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RACKS

(On Side A)

1. 누구없소? 

2. 호호호

3. 비애

4. 달

5. 여인 #3

(On Side B)

6. 코뿔소

7. 갈증

8. 루씰

9. 바라본다

 

LP 개수 : 1

러닝 타임 : 40:16 Mins

레이블 : 동아기획, 서라벌 레코드 (LP) / 신나라 레코드 (CD)

 



 

그러니까.. 이 앨범의 제목은,

곧 이 서재의 근원

 

..... 



"신촌에 이상하게 노래 부르는 애가 있다던데, 그게 너구나?"

 


한영애는 몇몇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노래와 인연을 맺은 계기에 관해서 언급을 한 적이 있었다. 거기서 많이 놀랐던 사실이 있는데, 바로 그녀는 의외로 노래에 관심이 없었다는 점이다! 한영애가 노래와 인연을 맺은 계기는 친구가 주선해준 덕분이었다. 신촌의 음악감상실인 프린스 살롱에서 오디션을 보게 된 것이다. 



한영애는 친구의 말을 듣고 시큰둥했다. 난 노래에 딱히 관심도 없는데 내가 왜 해야하니? 어지간하면 해, 얘. 이건 정말 흔치 않은 기회야! 친구의 답이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노래를 부르다 위의 말을 해 준 사람을 만난다. 포크, 블루스 음악 장르의 거장 중 한 사람인 이정선 말이다.

 


6~70년대 한국에서는 음악감상실이 가수 데뷔와 앨범 발표로 가는 확실한 통로 중 하나였고, 오디션을 받은지 단 30분만에, 한영애는 주급까지 꼬박꼬박 받아 챙기면서 프린스 살롱에서 노래하는 가수가 됐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잠재력을 알아봐준 이정선과 그룹 '해바라기' 로 활동하여  그의 도움 (이라 쓰고 '지시' 라 읽는다.) 으로 1976년부터 1978년까지 세 장의 앨범을 낸다.

 


정작 당사자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온 앨범으로, 태평양에 갖다 버리거나 마스터 테이프에 불을 질러 없애 버리고 싶었던' 이라고 말했던 비공식 앨범들에 대해서 나는 아는게 없다.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음반이 나왔다는 사실은 둘째 치고, 원체 구하기도 힘들거니와 찾다 보니 팔겠다는 사람을 보긴 봤는데... 그 사람이 댓가로 내놓으라는 배춧잎의 개수가 좀 많았다. 발견했을 당시에는 그래도 좀 어렸으니 나이로 어필해서 네고시에이션에 들어가 보려 했으나... 정작 그 분이 막상 거래에 들어가자 '태어나는 것과 달리 가는 데는 순서 없다'는 태도로 급 변경하시어 결국 떠나 보내야만 했다.

 


 



* 내가 봤던 한영애의 비공식 앨범 중 하나. <작은 동산>. 1977년인가 1978년 발매 음반이란다. 뭐, 정확한 발매년도도 잘 모르겄다. *

 

 


신기하게도 그 뒤로는 한영애의 비공식 앨범들이 더이상 궁금하지 않았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 놈의 중고값이 초장부터 질리게 만들었던 이유가 컸겠지만, 아마 결정적인 건 내가 묘한 목소리를 가진 그녀의 팬이었기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싫어하는 앨범이라고 하니까.. '가수 당사자가 싫어한다니까, 뭐.' 하는 식으로 알아서 합리화가 되더라. 나는 순종적인 구석도 꽤 많은 사람이다. 그러다 보니까 아직도 듣지 못하고 있네. 

 


한영애의 정규 2집 앨범인 <바라본다>는 그 유명한 '누구없소'와 '코뿔소'가 수록되어 있고 1988년에 발표됐다. 이미 70년대부터 해바라기로 활동했으며 85년에는 그 유명한 '신촌블루스'의 객원 보컬리스트로 활동했지만, 그녀는 1986년에 발매한 자신의 앨범인 <여울목>을 '공식적인 1집' 으로 친단다. 물론 자신의 이름이 전면에 나서는 앨범을 내기까지 이런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에는 1977년부터 7~8년간 꽤 오랫동안 연극배우로 활동한 이유도 있다. 

 


이런 일화들을 듣고 있으면 한영애란 아티스트는 자기 세계에 대한 명확한 고집이 있는 사람으로 보인다. 내가 이 아티스트를 처음 알았을 때 가장 먼저 들은 일화가 바로 위에 언급된 '친구의 주선으로 오디션에 응시' 한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후에 좀 더 찾아보니 한영애는 예전부터 음악과 많은 연관이 있었으며 관련 활동도 해 온 터였다. 학창시절에는 합창 경연 대회를 할 때 마다 지휘자로 뽑혔고 국군장병 위문공연 때도 대표로 노래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독학으로 기타도 익혔단다.

 


더불어 그녀는 이정선의 참여로 만든 세 장의 앨범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그의 것이지, 내 것은 아니라고 단호하게 이야기한다. 실제로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해당 앨범을 만든 이유에는, 그녀의 표현대로 따르자면 이정선의 '지시'가 있었다. 헌데 한영애는 포크 장르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연극이 취향에 맞게 되었고 이 곳으로 뛰어들어 오랜 시간 음악을 외면한다. 8년 뒤에 이정선의 권유와 설득으로 다시 음악하는 삶을 꿈꾸게 되고 나서야 한영애는 이런 꿈을 품는다. 난 음악을 앞만 보이게 부르지 않을거야.. 뒤와 옆까지 보이고 또 느낄 수 있는 음악을 할거야.. 

 


한영애는 자기고집 뿐만 아니라 수줍음도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 연극을 하며 '음악의 양감' 을 꿈꾸기 전까지, 그녀는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과 음악을 함부로 연관시키듯 말하지 않았다. 본인이 본인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고뇌한 뒤에야 비로소 움직인 셈이다. 

 




* 연극 오래 했던 역량을 발휘한 경우. 한영애의 공연 영상을 찾다보면, 그녀가 무대에서 의상이나 헤어 스타일을 상당히 변화무쌍하게 하고 나오는 모습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런 시도가 사실 최초는 아니다. 가요 프로그램 보다 보면 '소방차' 마저도 승마복 입고 노래 부르다 간주 부분에서 갑자기 고을 원님 복장으로 갑자기 사극 분위기 내는 경우가 있으니까.

 

하지만 소방차의 그런 변신은 감상자로 하여금 꽤나 뜬금없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한영애의 경우에는 뜬금없다기 보다는 그런 의상이나 헤어스타일의 변신이 '우리가 생각하는' 기본적인 맥락을 초월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때문에 그녀의 이런 무대 연출은 상당히 전위적이다.


(캡쳐 사진은 1996년 8월 3일에 방영된 KBS의 <빅쇼>의 한영애 편 중에서.) *

 

 

앞만 본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이나 사물의 여러가지 면에서 딱 하나만을 바라본다는 얘기다. 사실 포크, 혹은 블루스 장르의 음악으로 당시에 잘 알려졌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영애의 음악은 어느 하나 명확하게 그 장르를 정통으로 알고 또 하고 있다는 생각을 받긴 힘들었다. 아마 그녀가 '정통'으로 어떤 음악 장르를 파고 들었다면 그것은 객원 보컬로 참가했던 <신촌블루스 1집> 일 것이다. 공식 정규 1집인 <여울목>은 실질적으로 보자면 '정서' 만을 담고 있을 뿐, 블루스 고유의 12음계 형식을 도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걸 포크라고 여기기에도 힘들고.. 

 


이런 점에서 한영애에게 장점이 될만한 상황이 있다면, 그것은 어느 장르이건 정통적으로 성취한 부분이 없기 때문에 반대로 다채로운 스펙트럼의 음악 장르를 섭취한 상태라는 점이다. 단점은..어느 장르이건 '정통적으로 성취한 부분이 없다'는 점이었다. 충분히 음악의 앞, 뒤, 옆을 볼 수 있지만 그녀에겐 양감의 형태를 정할 수 있는 도자기가 없었다.

 


정규 2집인 <바라본다>는 그 음악적 도자기를 남의 손이 아니라 한영애 자신의 손을 통해 처음으로 빚어낸 경우다. 그녀의 파트너인 김수철의 '사랑과 평화'의 송홍섭의 가이드가 기본적으로 큰 역할을 했지만, 그녀 역시 앨범 수록곡의 작사 작업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한영애와 두 사람은 서울 스튜디오에서 1988년 7월 7일부터 8월 10일까지 한 달 가량 집중력있게 녹음하여 이 명반을 완성해냈다.

 


앨범을 턴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들으면 가장 처음 접하는 트랙은 윤명운이 작사와 작곡을 겸한 '누구없소?' 다. 블루스의 정서가 가득 담겨져 있지만 본인 말에 따르면 '트로트처럼 부르고도 싶었던'  이 곡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던 이유는 한영애가 록 장르를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그녀의 목소리가 치명적으로 고혹적이라서 였다.

 


트로트처럼 부르고 싶다고 말을 했다는 것과 연관지어 생각해보면 실제로 그 장르는 그리 끈적하게 불러서 좋을 게 없다. 흔히 트로트의 여제인 주현미나 이미자 같은 아티스트들이 노래를 부르는 순간을 생각해보면 대개 목소리가 꾀꼬리처럼 간드러진 편이다. 그래서 좀 무례할 수 있지만, '누구없소?' 를 부를 때의 한영애는 어딘지 모르게 사연 많은 거리의 여인같다는 기분도 든다. 트로트 특유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이뤄질 수 없는 삶의 아픔을 마치 체로 걸러낸 듯하여 순수하게 감성적인 눈물샘을 자극한다면, '누구없소?' 는 그냥 그 자체로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 피로감이다. 

 


사실 눈물이 나올 틈도 없다. 곡 속의 주인공은 외로움과 고단함에 저항해보려 몸부림치기 이전에 거기에 굴복하여 그냥 무조건 이 날 하루가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어찌보면 어두운 곡이지만 사실 듣고 있으면 히트칠만 하다는 생각이 다분하게 드는 곡인 셈이다. 특히 언제나 귀 기울여 듣게 되는 부분은 맛깔나는 기타 리프인데 일본에서 태어나 조용필과의 인연으로 그의 백밴드인 '위대한 탄생'에 들어가 경력을 시작했던 박청귀의 리드 + 리듬 기타는 무심하게 물러나 있다가 간주 부분에서 스르륵 들어와 짧지만 강렬한 리프를 남기고 사라진다. 이런 형식은 지금도 다른 가수의 타이틀곡들에서 일반적으로 들을 수 없는 편이기도 하고. 여기서 방점은 무심하게 물러나 있다가 들어오고 다시 나간다는 점이다.

 


주된 리듬을 형성하며 심지어 앞으로 내세우는 기타 파트는, 의외로 베이스다. 흔히 우리는 베이스를 뒤에서 든든하게 받쳐준다고 생각하지만, 이 곡에서 기억에 남는 서너마디의 리프를 만들어 내는 것은 이 악기다. 참고로 이 베이스 솜씨는 앨범의 제작을 맡았던 송홍섭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소리와 더불어 밑에 소개하겠지만, 쟁쟁한 보컬리스트들의 목소리를 모두 하나의 매체로 담아낸 사람은 조하문 1집, 시나위 1집 등을 작업한 최병철 엔지니어다. 역시... 

 


이런 부분들 때문에 <바라본다>는 80년대 한국 음악 앨범이 이뤄낸 최대 성과물 중 하나로 꼽힌다. 3년 전에 나왔던 한국 록의 명반 중 명반이라 불리는 <들국화 1집>과 이 앨범을 비교해봐도 그 차이가 확연히 느껴진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인데, 사실 잘 모른다 해도 '누구없소?' 만 들으면 바로 수긍을 하게 된다. 이후 90년대에 들어 아티스트들이 앞다투어 음향 엔지니어링과 마스터링에 신경을 쓰기 시작하면서, 한국 음악계의 음향 수준이 다소 상향 평준화 되기에 이 앨범의 기술력은 다소 흔한 일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한영애의 앨범에서 이 정도의 라인업을 다시 볼 수 없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기억에 남는다.

 


8번 트랙인 '루씰'은 '누구없소?' 와는 달리 온전한 한영애의 보컬을 들을 수 있는 곡이다. 유명한 일화 하나가 있다. 신촌블루스의 멤버인 엄인호는 이 곡을 작곡한 뒤 한영애에게 넌지시 말했다고 한다. "사실 나, B.B. 킹 생각하면서 이 노래 쓴 거야." 라고. 곡을 들어본 적은 없어도 B.B.킹이란 이름이 블루스 음악을 대표하는 아티스트라는 사실은 마치 기본 상식처럼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엄인호에게 그 말을 들은 한영애는 잠시 생각하다 거의 10여분 만에 스르륵 작사를 완료한다. 

 




* B.B.킹. 본명은 라일리 F. 킹 (Riley F. King) *

 

 


'루씰'은 정확히 얘기하자면 B.B.킹이 자신이 연주할 때 쓰는 깁슨 기타에 붙인 이름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사람 이름이기도 하고. B.B.킹이 연주를 하고 있던 한 바에서 어떤 남자 둘이 한 웨이트리스를 가지려 싸우고 있었단다. 그 때 그들의 행패로 인해 바에 불이 나기 시작했다. 



이들과 불을 피해 밖으로 나오던 B.B.킹은 그만 깜빡하고 자신의 깁슨 기타를 놔두고 온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는 다시 불 속으로 뛰어들어가 결국 기타를 구해서 나온다. 그리고 싸우던 두 남자는 결국 불에 휩싸여 죽는다. 사건이 다 정리된 이후에 B.B.킹은 이후 그들이 차지하려던 웨이트리스의 이름이 루씰이란 것을 알게 되고 자신의 기타에 그 이름을 붙인다. 

 


노래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한영애의 끈적한 보컬은 마치 60년대 말에 한국에 '음악계의 다이나마이트' 라는 별명을 가진 김추자가 처음 등장했을 때 받았던 느낌, 혹은 세간의 유명한 평가 중 하나인 재니스 조플린이나 멜라니 사프카의 보컬 같다는 인상도 준다. 말 그대로 '첫인상' 말이다. 한영애가 가진 끈적함과 건조함은 그 세 아티스트들을 넘나든다. 고혹적이지만 거기엔 삶의 무게가 담겨 있고, 혹은 재니스 조플린처럼 절규하기엔 보컬의 기교가 먼저 떠오른다.

 


두 곡을 처음 들으면서 왜 한영애가 '미녀' 대신 소리의 '마녀' 라는 별명을 갖게 됐는지 개인적으로 생각해 본 일이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이 앨범을 제대로 들은 것은 머리가 조금 굵어지고 난 일이다. 참 이상하지.. 이상은이나 신중현의 음악을 처음 들은 건 일곱살 때라고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데, 한영애의 이 <바라본다>를 처음 들은 건 정확한 나이대가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 머리가 약간이나마 굵어지고 나서는 맞는데 마치 최면에 걸렸다거나 꿈을 꾼 듯 진행 과정은 기억하나 시작과 끝은 몽롱하다고 해야할까..

 


그러나 확실히 최근 들어 이런 식으로 느낀 부분은 있다. 한영애라는 아티스트가 가진 독창적 보컬의 근원은 무엇인가를 '갈구' 하는 것에서 비롯된다는 점. 그녀는 포크 장르에 어울리지 않았고, 또 완벽히 블루스 장르를 소화한다고 볼 수도 없었다.

 


그녀는 재니스 조플린처럼 술과 약물로 자신의 몸을 망쳐 (당사자가 의도한 건 아니지만) 파란만장한 삶을 살지 않았고, 요절하지도 못했으며 절규하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멜라니 사프카 만큼의 잔잔한 서정을 담아내지도 못했다. 이런 점에서 이 앨범에 유일하게 불만이 있는 곡이라면 2번 트랙인 '호호호' 다. 들을 때마다 좋다고는 느끼는 곡인데, 앨범 전체로 따지면 그리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하여튼 예전엔 한영애의 힘이 로컬 음악 신에서 그 두 가수의 감흥을 '처음부터' 전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니 적어도 <바라본다> 에서는 그녀가 두 가수의 위상을 따라잡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누나. 이 곡 히트 시켜줘.

누나가 이 곡 히트 못 시키면 내가 나중에 다시 부를거야."

 


멜라니 사프카 이야기를 했는데, 앨범을 들으며 그녀의 느낌을 상상했던 건 3번 트랙인 '비애'와 5번 트랙인 '여인 #3' 에서였다. 이 중 3번 트랙인 '비애'는 유재하가 준 곡으로도 유명하다. 자신의 1집 앨범인 <사랑하기 때문에>를 준비하는 와중에도 한영애의 2집 앨범을 위해 직접 곡을 쓴 그는 그녀에게 전해주면서 위의 말을 했다. (유재하는 한영애의 절친한 동생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앨범을 만든다. 그 누구보다도 대중의 사랑을 받고 싶어해서 그리 되려고 노력했던 유재하는 처음으로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라이브 무대를 선보인 뒤, 결국 <바라본다>가 발표되는 광경을 보지 못하고 뭐가 그리 급했는지 하늘을 향해 날아오른다. 

 


참 희한하다. 예술은 때로 세상을 바꾸기도 한다잖아? 헌데 이미 하늘 위로 날아가 버린 사람을 다시 땅 위에 되돌려 놓지 못한다. 세상이 바뀌는 것에 비하면 한 사람은 너무나 사소하고 작은 것일지 모르는데 말이다. '비애' 는 참으로 유재하스러운 발라드 곡이지만, 그 속에는 상상도 못할 비통함이 있다. 곡은 구했지만, 그 곡을 쓴 사람을 구하지 못한 누군가의 자책감이 목소리가 되어 스피커를 찢고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루씰'의 가사를 인용하자면 '나도 너 처럼 소리를 갖고 싶어'. 전설적인 블루스 기타리스트의 소유물이 되면 자신이 이루고 싶었던 무언가를 이뤄낼 수 있을까? 

 


하지만 그건 결국 불가능한 일이지 않은가. 혹은 '누구없소?' 처럼 이 고단한 하루를 어떻게든 떠나보내고 꼭 아침을 맞았으면 하며 그 시간대를 갈구하는 것처럼. 자신의 현 상황에서 이루거나 가질 수 없는 것들을 가지고픈 열망은 점액처럼 녹아내려 불안에 떨고 있는 영혼을 잠식한다. 아하. 파스빈더 감독님이 제목을 원체 잘 지으시니까 내가 또 어떻게든 훔쳐서 묻어가는구먼. 이루지 못한 지독한 갈망은 감상자로 하여금 귀를 뗄 수 없게 만들며 숨을 죽인 채 듣게 만든다. <바라본다>의 음악적 매혹과 동력은 아이러니하게도 성취를 향한 갈망으로부터다.

 


그리고 이 압도감을 일순간에 해방시키는 지점은 바로 한영애가 부르는 록 장르의 곡들에서다. 4번 트랙인 '달', 6번 트랙인 '코뿔소', 마지막 9번 트랙인 '바라본다' 가 그것이다. '달'도 좋긴 하다. 그러나 그 이상의 파괴력과 강렬함을 지닌 채 앨범의 핵심적인 이미지를 감상자에게 주입 시키는 곡은 바로 이 두 곡이다. 한영애는 이 앨범을 통해 자신의 인지도를 한껏 끌어올렸으며, 냉정히 보자면 제작 당시에는 그녀보다 음악계에서 더 큰 상업적 성취를 거두고 있던 아티스트들이 세션으로 총출동하여 도운 부분이 있다. 위에서 언급한 인물들을 비롯하여 김현식, 전인권, 박주연, 김효국, 김희연, 그리고 당시 참여해놓고도 앨범 참여 리스트에는 빠져 있었지만 봄 여름 가을 겨울까지.. 굳이 한영애가 요청하지 않았음에도 불구, 혹은 같은 소속사에서 활동하는 가수들도 많았지만 어쨌든 이들은 모두 자청하여 한걸음에 달려와 그녀의 앨범 제작을 도왔다.

 


여기서 한영애가 내릴 수 있는 선택은 자신의 그 독특한 보컬과 폭발적인 성량으로 그저 코뿔소처럼 앞으로 꾸준히 돌진하는 것 뿐이다. 사실 아무리 80년대가 음악의 전성기였다 할지라도 '코뿔소' 처럼 어떤 정치적 의식도 적나라하게 드러내지 않은 채 순수하게 팍팍하고 고단한 현실의 삶을 은유적으로 말하는 곡이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는 경우는 잘 없었다. 

 


그 때문인지 각기 다른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라 해도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이 험한 세상 / 오늘도 달려야 해 / 우리는 코뿔소 / 자신의 모든 문제 스스로 헤쳐서 / 밀고 가야 해' 라 부르는 이 곡은 결국 '닥쳐 닥쳐 닥쳐 닥치고 가만있어 / 우리는 달려야해 거짓에 싸워야해 / 말 달리자' 라 부르는 80년대 버전의 '말 달리자' 나 다름없다. 크라잉넛 노래 말이다. 한영애가 이 앨범에서 불렀던 곡들은 록이지만 알게 모르게 펑크의 정서도 스며든 느낌을 준다.

 



 

* '바라본다' 의 코러스 녹음에 세션 자격으로 참여한 아티스트들.

맨 좌측부터 정윤정, 전인권, 박주연, 김련, 윤명운, 홍찬숙, 조정은, 김현식.

이들의 사진은 <바라본다> LP 속지에 수록되어 있다. 

신나라 레코드에서 발매된 CD에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

 

 

그리고 압권은 김수철이 작곡하고 한영애가 작사한 '바라본다' 다. 5분 10초의 길이를 가진 이 곡은 작정하고 앨범의 핵심이 되겠다는 듯 만들어졌다. 위에서 언급한 세션 보컬리스트들은 다들 기본적으로 가요계에서 잔뼈 굵은 사람들이다 보니 코러스 였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목소리를 들으려 혈안이 돼 있었다던데, 자신의 목소리를 한계까지 끌어올리듯 샤우팅으로 일관하는 상태로 3~4번을 반복 녹음한 탓에 이들은 모두 작업이 끝난 후에 탈진해 버렸다고 한다. 김수철의 경우에는 자신이 부르는 노래보다 더 한 프로그레시브적인 록 멜로디를 한영애에게 줬고, 박청귀의 기타는 약이라도 빤 듯 쉴새없이 절정의 단계로 날아오른다.

 


생각해보면 이 곡은 일부러 최대한도로 힘을 준 것이 청자들에게 오히려 더 쉽게 다가오는 계기가 됐을런지도 모른다. 한영애가 쓴 가사가 막상 볼 때 다소 난해하기 때문이다. 곡 제목 자체도 '바라본다' 이면 흔히 '무엇을' 보는지 궁금해하기 마련인데 그것이 없다. 그리고 가사의 상당수는 '숨가쁜 계절의 문턱으로 이미 지나버린 / 저 들판 한가운데 산처럼 우뚝 섰던 마음의 연민들', 혹은 '춤추는 욕망 모두 내 속에서 잠재우고 / 빈 가슴 빈 손으로 저 문을 나설지니' 같은 추상적이고 은유적인 느낌을 준다. 어떤 청자에게는 이 노래가 해당 아티스트의 심상을 생각하게 만드는 재미를 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끝끝내 대부분의 마음을 사로 잡는 것에는 결국 생각하는 것도, 아는 것도 모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는 접점이 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 접점은 분명 '사랑하리라' 일 것이다. 뒤이어 나오는 '그 뜨겁던 눈물의 의미를', '그 외롭던 생명의 향기를' 일 것이다. 생각이 필요없이 이 가사들은 모두 직관적으로 훅 다가와 청자의 귀를 뚫고 들어가고, 몸을 구석구석 훑은 뒤에 심장을 강타한다. 

 


이 앨범을 처음 들었을 때의 정확한 나이 때는 이상하게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곡을 처음 들었을 때 받았던 충격은 정확히 기억한다. 너무나 충격적인 곡이었고, 앨범을 순서대로 듣다 보면 이 곡이 주는 카타르시스가 대단하다. 혹은 체념일 수도 있겠다. '아. 결국 사랑인가' 싶어서.. 사실 사랑이라는 단어 자체의 어감이 전해주는 감흥이 뻔하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크게 바뀌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곡을 들으면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내 생각보다 훨씬 다층적이고 거대한 범위를 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게 있었다.

 


흔히 스스로 주제, 혹은 자신의 위치를 안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그 분수와 주제라는 것은 대개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를 반영한 차원에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말하자면 삶의 가혹함에 좌절하고 굴복한 것을 깨달음으로 착각한다는 얘기다. 계급의식인지 모를 그 무엇이 깨달음이라 자청하고 끼어들 때  우린 스스로 굉장한 비참함을 느낀다. 이를 보며 한영애는 우리가 어떤 형태이든 상관없고, 때로는 거대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과감히 바라보고 또 사랑해도 상관 없다고 소리친다. 

 


말하자면 무엇을 바라보든 혹은 무엇을 사랑하든, 그 앞에서 우린 '주제'를 알고 초라해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바라본다'는 말 그대로 바라봄만을 이야기하는 곡이지만 신기하게도 거기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바라보고 사랑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바라보며 사랑하면, 우린 점점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만큼 커진다고 노래한다. 커지려면 갈구해야 한다. 사랑은 갈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곡은 멋있다. 심지어 이 곡은 마무리 부분에 있어서 한영애의 보컬이 원래의 멜로디를 소화하지 못하고 흐트러 진다는 것을 그대로 담아놨다. 하지만 노래 부르기에 실패했다거나, 어지간히 노래 못한다며 비웃지 못하게 된다. 그 흐트러진 보컬을 담은 마무리에는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치의 목소리를 쏟아부으며 뜨겁던 눈물, 혹은 생명의 향기를.. 우리가 때로는 경멸하며 살아가는 생명의 향기 (나도 그렇지만, 가끔 주위 사람이 죽이고 싶을 정도로 밉게 보일 때가 있거든요.) 를 사랑하라며 예찬하는 가수의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때로 우리 하는 일이 너무나 하찮게 느껴질 때가 있다. 어지간히 유토피아 같은 생활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이야 모른다고 하면 어쩔 수 없다쳐도, 아마 그렇게 느끼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내가 할 줄 아는 것으로 바꿀 수 있는게 무엇인가.. 한영애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는 알 수 없다. 유재하를 제외하고, 그녀는 앨범에 참여한 사람 중 김현식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다. 그리고 들국화는 한 번 해체됐으며 전인권은 마약에 허우적댔다. 다시 돌아오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렸다. 우리 앞에 닥쳐오는 위기나 느껴지는 삶의 회의가 우리의 능력으로는 막을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삶이 오직 위기로만 진행되는 것이 아님을 안다. 그리고 이 깨달음은 오직 긴 시간을 두고 우리의 삶을 바라봐야만 얻을 수 있다. 바라보는 것은 갈구하는 것이다. 먼저 떠나간 무언가를 상상할 때 그게 사람이든, 되고 싶었던 꿈이든 상관없다. 떠나간 것을 다시 잡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하지만 동시에 그렇기에 우리는 살아야 한다. 삶과 죽음이란 모르기에 언젠가 떠나간 것들과 다시 마주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다시 마주했을 때 나 이렇게 살았다고 이야기 하기 위해, 우리는 꾸준히 바라보며 갈구해야 한다. 떠나간 너를 그리워하며, 이루지 못한 나의 무언가를 그리워하며 목이 타 왔기에 그것을 채우기 위하여 이렇게 바라봤다고 말해야 한다. 그렇게 앞으로 걸어가야 한다고 한영애의 노래는 이야기한다.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다. 하지만 그 곡과 이 앨범을 듣고 그리 느꼈던 것이 있어, 최대한 그렇게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한영애는 여전히 살아있고 노래를 부르고 앨범을 낸다. ...6집 이후로 11년째 앨범이 나오고 있지 않지만서도. 그래도 <바라본다>가 명반이라는 사실을 퇴색시키지는 못한다. 더불어 '바라본다'는 명곡이다. 동시에 나를 살게 하는 참으로 사소하고도 큰 존재 중 하나다.

 

 

.....

 

'이 앨범을 위해서 곡을 마련해 주신 여러분들, 소리를 만들어주신 송홍섭 씨,

처음부터 끝까지 에너지를 주신 김수철 씨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재하에게 이 노래를 바칩니다.'

 

- 2집 앨범 <바라본다> 커버 뒷면에 적힌 한영애의 말


.....



* 바라본다 *

작사: 한영애 + 작곡: 김수철



 

바라본다

화려한 하루를 남기고 이미 불타버린

저 하늘 구탱이에 녹처럼 매달렸던 마음의 구속들

 

바라본다

숨가쁜 계절의 문턱으로 이미 지나버린

저 들판 한가운데 산처럼 우뚝 섰던 마음의 연민들

 

바라본다

춤추는 욕망 모두 내 속에서 잠재우고

빈 가슴 빈 손으로 저 문을 나설지니

아.. 그렇게 자유가 된다면


사랑하리라

사랑하리라

 

춤추는 욕망 모두 내 속에서 잠재우고

빈 가슴 빈 손으로 저 문을 나설지니

아 그렇게 자유가 된다면


사랑하리라

사랑하리라

사랑하리라 그 뜨겁던 눈물의 의미를

사랑하리라 그 외롭던 생명의 향기를

사랑하리라 그 뜨겁던 눈물의 의미를

사랑하리라 그 외롭던 생명의 향기를

사랑하리라 눈물의 의미를

사랑하리라 생명의 향기를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사랑하리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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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CKS


1. Intro - Prologue

2. Lonely

3. 사랑 그땐 (Featuring by 하림)

4. Amazing

5. Baby

6. Oh My God

7. 벅차  

8. 예뻐 

9. Who Am I 

10. 음악에 취해 

11. 길 

12. Seoul 

 

CD 개수 : 1

러닝 타임 : 41:31 Mins

레이블 : 포니 캐년 코리아, WM 엔터테인먼트  

 

 

..... 



조금은 어둡게. 그러나 어색하지 않게

 


아이돌 음반을 들을 때 언제나 안타깝게 느껴지는 부분은, 바로 앨범 자체의 구성이 무척 불균질 하다는 점이다. 강렬하기만한 댄스와 팝, 의무적으로 만들어 삽입하는 느낌의 발라드 몇 곡. 마지막 트랙은 자신들이 콘서트를 할 때 앙코르 곡으로 쓸 요량으로 만든다고 규정한다면 너무 편견을 가지는 것일까. '기획사가 만든 상품' 이라는 이미지가 앨범에도 이미지의 '틀'을 만들어 버리고, 결과적으로 가수들을 음악보다 의상에서 참신함을 쏟아붓게끔 만드는 엉뚱한 상황을 연출하게 만든다. 그리고 설사 잘 만들어진 곡이 있다고 한들 싱글에서 앨범의 일부가 될 때 유독 튀거나 힘을 잃는 식으로 변해버리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 부분은 아이돌이 아닌 가수들에게서도 충분히 드러날 수 있는 문제이긴 하지만 말이다.)



아이돌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되새겨 보려고 해도 사실 너무 조심한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트렌드 따라 갈대처럼 흔들린다고 한들, 적어도 앨범 하나는 일관성 있게 만들어야 하지 않는가. 아무리 다른 분위기의 곡이라고 한들, '한 앨범에 있다'는 통일성은 줘야 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B1A4의 정규 2집 앨범이 돋보이는 부분이 있다면, 비교적 일관된 앨범의 톤이다. 그들의 지난 EP 앨범인 <이게 무슨 일이야> 에서 드러난 장점이기도 하고, 그보다 먼저 발매됐던 EP인 <In The Wind>와 정규 1집인 <Ignition>이 가지지 못했던 점이기도 하다. 전자와 후자의 차이점은, 개인적인 생각으로 봤을 때 개별 곡으로는 후자의 앨범들이 좀 더 인상적이었다는 것이다. ('뭐 할래요', 'Super Sonic' 같은 곡들이 여러모로 듣기 좋았다.) 하지만 개성이 조금 뒤지더라도 한 장의 CD를 끝까지 자연스럽게 듣게 만드는 것은 전자 쪽이었다. 그리고 난 그런 걸 더 좋아한다. 

 


알고 보면 <이게 무슨 일이야> 때부터 B1A4는 전체적으로 어둠이 드리워진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 <이게 무슨 일이야> 앨범 리뷰)  물론 그 조짐은 <In The Wind> 부터 보이긴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이게 무슨 일이야>의 다섯곡은 모두 어둡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활용하는 방법이 다채로웠을 뿐이다. 슬프거나 우울한 이야기인데 그걸 마냥 발라드 대신 댄스 음악으로 풀어낸다거나 하는 부분들 말이다.



정규 2집인 <Who Am I>는 소재와 방법 모두가 전보다 더 가라앉아 있다. 심지어 한 곡을 제외하고는 앨범에서 밝은 곡 마저도 일반적인 아이돌 음악처럼 빠른 템포를 갖고 있지 않으며, 언제부터인가 다들 유행처럼 계~속 쓰고 있는 덥스텝, 혹은 수액 찾는 걸걸한 외침마저도 들을 수 없다. 굳이 대세를 따라야 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앨범은 좋다. 

 


사실 <Who Am I> 에서 제일 좋지 않은 부분은 내가 보기에 다름 아닌 현재 그들이 타이틀곡으로 밀고 있는 곡들이다. 9번 트랙인 'Who Am I' 라든가, 11번 트랙, '길' 같은 곡이 그렇다. 전자는 B1A4 멤버인 정진영, 차선우와 작사, 작곡가인 좋은놈 (활동하는 이름이 이렇다.) 이 만든 곡이며, 후자는 <이게 무슨 일이야>의 3번 트랙인 'Yesterday' 를 만든 이기, 용배의 곡이다. 사실 좋지 않게 보는 부분들은 어떻게 보자면 별 것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어떤 형태로든 창의적인 (...요새는 '창조'라는 표현을 어떤 분이 독점하듯 쓰고 계시는데, 사실 다른 사람들에게 이 표현을 사용하자니 어째 모욕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못 쓰겠다.)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들에게서 다른 무언가의 기시감이 느껴지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편인데, 두 곡은 자꾸 다른 가수와 비교를 하게 된다는 점에서다.  

 


'Who Am I' 는 막상 들으면 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앨범 전체를 봤을 때 다소 겉돈다는 인상을 준다. 위에서 언급했던 '콘서트 때 앙코르 곡으로 쓰려고 만든 곡' 같다는 느낌을 준달까? '길'은 예전의 GOD가 불렀던 '촛불 하나' 같은 곡을 연상케 한다. 끝없이 애잔한 향수와 긍정적인 가사, 멜로디는 듣기 좋지만 이런 곡은 아이돌이 가진 외적인 이미지를 철저하게 요구하고 또 이용하는 곡이기도 하다. 아이돌은 곧 10대들의 우상이자 성인이 된 사람들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한 없이 투명에 가까운 맑은 이미지를 보는 느낌을 주니 이 어찌 유익하지 않겠냐만은, 이미 아이돌 포화상태라고 불리는 현실에서 '길' 같은 곡을 소화할 수 있는 아이돌 그룹은 차고 넘치는 것 같다. '길' 에게 이런 잣대를 들이댄다면 'Who Am I' 를 두고 아이돌이 콘서트를 고려한 곡도 못 만드냐고 되물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B1A4는 자신들의 보컬이나 보여지는 이미지 만큼, 하나의 곡을 만들기 위해 사용된 악기들의 멜로디를 청자에게 많이 각인시키는 드문 아이돌 그룹이다. 그리고 이번 앨범에서 주가 되는 것은 'Who Am I'의 록킹한 기타 리프가 아니라 소울과 디스코 시대를 거치는 듯한 리듬 기타의 리프다. 그렇게 볼 때 'Who Am I'는 다소 동떨어진 느낌을 준다. 뭐, 모든 곡들이 다 좋길 바라는 것도 욕심이고 나 말고 다른 팬들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 더불어 '길' 을 부르면서 B1A4는 SM 엔터테인먼트의 엑소를 연상케 하는 교복 의상을 입고 노래를 부른다. 엑소가 교복 패션을 고수하는 것은 코카콜라가 산타 클로스와 북극곰을 자기네 회사 마스코트로 삼은 것처럼 영악한 결정이라 할 수 있다. 이건 뭐 딱히 저작권자가 있다고도 볼 수 없고, 먼저 입고 나와서 인상적인 이미지를 심어주면 그만이거든. 근데 얘들은 '으르렁' 뮤직 비디오로 이미 뭔가 터뜨려 버렸어.  

 

사실 'Lonely' 부를 때 입고 나온 그 회색 의상이 적절해 보이는데 왜 굳이 '길' 을 부르면서 교복에 가까운 의상을 입고 나오는지 좀 의문이다. 이미 그거 입고 하는 보이 밴드가 있는 마당에.. 일종의 레퍼런스를 참조함으로서 이미지를 심어주는 방식일 수 있는데, 사실 신동우가 본격적으로 안경을 쓰지 않고 활동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B1A4는 자신들의 특색을 충분히 드러냈다고 봐서 말이다. * 

 

 

아쉬움을 우선적으로 이야기 했는데, 위에서 언급한 그런 요인들을 제외한다면 이번 앨범은 정규 1집보다 충분히 좋다. 그리고 EP 앨범에서 보여줬던 일관된 정서와 응축력을 12곡이 있는 정규 앨범으로 잘 가지고 왔다. 앨범의 다른 곡들에서 일단 특기해 둘만한 부분은 멤버들의 솔로로 채운 트랙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고, 점점 음악에 직접 손을 대는 멤버들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지점에 신경쓰는 앨범을 좋아한다. 아이돌도 허용되는 범위 안에서 자기 입을 옷은 스스로 만들거나 골라야 하기 때문이다. 근데 이걸 하려면 멤버 별로 어느 정도 인지도를 쌓아야 결심이 선다. 이제 때가 된 셈이다.  

 


참고로 이전 앨범들에서 작사나 작곡 쪽에 주로 눈에 띄는 멤버는 차선우와 (당연히) 언제나 스스로 곡을 만드는 정진영이었는데, 이번 앨범에서는 신동우도 작사와 작곡에 뛰어들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좋다. 10번 트랙인 '음악에 취해' 는 신동우의 솔로곡인데, 더불어 마이클 잭슨에 대한 오마주를 담았다고도 한다. 작사로 따지면 8번 트랙인 '예뻐'를 포함해야 하겠지만 멜로디를 만드는 작곡으로 따졌을 때 신동우가 만든 곡은 공동작곡한 10번 트랙과 12번 트랙인 'Seoul' 이다. 



비교적 복잡한 음악적 구성을 띄고 있는 정진영과 다르게 철저하게 박자감 넘치는 곡을 만드는데 모든 걸 쏟아 부었다는 인상을 주는데, 그는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분야를 충분히 잘 해내고 있다. <Who Am I> 라는 앨범에 어떤 시대적 감흥마저 안겨주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이며 펑키한 디스코, 혹은 소울 음악에 대한 나름대로의 일가견이 분명 있다. 그가 보여줄 다른 작업물도 기대된다. 7번 트랙인 '벅차'의 경우에는 일종의 팬 서비스 같다는 생각이 든다. 참신하진 않지만 딱히 모난 것 없이 안전하다.  

 


사실 들으면서 놀라게 되는 건 B1A4의 막내인 공찬식이 제대로 자신의 보컬 실력을 들려줄 수 있는 기회가 잘 없었다는 것이다. ...이건 개인적으로도 들으면서 문득으로라도 의문을 갖지 못했던 부분이라 많이 놀랐다. 그러고 보면 얘들도 이제 데뷔한지 3년이 다 돼 가는데. 그 때문인지 '벅차' 에서 메인 보컬인 이정환과 같이 노래를 부른다. 



정환 역시 1집인 <Ignition>에서 솔로로 불렀던 '짝사랑'을 제외하면 솔로 무대는 콘서트를 제외하고 주로 KBS의 <불후의 명곡>에서 한풀이 하고 있었다. '벅차'는 듣기 좋게 현악을 이용한 발라드 곡으로 무엇보다 두 멤버의 역량을 펼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청자로 하여금 본격적으로 공찬식의 보컬 실력을 평가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내가 들을 때는 별 문제 없어 보인다. 보컬의 개성이 아직 두드러지지는 못하다는 느낌이 든 것이 아쉬운 점이랄까.  

 


아쉬운 곡이 두어개 있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Who Am I>는 모범적인 아이돌 앨범이다. 개인적으로 취향에 맞는 아이돌 앨범이 보이 밴드에게서만 유독 많이 나오는 듯하여 걸 그룹은 어떡하나 싶을 정도인데, B1A4의 이 앨범이 지난 번 EP 앨범인 <이게 무슨 일이야>와 더불어 중히 여겨져야 하는 이유는 외부의 기획자들이 아닌 아이돌 멤버가 스스로 자신들의 상품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에서다. 



육체성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퍼포머에 머무르지 않고, 이 종이돌은 점점 '음악적으로' 장인의 행보를 시작하려 하고 있다. 패션이나 무대 구성에 신경 쓰는 것도 좋지만, 정작 음악적 퀄리티를 등한시 한다면 포화 상태라고 불리는 아이돌 판도에서 어떻게 살아남겠는가. 남는 건 형형색색의 의상과 헤어스타일도, 외모도 아닌 결국 곡 자체다. 양희은의 말 마따나 노래에겐 각각의 운명이 있다. B1A4의 노래들은 현재까지는 비교적 다른 아이돌들의 곡보다는 오래 갈 것 같다.


아. 마지막으로 한 곡만 더 이야기 해야겠다. 현재까지 '길'과 더불어 방송용으로 활동할 때 부르는 타이틀곡인 'Lonely' 가 그것이다. 이걸 언급 못 했네. 여튼, 들으면서 좀 많이 놀랐다. 곡 자체는 사실 내가 현재도 잘 적응하지 못하는 R&B 스타일의 곡이다. 그리고 1번 트랙이자 경음악인 'Intro - Prologue' 는 3번 트랙에서 피처링한 하림의 하모니카 덕을 톡톡히 보려 하는구나 싶었다. 상황을 주도하는 것이 전체적인 멜로디가 아니라 하림의 연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득 그 거부감을 억누르고 끝까지 듣게 만드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정진영이 쓴 한숨과도 같은 절묘한 가사에서였다. '함께 밥을 먹으려 해도 네가 없구나 / 같이 영활 보려고 해도 네가 없구나 / 우린 아무것도 없구나 정말 아무것도 없구나' ...란 부분.  

 


함께 밥 먹고 영화 본다는 것은 남녀상열지사의 기본이 된 것도 모자라 아주 관성으로 거듭났다. 그래서 이젠 정말 지겹지 않나 할 수준인지라 곡 가사에서까지 들어야 하나 싶기도 하지만, 앞의 두 대목이 '우린 아무것도 없구나 정말 아무것도 없구나'로 완결될 때 거기엔 우리가 실제의 세상에서 알고 있지만 외면해 왔던 텅 빈 구덩이 같은 게 있었음을, 혹은 반으로 나눠져 버린 큰 다리 (bridge) 가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런 걸 굳이 드러내는 것은 어쩌면 아이돌에겐 금기가 아닐까. 잘못 드러내도 어설픈 치기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위의 가사를 쓰는 것만으로도 B1A4는 자신들의 보이는 대로의 이미지를 유지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챈 듯 보인다. 이게 우연의 결과로 튀어나온 것인지는 모르겠다. 헌데 일단은 솜털 보송보송한 귀여운 주먹으로 살짝 건드린 것이 날카로운 얼음파편이 되어 심장에 박힌 것마냥 꽤 찌릿하다. 이런 가사쓰기를 아이돌의 음악에서 들은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적어도 내 기억에는 말이지. 

 

 

p.s.1 - 음.. 이 앨범 리뷰를 요약하자면.. 앞으로 '길' 부를 때는 교복 말고 다른 옷을 입고 나왔으면 좋겠다..정도? 뭐, 버..버버리 코트 같은 거? 하아. 근데 또 말 해 놓고 보니 교복을 대체할 것에 대해 생각해보니 딱히 떠오르는 게 없는 게 현실이기도 하네요. 

 

p.s.2 - 앞으로는 앨범 리뷰 본문에 저렇게 소제목을 붙이기로 했습니다.사실 본문에 저렇게 소제목 붙이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좀 꺼림칙해서 하지 않고 있었어요. 뭐랄까요.. 제가 싫어하는 20자평 같은 것을 생각나게 만들어서요. 근데 어떻게 생각해보면 저 제목은 제목일 뿐, 평은 아니고, 뭐라도 갖다 붙여야 사람들이 들어오겠거니 싶어서 저리 해두기로 했습니다. 만화와 영화 리뷰에도 이제 저런 소제목을 붙일 듯 합니다. 뭔가 스스로 피곤해 지는 길에 알아서 들어간다는 느낌이네요.



Lonely 


작곡: 정진영 + 작사: 정진영, 차선우 + 편곡: 정진영, Perfume 


네가 사준 넥타이에 화이트셔츠 

조금 작은 한 동안 안 입던 팬츠

혼자 입고서 난 랄랄라 

혼자 좋아서 난 랄랄라 

 

다시 꺼낸 많이 낡은 스티커 사진 

예전 너와 내가 행복해 웃는 사진 

혼자 보고서 난 랄랄라

혼자 좋아서 난 랄랄라


아직 난 왜 여전히 왜 여기서 왜 이러는지

 

 

내가 다시 전화할게 자기야 no 

내가 잘할게 더 나 때문에 울지 않도록 

나 너무 그리워 

네 눈, 네 코, 네 입술 

 

함께 밥을 먹으려 해도 네가 없구나 

같이 영활 보려고 해도 네가 없구나

우린 아무것도 없구나 정말 아무것도 없구나

every day every say 

너와 함께 거리를 걷는다 걷는다 

다시 함께 걷는다면 

우리 함께 걷는다면(좋겠다) 

 

네가 내게 항상 들려줬던 노래 

이젠 내가 네게 들려주는 노래

혼자 듣고서 난 랄랄라 

혼자 좋아서 난 랄랄라 

 

네가 없는 거리를 걸어보고 네가 없는 차를 타고 

달아나고 달아나도 결국 네게 눈이 먼 바보

날 찾는 사람은 없는 듯 해 

활짝 빛이 나던 네 맘의 창들도 이미 닫힌 듯 해(hey) 

 

함께 밥을 먹으려 해도 네가 없구나 

같이 영활 보려고 해도 네가 없구나

우린 아무것도 없구나 

정말 아무것도 없구나 

 

every day every say 

너와 함께 거리를 걷는다 걷는다 

다시 함께 걷는다면

우리 함께 걷는다면 

 

아직 난 왜 여전히 왜 

여기서 왜 이러는지  

 

연기처럼 흩날리는 기억 you're right girl 

나는 많이 아파 sick my heart 

 

우리에게 절대 없을 거 라던 이별 

몰래 날 찾아왔다가 이렇게 너무 쉽게 

사랑은 소리 없이 나를 떠나

 

다시 돌아가려고 해도 네가 없구나 

아무리 불러 봐도 이제 네가 없구나 

우린 아무것도 없구나 

정말 아무것도 없구나 

 

every day every say 

너와 함께 거리를 걷는다 걷는다 

다시 함께 걷는다면 

우리 함께 걷는다면 

 

baby I just wanna spend some time with you

baby I just wanna spend some time with you

baby I just wanna spend some time with you

baby I just wanna spend some time with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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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t.1 에서 이어집니다.)

 


순덕이 죽을 때 그 상황을 지켜 본 두 피난민이 있다. 바로 잠시 동굴에서 나와 그녀를 찾으러 온 만철과 상표라는 청년들이다. 순덕에게 남몰래 애정을 품고 있었던 만철은 그녀의 죽음을 눈앞에서 보고 큰 충격을 받는데, 상표는 보지 못한다. 죽음의 순간이 지나간 이후, 만철이 이 슬픈 감정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오름을 마구 달리는 순간이 있는데 평소 자기 자신을 '말다리' 라고 자부하던 상표는 이게 달리기 시합하자고 하는 건 줄 알고 배시시 웃으며 그를 따라간다. 참혹한 상황에서도 일상에서 장난 치듯이 노는 사람이 있는 건 여전한데, 총격전 시퀀스 다음에 등장하는 이 시퀀스를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제주도의 오름이 순덕의 나체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다음 시퀀스에서는 나무를 보여준 뒤 카메라가 아래로 계속 내려가 동굴 속에 숨어 지슬을 나눠먹으며 잡담을 나누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정확히는 시간의 경과를 나타내는 것이며 오름에서 뛰고 있던 만철과 상표도 앉아 있다.

 

참고로 <지슬>은 대부분의 시퀀스를 실제로 굴 안에서 찍었다. (근데 그 굴이 1992년에 유골, 생필품까지 포함하여 완벽한 보존상태로 발견되어 4.3 관련 현장으로서는 최초로 그 형태가 완벽히 유지된 '다랑쉬굴' 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느 굴인지 얘기가 나왔던 것 같은데..) 그러나 고혁진 프로듀서의 말에 따르면 카메라가 아래로 내려가 굴 속에 앉은 사람들을 보여주는 이 시퀀스를 찍을 때, 여러가지 문제로 실현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 때 감독이 아이디어를 낸 것이 제주대학교에 있는 강당 겸 극장에서 찍어보자는 것이었다. 흑백영상과 조명, 카메라 트릭과 편집으로 적절히 동굴의 분위기가 났는데 이 시퀀스 자체는 참 의미심장한 구석이 있다.

 

여태껏 작품에서는 피난민들이 동굴에 진입할 때 이렇게 지상에서 지하로 하강하는 듯한 분위기로 찍은 적이 없었고, 인물들을 제외한 주위의 모든 것들을 암흑으로 처리해 공간감을 없앤 적도 없었다. 물론 얘기를 듣고 보니 촬영장에서 고안된 즉흥적인 상황이었지만, 그 촬영방식이 본의 아니게 등장인물들을 모두 죽음을 향해 하강시키는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동굴은 곧 그들에게 마련된 무덤이다. 이 와중에 어머니가 걱정된 무동은 아내에게 내일 마을에 내려가 어머니를 다시 모셔 오겠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앞의 두 시퀀스를 총괄하는, 개인적으로는 '세 번째' 라고 규정한 무시무시한 시퀀스가 하나 등장한다. 바로 무동의 어머니가 고 중사를 비롯한 토벌대에게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이다.

 

그녀는 고 중사의 칼에 찔려 죽어가면서도, 그에게 어머니가 있는지를 묻고 (살인귀 같은 고 중사가 자신의 참혹한 과거를 이야기해서 스스로가 '인간' 임을 증명하는 부분이 이 지점이기도 하다.) 집에 불이 날 때 문득 방에 있는 지슬을 본다. 그녀는 혹시 아들이 와서 이걸 가져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지 피를 흘리는 와중에도 소쿠리와 어지럽게 널려 있는 지슬을 향해 기어간다. 다음 쇼트에서 관객이 보게 되는 것은 타 버린 집과 어머니의 시신을 본 무동의 모습이다. 순덕의 죽음과 더불어 이 작품에서 가장 잔혹하게 표현된 시퀀스일 것이다.

 

이 시퀀스 자체적으로 관객의 모든 진을 빼 놓는 무시무시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이걸 본 순간을 잊을 수 없는 것은 내 옆에 앉아 있는 한 여성 관객의 반응 때문이다. 거의 앞자리에서 이 작품을 봤는데 담요 같은 것을 가져와서 무릎에 깔아놓고 보던 여성 관객과 나는 각자 반대 방향의 거의 끝자리에 앉아 있었다. 보고 있는 동안에 극장 좌석이 덜덜덜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뭐 이런가 싶어서 옆을 봤는데 끝자리에 앉아 있던 여성 관객이 고개를 숙이고 담요에 얼굴을 파묻은 채 몸을 웅크리고 덜덜 떨고 있었다. 그 관객이 거의 온 몸을 사용하다시피 하여 흐느끼고 있었다는 걸 아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가 앉은 좌석줄에는 그 관객까지 포함하여 둘만 앉아 있었는데, 끝자리까지 울음의 기운, 그리고 진동이 느껴질 정도로 이 시퀀스가 주는 슬픔은 대단하다.

 

문제는 이 시퀀스가 단순히 슬픔만을 전해주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무동은 어머니의 타버린 시신 밑에 있는 지슬들을 발견한다. 작품은 무동이 자신의 슬픈 감정을 다른 피난민들에게 알리는 방식을 피한다. 피난민들은 무동이 마을 어디에서 지슬을 얻어 왔다고 생각하고, 맛있게 먹으며 작품은 기운 없이 어머니는 잘 계시더라, 결국 오시지 않았다는 표현을 '응' 이라는 딱 하나의 대사로 표현한 뒤, 한참동안 표정을 가린 채 구석에 앉아 있는 무동의 모습을 부각시켜 보여준다.

 

4.3의 참혹함을 잘 알 수 있는 유명한 이야기로 이런 것이 있다. 1948 ~ 1949년의 제주도는 그 해에 감자 농사가 참 잘 되었고 맛도 좋았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감자 하나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아마 제주도에서 키우는 대부분의 농작물들이 그랬을 것이다. 이 이야기의 끝은 그 농작물들이 맛이 좋은 이유다. 땅 속에 묻혀 썩어간 사람들의 시신이 양분이 되었다는 것. 오름의 형상이 여인의 나체로 변하는, 그리고 거대하게 솟아있는 나무를 보여주다 카메라가 땅 속으로 들어가듯 하강하는 것, 그리고 피난민들이 유달리 맛있는 것 같다고 먹는 무동의 지슬들까지. 개별적인 쇼트로 볼 때는 아름답기만한 <지슬>은 시퀀스 별로 합쳐졌을 때 비로소 '끔찍해진다'. 작품은 오름을 비롯하여 흑백으로도 제주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자연물들이 그렇게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것에는 '양분'이 필요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그리고 그 양분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간 것에서 풍요로워졌다는, 끔찍하고 비참한 현실에서부터 생성된 것이다. 작품은 여기서 지슬이라는 것이 가지는 메타포, 그리고 이미지의 비극을 최대치로 끌어올린다. 그리고 그 비극이 영겁처럼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는 듯 또다른 죽음들이 연이어 기다리고 있다.

 

 


* 작품 속에서 토벌대가 벌이는 행각들은 당시에 일어났던 '오라리 방화사건'을 연상케 한다. 오라리 사건은 1948년 4월 30일 낮 12시에 일단의 청년 30명 가량이 오라리 연미 마을에 들어와 12채의 민가를 불태우면서 시작된 사건이다. 서북청년단과 대동청년단은 마을에서 좌익 활동을 한 자를 색출한다고 불을 질렀다. <4.3은 말한다> 2권에서 이와 관련한 당시 15세였고 마을주민이었던 박기찬의 증언이 있다.

 

"대동청년단원들이 몰려온다는 마을 사람들의 소리를 듣고 어머니와 형, 나 셋이서 겁이 나 안방문을 걸어 잠그고 숨을 죽이고 있었는데, 조금 있으니 우리 집 마당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문틈으로 보았더니 손에 몽둥이를 든 수십명의 청년들이 마당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놀랄 틈도 없이 문짝이 와지끈 부서지면서 그 청년들이 방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앞장섰던 사람이 마을에서 대청활동을 하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너희들도 죽이고 싶지만 어리니까 봐준다' 고 씩씩거렸습니다. 장독이고 문짝이고 남김없이 때려 부쉈습니다. 그러곤 초가처마에 불을 놓기 시작하더군요."

 

5월 1일에도 마을에 들어와 폭도를 찾아내겠다며 불을 지르던 이 청년단원들은 그 때 민오름에서 그들을 쫓아 내려오던 무장대를 발견하고 도주한다. 이 때 무장대에 의해 도민 한 사람이 희생당한다. 김규찬이라는 순경의 어머니였다고 하는데, 마을민가가 불타는 모습을 보고 아들을 찾아 그릇, 병아리 등을 담은 구덕을 지고 내려가다 무장대와 마주쳤다고 한다.

 

"..나도 들은 얘기입니다만, 산 사람들이 청년들을 추격하다 돌아오는 길에 한 여인을 만났답니다. 누구냐고 물었더니 그 여인은 그만 '규찬이 순경 어멍 (어머니) 이여' 라고 대답했는데, 그게 화근이 되었다더군요. 총을 든 산 사람들 모습을 보고 경찰이나 우익청년단원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대답을 했던 것 같습니다. 산 사람들이 방화에 대한 분풀이로 일을 저질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때 제주도민들이 그런 일을 당하는 동안, 미군 측에서는 오라리가 방화되는 광경을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들려고 공중에서 항공촬영을 하고 있었다. 제주 4.3 평화기념관에서도 이 작품의 사진과 영상 일부를 볼 수 있는데, 바로 <제주도의 메이데이 (May Day On Cheju-do) 라는 작품이다. 미국 국립 문서 보관소에 보관되어 있었다는 이 작품은 제민일보 측의 주장에 의하면 실제 영상만을 가지고 촬영한 것이 아니라 중간에 자체적으로 연출하여 조작했다는 주장도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작품을 완벽하게 제대로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여기에 관해서 아직까지는 의혹으로 느껴진다. 여하튼 이 작품은 항공기에 일반 카메라와 더불어 3D 입체 상영을 위해 개발된 카메라까지 포함하여 두 대로 동시촬영 했다고 한다.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잔혹한 3D 상영 영화가 아니었을까. 영상으로 4.3의 진행상황과 사건을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자료이기도 하다. *

 

오멸 감독이 언론에 한 말 중 인상깊은 지점이 있다. "이방인이 관광하는 기분으로 착륙하게 될 제주도의 공항 밑바닥에서는 아직까지 4.3 사건 희생자의 시신이 발굴되어 나오고 있고,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리고 활짝 웃으며 사진을 찍는 정방폭포에서는 수도 없는 사람들이 총탄에 쓰러져 갔다." 는 부분이 그것이다. 그 말을 봤을 때 잠시 저 발언을 하는 그의 기분이 어떨지를 상상해 봤었다. 자신이 겪은 일도 아닌데 당시의 비참함을 완벽히 공유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시에 그 비참함에서 조금이나마 자유로운 것이 작품을 이런 방향으로 만들어낼 수 있도록 하는 동력이 됐는지도 모른다. 영화로 만들면 도저히 눈 뜨고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울 법한 소재를 '영화화' 시키는 것, 그리고 직접 경험한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보다는 다소 차분하고 객관에 가까운 시선을 유지한 채로 어디에 원인이 있는지를 지적하는 태도까지. (이 작품은 굉장히 정치적이다. 어디에 원인이 있는지를 명확하게 결론내리고, 그 곳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 지적이 너무나 명확해서, 원인을 한국이라는 토양 안에서 날뛰었던 '좌'와 '우'를 초월할 수 있지 않았던 것인가 싶다. 그리고 이 글의 초반부에서도 언급한 바이지만 유머까지 겸비하고 있다. 대신 초반부의 유머 코드들이 무조건 관객을 웃게 만들자는 목표 하에 구상된 것이었다면, 마지막에 연기를 피우는 시퀀스는 단순히 웃게 만들자는 목표 이상의 것이 보인다.

 

사실 이 부분이, 보면서 많이 기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련의 이야기를 거쳐서 작품이 다다르는 곳은 다름아닌 토벌대가 피난민들의 동굴을 발견하는 지점이다. 윗부분에서 언급한 다랑쉬굴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풀어볼까 하는데, 1992년에 처음 발굴되고 제민일보가 취재하여 세상에 알려진 이 굴 안에서 11명의 사람이 죽었고, 그 유골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동굴 안에서 아사한 것이 아니라 토벌대에 의해 학살된 것이었는데 여기서 주목할만한 지점은 토벌대가 그들을 죽인 방식이다. 처음엔 수류탄을 던졌는데도 효과가 없음을 안 토벌대는 검불로 불을 피운 뒤, 그 연기를 동굴 내부로 풍기게 만든 다음에 입구 부분을 돌로 막아버렸다. 당시 무장대들이 주로 굴에서 생활하며 토벌대와 싸웠기 때문에 그들 입장에서는 '빨갱이들' 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리라. 하지만 그들은 빨갱이가 아니었고, 살해당할까 두려워 산으로 도망쳤던 제주도 구좌읍 종달리, 하도리의 주민들이었다. 그리고 이들 모두 1948년 12월 18일에 토벌대의 작전에 의해 모두 질식사하고 만다.

 

이 다랑쉬굴의 참사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채 모' (구좌읍 종달리에 사는, 92년 당시 67세의 노인이었다. 제민일보 측의 기사에서 이름이 저리 표기된 것인데 아마 본인이 실명 공개를 꺼렸던 것 같다.) 라는 남자였는데, 다랑쉬굴에 있다 혼자 다른 굴로 피신하던 중 좌익 무장대에 의해 포로로 잡히게 된 참이었다. 주민들이 모두 사망했다는 소식은 산 속의 무장대에게도 들렸고, 이틀 뒤에 채 모와 그들은 함께 굴로 시신 수습을 하러 들어갔다. 이틀 뒤 굴의 상황에 관해 채 모는 이렇게 증언했다.

 

"굴 안은 그 때까지도 연기로 가득했는데 시신은 고통을 참지 못해 돌 틈이나 바닥에 머리를 찧은 채 죽어있었고 코와 귀로 피가 나 있었다.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을 보니 가련한 생각에 여기저기 흩어진 시신들을 나란히 눕혀놓고 나왔다."

 

<지슬>에도 똑같은 상황이 등장한다. 그러나 작품은 연기를 토벌대가 아닌 피난민들의 무기로 반전시킨다. 동굴로 피난 올 때 식량으로 삼을 겸 해서 지슬과 말린 고추를 들고 온 피난민들은 토벌대를 쫓아내기 위해 고추를 태워 연기를 동굴 바깥으로 올려 보내는 것이다. 이 연기를 피우는 피난민들도 죽을 맛이지만, 총을 쏘며 진입하려는 토벌대에게도 연기는 상당히 극복하기 어려운 문제다. 앞도 보이지 않지만 눈, 코, 입이 너무 매우니 도저히 못 들어가겠다는 것이지. 나는 이 시퀀스를 생각할 때마다 이상하게 웃기다. 자연스레 화생방이 연상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매운 고추로 성공적인 임기응변을 해낸다는 설정이 웃음을 유발하는 것일지 모른다.

 

물론 이 시퀀스의 기본은 삶을 향한 피난민들의 의지다. 무동은 어쩌면 어머니의 시신을 본 그 지점에서 자살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지슬을 가지고 돌아와 피난민들과 함께 나눠먹는다. 그리고 피난민들은 지금 어떻게든 살겠다고 매운 고추 연기를 피워 토벌하러 온 군인들에게 풍기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군인들 역시 포기할 법도 한데 끝까지 동굴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아등바등이다. 군인들 역시 동굴 안의 피난민들을 폭도라고 생각하고 있고, 또 그렇게 생각해야만 죽일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그들이 산다. 서로 이유는 정반대지만 살고자 하는 의지는 똑같다. 작품은 그래서 이상한 희극적 감흥을 느끼게 하면서 바라보게 만들다 관객을 한숨짓게 만든다. 서로가 살고자 하는 의지는 같은데, 왜 귀결되는 지점은 다를까. 왜 서로 다툴 필요가 없는데도 이렇게 만들어야 할까.

 

문득 4.3 평화박물관에 갔을 때 했던 질문이 떠올랐다. 그 곳에는 90년대에 제작된 4.3 관련 TV 다큐멘터리를 상영하는 내부 상영관이 있었고, 거기서 그 작품을 봤었다. 그런데 보던 도중에 내가 굉장히 경악했던 지점이 있었다. 바로 다큐멘터리가 서북청년단에 몸을 담았던 노인을 인터뷰한 것이다. '주제에' 인권보호랍시고 모자이크, 음성변조 처리까지 된 그 남자는 의자에 팔을 괴고 학살의 기억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상영관을 나와서 다른 공간으로 이동할 때, 나는 박물관 관계자에게 다가가 넌지시 질문해 봤다. 아까 그 다큐멘터리에서 인터뷰했던 서북청년단 출신의 노인이 법적인 심판을 받았느냐고. 박물관 관계자는 표정의 변화를 일으키지 않은 채 대답했다. 아니요. 제가 듣기로는 어떤 처벌도 받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어요. 나는 다시 반문했다. 저 사람 아직 살아 있으면 처벌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관계자 분이 다시 대답했다. 약간은 분노인지 냉소인지 모를 느낌이 담겨져 있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그렇겠죠? 하지만 지금도 살아있는지는 의문이고, 4.3에 관해서 책임을 묻고자 노력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어떤 태도로 말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자기가 했던 짓을 저렇게 이야기 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나름대로 의미 있는 거에요. 끝까지 하지 않았다고 발뺌 하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저 노인은 그냥 만든 사람들이 저 사람에게 기대했던 만큼의 역할은 한 거에요.

 

 

* 오라리 마을에 불을 질렀던 우익단체 대동청년단 단원 중 한 명은 나중에 마을 사람들의 증언에 따라 제민일보가 조사하여 제주도 시내에서 만나게 된다. <4.3은 말한다> 2권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박 아무개' 라는 이름의 사내인데, 인터뷰에 응해놓고도 자신은 오라리 마을에 불을 지르지 않았다고 부인하다가 이후에 한 번 더 이뤄진 두번째 인터뷰에서 한 기자가 목격자들이 대질증언을 할 용의가 있다고 하자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다면 그렇게 했다고 합시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5월 1일에 방화 사건에 참여했던 박 아무개는 오라리를 직접 조사하고, 우익청년단의 방화혐의가 분명하다고 판단내린 김익렬 연대장의 지시로 검거되어 제주 모슬포 연대본부 영창에 감금된다. 그런데 그는 미군정에 있는 딘 (Dean) 소장의 명령으로 제주로 온 박진경 중령이라는 사람에 의해 감금된지 22일만에 풀려나게 된다. 풀려나자 바로 오라리 주민들의 반발에 부닥친 제주 수뇌부 측은 다시 박 아무개를 연행하는데, 이번에는 제주 경찰서 유치장에 집어넣고 38일 동안 감금시킨다. 박 아무개는 제민일보 취재진에게 '거기서 특별대우를 받으며 지냈다' 고 증언했고, 이후 1948년 9월 15일에 직접 경찰학교 제 9 기생으로 입교한 뒤에 경찰복을 입고 '4.3 진압' 에 뛰어 들었다고 한다. *

 

작품은 어쩌면 마지막 순간만큼은 피난민들이 '같은 사람'에게 총살 당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런지도 모른다. 피난민들은 경준의 기지로 살아남고, 도망치는데 성공한다. 작품은 카메라로 집요하게 피난민들의 마지막을 쫓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고추 연기를 피우는 시퀀스에서 쓸데없이 오지랖을 발휘하는 건 아니다. (나만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이해는 한다만 개인적으로는 박 일병과 김 이병을 제외하고는 군인들에게 큰 정이 가지는 않는다. 이건 정말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지슬>은 어떤 지점에서 <설문대 할망과 오백장군> 설화의 일부를 차용하여 섬뜩한 마무리를 짓는다. '영화' 이고, 선과 악의 입장을 가를 필요성도 어느 정도 존재하기 때문에 그건 사실 이 작품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리는 강렬한 심판인 셈이다.

 

이 끄적임의 중반부 쯤에서 챕터 얘기를 한 적이 있는데, <지슬>은 네 개의 챕터로 나눠진 작품이고 그것에 모두 신위, 신묘, 음복, 소지라는 제목이 붙여져 있다. 참고로 이것은 제사의 절차를 표현한 것인데, 거기에 딱히 연관성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아마 <설문대 할망과 오백장군> 설화에서 등장한 묘사가 일부가 활용된 것처럼, 제주의 문화적 요소를 반영하고자 하는 의도일 수 있다. 동시에 이렇게도 보인다. 4.3 은 시간적인 개념으로 보자면 분명 지나간 '과거의 역사' 이기 때문에 이것을 설명하는 방법 역시 과거의 요소를 통해 시도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라고. 자신의 어머니가 가마솥에 빠진 줄도 모르고 그녀의 고기가 든 국을 맛있게 먹는 오백명의 아들들, 그리고 제사를 지낼 때 거치는 절차를 표현한 단어들...

 

 

 

과거는 흔히 아름다운 추억, 혹은 전통으로 미화되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어둡고 참혹한 표현을 할 때 활용될 수 있는 단어이기도 하다. 작품은 그렇게 4월 3일이라는 날이 쉽게 폭동, 항쟁 등이란 표현을 붙일 수 없는 것이라 이야기한다. 폭동, 혹은 항쟁이라는 표현을 통해 영광을 얻고 가슴 뛰며, 세속적인 이득을 얻는 사람들은 지극히 한정되어져 있기 때문이다. 굳이 연관성이 많지 않더라도 4월 3일이라는 날과, 제사 절차에 관련된 이런 '과거의 단어' 가 교과서에서 보고 단순히 외우면 끝나는 차원에서 다뤄지지 않아야 핟고, 그리고 그 단어들은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작품은 이야기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과거의 단어는 인터넷 상에서, 혹은 단순한 숫자를 넘어서는 끔찍하고 지독한 어둠을 품고 있다. 가마솥 안의 존재는 그 어둠을 가벼운 것으로 얕봤다가 결국 벌을 받는 것이리라. <지슬>은 그 시퀀스를 통해 우리가 마주보는 역사를 절대 가벼운 여흥거리로 받아들이지 말라고 경고한다.

 

 

작품 속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모든 자리에 제방이 놓여져 있고, 그것이 타오르는 마지막 시퀀스가 놀라운 것은 그 때문이다. <지슬>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피난민과 군인 모두 가리지 않고 모든 시신 앞에 제방이 놓여져 있고 그것이 불탄다. (GV에서 고혁진 프로듀서가 했던 말에 따르면, 저 지방에 적혀진 글들은 모두 해당 인물들에 맞춰서 일일이 다르게 쓴 것이라고 한다. 안타깝게도 난 한자 까막눈이라 뭔 말인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방에 보통 어떤 말이 쓰여져 있는지를 알기 때문에 대충 예상은 된다.) 놀라운 건 제주의 입장을 대변할 법한 이 작품이 '모두'가 안식에 들 수 있기를 기원할 때, 그런 감정상태에 이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증오와 원한을 오랜 시간동안 생각하여 납득하고 이해했을까 하는 점이다. 현실세계에서 그런 용서는 보통 상대방보다 내가 얼마나 더 큰 그릇을 가진 인간인지를 과시하기 위해서 쓰이는 것이다. 정말로 자신이 걸어온 길을 반추하고 사색하며 증오할 법한 이를 이해하고 용서하는 단계는 쉽지 않다.

 

하지만 <지슬>은 그걸 해낸다. 가해자라고 생각되는 이들까지도. 이제는 그들 모두가 죽었기 때문에. 이 작품이 현실의 나보다 마음 씀씀이가 훨씬 넓다. 하지만 작품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작품은 관객에게 각오를 다지라고 부탁한다. 이것은 '영화' 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현실에선 이렇게 '1시간 48분만에' 65년 전의 기억을 말끔히 해결할 수 없다고, 위로할 수도 없을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그러니 당신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사유하라고. 과거의 일에 묶여있는 영혼들은 지방과 함께 멀리멀리 안식을 취하러 떠날 것이니, 그들이 떠남으로 인해 남겨진 고통의 기억을 나눠받고 현재에서 생각하라고 말한다.

 

영화는 기록매체다. 40년대에 일어난 4.3을 본격적으로 다룬 작품이 2012년에야 만들어 졌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들이 필름에 담겨짐으로 인해 <지슬>은 '과거'가 되었다. 이 작품이 우리에게 주는 최소한의 의의는, 앞으로 이 작품을 생각할 때 적어도 절대로 가볍게 생각하지는 못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아마 직접적인 장소를 거론하자면 정방폭포일런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그게 영화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최대의 의의이기도 하다. 결국 무언가를 바꿔야 하는 것은 영화가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이다. 작품은 그런 사람에게 무언가를 일깨워준다.

 

2011년의 나는 그렇게 4.3 평화박물관 문을 열고 길을 나섰다. 그리고 2013년의 나는 대구 동성아트홀 극장문을 열고 길을 나섰다.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어이그, 저 귓것>이나 <뽕똘> 같은 유머러스한 느낌의 작품을 만드는 오멸 감독이 조금 더 좋지만, <지슬>이 굉장한 걸작이라는 것에는 동의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이 작품은 지금보다 더 많이 이야기 되어져야 한다. 완성도의 출중함이야 두 말 할 것 없고, 1948년 4월 3일부터 시작됐던 어느 날들을 이야기하고, 그것에 관해 최소한 지방이라도 태우는 것을 극영화적 영상으로 보여주기 위해 이만큼의 시간이 걸렸다는 것을 체감시키기 위해서라도...이 작품은 많이 이야기 되어져야만 한다.


 

 

 * <4.3은 말한다> 2권에서 발췌한 부분. 미 군정장관 딘 (Dean) 소장이 제주에서 군정 당국 수뇌회의를 주재하고 떠나간 다음 날, 평화정책을 계획하고 추진해 왔던 김익렬 연대장이 해임된다. 그리고 박 아무개를 풀어줬었던 박진경 중령이 연대장 자리를 맡게 된다. 박진경 중령은 영어에 능통하여 딘 소장의 총애를 받던 사람이었으며,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군 소위로 제주도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었다고 한다. 취임한 지 한 달 뒤, 박진경 중령은 토벌작전의 공로를 인정받아서 대령으로 고속 승진했고 나중에 강공 토벌정책에 반기를 든 부하의 손에 의해 암살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김익렬 전 9연대장은 자신의 유고인 <4.3의 진실>에서 박진경 중령이 연대장 취임식날에 했던 연설을 정확히 기억하여 적어놓고 있다. '그는 우리나라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도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라도 독립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이것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 다시 말해서 초토작전을 감행하겠다는 의지의 발표였다.'

 

다시 <4.3은 말한다>로 돌아가서, 미 군정이 박진경 중령을 연대장으로 취임시킨 것은 4.3을 무력 진압으로 해결하겠다고 선언한 것과 마찬가지 였다고 한다. 이 때 딘 소장의 관심사이자 받은 명령은 4.3을 어떤 방식으로든 최단기로 진정시켜서 5.10 선거를 무사히 치르게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주도민들은 군정의 강압정책에 반발해서 선거를 단체로 보이콧 했다. 조병옥 경무부장은 이것을 보고 설득을 하기는 커녕 경찰전문학교 정예부대를 제주도에 들어오게 해 무력 진압 하겠다는 의지를 굳건히 했으며, 또 상당수의 제주도민들이 산으로 피신했다.

 

마침내 5월 10일이 되어 처음으로 대한민국에서 제헌국회를 구성하기 위한 첫 선거가 열렸고, 두산백과에 따르면 무소속이 85명(42.5%), 대한독립촉성국민회 55명(27.5%), 한국민주당 29명(14.5%), 대동청년단 12명(6%), 조선민족청년단 6명(3%), 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 2명, 대한노동총연맹 1명, 교육협회 1명, 단민회(檀民會) 1명, 대성회(大成會) 1명, 전도회 1명, 민족통일본부 1명, 조선공화당 1명, 부산 15구락부 1명이 당선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제헌국회 의장에는 이승만, 부의장에는 신익희가 당선된다. 마지막으로 7월 10일, 이승만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되었고 1948년에 시작된 4.3은 1954년에 끝이 난다.

 

 

1992년 3월 말에 발굴되어 4월 15일에 굴에서 꺼내졌던 다랑쉬 굴의 희생자들은 그 날 새벽 6시에 유족들이 도착하자마자 이미 수습되어져 있었다. 읍장과 구좌읍 이장단, 유족들 80명이 참관한 가운데 장례식을 치룬 뒤, 유골들은 모두 오전 7시에 화장장으로 이동해 화장된 뒤 바다에 수장됐다. 행정당국 측에서는 "매장을 권유함에도 불구하고 유족들이 한사코 화장을 주장했다." 라고 공식 발표를 했지만, 실제로 유족들은 44년만에 기적적으로 찾은 유골인데 뼛가루의 11분의 1이라도 가져가겠다고 격렬하게 이야기 했다. 그러다 마침내 화장에 동의하게 된 유족들은 그 이유에 관해서 이렇게 설명했다.

 

"지금껏 억눌러 참아왔는데, 매장할 경우에 누가 똥 싸고 오줌 싸고 돌멩이를 던질 것 같아서요.
 그래서 화장에 동의했습니다." *


p.s.1 -  고혁진 프로듀서님과의 GV에서 몇 가지 질문을 했었는데, 그 중 궁금한 것이 과연 이 작품이 '미국' 선댄스 영화제에 출품됐을 때 현지 관객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대한 답변입니다.

 

"선댄스에서의 반응은 좋은 편이었습니다. 선댄스는 작품을 고를 때 테크닉에 대한 기준도 많이 두는 편이었는데, <지슬>은 미학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특히 5~60대 관객이 많았고, 그 분들이 눈물을 흘리시면서 이런 영화를 만들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도 해 주셨어요. 그리고 작품을 보셨으니 아시겠지만 마지막 자막에 미 군정이 핵심 배후에 있다고 써 놨었죠. 그런데 그것에 관해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선댄스에서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 분들이 '그 시대의 우리나라라면 분명 그럴 수 있겠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계시더라구요."

 

p.s.2 - 아마 어떤 분들은 보셨겠지만, <어이그, 저 귓것>, <뽕똘>과 <지슬> 사이에는 <이어도> 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4.3에 관한 이야기입니다만 극장 개봉을 하지 않았죠. 오멸 감독님이 원치 않았다는군요. 현재 극장 개봉 외의 방법으로 관객과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준비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p.s.3 - <지슬> 에는 부제가 달려 있습니다. '끝나지 않은 세월 2' 라는 것이죠. 지금은 고인이 된 김경률 감독님의 작품 중에 <끝나지 않은 세월> 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이 당시 오멸 감독님도 제작에 참여 했었다는데, 의견차이로 도중에 나왔다고 하더군요. 오멸 감독님이 4.3을 다루게 됐을 때, 이 소재를 결국 영화로 옮길 수 있게 된 것에는 김경률 감독님이 준 영향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슬>의 '제작총지휘' 에는 김경률 감독님의 이름이 들어가 있습니다.

 

p.s.4 - 이렇게 끄적인 리뷰가 4.3 의 희생자 분들께 미약하게나마 위로가 되었으면 합니다. ...아니.. 이거 적다가 몸살기가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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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 많아요.
 뭐가?
스포일러가.

근데 이 작품에다 스포일러란 표현을 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

 


감독: 오멸
주연: 양정원, 이경준, 성민철, 홍상표, 문석범, 박순동, 강희, 김동호, 김순덕, 조은, 어성욱, 백종환
음악: 전송이, 서지선
촬영: 양정훈
12세 관람가 / Black & White / 108분

 

....


제주도의 군부대도 4월 3일이 되면 4.3 박물관에 견학을 간다. 다른 군부대도 모두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내가 소속되어 있었던 군부대는 그랬다는 얘기다. 내가 본 비 오는 날 제주도의 날씨는 대부분이 안개가 자욱하게 껴서 거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공문이 날아오고, 대략적인 인원들을 꼽아서 가던 그 날도 안개가 자욱했다. 정확한 이름은 4.3 평화기념관.. 버스에서 내리면 그럭저럭 거리감이 느껴지는 길을 걸어가야 한다. 생각해보니 그 때 한 번 가보고는 못 가봤기 때문에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왜냐면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으니까. 참으로 몽환적인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태어난 포항도 가끔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안개가 끼는 경우가 있다. 고등학생 때, 통학버스비를 내지 않고 일부러 한 학기 정도는 학교에 걸어서 간 적이 있었는데, 내 발걸음의 속도로 그 곳까지는 대략 40분 가까이 걸렸다. 그 때는 맞은 편 건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안개가 껴도 별로 개의치 않았다. 난 안개를 좋아한다. 스스로 알 수 없이 내 한 몸 다 가려지는, 그것에 묻혀진다고 생각할 때의 인상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주도의 안개는 달랐다. 마침 내가 제주도에 발령 온 지도 얼마 되지 않았을 시점이기에 더 그렇지만, 그 곳은 낯선 공간이었다. 곳곳에서 까마귀 소리가 들리고 산 에 위치한 안개 속에 싸인 평화기념관을 향해 걸어가는 경험은 특별하다. 목적지는 저기 있는데, 거기까지 도달하는 길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나는 길을 잃은 채 그저 똑바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게 희한하다. 육지도 아닌 섬에서 길을 잃는다는 것이. 육지도 끝이 있지만, 동시에 끝없이 이어져 있기도 하다. 길을 잃으면 이 두 발로 새로운 길을 만들면 된다.
 
 


 
하지만 섬은 공간이 한정되어 있다. 벗어날 수 없다. 섬에서 길을 잃는다는 건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이야기다. 그게 더 막막하다. 너무나 벗어나고 싶은데, '새로운 길로 가는 길을 잃어버리면 원래 도망쳐 왔던 길로 다시 되돌아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섬의 한계이자 동시에 정의다. 4.3을 아는 것, 혹은 오멸 감독의 <지슬>을 보는 것은 결국 당사자들에게는 숙명으로, 상관 없는 후대의 사람들에게는 의도치 않은 원죄처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내게 그 박물관과 작품은 원죄처럼 보였다. 박물관은 고요했고 <지슬>의 도입부 역시 파도가 치는 시퀀스를 제외하면 고요하다. 무채색의 컨셉으로 내부가 디자인 되어졌던 박물관, 그리고 흑백으로 찍힌 작품... 컬러의 세상은 우리에게 몰입하라 강요하지만 흑백같은 단색조들은 굳이 강요하지 않아도 우리가 알아서 몰입하게 만든다. 각각의 색깔을 가지고 있고, 개성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던 세상의 모든 사물들이 검은색, 흰색, 회색으로만 보이기 때문이다. 색깔이 비슷하다고 한 덩어리로 보여 별 것 아닌 듯 치부하다 중요한 것들을 놓치기 전에 관객은 필사적으로 몰입해야만 하는 것이다.
 
<지슬>의 처음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자연적인 것들' 이다. 일종의 '전운' 같은 느낌이랄까? 회색빛 구름이 드리워진 공중 쇼트를 보여준 뒤에 작품은 제주도의 어느 한 민가에 어지럽게 널려있는 제사용 그릇들을 보여준다. 그 전에는 이미 '빨갱이 토벌대'로 온 군인들이 민가에다 불을 질러 그 주변을 폐허로 만든 뒤다. 군인들을 이끄는 수장인 김 상사가 어질러진 제사 그릇들을 발로 차며 문을 열자 그와 함께 온 군인인 고 중사가 칼을 다듬고 있다. 김 상사가 제사음식으로 쓰려는 것을 가져온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배를 꺼내더니, 그의 칼을 얻어 깎고는 서로 나눠 먹고 웃음 짓는다. 과일 한 쪽도 나눠먹는 선진병영 환경에서의 군인들의 우정이라며 국방부가 홍보 영상으로 쓸 법도 하지만 사실 이 쇼트는 굉장히 끔찍하다. 왜냐면 뒤에 웬 머리 긴 여자가 사다코 마냥 몸이 반쯤 가구 안에 걸쳐진 채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처음 이 쇼트를 마주했을 때, 그리 끔찍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건 아마도 감독이 구상했을 이 쇼트의 연출이 영화적으로 감정을 증폭시킨다기 보다 연극을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을 들게 만들어서였던 것 같다. 그래서 반응이 조금 늦게 왔다. 아. 저게 여자의 시신이구나.. 지금 저 군인이 사람을 죽인 것이구나.. 생각해보면 나를 포함한 관객들은 <지슬>에서 앞으로 벌어질 '4.3 학살'의 첫 순간을 본 셈이다. 이런 역사적 사건은 사실 리얼하게 그 시대를 묘사하는 것이 관건일 것이다. 그러나 작품은 첫 순간을 다큐멘터리적이지 않고, 의외로 양식적인 연출로 묘사한다. 막 드러내는 것은 아니지만 배경처럼 자리 잡아 있는 여인의 시신, 그녀의 시신이 담겨진 가구, 그녀의 푹 숙여진 머리를 가운데 놓고 양 옆에 선 두 군인이 사람을 죽인 칼로 배를 깎아 나눠먹으며 웃는 모습까지.. 구도를 비롯한 전체적인 조형에 신경을 쓴 것이 상당히 미학적이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작품은 도입부를 통해 <지슬>을 어떻게 이끌고 갈 것인지를 관객에게 조심스럽게 이야기한다.
 
 


 
* 4.3 은 4월 3일 새벽에 제주 남로당 무장대들이 제주대 내의 12개 지서와 우익단체들을 공격했다고 정의되어져 있고, 또 그것이 맞지만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처음 불안감이 조성됐던 것은 1947년에 일어난 3.1절 발포 사건 때문이었다. 제민일보 취재반이 지은 <4.3은 말한다> 1권에 따르면 당시 3.1 절 기념집회 도중 기마경관이 아이를 쳤다고 한다. 일부러라기 보다는 아마도 타고 있던 말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해서 생겼던 일 같은데, 아이가 치었으니 성난 군중들이 그 기마경관에게 돌을 던졌다.

 

그런데 여기서 경찰 측이 경찰서를 습격한다고 오인하고 제주도민들에게 발포를 하게 된다. 당시 집회에 시위대는 없었고 200여명 가량의 관람객들만 있었는데, 그 중 6명이 발포에 사망하고 만다. 경찰과 미군정은 민심수습을 하려 들지 않고 경찰서 습격을 근거로 내세우며 집회 관련자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다. 당시 이것을 지켜보고 있던 남로당 제주위원회 측은 악화된 민심의 흐름을 반 경찰 / 군정 활동에 이용하여 3월 10일부터 제주도청을 필두로 민관총파업을 유도해서 돌입하기에 이른다.

 

여기서 내가 가졌던 궁금증 하나는, 제주도에 공산주의 세력이 있는데 왜 그것을 애초부터 무너뜨리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4.3은 말한다> 에서 제민일보 취재반과 인터뷰를 가졌던 남로당 연구 전문가 김남식의 말에 따르면, 당시에는 남로당원이라는 이유만으로 구금되거나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왜냐면 당시에 남로당은 군정청에 합법정당으로 등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6.25가 일어나기 전이고, 일본으로부터 해방됐지만, 친일파들이 처벌받지 않고 그대로 공직에서 일을 하고 있었으니 뭔가 불가능했던 것도 아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남로당 제주도당은 4.3을 일으켰다. 군경의 초토화작전에 의해 엄청나게 큰 인명피해가 날 것이라는 점을 상상하지 못했겠지만, 고립된 지역인 제주도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킨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역사문제연구소가 기획하고 서중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가 지은 <이승만과 제1공화국: 해방에서 4월혁명까지> 에 따르면 이 남로당의 봉기는 중앙당의 지시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남로당 제주도당 측은 봉기를 일으키기 전에 중앙당에 보고조차 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4.3을 일으키겠다고 결정해 버렸다. *
 
이것은 4.3 이라는 것이 현재까지도 마땅하게 어떤 활동이었는지 통합적으로 규정되지 못했다는 현실에서 비롯되는 것일게다. 누군가는 '사태' / '사건' 이라 이름 붙였고, 누군가는 '항쟁', 또 누군가는 '폭동'이라 말하며 아예 '혁명' 이라고 이야기 되어지는 것도 들은 적이 있다. 이 많은 호칭들에 문제가 있다면 '아' 다르고, '어' 다른 게 우리네 말이듯이 어떤 명칭을 붙여주느냐에 따라 해당되는 사례의 성격을 완전히 바꿔버린다는 것이다. 감독과 제작자는 GV나 인터뷰에서 작품을 흑백으로 촬영한 것은 제주의 풍경이 이 이야기를 풀어놓기에는 지나치게 아름답기 때문이라고 말했지만, 흑백의 색깔은 모든 것을 중화시키는 마력이 있다. 오멸 감독은 작품의 색채를 통해 정치사회적 이해관계에 따라 바뀌는 명칭들을 전부 한 덩어리로 묶어버린다. 
 
그래서 <지슬>에서는 '사태, 사건, 항쟁, 폭동, 혁명' 이라는 표현이 모두 무의미해진다. 작품은 그 모든 명칭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공통적인 속성을 본다. 위의 다섯개 단어가 정의를 규정받는 대가로 요구하는 것. 바로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있는 '무고한 사람들의 죽음'.. 우리는 그것을 '학살'이라 부른다. 군인들이 배를 나눠먹으며 서로의 전우애인지 뭔지 모를 웃음과 마음을 공유하는 쇼트가 끔찍하게 보였던 건 그 뒤에 죽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흑백의 세상에서도 그것만큼은 똑똑히 보인다. 그리고 작품은 그 죽음을 응시하라고 말한다.

 

사실 안타깝게도 4.3은 이제 점점 논의되기 어려운 역사가 되어가고 있다. 시간의 문제인 셈인데, 가깝게 보자면 용산 참사, 멀게 봐도 5.18의 경우에는 적어도 아직 관련자들이 살아있어 궁극적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가지고 싸울 힘이 존재한다. 그러나 1948년에 발생한, 이 일의 도화선이라고 일컬어지는 3.1 절 발포 사건이 일어난 1947년까지 따지면 4.3은 무려 65년 이상의 시간적 차이가 존재한다. 유독 아카이브가 빈곤하기로 유명한 한국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 일은 점점 논의될 수 있는 힘을 잃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남로당, 이승만 정권, 미국, 대동청년단, 서북청년단 각각의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고, 관련자들 대부분이 세상을 떠나 버렸다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자 악재가 겹쳐져 있기 때문이다. <지슬>은 다큐멘터리 터치로 만들어진 작품이 아니다. 덧붙여 그 일의 원인을 남과 북, 한 쪽에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래서 작품은 4월이 아니라 11월부터 시작한다. '해안선 5km 바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폭도로 여기겠다'는 공포가 퍼져나간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시점에서 말이다.

 

 

* 4.3에 관한 시선들 중 하나로, (자칭) 군사 전문가인 지만원은 4.3을 '폭도의 반란'이라고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고 있다. 저서 제목인 <지워지지 않는 오욕의 붉은 역사: 제주 4.3 반란 사건>만 봐도 그의 견해를 대충 알 수 있는데, 이 책의 한 부분에서 북괴의 폭도들의 소행이라는 근거를 뒷받침하기 위해 <주체의 기치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이란 저서의 일부가 인용되고 있다. 지만원 박사는 이 책에서 4.3 발발의 첫 순간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고 썼다.

 

'투쟁에 나선 남조선 인민들은 ‘김일성 장군 만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만세!’를 소리 높이 외치며 원수들의 피비린 탄압을 불굴의 투지로 싸워냈다. 2월 7일 이후 26일까지, 수많은 경찰지서가 녹아나고 악질경찰관, 악질관리, 반동분자 수십명이 처단되었다. 26자루의 총과 481발의 탄약을 빼앗고, 61대의 기관차, 27개의 통신기구, 수많은 다리와 도로를 파괴하고, 83개소의 전신전화선을 끊어버렸다.'
 
그리고 또다른 비슷한 시선으로는 언론인 조덕송 기자가 <신천지> 1948년 7월호에 쓴 현지보고서,
 '유혈의 제주도' 에서도 등장한다.
 
'...직접 난동의 희생이 되고 있는 제주도민은 뭐라고 사건의 원인을 말하고 있는가. 금번 사건의 도화선은 순전히 도민의 감정악화에 있다. 무엇 때문에 제주도에 서북계열 사설청년단체가 필요하였던가. 경찰 당국은 치안의 공적도 알리기 전에 먼저 도민의 감정을 도발시키는 점이 불소하였다. 왜 고문치사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직접 원인의 한 가지로 당국자는 공산계열의 선동모략을 지적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근인의 한 가지로 긍정할 수 있다. 그러나 30만 전 도민이 총칼 앞에 제 가슴을 내밀었다는 데에서 문제는 커진 것이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

 

군인들이 첫 등장했을 때의 섬뜩한 분위기를 제외하면, 제주사람들이 첫 등장하는 시퀀스는 유머러스하다. 오멸 감독의 전작 두 편인 <어이그, 저 귓것>과 <뽕똘>이 유머가 아주 풍부했기 때문에 그 실력이 어디 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대신 애초에 작정하고 유머 코드를 넣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보고 나면 더이상 웃기지 않는다는 게 특징이다. 이들은 폭도로 간주된다는 흉흉한 소문이 두려워 산으로 숨어든 참에, 군인들이 올까 구덩이에 숨어드는 것이다. 그런데 마을 주민들은 참 이상하게도 비좁은 구덩이 속으로 끊임없이 모여든다. 자리가 없으니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나가라고 애원하는데도 말이다.
 
이 시퀀스는 어떻게 보면 꽤 상징적인 측면이 있다. 해안선 5km 바깥에 있다 폭도로 몰리기 싫은 사람들이 생명의 위협을 느껴 서로 모이는 것인데, 군인들과는 달리 이 마을 사람들은 육지를 오가는 것이 자유롭지 않은 상황이다. 공동체로서 살아가던 마을 사람들은 그렇게 모여 숨어드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한다. 그들 중에는 충분히 벌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도 존재한다. 마을 사람 중 한 명이고 '삼촌'이라 불리는 자는 일제강점기 시절에 일본에 협조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품에서 명확히 설명해주지 않지만 그로 인해 누군가의 아버지가 해코지를 당했다. 그래서 그는 간간히 마을 사람들로부터 신경질적인 대응을 받는다. 그는 멋쩍게 책임을 회피하려 하지만, 일단은 마을 사람들은 그를 여전히  공동체의 일원으로 대한다. 이후에 군인들의 동굴 침입을 막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결사적으로 말린 고추를 태워 연기를 피우는 부분에 이르게 되면 마을 사람들이 이 삼촌을 용서하고 같이 화해한다. (근데 이 삼촌이 '동호 삼촌'인지 헷갈린다.)
 
마을 사람들은 4.3 이 어떤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왜 죽는지에 관해 의문을 가지고 항변하지도 못한다. 그들은 자신들을 죽이러 온 토벌 군인들을 걱정하며, 서로 뭉치는 것이 도리어 고립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모른다. 이들이 무식해서가 아니다. 이들은 그저 일상을 살고 있는 것 뿐이다. 사회가 설명을 해 주지 않으니 위기의식을 느낄 새도 없고, 또 계속 그 의식에 사로잡힐 수만은 없으니 그냥 어딘가에 폭도들이 있는가보다 하면서 그렇게 산다. 그래서 자신을 죽이려는 토벌대들을 걱정하고, 친일했던 사람을 포용하려 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죽을 위험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도 피난올 때 집에 놔 두고 온 돼지에게 먹이 줄 걱정을 한다. 마지막으로 기어코 가지 않겠다는 어머니를 어떻게든 끌고 가야 하는데, 얼만큼 심각한지 모르니까 일단은 어머니의 의사를 존중하여 놔두고 간다. 이런 판단은 당연하다. 그들은 사람이니까.
 

 
 
작품 속에서 이런 방식은 일부의 군인들에게도 해당된다. 사이 좋게 배 깎아먹는 이후, 다른 군인들의 모습이 처음 등장하는 시퀀스는 추운 겨울날에 나체로 가혹행위를 받고 있는 병사인 박 일병의 모습에서다. 그러나 그의 나체가 등장하기 이전에 관객이 먼저 보게 되는 것은 너무 추워서 꽉 쥔 주먹을 클로즈 업 한 쇼트다. 사병인 그 군인이 가혹행위를 받고 있는 이유는 '빨갱이 / 폭도들을 한 놈도 사냥하지 못해서' 다. 사람의 시체를 옆에 두고 눈밭에서 똥을 싸고 있던 김 상사가 가혹행위를 시킨 백 상병을 부르고, 밑의 애들에게 좀 잘 해주라는 말을 남긴채 사라져간다. 이 사병이 다음 순간에서 받는 대우는 몸에다 찬물이 끼얹어 지는 것이다. 이런 것을 보고 있으면 이 사병이 쥔 주먹은 여러 외부적 여건에서 발생된 고통이 증오로 승화된 것만 같다. 하지만 그는 작품 속에서 자신의 친구이지만 계급 상으로는 후임인 김 이병과 더불어 마을 사람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사정은 잘 모르지만 그들이 무고하다는 것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이다. 꽉 쥔 그의 주먹은 그 고통스러운 상황을 견뎌내는 것과 같다.

 

의외로 증오의 순간은 예상 못한 지점에서 등장한다. 개인적으로는 작품 속에서 상당히 섬뜩했던 부분 중 하나인데, 장지문이 클로즈 업 된 쇼트가 그것이다. 김 상사가 자신의 동생을 찾는 것이 장지문에 가려져 소리만 들려오는데 관객이 듣기에도 제대로 된 정신상태에서 소리치는 게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옆에서 누군가 지속적으로 칼을 갈고 있는 중이다. 작품은 가장 인도주의적이고 조용해 보이는 사람들이 가장 지독하게 광기에 휩싸여 있음을 보여준다. 마침내 장지문이 열리고 마을 사람들이 키우는 돼지가 가마솥에 넣어질 때, 우리는 그들이 왜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는지에 관해 대충은 짐작할 수 있다. 김 상사는 어떤 연유에서인지 마약에 중독되어 있고, 옆에서 조용히 칼을 갈던 고 중사는 함경도 사투리를 쓰며 폭도들을 죄다 잡아 죽이라고 지시한다. 관객은 후에 이 군인이 사람을 무차별로 학살하면서 자신의 가족이 빨갱이에게 희생당했다는 과거를 읊조리는 것을 듣게 되어 살인귀가 된 연유를 알게 된다.

 

<지슬>의 이런 디테일은 실제 이런 관련 사건들이 발생했을 때 들려왔던 증언들을 참고하여 넣은 것이다. 가령 우린 5.18 관련 TV 다큐멘터리에서 계엄군으로 참여했던 사람들이 진압 작전을 수행하기 전에 약물이 함유된 막걸리 등을 마시고 광주 시가지로 갔다고 증언한 것을 잘 알고 있을 정도로 이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비단 5.18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베트남전을 비롯한 전쟁과 관련해서 사람들이 약물이 없으면 버텨내기 힘들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더불어 빨갱이에 대한 무시무시한 증오를 드러낸 사람이 있지만, 정작 오해로 인해 빨갱이가 아닌 사람들을 참혹하게 죽인다는 것도. 어떻게 보면 이 디테일은 '관습'이라 할 정도로 실생활이나 관련된 여러 작품들에서 봐 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질리지 않고 여전히 생생히 무섭게 다가오는 이유는 약물과 누구나 오해로 인해 품을 수 있는 증오라는 익숙한 요소들이 우리의 인성을 단숨에 마비시켜 버린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군인들도 어찌보면 일상을 살고 있다. 그들 역시 사건의 진상을 자세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은 명령에 살고 죽어야 하는 군인인지라 굳이 거기에 관심을 두지는 않는다. 이것은 결국 자신의 인생이기 때문이다. 빨갱이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무고한 사람이라면 그는 공적을 세운 것이 아니라 살인범이 되어버린다. 자신의 인생을 보상받을 수 없으니까. 그래서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두 사병만 빼 놓고 나머지 사람들은 자신들이 습격한 마을 사람들이 '빨갱이가 아니라는 것'에 관해 단 한 번의 의심도 하지 않는다. 당연하다. 사람이고 국방의 의무라고 여기며 자신의 일니까. 작품은 '사람이라서 그리 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을 뒤엉키게 만들어놓고 비극을 향해 달려간다. 서로의 입장이 이해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이 작품은 정말 사무치게 슬프다. 마치 우리가 왜 싸우고 죽어야 하느냐고 묻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오해의 증오는 그 절규를 바로 일축시켜 버린다.
 
이 시퀀스의 마무리는 섬뜩하다. 사병들은 민가에서 가져온 돼지를 가마솥에 넣고 끓이며, 고 중사의 명에 따라 '폭도들'을 죽이러 나서려 한다. 그리고 옆에선 김 상사가 약에 취한 채 기왕 폭도 잡으러 가는 김에 계집애도 하나 건지라고 말하며 땅바닥을 기고 있다. 죽은 돼지가 담겨진 가마솥의 동그란 형상은 곧 동굴의 구멍으로 바뀌며, 피난 온 마을 사람들 중 한 명이 잠시 그 구멍을 응시하다 다시 숨어 들어가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피난 온 마을 사람들은 도리어 스스로를 막다른 곳으로 몰고 있다. 그들은 가마솥 안의 돼지다.


 

 
* <지슬>은 작품 속 인물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 오히려 <지슬>이 분노의 시선으로 부릅뜨고 '침묵하고 있다' 고, 그래서 진실을 밝히라고 외치는 곳은 작품 속에서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미국과 그에 관련된 사람들'이다.

 

미 군정은 3.1 발포사건을 알아보기 위해 자신들의 조사단을 현지에 파견한다. <4.3은 말한다> 에서 언급하는 그들의 자료에 따르면 미군 조사단은 제주 총파업의 원인을 3.1 절의 경찰발포로 인해 도민들의 감정이 고조됐고, 남로당이 이 점을 이용해 대중을 선동하여 증폭시켰다고 보고 있다. 여기서 그들은 후속조치를 '경찰의 행위' 보다는 '남로당의 선동'에 더 많은 비중을 둔다. 그들이 떠나자 조병옥 경무부장과 응원경찰대가 제주도에 상륙했으며, 경무부 수뇌진이 제주도민의 90%가 좌익색채라는 발언을 공공연히 하고 다니게 된다.

 

이후, 파업이 잠잠해지자 미군정 당국은 제주 수뇌부를 전면 교체하게 된다. 3.1 발포 사건 이후로 제주도 경찰관의 숫자를 줄이고, 사정 모르는 육지 사람들 / 서북청년단 일원들로 채워나간 것이다. 참고로 이 때 전면적으로 유입됐던 서북청년단은 40년대 후반에 결성된 반공단체로, 사무실은 동아일보 사옥에 있었으며 활동자금은 한반도 서북부 출신 실업가들과 미군정청 고위관리들, 그리고 이승만 정권 계열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에 의존하고 있었다. 흔히 4.3을 일으킨 원흉 중 하나로 꼭 거론되곤 한다. 그리고 이 서북청년단으로부터 일부가 빠져나가 대동청년단이라는 또다른 우익 단체를 만들게 된다. 둘 다 이승만 정권의 노선에 맞춰 활동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4.3 해결에 참여했다가 후에 해임되는 수난을 겪은 9 연대장 김익렬 중령의 유고인 <4.3의 진실> 에서 그의 견해와 더불어 끔찍한 일화 하나를 볼 수 있다. 3.1 발포사건 이후, 제주도 내에서 약 2,500명의 청년들이 구금됐다고 한다. 그런데 이 당시 김용철, 양은하, 박행구라는 이름의 청년들이 구금 상태에서 고문을 당하다 죽는 일이 발생한다. 제주 경찰 측에서는 3월 15일에 시체를 몰래 강에 내던지려다 그 광경이 청년들의 가족들에게 발각되고, 그 사건이 제주민심에 큰 충격을 줘 도민들이 경찰들을 믿지 못하는 결과를 낳고 만다.

 

미군정이 뒤에 있는 경찰들의 과잉진압에 대해서는, 비록 이승만 정권 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김대봉 당시 경무부 공보실장까지 이렇게 얘기하게 만들 정도였다. '...물론 폭동 원인에 경찰도 과실이 없다고 보지는 않는다. 어느 면에서 경관의 고문에 의한 치사 사건이 있었고, 또 경찰이 청년단체에게 경관행세까지 방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미군정 하에 있었기 때문에 '남로당의 폭동' 이라며 공산주의 세력 쪽에 원인이 있다고 봤지만, 동시에 당시 관공리 쪽의 문제도 심각했다고 지적한 이인 경찰총장도 있다. 그는 1948년 6월 17일 <서울신문> 에서 이렇게 자신의 견해를 드러낸다. '제주도 사태가 이렇게까지 악화되 것은 시정방침에 신축성이 없는 것과 관공리가 부패하였다는 것 등을 볼 수 있겠다. 특히 그들은 제주도에 가는 게 무슨 정배나 가는 양으로 생각함으로써 인재될 만한 사람들은 제주도로 안 가고 보니, 명예나 돈이나 바라는 친구들이 어찌 옳은 시정을 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부패상은 작년인 1947년에 내가 제주에 방문했을 때 이미 역력히 말하고 있었다...'  *

 

 

* 1. 김익렬 9연대장의 유고인 <4.3의 진실> 에서 그가 쓴 4.3 초기의 피난민 입산사태에 관한 주장과 견해.

 

'토벌이 시작되고 1주일이 못 되어 폭도의 세력은 강해지고, 경찰은 읍내를 수비하는 데도 급했다.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육지에서 토벌명령을 받고 내려온 김정호 사령관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수립된 작전계획이 '초토작전' 이다. 이 작전이야말로 제주도를 대폭동 사건으로 확대시킨 근본원인이 된다. ...최초의 작전은 극비밀리에 조천면과 애월면 일대의 산간마을에서 행해졌다. 그 초토작전은 철저하게 이뤄져 비밀의 누설을 방지하였으므로 당사자들 이외에는 아무도 몰랐다. 제주도 미군정 장관이나 9연대 정보부에서도 전혀 몰랐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점차 인접마을에 이런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산간마을 주민들은 치안부재 상태에서 생명보전 때문에라도 할 수 없이 폭도들에게 조금이라도 협력 안 한 마을이 전무할 정도였다. 따라서 초토작전의 대상이 되지 않은 마을은 거의 없었다. 산간마을 주민들은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서라도 폭도에 가담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제주읍이나 일주도로변의 치안이 확보된 해변마으로 피난하든지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대부분은 폭도에 가담하였다. 해안마을로 하산한 주민들에 대하여 또 경찰들이 귀찮게 굴었기 때문이다. ....미군정은 처음엔 강력히 초토작전을 반대하였으나 다음부터는 어찌된 셈인지 묵인하는 태도로 나오더니 나중에는 오히려 장려하는 태도로 변하였다.'

 

미군정이 초토작전을 묵인하게 되자 경찰은 공공연하게 한 마을, 한 마을을 초토화시켜 나갔다. 이렇게 되자 일이 예기치 않은 상황으로 돌변하였다. 대부분의 산간마을민들이 산으로 도주하여 폭도들에게 가담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폭도의 수는 기하급수로 증하가여 갑자기 수백, 수천이 되어 그 수를 판단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고 말았다.'

 

2. 당시 경찰의 진압작전을 직접 보고 그것을 경향신문 신춘 현상수기에 써서 당선되어 1964년 1월 5일자에 게재됐던 임두홍의 글, <내가 겪은 사건실기 - 4.3 폭동> 중 일부..
 

'..과연 그들 경찰이 하는 일은 무엇이었던가? 그들의 총구는 닭과 개를 향하여 불을 뿜었고 아무 집에나 마구 들어가서 밥을 시켜먹었으며, 마을의 개들은 그들을 보면 꼬리를 감추고 도망갔다.

 

그들은 젊은 여인들을 붙들어다가 욕을 보였다. 그들은 젊은 사람들만 보면 폭도라거나 혹은 빨갱이라고 하여 행패를 부리고 잡아갔다... 젊은이들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순경들은 마을사람들을 전부 학교 운동장에 모이라고 했다... 그러고는 몽둥이로 사람들을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맞는 사람들은 '내가 맞을 죄를 졌으면 가르쳐 달라' 고 악을 썼지만 때리는 순경들의 입에서는 욕설과 몽둥이만이 내려졌을 뿐이었다.'
 

3. 4.3 당시 통위부 정보국장을 맡았던 백선엽 장군이 쓴 <실록 지리산> 118 페이지 일부..

 

'..한편으로 11연대 (9연대가 11연대로 재편성 되었음) 는 공비들의 정보망을 차단하고 좌익세력에 위협을 주기 위해 좌익 혐의자들을 마을별로 색출, 공개 처형 하는 일을 매일같이 반복했다. 이 같은 처형 과정에는 집안끼리의 갈등, 개인적 원한 등이 얽혀들어 무고한 희생자가 발생했는데 당시 토벌정책으로는 그런 옥석을 가려내지 못했다.' *
 
 
"..그나저나, 아까 그 여자 쏴 버리지 그랬냐..?"
 
"그러게...
아냐. 그래도, 사는 게 더 나을지도 몰라."

 
참고로 <지슬>은 네 개의 챕터로 나눠져 있다. 그리고 두번째 챕터와 세번째 챕터는 장르적인 재미에서도 가장 긴박감 넘치고, 동시에 지독히 슬프며 작품 속 인물들의 오해와 갈등에 불을 붙인다. 그래서 솔직히 보는 내내 괴로웠다. 왜냐면 웬만한 호러 장르의 작품들보다도 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죽음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일원 중 한 명인 경준 ('뽕똘'이라 불려야 옳겠지만, 그는 이 작품에서만큼은 유일하게 '뽕똘'이라 불리지 않는다.) 의 안내에 따라 좁다란 굴로 들어가는 데 성공하지만 몇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잘 따라오다 학교에 놔둔 책을 가지러 가기 위해 사람들을 이탈한 순덕이란 처녀. 그녀는 굴에 들어가 있는 마을 사람들 중 한 명인 동호 삼촌 부부의 딸이다. 그리고 아들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몸이 불편하니 자신은 못 간다며 마을에 남은 한 할머니. 그녀는 동굴에 숨어 있는 무동이란 남자의 어머니이다. 김 상병은 광대하게 펼쳐진 제주도의 오름에서 순덕을 발견하지만 차마 총으로 쏘지 못한다. 
 
문득 보면서 느꼈던 너무나 끔찍한 생각은 '차라리 저기서 박 이병이 순덕을 총으로 쐈다면 나았을까?' 하는 것이다. 순덕은 도망치지만 얼마 가지 못해 다른 군인들에게 붙잡히고, 고 중사와 김 상사에게 성적으로 농락당한다. 총에 맞아 죽는 것이나 성적 노리개가 되는 것이나 끔찍하기는 매한가지이다. 그러나 기어이 전자의 생각을 하게 되는 이유가 있다면, 그건 아마도 박 일병이 김 이병에게 배고플 때 먹으라고 얻은 감.. 아. 맞다. 이 작품 제목에 대한 의미를 안 적었네. '지슬'은 제주어로 '감자'를 의미한다. 그 '지슬'을 순덕에게 갖다 주려다 그녀가 입수한 총에 맞아 죽기 때문인 것 같다.

 

난 섬 사람들과 육지 사람들 사이의 상처가 지독하게 곪아 버렸음을 극명히 드러내는 이 시퀀스가 참 싫다. 흑백 영상의 명암 처리는 아름답고, 총소리가 들리자마자 민가의 장지문이 순서대로 닫혀가며 그것을 카메라가 빠르게 트래킹 하여 포착해내는 순간은 너무나 '영화적' 이라는 느낌을 준다. 알고 보면 사선에 내몰린 한 처녀가 사력을 다해 살아보고자 마지막 저항을 하는 처절한 순간이다. 그러나 작품은 군인들의 시선으로 이동해서는, 마치 오사마 빈 라덴 때려잡으러 가듯 작전을 수행하는 것처럼 (근래에 캐서린 비글로우 감독의 <제로 다크 서티>를 봐서..) 순덕의 죽음 직전 순간을 연출하고 있다. 여기에도 영화적인 리듬이란 표현을 쓴다면 그게 해당이 될지는 모르겠는데, 여하튼 그 리듬이 너무 매끈해 보이는 것이다. 폭력의 순간을 보여주자고 관객에게까지 폭력을 쓸 수는 없다. 이것은 작품을 만든 오멸 감독도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나는 이 작품을 정식 개봉 전에 시사회 겸 기획전 형식으로 대구 동성아트홀에서 상영됐을 때 처음 관람했다. 그 다음주에 한 번 더 봤었는데, 처음 이 작품이 상영됐을 때 고혁진 프로듀서의 GV가 있었다. 오멸 감독은 아니었지만 그 역시 작품의 공동감독인양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고, 또 그에 걸맞게 작품 제작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 이야기 속에서 내게 한 가지 흥미로웠던 것은 의외로 오멸 감독이 찍은 모든 작품이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이 작품은 대부분의 시퀀스가 그 날의 느낌을 따라 즉흥적으로 찍혔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테이크를 재촬영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미 그런 방식으로 예전부터 찍어 왔던 홍상수 감독도 이 정도의 '화면 때깔'이 나오지 않는데, 감독의 능력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제주도의 풍광이 그만큼 멋들어져서인지는 확신할 수가 없다. 실제로 제주도의 풍광은 어딜가나 멋지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이 시퀀스 역시 즉흥적인 느낌에서 찍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관객에게 시각적인 폭력을 제공하지 않는 대신, 지극히 장르 영화적 재미의 향기를 풍기는 것은 용납될 수 있는 일일까? 오멸 감독의 작품은 잘 나가다가 꼭 한 번씩 나로 하여금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순간이 있었다. <어이그, 저 귓것> 은 초반 30분, <뽕똘>은 마지막의 '자파리', 그리고 이 작품에서는 순덕의 죽음과 더불어 벌어지는 한 밤 중의 총격전이었다. 물론 이런 생각을 감독이 듣는다면 그의 입장에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만들면 날 보고 어떡하라고, 이 자식아!?' 라고 멱살을 잡고 싶은 심정일테니 뭐라 할 순 없지만...개인적으로는 그래서 '개별적인 쇼트'로 따질 때는 이 작품이 싫었다. 오히려 <어이그, 저 귓것>이나 <뽕똘>이 좋았던 것이다.
 
두 작품은 사실 기본적으로 워낙에 한정된 예산으로 만들어진 탓에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영화적인 화면빨' 과는 거리가 많이 멀었는데, 어떻게 보면 그것이 솔직함이었다. 지금의 여건에서 우리는 이렇게 영화를 만들고 있다고 얘기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보다보면 갑자기 예상 못한 공격을 하듯이 불현듯 너무나 아름다운 쇼트들을 보여주곤 했다. 그건 그 여건에서 최대한의 능력을 짜 내어 구현한 아름다움이었다. 반면 여전히 빡빡하더라도 앞의 두 작품보다는 여유로운 여건에서 시작한 이 작품은 모든 순간이 지나치게 매끄러워 갑자기 보석같은 순간을 발견했을 때의 희열이 없다. 오히려 이 아픈 순간을 묘사하는 것에 있어 저런 연출이 타당한지를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건 아마 개인적인 체감의 차이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리라.
 
<지슬> 의 매력은 개별적인 쇼트보다 하나의 시퀀스에 있다. 잘 된 쇼트, 잘 되지 못한 쇼트들을 모두 합쳐 하나의 시퀀스가 되는 것이기에, 매끄럽게 만들어지지 않으면 시퀀스는 매력적일 수가 없다. 작품 속에서는 이런 시퀀스가 여러 개 합쳐져 상상을 초월하는 위력을 발휘하는 지점이 있다.. (Pt.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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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오멸

주연: 양정원, 오영순, 문석범, 이경준, 김대영, 장정인

음악: 황태승, 양정원

촬영: 김경섭

12세 관람가 / Color / 90분

 

 

....


 

(<뽕똘>을 책에다 적어놓을 때, 그 작품의 연작이라 볼 수 있는 오멸 감독의 <어이그, 저 귓것>은 블로그에 적어놔야 겠다고 생각했다. 이제야 적어놓는다.) 오멸 감독의 <어이그, 저 귓것>의 시작은 슬프다. 기타 잘 치고 노래 잘 부르는 용필이 다리를 절뚝거리며 온 몸이 성치 않은 채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는 노래로 성공하겠다는 청운의 꿈을 품고 육지로 상경했다가 교통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용필은 어머니는 잘 계시냐고 묻는데, 관객은 그 말 때문에 잠시 기대를 한다. 그래도 어머니가 따뜻하게 그를 맞아주겠지. 하지만 용필은 '어머니의 산소'를 얘기한 것이었다. 작품은 곧 어머니의 산소 앞에서 절규하는 용필의 모습을 보여준다. 어찌보면 절규 같고, 어찌보면 고향에 돌아와서 다시 시작해 보겠노라는 의지일 수 있는데 이 작품은 곧 그 생각을 산산조각 내버린다. '할아방'이 등장해 용필을 다그치기 때문이다. 너희 어머니 묘는 여기가 아니라 저기 있지 않냐?

 

....풋! 용필은 순간 멍해진다. 이 순간이 웃긴 이유는 용필 본인이 남의 묘인 줄도 모르고 온갖 감정을 다 담아서 절규하고 있는 중이며, 또 음악과 카메라의 움직임이 마치 이 시퀀스는 정말 감동적이고 슬프다는 것을 최선을 다해 알려주려고 홍보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가장 많은 감정을 담은 시퀀스가 결국 남의 묘라는 이유로 착각으로 끝나고 말 때 작품의 제목이 뜬다. '귓것'. '귀신'의 제주어 표현이지만 동시에 '바보'라는 놀림과 경멸의 표현이기도 하다. 작품을 한 번에 이해하게 만들어주는 기발한 도입부이자 저예산으로 찍힌 것이 티가 나지만, 동시에 특정 부분에서의 카메라워크가 참 뛰어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준다.

 

나는 이 작품을 거꾸로 봤다. 오멸 감독의 작품을 처음 본 것이 군 복무를 하던 시절인 2011년, 휴가가 끝나고 귀대해야 하기 때문에 내가 복무 중인 부대가 있는 제주도로 왔을 때였다. 복귀 시간이 많이 남았을 때 주로 제주도에 도착을 했기 때문에 남는 시간에는 꼭 영화 한 편을 보고 귀대하곤 했었다. 그 때 <뽕똘>이 멀티플렉스 극장인 CGV에서 한 관을 차지하고 상영 중이길래 관람했었는데, 그 작품이 내가 처음 본 오멸 감독의 작품이었다. 뒤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뽕똘>과 이 작품은 모두 2009년에 제작됐는데 개봉을 2년 뒤에 한 것이었다. 거꾸로 보고 느낀 것은, 영화란 것이 개인의 취향과 선호도에 차이가 있다지만 오멸 감독의 작품은 만듦새로 따진다면 첫 작품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 다음 작품을 만들어 갈수록 더 좋아진다는 것이었다. 이 말은 어찌 보면 이후에 그가 이뤄낸 성취를 생각하면 첫 작품이 가장 나쁘다는 이야기도 된다.

 

단적으로 <어이그, 저 귓것>의 초반 20여분은 최호 감독의 <고고 70>을 처음 봤을 때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말했던 감정을 떠올리게 된다. '주인공들만 신난다'..라는 것 말이다. 이 작품의 주된 이야기는 제주도에 용필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뽕똘과 전설적인 춤꾼이 되기를 꿈꾸는 댄서 김, 실명은 '대영' 이 자기 실생활을 내팽겨 쳐버리고 그로부터 음악을 한 수 배워보려고 노력하는 이야기다. <뽕똘>과 더불어 이 작품이 초반부에 관객에게 흥미롭게 다가오는 것은 우리나라 방언인데도 불구하고 듣고 있으면 꼭 외국어 듣는듯한 100% '제주어' 대사들이다. 실제로 제주도 말은 방언임에도 불구하고 막상 들어보면 의미를 아는데 어려움을 겪기 때문에 유네스코에게 하나의 독립된 언어로 인정을 받았다. 그 언어가 제주도민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상당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강점이 된다. 특히 이 제주어의 매력이란 말에 딱히 강세를 붙이기 보다는 끝을 조금 늘리거나 주로 의문문으로 말하고자 할 때 우리가 사용하는 발음의 높이를 구사하는데서 나오는데 (간단히 말하자면 '같이가젠~?', '뭐 하멘~?' 같은.) 이 언어의 느낌은 가히 '귀엽다'! 이런 느낌은 <뽕똘>에서 자주 사용됐고, 또 관객의 미소를 짓게 만들기 위한 유머로서 적중률이 꽤나 높았다. 노래를 배우는 이 작품과 달리 <뽕똘>은 영화를 만드는 이야기인데 육지에서 온 무명배우인 성필이 현장을 무시하자, 뽕똘이 제주어를 쓰면서 성질을 부리는데 전혀 화가 나 보이지 않고 귀엽게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이그, 저 귓것>에서는 제주어가 힘을 발휘하려는 순간이 시작하자마자 바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오히려 시작하고 30여분이 지나야 한다. 그렇다면 이 초반 30분은 짜임새 있게 만들어 졌는가? 사실 여기서 많은 불만이 있었다. 그것은 캐릭터에 관해 별다른 명확한 영화적 설명이 존재하지 않아서다. 가령 관객이 도입부부터 보게 되는 인물 중 한 명인 할아방, 혹은 '삼촌'이라 불리는 노인은 남의 묘에서 울고 있는 용필을 다그칠 때는 정신 똑바로 박힌 동네 어르신처럼 보인다. 실제로도 그는 정신이 나가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용필을 다그치고 난 뒤에 바로 등장하는 시퀀스는 다름아닌 이 할아방이 동네 할망이 운영하는 점빵 앞에서 노숙자처럼 드러누워 잠을 자는 것이다. 그러고는 일어나서 별다른 대사도 없이 점빵 외벽에다가 노상방뇨를 한다.

 


여기서 뽕똘이 첫 등장하는데, 그는 할망에게 외상을 하려 들면서 할아방의 행동을 고자질한다. 할망은 화가 나서 모른 척 하고 서 있는 할아방의 등을 찰지게 후려치기 시작한다. 젊었을 적엔 이 오줌이나 싸대는 물건으로 이곳저곳 쑤시고 다녔다면서 말이다. 관객들이 할아방은 어떤 사람인가 궁금하게 만드는 장치로서 기능할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도입부 이후로 바로 이런 시퀀스가 등장하는 것이 이 인물에 대해 심한 괴리감을 만든다고 느껴졌다. 이후는 더 심하다. 할아방은 개밥그릇에 있는 물을 들어서 먹다가 할망으로부터 물세례를 받으며, 또 한 번은 점빵에 들어가 소주를 훔치려다 적발되어 쫓겨난다.

 

 

그리고 이후, 첫 감상 때 나를 가장 당혹스럽게 만들었던 시퀀스가 하나 툭 튀어나온다. 여전히 주변을 서성이던 할아방은 농사를 짓고 있다 새참 먹고 있는 여인들의 초대를 받는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그녀들은 마치 짠 듯이 할아방에게 소리 한 곡조를 요청하고, 그가 한 소리 부르기 시작하는데 정말 잘 한다. 마침 용필에게 지적받고 양동이 뒤집어쓴 채 노래 연습하던 뽕똘과 대영은 할아방의 노랫소리가 들리자 지금 저쪽에서 놀고 있다면서 그쪽을 향해 달려간다. 마을 사람들이 한데모여 소리에 맞춰 풍악을 울리는 중이며, 멀리서 대영이 '댄서 김'이 되어 괴이한 몸부림을 치고 있다. 이 시퀀스의 핵심은 그들만 신났다는 점이다. 아까 전만 해도 가게 앞에서 오줌 싸다 얻어맞고, 개밥그릇의 물을 먹고, 소주 훔치려던 남자가 노래를 굉장히 잘 부른다. 이 점에 관해서 관객에게 어느 정도 납득을 시켜줘야 했었다. 그런데 작품은 이 순간이 등장하기 이전 30분동안 할아방을 코미디의 대상으로만 삼을 뿐, 음악적인 이야기에 관해서는 어떠한 말도 해 주지 않는다.

 

 

물론 이런 음악적인 부분에서 고수의 면모를 보여준 이 사람이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있는 것 아니겠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30분은 짧은 시간이 아니다. 그리고 그 동안 작품은 이 인물에게 큰 비중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나마 등장해도 화장실 코미디에서나 발생할 법한 상황들을 만들어 내어 어떻게든 웃기는 것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인물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그래서 관객의 입장에서는 갑자기 소리가 한 곡조 뽑혀나오자 어안이 벙벙한 것이다. 이전과 지금의 갭이 너무나 커서. 그래서 <어이그, 저 귓것>의 첫번째 음악판은 관객의 입장에선 난장판으로 보인다. 작품 속의 인물들은 할아방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소리를 할 때 거리낌 없이 뛰어가서 신나게 논다. 하지만 관객은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쌍방향 소통을 하는 영화는 드물다. 그런 영화는 필름이 영사되는 매체적 한계 이상의 것들을 끌고 들어와서 극복했을 때 뿐이다. (남기남 감독의 <영구와 땡칠이> 라든가.. 짐 셔먼 감독의 <록키 호러 픽쳐 쇼> 라든가..) 일방적으로 작품의 정보를 받아들이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이 상황들이 너무나 이상할 뿐이다.

 

 

 

여기서 느낀 것은, 현재까지의 오멸 감독은 '작은 이야기'를 표현하는 것에는 참 미숙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두번째 작품인 <뽕똘> 부터 담고 있는 이야기의 함의를 키워가는 모습을 보였다. 소규모 인원으로 영화를 찍는 이야기는 중반부로 가면서 제주도의 신화적 요소들을 끌고 들어왔으며 세번째 작품인 <이어도> (<- 오멸 감독이 극장 개봉을 할 생각은 없다고 했던..) 와 최근작인 <지슬>은 기본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제주 4.3 이라는 '역사' 였다. <어이그, 저 귓것>도 빛이 나는 순간은 순수하게 사람들의 살아가는 이야기에서 창출되는 소동극이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세상의 이야기'를 끌고 들어와 작품 속 인물들에게 맞출 때다.

 


그 순간은 다행히도 내가 이 작품을 좋지 않게 봤던 순간에 거의 이어서 등장한다. 시작은 뽕똘의 아내가 아기에게 쓸 기저귀를 사러 할망의 점빵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마침 점빵에 기저귀가 다 떨어져서 도착하는데 몇 일 걸릴 거라고 얘기해준다. 뽕똘의 아내는 그럼 아껴써야 겠다고 말하며 조금 근심어린 표정을 지으며 가게를 나선다. 남편은 밭일을 하지 않고 노래를 배우겠다고 나돌아 다니는 중인데 집에는 아기 기저귀조차 없다. 이런 와중에 할망이 걱정을 하기 시작한다. 자신은 늙었는데 대형마트 때문에 사람이 잘 오지도 않는 이 점빵을 누구에게 줘야 할 지... 이 작품이 '음악영화' 로서의 정체성을 본격적으로 드러내는 순간은 바로 할망이 노래를 부르는 순간이다. 제주민요 중 하나인 '망건노래', 혹은 '양태 젖는 소리' 가 점빵할망 역을 맡은 오영순의 육성으로 불려진다. 그녀의 육성과 함께 겹쳐지는 것은 뽕똘의 아내가 터덜터덜 집으로 귀가하는 것이다. 예술을 노래하며 한 곡조 뽑고 신나게 사는 사람들이 있지만, 동시에 세상에는 하루를 어떻게 먹고 살아가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다.

 


작품은 이런 고민을 제주도의 여성들에게 투영한다. 이것은 인상적인데, 단순히 남성들이 철이 없다기 보다는 '제주도에는 여자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영화적으로 끌고 들어온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이런 이야기의 근거로 자주 전해지는 것은 바닷가나 섬 지방에 살고 있는 여성들의 숙명이다. 남자들은 바다에 고기잡이를 하러 떠나고, 여자들은 남는다. 남자들은 풍랑을 만나면 대부분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 바다에서 '이어도를 봤다' 는 이야기도 여기서 유래하는데, 실제로 이어도는 섬이 아니라 평평한 바위라고 한다. 그런데 납작해서 수평적인 시각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위에서 봐야만 보이는 것이 이어도인데, 이 바위를 볼 수 있을 정도의 위치까지 가 있다면, 풍랑을 만나 파도를 이용해 배나 사람이 그 위치까지 떠 있다는 얘기가 되므로 살아남기가 힘들다. '망건노래' 에는 '이여 이여 이여도 허라. 이여라는 말에 눈물이 난다.' 라는 구절이 있다. 이것이 할망의 입에서 불려질 때 노래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비애의 정서를 가진다. 작품이 납득이 가고, 인상 깊어지는 순간이다.

 

 

 

 

* 망건노래 *

 

 

 

* 인생길 *

 


그리고 뒤이어 용필을 연기한 양정원이 자신의 자작곡인 '인생길' 을 부를 때 (양정원은 실제로도 제주도에서 가수 활동을 하고 있다.) 이 곡은 이전에 할망이 부른 '망건노래' 의 훌륭한 반대지점이 된다. 제주도의 여자들은 비애가 느껴지는 슬픈 소리를 하고 있을 때, 제주도의 남자들은 '인생은 멀고 먼 하늘 끝'을 부르며 계곡에서 헤엄치며 놀고 있다. 이 작품의 제목이 이해가 가는 순간이다. 이 곡은 작품의 개봉이 끝난 후에 찾는 사람이 많아질 정도로 인기곡이 되었지만 듣고 있으면 참 서글프게 관객에게 웃음을 준다는 생각이다. 이 두 곡이 지나간 뒤에 작품은 한동안 캐릭터 코미디에 집중하는데, 초반부와는 다르게 그 상황들이 어색하지 않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할아방이 뽕똘에게 할망에게 자기 오줌 눈 것을 일러바쳐서 앙심을 품고 그를 혼내려다 졸지에 레슬링이 되어버리는 시퀀스도 그렇고.

압권은 술을 못 마시게 되어 시원섭섭해진 이 남자들 중에서, 대영이 아이디어를 내어 자기 친척집이 오늘 가문잔치를 하는데 거기 가서 술을 좀 얻어마시자는 아이디어를 낼 때다. 용필이 심드렁하게 거기 가면 축의금도 내야 하지 않냐고 다그치자 뽕똘이 간단하게 방법을 얘기한다. "거 봉투에 5천원 담아서 주면 되죠. 제가 가져 올게요." (<- 참고로 이 작품이나 <뽕똘>이나 밑에 '한국어 자막'이 있다.) 그리고 고수들이 승부를 내려고 이동할 때 나올법한 스코어 음악이 흘러 나오며 한껏 차려 입은 4인방이 위풍당당하게 대영의 친척집을 향해 슬로우 모션으로 걸어갈 때다. 이 시퀀스의 끝은 가자고 한 대영이 어머니에게 들켜서 얻어맞고 끌려가는 것이다. 나는 이 시퀀스를 보고 웃겨서 뒤집어 지고야 말았다. 두번째 감상 때부터는 박장대소까지는 갈 수 없겠지만, 계속 사람의 입가에 미소를 끊이지 않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어이그, 저 귓것>이 어느 지점부터 갑자기 긍정적인 면에서 인상적으로 변하는 이유는 노래를 통해 예술가의 삶을 정의하기 때문이다. 민요를 맛깔나게 부르는 할아방, 음악가로 성공하려 했던 용필, 댄서가 되고자 하는 대영 / 댄서 김, 음악을 배우려는 뽕똘은 지금 현재의 세상에서는 인정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왜냐면 어느새인가 세상은 예술을 향유하고 즐기지 않고, 한 끼 먹고 굶어죽지 않기 위해 온갖 더러운 짓을 감수하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다면...나는 서민이기 때문에 어딘가 콕 찝을 곳은 있겠지만, 어쨌든 세상이 그렇게 변해버렸다. 대기업은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 동네 점빵을 몰아내고 대형 마트를 건설하며 음악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자기 처자식만 고생시키고, 물건값조차 제대로 지불하지 못한 채 외상만 해대는, 그리고 남의 집 잔치에 축의금으로 5천원만 넣는 귓것들'이 되어버렸다.

 

문득 든 생각은 '예술가에게 예술적 영감 이외에 인성까지 바라는 것은 과한 것일까?' 하는 점이다. 예술의 시대에 태어났으면 존경받았을 할아방은 지금의 세상에선 젊었을 적 오입질 많이 하여 할망에게 지탄 받는 노인일 뿐이다. 아니, 뭐.. 건스 앤 로지스의 액슬 로즈도 생각해보면 '노래 쥑이게 부르는 나쁜 놈'의 이미지니까. 하지만 인성이 어찌됐건 공통되는 것은 이들의 노래만큼은 예술적으로 존경 받는다는 점이다. 언제나 할아방을 쫓아내던 할망은 막상 본인이 나이가 들고, 점빵 또한 폐점의 위기에 놓였다는 것을 알자 갑자기 술상을 들고 할아방의 집을 찾아간다. 그를 위한 술상인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때 할아방은 잔칫집에 놀러 가 있다. 예술가들은 이기적인 족속들이다. 결국 나이가 든 할망은 어느샌가 갑자기, 홀연히 가버린다. 이기적인 예술가가 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죽은 사람이 들어줄 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녀를 위해 한 소리를 읊어주는 것이다. 할아방은 이후, 한 번도 소리를 부르지 않는다. 그나마 예술가가 살만했던 땅인 제주도 이젠 점점 그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다. 오멸 감독은 이렇게 사람 사는 이야기를 무대가 되는 장소의 역사나 신화와 연결시킬 때 굉장히 아름다워지고 깊어진다.

 

 

 *  이 시퀀스는 도입부만큼 아름답게 찍혔을 뿐만 아니라 마치 '백아절현 (伯牙絶絃)' 같은 사자성어를 생각나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 중국 춘추시대 때 살았던 거문고의 달인, 백아의 솜씨를 잘 알아줬던 사람은 친구인 종자기 뿐이었다. 그 종자기가 어느 날 죽자 백아는 거문고 줄을 끊어버렸다. 자신의 소리를 잘 알아주는 사람이 죽었다면서. 할아방은 나이가 들었다. 할망들도 사라지고, 언젠가 그도 사라질 것이다. *
 

대개의 예술가들은 각개 행동은 좋아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서로 보듬으며 살아야 하는 것일까. 그들도 결국은 사람이니 말이다. 용필은 뽕똘에게 왜 할아방이 저러고 사는지 사연을 듣고 나서 그를 위한 헌정곡을 쓴다. 노래를 배우고자 찾아오는 뽕똘을 언제나 매몰차게 쫓아냈던 용필은 그 날따라 희한하게 그를 직접 자신의 무대에 포함시킨다. 이 시퀀스는 꼭 <뽕똘>에서 고등학생들이 수학여행으로 제주도를 둘러보는 한가운데서 등장인물들이 영화를 찍는 것을 연상케 만든다. 그만큼 다큐멘터리적으로 찍혔다는 이야기다. 양정원은 실제로 그 노래를 불렀던 것 같다. 카메라의 배치도, 느낌도, 모여있는 사람들도 '영화적'이라 볼 수 없다. 극영화와 다큐멘터리적 수법이 결합되는 순간, 작품은 뭔가 결의를 다지는 것 같다. <뽕똘>에서도 그 순간만큼은 웃을 수 없었다. 그렇게 희극적으로 보이던 인물들이 다큐멘터리적 기법으로 찍힌 시퀀스에서는 한 없이 진지해 보이기 때문이다. 여태껏 희극의 대상으로 삼아왔지만, 결론적으로 감독이 이들을 애정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는 증거다.

 

작품은 모든 상황이 끝난 뒤 다시 예전처럼 술을 마시며 수다를 나누는 인물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 중에는 끝내 성공하겠다고 육지로 올라간 사람도 있고 죽음을 맞이한 사람도 있다.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고 자연의 순리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에게는 주인공들의 존재가 처음엔 우스웠지만 지금은 그들이 존재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맙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들은 이제 귓것같은 짓거리를 하며 살지 않는다. 뽕똘은 자신의 아내가 앓아 눕자 미안함에 알아서 집안일을 하고, 그녀를 다시 챙기며 용필은 멋지게 공연을 한다. 적어도 관객의 눈에는 과거의 그들같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 그들은 예술가이며, ..비록 같이 산다면 좀 골 아플지라도 세상엔 그런 사람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호응을 받지 않고, 오히려 미움을 받기도 하지만 (참고로 이 말은 미움을 받으려고 작정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다시 태어나 노래 할 수 있다면 / 같은 길을 가겠노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 말이다.

 

신은 이기적이라 자신이 탐내는 사람들을 꼭 일찍 데려가곤 한다. 그래서 쓸모없는 인간들만 남겨놓는 것 아니냐고 우리 입장에서 항의할 법도 하다. 그러나 어떤 때는 보는 것만으로도 활력을 얻게 해주기 위해서, 아니면 보는 사람에게 교훈을 주게 하고 싶어서 다 데려가지 않을 때도 있다. 바로 이들. 이들이 만들고 부르는 노래를 들으면 그런 기분이 든다. 처음 시작이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됐던 <어이그, 저 귓것>은 결국 멋있는 '음악영화'로 승화되었다. 이 작품은 오멸 감독의 현재 발표된 작품들 중에서 가장 나쁘다고 생각하지만, (이건 취향의 문제일 것이다. <뽕똘>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감독이 뒤로도 이런 형식을 다시 시도할 것 같지는 않아 보여서 동시에 유일하고 소중하다.

 

 

 


* 다시 태어나 *

작사, 작곡: 양정원

 


내가 다시 태어나 숨을 쉴 수 있음에

나는 다시 나는 다시

내가 다시 태어나 걸어갈 수 있음에

나는 이제 나는 이제


얼마나 기다렸는지 세상 밝은 빛을

얼마나 기도했는지 가슴 졸이며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노래 할 수 있도록

내가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같은 길을 가겠노라고


내가 다시 태어나

노래 할 수 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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