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TRACKS
(On Side A)
1. 누구없소?
2. 호호호
3. 비애
4. 달
5. 여인 #3
(On Side B)
6. 코뿔소
7. 갈증
8. 루씰
9. 바라본다
LP 개수 : 1
러닝 타임 : 40:16 Mins
레이블 : 동아기획, 서라벌 레코드 (LP) / 신나라 레코드 (CD)
그러니까.. 이 앨범의 제목은,
곧 이 서재의 근원
.....
"신촌에 이상하게 노래 부르는 애가 있다던데, 그게 너구나?"
한영애는 몇몇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노래와 인연을 맺은 계기에 관해서 언급을 한 적이 있었다. 거기서 많이 놀랐던 사실이 있는데, 바로 그녀는 의외로 노래에 관심이 없었다는 점이다! 한영애가 노래와 인연을 맺은 계기는 친구가 주선해준 덕분이었다. 신촌의 음악감상실인 프린스 살롱에서 오디션을 보게 된 것이다.
한영애는 친구의 말을 듣고 시큰둥했다. 난 노래에 딱히 관심도 없는데 내가 왜 해야하니? 어지간하면 해, 얘. 이건 정말 흔치 않은 기회야! 친구의 답이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노래를 부르다 위의 말을 해 준 사람을 만난다. 포크, 블루스 음악 장르의 거장 중 한 사람인 이정선 말이다.
6~70년대 한국에서는 음악감상실이 가수 데뷔와 앨범 발표로 가는 확실한 통로 중 하나였고, 오디션을 받은지 단 30분만에, 한영애는 주급까지 꼬박꼬박 받아 챙기면서 프린스 살롱에서 노래하는 가수가 됐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잠재력을 알아봐준 이정선과 그룹 '해바라기' 로 활동하여 그의 도움 (이라 쓰고 '지시' 라 읽는다.) 으로 1976년부터 1978년까지 세 장의 앨범을 낸다.
정작 당사자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온 앨범으로, 태평양에 갖다 버리거나 마스터 테이프에 불을 질러 없애 버리고 싶었던' 이라고 말했던 비공식 앨범들에 대해서 나는 아는게 없다.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음반이 나왔다는 사실은 둘째 치고, 원체 구하기도 힘들거니와 찾다 보니 팔겠다는 사람을 보긴 봤는데... 그 사람이 댓가로 내놓으라는 배춧잎의 개수가 좀 많았다. 발견했을 당시에는 그래도 좀 어렸으니 나이로 어필해서 네고시에이션에 들어가 보려 했으나... 정작 그 분이 막상 거래에 들어가자 '태어나는 것과 달리 가는 데는 순서 없다'는 태도로 급 변경하시어 결국 떠나 보내야만 했다.

* 내가 봤던 한영애의 비공식 앨범 중 하나. <작은 동산>. 1977년인가 1978년 발매 음반이란다. 뭐, 정확한 발매년도도 잘 모르겄다. *
신기하게도 그 뒤로는 한영애의 비공식 앨범들이 더이상 궁금하지 않았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 놈의 중고값이 초장부터 질리게 만들었던 이유가 컸겠지만, 아마 결정적인 건 내가 묘한 목소리를 가진 그녀의 팬이었기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싫어하는 앨범이라고 하니까.. '가수 당사자가 싫어한다니까, 뭐.' 하는 식으로 알아서 합리화가 되더라. 나는 순종적인 구석도 꽤 많은 사람이다. 그러다 보니까 아직도 듣지 못하고 있네.
한영애의 정규 2집 앨범인 <바라본다>는 그 유명한 '누구없소'와 '코뿔소'가 수록되어 있고 1988년에 발표됐다. 이미 70년대부터 해바라기로 활동했으며 85년에는 그 유명한 '신촌블루스'의 객원 보컬리스트로 활동했지만, 그녀는 1986년에 발매한 자신의 앨범인 <여울목>을 '공식적인 1집' 으로 친단다. 물론 자신의 이름이 전면에 나서는 앨범을 내기까지 이런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에는 1977년부터 7~8년간 꽤 오랫동안 연극배우로 활동한 이유도 있다.
이런 일화들을 듣고 있으면 한영애란 아티스트는 자기 세계에 대한 명확한 고집이 있는 사람으로 보인다. 내가 이 아티스트를 처음 알았을 때 가장 먼저 들은 일화가 바로 위에 언급된 '친구의 주선으로 오디션에 응시' 한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후에 좀 더 찾아보니 한영애는 예전부터 음악과 많은 연관이 있었으며 관련 활동도 해 온 터였다. 학창시절에는 합창 경연 대회를 할 때 마다 지휘자로 뽑혔고 국군장병 위문공연 때도 대표로 노래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독학으로 기타도 익혔단다.
더불어 그녀는 이정선의 참여로 만든 세 장의 앨범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그의 것이지, 내 것은 아니라고 단호하게 이야기한다. 실제로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해당 앨범을 만든 이유에는, 그녀의 표현대로 따르자면 이정선의 '지시'가 있었다. 헌데 한영애는 포크 장르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연극이 취향에 맞게 되었고 이 곳으로 뛰어들어 오랜 시간 음악을 외면한다. 8년 뒤에 이정선의 권유와 설득으로 다시 음악하는 삶을 꿈꾸게 되고 나서야 한영애는 이런 꿈을 품는다. 난 음악을 앞만 보이게 부르지 않을거야.. 뒤와 옆까지 보이고 또 느낄 수 있는 음악을 할거야..
한영애는 자기고집 뿐만 아니라 수줍음도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 연극을 하며 '음악의 양감' 을 꿈꾸기 전까지, 그녀는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과 음악을 함부로 연관시키듯 말하지 않았다. 본인이 본인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고뇌한 뒤에야 비로소 움직인 셈이다.



* 연극 오래 했던 역량을 발휘한 경우. 한영애의 공연 영상을 찾다보면, 그녀가 무대에서 의상이나 헤어 스타일을 상당히 변화무쌍하게 하고 나오는 모습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런 시도가 사실 최초는 아니다. 가요 프로그램 보다 보면 '소방차' 마저도 승마복 입고 노래 부르다 간주 부분에서 갑자기 고을 원님 복장으로 갑자기 사극 분위기 내는 경우가 있으니까.
하지만 소방차의 그런 변신은 감상자로 하여금 꽤나 뜬금없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한영애의 경우에는 뜬금없다기 보다는 그런 의상이나 헤어스타일의 변신이 '우리가 생각하는' 기본적인 맥락을 초월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때문에 그녀의 이런 무대 연출은 상당히 전위적이다.
(캡쳐 사진은 1996년 8월 3일에 방영된 KBS의 <빅쇼>의 한영애 편 중에서.) *
앞만 본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이나 사물의 여러가지 면에서 딱 하나만을 바라본다는 얘기다. 사실 포크, 혹은 블루스 장르의 음악으로 당시에 잘 알려졌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영애의 음악은 어느 하나 명확하게 그 장르를 정통으로 알고 또 하고 있다는 생각을 받긴 힘들었다. 아마 그녀가 '정통'으로 어떤 음악 장르를 파고 들었다면 그것은 객원 보컬로 참가했던 <신촌블루스 1집> 일 것이다. 공식 정규 1집인 <여울목>은 실질적으로 보자면 '정서' 만을 담고 있을 뿐, 블루스 고유의 12음계 형식을 도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걸 포크라고 여기기에도 힘들고..
이런 점에서 한영애에게 장점이 될만한 상황이 있다면, 그것은 어느 장르이건 정통적으로 성취한 부분이 없기 때문에 반대로 다채로운 스펙트럼의 음악 장르를 섭취한 상태라는 점이다. 단점은..어느 장르이건 '정통적으로 성취한 부분이 없다'는 점이었다. 충분히 음악의 앞, 뒤, 옆을 볼 수 있지만 그녀에겐 양감의 형태를 정할 수 있는 도자기가 없었다.
정규 2집인 <바라본다>는 그 음악적 도자기를 남의 손이 아니라 한영애 자신의 손을 통해 처음으로 빚어낸 경우다. 그녀의 파트너인 김수철의 '사랑과 평화'의 송홍섭의 가이드가 기본적으로 큰 역할을 했지만, 그녀 역시 앨범 수록곡의 작사 작업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한영애와 두 사람은 서울 스튜디오에서 1988년 7월 7일부터 8월 10일까지 한 달 가량 집중력있게 녹음하여 이 명반을 완성해냈다.
앨범을 턴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들으면 가장 처음 접하는 트랙은 윤명운이 작사와 작곡을 겸한 '누구없소?' 다. 블루스의 정서가 가득 담겨져 있지만 본인 말에 따르면 '트로트처럼 부르고도 싶었던' 이 곡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던 이유는 한영애가 록 장르를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그녀의 목소리가 치명적으로 고혹적이라서 였다.
트로트처럼 부르고 싶다고 말을 했다는 것과 연관지어 생각해보면 실제로 그 장르는 그리 끈적하게 불러서 좋을 게 없다. 흔히 트로트의 여제인 주현미나 이미자 같은 아티스트들이 노래를 부르는 순간을 생각해보면 대개 목소리가 꾀꼬리처럼 간드러진 편이다. 그래서 좀 무례할 수 있지만, '누구없소?' 를 부를 때의 한영애는 어딘지 모르게 사연 많은 거리의 여인같다는 기분도 든다. 트로트 특유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이뤄질 수 없는 삶의 아픔을 마치 체로 걸러낸 듯하여 순수하게 감성적인 눈물샘을 자극한다면, '누구없소?' 는 그냥 그 자체로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 피로감이다.
사실 눈물이 나올 틈도 없다. 곡 속의 주인공은 외로움과 고단함에 저항해보려 몸부림치기 이전에 거기에 굴복하여 그냥 무조건 이 날 하루가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어찌보면 어두운 곡이지만 사실 듣고 있으면 히트칠만 하다는 생각이 다분하게 드는 곡인 셈이다. 특히 언제나 귀 기울여 듣게 되는 부분은 맛깔나는 기타 리프인데 일본에서 태어나 조용필과의 인연으로 그의 백밴드인 '위대한 탄생'에 들어가 경력을 시작했던 박청귀의 리드 + 리듬 기타는 무심하게 물러나 있다가 간주 부분에서 스르륵 들어와 짧지만 강렬한 리프를 남기고 사라진다. 이런 형식은 지금도 다른 가수의 타이틀곡들에서 일반적으로 들을 수 없는 편이기도 하고. 여기서 방점은 무심하게 물러나 있다가 들어오고 다시 나간다는 점이다.
주된 리듬을 형성하며 심지어 앞으로 내세우는 기타 파트는, 의외로 베이스다. 흔히 우리는 베이스를 뒤에서 든든하게 받쳐준다고 생각하지만, 이 곡에서 기억에 남는 서너마디의 리프를 만들어 내는 것은 이 악기다. 참고로 이 베이스 솜씨는 앨범의 제작을 맡았던 송홍섭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소리와 더불어 밑에 소개하겠지만, 쟁쟁한 보컬리스트들의 목소리를 모두 하나의 매체로 담아낸 사람은 조하문 1집, 시나위 1집 등을 작업한 최병철 엔지니어다. 역시...
이런 부분들 때문에 <바라본다>는 80년대 한국 음악 앨범이 이뤄낸 최대 성과물 중 하나로 꼽힌다. 3년 전에 나왔던 한국 록의 명반 중 명반이라 불리는 <들국화 1집>과 이 앨범을 비교해봐도 그 차이가 확연히 느껴진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인데, 사실 잘 모른다 해도 '누구없소?' 만 들으면 바로 수긍을 하게 된다. 이후 90년대에 들어 아티스트들이 앞다투어 음향 엔지니어링과 마스터링에 신경을 쓰기 시작하면서, 한국 음악계의 음향 수준이 다소 상향 평준화 되기에 이 앨범의 기술력은 다소 흔한 일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한영애의 앨범에서 이 정도의 라인업을 다시 볼 수 없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기억에 남는다.
8번 트랙인 '루씰'은 '누구없소?' 와는 달리 온전한 한영애의 보컬을 들을 수 있는 곡이다. 유명한 일화 하나가 있다. 신촌블루스의 멤버인 엄인호는 이 곡을 작곡한 뒤 한영애에게 넌지시 말했다고 한다. "사실 나, B.B. 킹 생각하면서 이 노래 쓴 거야." 라고. 곡을 들어본 적은 없어도 B.B.킹이란 이름이 블루스 음악을 대표하는 아티스트라는 사실은 마치 기본 상식처럼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엄인호에게 그 말을 들은 한영애는 잠시 생각하다 거의 10여분 만에 스르륵 작사를 완료한다.

* B.B.킹. 본명은 라일리 F. 킹 (Riley F. King) *
'루씰'은 정확히 얘기하자면 B.B.킹이 자신이 연주할 때 쓰는 깁슨 기타에 붙인 이름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사람 이름이기도 하고. B.B.킹이 연주를 하고 있던 한 바에서 어떤 남자 둘이 한 웨이트리스를 가지려 싸우고 있었단다. 그 때 그들의 행패로 인해 바에 불이 나기 시작했다.
이들과 불을 피해 밖으로 나오던 B.B.킹은 그만 깜빡하고 자신의 깁슨 기타를 놔두고 온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는 다시 불 속으로 뛰어들어가 결국 기타를 구해서 나온다. 그리고 싸우던 두 남자는 결국 불에 휩싸여 죽는다. 사건이 다 정리된 이후에 B.B.킹은 이후 그들이 차지하려던 웨이트리스의 이름이 루씰이란 것을 알게 되고 자신의 기타에 그 이름을 붙인다.
노래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한영애의 끈적한 보컬은 마치 60년대 말에 한국에 '음악계의 다이나마이트' 라는 별명을 가진 김추자가 처음 등장했을 때 받았던 느낌, 혹은 세간의 유명한 평가 중 하나인 재니스 조플린이나 멜라니 사프카의 보컬 같다는 인상도 준다. 말 그대로 '첫인상' 말이다. 한영애가 가진 끈적함과 건조함은 그 세 아티스트들을 넘나든다. 고혹적이지만 거기엔 삶의 무게가 담겨 있고, 혹은 재니스 조플린처럼 절규하기엔 보컬의 기교가 먼저 떠오른다.
두 곡을 처음 들으면서 왜 한영애가 '미녀' 대신 소리의 '마녀' 라는 별명을 갖게 됐는지 개인적으로 생각해 본 일이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이 앨범을 제대로 들은 것은 머리가 조금 굵어지고 난 일이다. 참 이상하지.. 이상은이나 신중현의 음악을 처음 들은 건 일곱살 때라고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데, 한영애의 이 <바라본다>를 처음 들은 건 정확한 나이대가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 머리가 약간이나마 굵어지고 나서는 맞는데 마치 최면에 걸렸다거나 꿈을 꾼 듯 진행 과정은 기억하나 시작과 끝은 몽롱하다고 해야할까..
그러나 확실히 최근 들어 이런 식으로 느낀 부분은 있다. 한영애라는 아티스트가 가진 독창적 보컬의 근원은 무엇인가를 '갈구' 하는 것에서 비롯된다는 점. 그녀는 포크 장르에 어울리지 않았고, 또 완벽히 블루스 장르를 소화한다고 볼 수도 없었다.
그녀는 재니스 조플린처럼 술과 약물로 자신의 몸을 망쳐 (당사자가 의도한 건 아니지만) 파란만장한 삶을 살지 않았고, 요절하지도 못했으며 절규하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멜라니 사프카 만큼의 잔잔한 서정을 담아내지도 못했다. 이런 점에서 이 앨범에 유일하게 불만이 있는 곡이라면 2번 트랙인 '호호호' 다. 들을 때마다 좋다고는 느끼는 곡인데, 앨범 전체로 따지면 그리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하여튼 예전엔 한영애의 힘이 로컬 음악 신에서 그 두 가수의 감흥을 '처음부터' 전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니 적어도 <바라본다> 에서는 그녀가 두 가수의 위상을 따라잡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누나. 이 곡 히트 시켜줘.
누나가 이 곡 히트 못 시키면 내가 나중에 다시 부를거야."
멜라니 사프카 이야기를 했는데, 앨범을 들으며 그녀의 느낌을 상상했던 건 3번 트랙인 '비애'와 5번 트랙인 '여인 #3' 에서였다. 이 중 3번 트랙인 '비애'는 유재하가 준 곡으로도 유명하다. 자신의 1집 앨범인 <사랑하기 때문에>를 준비하는 와중에도 한영애의 2집 앨범을 위해 직접 곡을 쓴 그는 그녀에게 전해주면서 위의 말을 했다. (유재하는 한영애의 절친한 동생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앨범을 만든다. 그 누구보다도 대중의 사랑을 받고 싶어해서 그리 되려고 노력했던 유재하는 처음으로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라이브 무대를 선보인 뒤, 결국 <바라본다>가 발표되는 광경을 보지 못하고 뭐가 그리 급했는지 하늘을 향해 날아오른다.
참 희한하다. 예술은 때로 세상을 바꾸기도 한다잖아? 헌데 이미 하늘 위로 날아가 버린 사람을 다시 땅 위에 되돌려 놓지 못한다. 세상이 바뀌는 것에 비하면 한 사람은 너무나 사소하고 작은 것일지 모르는데 말이다. '비애' 는 참으로 유재하스러운 발라드 곡이지만, 그 속에는 상상도 못할 비통함이 있다. 곡은 구했지만, 그 곡을 쓴 사람을 구하지 못한 누군가의 자책감이 목소리가 되어 스피커를 찢고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루씰'의 가사를 인용하자면 '나도 너 처럼 소리를 갖고 싶어'. 전설적인 블루스 기타리스트의 소유물이 되면 자신이 이루고 싶었던 무언가를 이뤄낼 수 있을까?
하지만 그건 결국 불가능한 일이지 않은가. 혹은 '누구없소?' 처럼 이 고단한 하루를 어떻게든 떠나보내고 꼭 아침을 맞았으면 하며 그 시간대를 갈구하는 것처럼. 자신의 현 상황에서 이루거나 가질 수 없는 것들을 가지고픈 열망은 점액처럼 녹아내려 불안에 떨고 있는 영혼을 잠식한다. 아하. 파스빈더 감독님이 제목을 원체 잘 지으시니까 내가 또 어떻게든 훔쳐서 묻어가는구먼. 이루지 못한 지독한 갈망은 감상자로 하여금 귀를 뗄 수 없게 만들며 숨을 죽인 채 듣게 만든다. <바라본다>의 음악적 매혹과 동력은 아이러니하게도 성취를 향한 갈망으로부터다.
그리고 이 압도감을 일순간에 해방시키는 지점은 바로 한영애가 부르는 록 장르의 곡들에서다. 4번 트랙인 '달', 6번 트랙인 '코뿔소', 마지막 9번 트랙인 '바라본다' 가 그것이다. '달'도 좋긴 하다. 그러나 그 이상의 파괴력과 강렬함을 지닌 채 앨범의 핵심적인 이미지를 감상자에게 주입 시키는 곡은 바로 이 두 곡이다. 한영애는 이 앨범을 통해 자신의 인지도를 한껏 끌어올렸으며, 냉정히 보자면 제작 당시에는 그녀보다 음악계에서 더 큰 상업적 성취를 거두고 있던 아티스트들이 세션으로 총출동하여 도운 부분이 있다. 위에서 언급한 인물들을 비롯하여 김현식, 전인권, 박주연, 김효국, 김희연, 그리고 당시 참여해놓고도 앨범 참여 리스트에는 빠져 있었지만 봄 여름 가을 겨울까지.. 굳이 한영애가 요청하지 않았음에도 불구, 혹은 같은 소속사에서 활동하는 가수들도 많았지만 어쨌든 이들은 모두 자청하여 한걸음에 달려와 그녀의 앨범 제작을 도왔다.
여기서 한영애가 내릴 수 있는 선택은 자신의 그 독특한 보컬과 폭발적인 성량으로 그저 코뿔소처럼 앞으로 꾸준히 돌진하는 것 뿐이다. 사실 아무리 80년대가 음악의 전성기였다 할지라도 '코뿔소' 처럼 어떤 정치적 의식도 적나라하게 드러내지 않은 채 순수하게 팍팍하고 고단한 현실의 삶을 은유적으로 말하는 곡이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는 경우는 잘 없었다.
그 때문인지 각기 다른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라 해도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이 험한 세상 / 오늘도 달려야 해 / 우리는 코뿔소 / 자신의 모든 문제 스스로 헤쳐서 / 밀고 가야 해' 라 부르는 이 곡은 결국 '닥쳐 닥쳐 닥쳐 닥치고 가만있어 / 우리는 달려야해 거짓에 싸워야해 / 말 달리자' 라 부르는 80년대 버전의 '말 달리자' 나 다름없다. 크라잉넛 노래 말이다. 한영애가 이 앨범에서 불렀던 곡들은 록이지만 알게 모르게 펑크의 정서도 스며든 느낌을 준다.

* '바라본다' 의 코러스 녹음에 세션 자격으로 참여한 아티스트들.
맨 좌측부터 정윤정, 전인권, 박주연, 김련, 윤명운, 홍찬숙, 조정은, 김현식.
이들의 사진은 <바라본다> LP 속지에 수록되어 있다.
신나라 레코드에서 발매된 CD에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
그리고 압권은 김수철이 작곡하고 한영애가 작사한 '바라본다' 다. 5분 10초의 길이를 가진 이 곡은 작정하고 앨범의 핵심이 되겠다는 듯 만들어졌다. 위에서 언급한 세션 보컬리스트들은 다들 기본적으로 가요계에서 잔뼈 굵은 사람들이다 보니 코러스 였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목소리를 들으려 혈안이 돼 있었다던데, 자신의 목소리를 한계까지 끌어올리듯 샤우팅으로 일관하는 상태로 3~4번을 반복 녹음한 탓에 이들은 모두 작업이 끝난 후에 탈진해 버렸다고 한다. 김수철의 경우에는 자신이 부르는 노래보다 더 한 프로그레시브적인 록 멜로디를 한영애에게 줬고, 박청귀의 기타는 약이라도 빤 듯 쉴새없이 절정의 단계로 날아오른다.
생각해보면 이 곡은 일부러 최대한도로 힘을 준 것이 청자들에게 오히려 더 쉽게 다가오는 계기가 됐을런지도 모른다. 한영애가 쓴 가사가 막상 볼 때 다소 난해하기 때문이다. 곡 제목 자체도 '바라본다' 이면 흔히 '무엇을' 보는지 궁금해하기 마련인데 그것이 없다. 그리고 가사의 상당수는 '숨가쁜 계절의 문턱으로 이미 지나버린 / 저 들판 한가운데 산처럼 우뚝 섰던 마음의 연민들', 혹은 '춤추는 욕망 모두 내 속에서 잠재우고 / 빈 가슴 빈 손으로 저 문을 나설지니' 같은 추상적이고 은유적인 느낌을 준다. 어떤 청자에게는 이 노래가 해당 아티스트의 심상을 생각하게 만드는 재미를 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끝끝내 대부분의 마음을 사로 잡는 것에는 결국 생각하는 것도, 아는 것도 모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는 접점이 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 접점은 분명 '사랑하리라' 일 것이다. 뒤이어 나오는 '그 뜨겁던 눈물의 의미를', '그 외롭던 생명의 향기를' 일 것이다. 생각이 필요없이 이 가사들은 모두 직관적으로 훅 다가와 청자의 귀를 뚫고 들어가고, 몸을 구석구석 훑은 뒤에 심장을 강타한다.
이 앨범을 처음 들었을 때의 정확한 나이 때는 이상하게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곡을 처음 들었을 때 받았던 충격은 정확히 기억한다. 너무나 충격적인 곡이었고, 앨범을 순서대로 듣다 보면 이 곡이 주는 카타르시스가 대단하다. 혹은 체념일 수도 있겠다. '아. 결국 사랑인가' 싶어서.. 사실 사랑이라는 단어 자체의 어감이 전해주는 감흥이 뻔하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크게 바뀌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곡을 들으면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내 생각보다 훨씬 다층적이고 거대한 범위를 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게 있었다.
흔히 스스로 주제, 혹은 자신의 위치를 안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그 분수와 주제라는 것은 대개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를 반영한 차원에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말하자면 삶의 가혹함에 좌절하고 굴복한 것을 깨달음으로 착각한다는 얘기다. 계급의식인지 모를 그 무엇이 깨달음이라 자청하고 끼어들 때 우린 스스로 굉장한 비참함을 느낀다. 이를 보며 한영애는 우리가 어떤 형태이든 상관없고, 때로는 거대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과감히 바라보고 또 사랑해도 상관 없다고 소리친다.
말하자면 무엇을 바라보든 혹은 무엇을 사랑하든, 그 앞에서 우린 '주제'를 알고 초라해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바라본다'는 말 그대로 바라봄만을 이야기하는 곡이지만 신기하게도 거기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바라보고 사랑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바라보며 사랑하면, 우린 점점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만큼 커진다고 노래한다. 커지려면 갈구해야 한다. 사랑은 갈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곡은 멋있다. 심지어 이 곡은 마무리 부분에 있어서 한영애의 보컬이 원래의 멜로디를 소화하지 못하고 흐트러 진다는 것을 그대로 담아놨다. 하지만 노래 부르기에 실패했다거나, 어지간히 노래 못한다며 비웃지 못하게 된다. 그 흐트러진 보컬을 담은 마무리에는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치의 목소리를 쏟아부으며 뜨겁던 눈물, 혹은 생명의 향기를.. 우리가 때로는 경멸하며 살아가는 생명의 향기 (나도 그렇지만, 가끔 주위 사람이 죽이고 싶을 정도로 밉게 보일 때가 있거든요.) 를 사랑하라며 예찬하는 가수의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때로 우리 하는 일이 너무나 하찮게 느껴질 때가 있다. 어지간히 유토피아 같은 생활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이야 모른다고 하면 어쩔 수 없다쳐도, 아마 그렇게 느끼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내가 할 줄 아는 것으로 바꿀 수 있는게 무엇인가.. 한영애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는 알 수 없다. 유재하를 제외하고, 그녀는 앨범에 참여한 사람 중 김현식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다. 그리고 들국화는 한 번 해체됐으며 전인권은 마약에 허우적댔다. 다시 돌아오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렸다. 우리 앞에 닥쳐오는 위기나 느껴지는 삶의 회의가 우리의 능력으로는 막을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삶이 오직 위기로만 진행되는 것이 아님을 안다. 그리고 이 깨달음은 오직 긴 시간을 두고 우리의 삶을 바라봐야만 얻을 수 있다. 바라보는 것은 갈구하는 것이다. 먼저 떠나간 무언가를 상상할 때 그게 사람이든, 되고 싶었던 꿈이든 상관없다. 떠나간 것을 다시 잡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하지만 동시에 그렇기에 우리는 살아야 한다. 삶과 죽음이란 모르기에 언젠가 떠나간 것들과 다시 마주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다시 마주했을 때 나 이렇게 살았다고 이야기 하기 위해, 우리는 꾸준히 바라보며 갈구해야 한다. 떠나간 너를 그리워하며, 이루지 못한 나의 무언가를 그리워하며 목이 타 왔기에 그것을 채우기 위하여 이렇게 바라봤다고 말해야 한다. 그렇게 앞으로 걸어가야 한다고 한영애의 노래는 이야기한다.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다. 하지만 그 곡과 이 앨범을 듣고 그리 느꼈던 것이 있어, 최대한 그렇게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한영애는 여전히 살아있고 노래를 부르고 앨범을 낸다. ...6집 이후로 11년째 앨범이 나오고 있지 않지만서도. 그래도 <바라본다>가 명반이라는 사실을 퇴색시키지는 못한다. 더불어 '바라본다'는 명곡이다. 동시에 나를 살게 하는 참으로 사소하고도 큰 존재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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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앨범을 위해서 곡을 마련해 주신 여러분들, 소리를 만들어주신 송홍섭 씨,
처음부터 끝까지 에너지를 주신 김수철 씨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재하에게 이 노래를 바칩니다.'
- 2집 앨범 <바라본다> 커버 뒷면에 적힌 한영애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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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라본다 *
작사: 한영애 + 작곡: 김수철
바라본다
화려한 하루를 남기고 이미 불타버린
저 하늘 구탱이에 녹처럼 매달렸던 마음의 구속들
바라본다
숨가쁜 계절의 문턱으로 이미 지나버린
저 들판 한가운데 산처럼 우뚝 섰던 마음의 연민들
바라본다
춤추는 욕망 모두 내 속에서 잠재우고
빈 가슴 빈 손으로 저 문을 나설지니
아.. 그렇게 자유가 된다면
사랑하리라
사랑하리라
춤추는 욕망 모두 내 속에서 잠재우고
빈 가슴 빈 손으로 저 문을 나설지니
아 그렇게 자유가 된다면
사랑하리라
사랑하리라
사랑하리라 그 뜨겁던 눈물의 의미를
사랑하리라 그 외롭던 생명의 향기를
사랑하리라 그 뜨겁던 눈물의 의미를
사랑하리라 그 외롭던 생명의 향기를
사랑하리라 눈물의 의미를
사랑하리라 생명의 향기를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사랑하리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