게 영화가 좋아서 만드는 사람들이 있었겠지만, 그들이 자신들의 것이라 생각하며 만드는 장면들이 결국 헐리우드의 영향권 내에서 파생됐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한국에 안정적으로 안착하기까지는 또 얼마간의 진통을 겪어야 했다. 꿈을 찾으려는 열정이 어떻게 몰락으로 변해가는가를 이야기하던 원작은 정지영 감독에 의해 한국영화 역사의 자존감 여부와 더불어 영화인의 꿈을 꾸고 있는 사람들에게 씁쓸하게 말한다. 그 때나 지금이나 '충무로' 키드보다는 '헐리우드' 키드들이 너무나 많다고. 아니. 그 충무로도 정말 한국의 토양에서 자라난 것이 맞는가? 아니면 모방으로 시작했지만 창작의 어머니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스스로 차 버린 것인가? 이 물음이 다소 낯간지러울수도 있다. 그러나 원작과는 전혀 다른 지점에 선 이 생각을 탐구할만한 가치는 분명히 있다.

 

특히 연출과 실제 촬영 영상을 뒤섞어 만든 대종상 영화제 시퀀스에서 배우인 신성일, 윤정희, 장선우 감독 등이 객석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을 볼 때는 더욱 말이다. (이덕화와 김혜수의 경우에는 이 작품을 위해서 따로 찍었다.) 이 작품에 대한 당대의 생각은 아마도 대내외적인 평가로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작품은 도쿄와 뉴욕국제영화제, 산 세바스티안 국제 영화제에 초청됐고 한국 대종상 영화제에서는 대상, 그리고 산 세바스티안 국제 영화제에서는 국제영화평론가 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자국 내 흥행에서는 크게 실패했다. 물론 흥행 실패한 영화가 무조건 잘났다, 흥행한 영화들은 뭐가 되느냐를 말하는 의미는 아니다. 단지 어느 국가에서든 헐리우드의 아래에서 과연 나는 진짜의 무언가를 만들고 있는 것인지를 고민하고 있는 것은 공통의 문제라는 의미일 것일게다. 관객들은 무엇을 보았을까. 이 작품을 헐리우드라는 영역의 아래에 있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헐리우드에 비하면 방화는 한참 모자라다고 생각했을까. 그러면 그나마 못났지만 우습게라도 '한국영화'라는 자의식은 가졌을텐데 말이다. 굳이 정지영 감독이 자신의 작품을 흥행에 실패하면서까지 시험해보고 싶은 의도는 없었겠지만, 유독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는 그런 점에서 관해서 깊게 생각하게 만든다. 인상깊은 작품임에 분명하지만 처음 보고 나서 너무나 막막한 기분이 든 건  어쩔 수가 없나보다. 아. 병석은 그렇게도 자신이 원했던 스크린 속으로 뛰어든다. 그가 그렇게나 찾던 '한국에서의 자신만의 스크린'은 이미 많이 바뀌었지만, 거기밖에 없었다. 거기만큼은 헐리우드의 영화 식민지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명길아. 여긴 내가 가끔 산책 나오는덴데 말야.. 서치라이트, 멋지지 않니?"

 

"근데 병석아. 여긴 야간 통금지역 아니냐?"

 

"그래.. 간첩 잡겠다고 저걸 비추는 모양인데, 저기 불빛 나오는데가 영사실이고 난 저게 움직이는 스크린 같단 말야. 저 불빛이 이 절벽 밑을 스쳐 지나갈 때, 내가 간첩으로 오인받아 가지고 총을 맞아 쓰러지게 되면 나는 저 스크린 속으로 빠져 죽는 셈이 되는거야.. 어때. 근사하지 않니?"

 

 

현세에서 그런 '스크린'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p.s.1 - 사실 작품의 이런 시각에 관해서는 반론의 여지도 있습니다. 가령 발터 벤야민 님이 많은 영향을 끼치셨던 포스트모더니즘 식으로 따진다면, 결국 혼성모방을 통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면 그것도 결국은 창작이 아니냐는 것이겠죠. 아마 추창민 감독님의 <광해: 왕이 된 남자> 같은 작품이 <데이브>와 <카게무샤>의 자장 안에 있다는 것으로 논란이 됐었으니 이런 의문에 가장 잘 부합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저는 아직 <데이브>를 보지 못했으니 여전히 뭐라 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인식하고 있느냐, 아니면 이것도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견해가 창작과 모방의 경계를 가르는 것 같기도 합니다. 후자의 것이면 심각한 것일수도 있겠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은 이미 어딘가에 잠식당했다는 것과 마찬가지 일테니까요.

 

p.s.2 -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모든 영화 장면들은 모두 VHS와 LD에서 활용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후에 뉴욕영화제에 출품할 때 문제가 되지 않을까 우려가 됐었다는데요, 정지영 감독님의 말로는 해당 작품들의 판권을 소유한 영화사에 일일이 사용허락을 구하는 편지를 써서 보냈는데, 당시 미국 쪽에도 딱히 이런 것을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서 모르겠다고 답변이 왔다더군요. 그래서 그냥 마음놓고 썼다고 합니다. 당연히 영화제 개봉 때도 문제가 되지 않았고요.

 

p.s.3 - 위에서 영화제 관련 정보를 적어넣을 때 한 가지 못 적은 게 있었는데, 이 작품이 프랑스 영화제에서도 소개가 됐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감독님이 구체적으로 기억은 못하더군요. 그러니까 칸느 영화제에서 했는지, 아니면 도빌 아시아 영화제에서 한 것인지를 모르겠다는 것이지요. 아마 후자 쪽이겠지만요.

 

미국말고 프랑스에 작품이 초청되어서 보낼 때는 걱정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과연 그 쪽에서 이 작품을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그러나 다행히도 관객 반응은 좋았다는군요. 그리고 그 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이 정지영 감독님에게 인상깊은 말을 하나 해줬다고 합니다. "헐리우드 영화가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할 때부터, 그들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든 간에 다들 이런 추억은 하나씩 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p.s.4 - 작품에서 인상적인 부분이 하나 있는데, 미처 본 끄적임에는 넣지 못한 것입니다. 명길과 병석이 또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만나서 철길을 걸어가는 장면이에요. 여기서 배우인 최민수 님이 존 슐레진저 감독님의 <미드나잇 카우보이>를 언급하지요.

 

 

 뭐랄까요. 요즘 한국배우들이 '나는 어떤 작품을 좋아합니다' 하는 이야기를 잘 듣지 못한 거 같아서요. 아. 요즘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겠군요. 심지어 영화잡지에서조차도 그런 언급을 잘 듣지 못할 때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가끔 '시네마테크와 친구들' 리스트가 올라올 때 어떤 배우가 이 작품을 추천했다고 할 때는 놀랄 때가 많아요. 사실 놀랄 것도 없죠. 그냥 그 배우가 TV라든지, 책, 라디오라든지.. 그런 자주 노출될 수 있는 매체에서 그런 말들을 하지 않은 것 뿐인데 '이 배우가 이 작품을 좋아했었어?'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죠. TV나 책, 라디오 등에서 배우를 인터뷰할 때, 이 배우를 '영화배우'라 여기지 않고 그냥 '셀러브리티' 로만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지금의 배우들이 그냥 화장술로 자신들의 만들어진 이미지를 유지하고 싶어서 로봇 마냥 했던 말만 계속 반복하는 것인지.. 뭐가 문제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질문을 통해 이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꺼내야 하기 때문에 배우를 배우로 보지 않고 그냥 가십거리로만 생각하는 지금의 풍토 쪽에 문제의 무게가 더 있다고 생각은 합니다만 말이죠.

 

어쨌든 그래서 최민수 님이 <미드나잇 카우보이>를 언급하는 게 조금 놀랍기도 했어요. (...단지 외국영화 제목 한 번 언급한 것인데.) 꺼낼 수 있는 말들이 많을 거에요. 박근형 님 같은 경우에도 '나 유현목 감독님의 <문>에 나온 사람이야' 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장미희 님 같은 경우에도 김기영, 배창호, 하길종 감독님과 작업한 경력이 있는 배우인데. 최불암 님도 '나 <영자의 전성시대>, <바람불어 좋은 날>, <사람의 아들>, <만종>, <최후의 증인>에 나온 사람이야! 양촌리 이장 아저씨만 한 게 아니라고!!' 라며 소리치고 싶은 마음이 있을지도 모르죠. 우리가 TV에서 흔히 아버지와 어머니상으로 기억하는 배우들, 아님 젊은 세대들에게 인기를 얻는 배우, 아니면 그냥 얄팍해 보이는 작품에 출연한 배우들도 '나 이런 작품에도 나왔다' 라든가, 아니면 '나 이런 작품 좋아한다' 고 말하고 싶어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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