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가, 욕망을 거세한 조선을 비웃다
임용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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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조선사 [박제가 욕망을 거세한 조선을 비웃다] 임용한, 역사의 아침, 2012

 

“인간사회는 항상 두 얼굴이었다. 어떤 부분에서는 차별에 항의하는 듯 서로 돕고 정을 나누며 사는 사람들이 어떤 부분에서는 마치 자신이 받은 차별대우를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더 약한 자를 찾아내서 더욱 심하게 차별한다. 서얼 차별이 꼭 그런 경우였다.”

 

박제가도 서얼이고, 백탑파라고 불리던 박제가의 친구들도 대부분 서얼이었다. 그들은 차별 속에서 우리가 실학의 시대라고 부르는 17세기 18세기를 살았다. 그들은 차별 때문에 가난하다고 푸념을 했지만, “서민처럼 직접 농사일을 하지도 않았다. 한량한 이무기처럼 매일 서로 오고 가며 모였다. 한번 모였다 헤어지면 다음날 다시 이런저런 핑계로 누군가의 집에 간다. 그러면 마침 그곳에 누군가 있거나 또 찾아온다.” 물론 그들은 공부도 했다.

 

“박제가는 젊은 시절 봉선사에 들어가 글공부를 한 적이 있으며, 이덕무 유득공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딱 거기까지다. 우리가 실학자들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대부분 딱 그 정도 공부를 했다. “몇몇 실학자들에 대해서는 과장된 평가가 많다. 몇몇 이들은 모두가 다 아는 사회문제점을 좀 더 크게 이야기해서 눈에 띄었고, 어떤 이들은 부분적으로 선각자였고, 오히려 남들보다 더한 보수주의자도 또는 복고주의자도 있었다.”

 

박제가는 어떻게 평가될까? “박제가는 많은 시를 유산으로 남겼고, 이 시에는 그의 박학이 충분히 녹아 있다. 그러나 실용주의 개혁론자인 그는 정작 경세론이나 경학에 대해서는 평생 그럴듯한 대작을 남기지 못했다. <<북학의>>는 비슷한 책을 찾을 수 없는 명저이지만, 너무 분량이 짧고 체계적인 이론을 갖추지 못했다. 그 덕분에 문장이 더 예리해서 박제가의 외침과 고통이 처절하게 와 닿기만 한다.”

 

저자는 <<북학의>>를 “낙후된 조선사회의 현실을 폭로하고, 구체적인 해결방안을 제시한 저술집”이라고 평가하며 버나드 맨더빌의 <<꿀벌의 우화>>와 비교 한다. “풍자시에 가까운 맨더빌의 발언을 두고 자본주의, 자유주의, 신자유주의의 정당성 또는 폐단을 연상하거나 논쟁한다면 당신은 경제이론을 모르거나 경제이론을 우습게 보는 것이다.” 맨더빌에 대한 다른 평가도 있겠지만, <<북학의>>와 <<꿀벌의 우화>>의 공통점은 당시 사회상을 풍자했다는 정도다.

당시 사회상을 고려하더라도 박제가의 주장에는 많은 이의가 뒤따른다. 특히 중국어 공용화 주장이 그렇다. “중국어는 문자의 근본이다. 우리말을 버리고 중국말을 쓰자. 그래야 우리도 오랑캐(동이)라는 명칭을 면할 수 있다.” 박제가의 이러한 중국어 공용화 주장은 얼마 전 있었던 영어 공용화 주장과 같다. 우리가 영어를 모국어로 쓰면, 미국인이 되는가.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나이지리아인들은 나이지리아인들이고,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필리핀인들은 필리핀인들일 뿐이다. 그들에게 뉴스위크지나 타임지를 주고 읽어보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이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다. 애써 이해할 필요도 없다. 언어도 중요하지만, 강유원 선생의 말처럼 ‘사회관계망’이 더 중요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더 중요하다. 우리를 규정하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며, 박제가를 규정하는 것은 조선이다.

조선이라는 사회관계망 속에서 박제가는 서얼이라는 현실의 벽을 넘어서지 못했다. 어쩌면 그는 서얼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안주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조선시대 집 나간 서얼은 홍길동밖에 없다.’는 말처럼 그의 서얼은 우리가 생각하는 홍길동의 서얼과는 다르다. 저자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서얼은 (상위) 1%에 들어갈 능력과 자격이 있음에도 불합리한 이유로 참여를 거부당하고, 간간이 굶거나 빌어먹는 삶은 살아야 했다.” 그는 서얼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책을 먹고 덮고 하면서도, 책만 보고” 살았다. 학자로서 열심히 공부했다는 것이 아니라. 독서가로서 열심히 책만 보고 살았다는 이야기다.

 

박제가의 <<북학의>>는 “발상 전환을 요구하고 계몽하는 하나의 외침이며 하나의 대전제”를 제시했을 뿐이다. 맨더빌의 주장을 받아들인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과 같은 명저로 맨더빌의 대전제를 체계화시켰듯이, 끊임없이 외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곳을 둘러보고 사회관계망을 체계화시키고 객관화시켜는 것이 지식인의 책무가 아닐까. 2012.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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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친구관계, 공감력이 답이다 - 서울대의대 김붕년 교수의 왕따 처방전
김붕년 지음 / 조선앤북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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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심리 [아이의 친구관계, 공감력이 답이다] 김붕년, 조선앤북, 2012

 

대부분 사람들은 어린 시절에 단짝 친구, 삼총사, 오총사 때로는 칠공주로 불리는 친구들과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어른이 되고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 시절 그 친구들을 그리워한다. 그때도 따돌림당하는 친구가 있었지만, 지금처럼 왕따 문제로 정신과 치료를 받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친구는 없었던 것 같다. 윤리 교과서에서 배웠던 질풍노도의 시기는 어른이 되는 한 과정에 불과한데, 사회가 발달하고 의학이 발전하는데 왕따 같은 청소기의 문제들은 왜 더 심각해지는 것일까?

 

“3~5세에 가장 활발하게 일어나는 뉴런의 자연사멸은 경쟁에 실패한 뉴런을 걸러내는 과정이고, 10대에 전두엽에서 일어나는 시냅스의 가지치기 현상도 보다 효율적인 신경망을 구성하기 위해 경쟁에서 뒤떨어져 용도가 없는 회로를 제거하는 작업이다.”

 

정신과 전문의인 저자는 시냅스의 가지치기 작업의 영향으로 청소년들은 가정이나 학교에서 잦은 마찰을 일으킨다고 한다. 또한, 청소년기에는 뇌하수체의 영향으로 신경전달 물질의 불안정한 분비가 일어나 이전 시대보다 더 불안정하다고 한다. 이러한 뇌 과학적 측면에서만 본다면 청소년기에는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가르치는 교육보다 의학적 이해와 치료가 더 중요하게 보인다. 청소년을 하나의 인격체로 받아들이고 대우한다고 청소년의 뇌하수체가 성인의 뇌하수체처럼 안정적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니 청소년을 불안정한 개체로 인정하고 자연상태에 버려 놓으면 되는 것일까?

 

저자는 뇌 과학적인 측면에서 공감력이라는 개념으로 논의를 확대시켜 사회적 관계에 놓인 인간으로서의 청소년의 특징과 해결책을 설명하고 있다. 그렇지만 저자의 논의는 청소년은 학교와 가정이라는 집단 속에서 작용과 반작용을 하는 개체로서의 인간이며, 저자가 이야기한 청소년기의 뇌 과학적 특성은 청소년을 이해하는 단초로 받아들여질 뿐이다.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청소년기의 뇌 과학적인 특성은 집단에 적응하지 못하는 한 개체에 대한 무수한 변명 중 하나이다.

 

청소년이 성인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개체에서 집단의 구성원으로 위상전이 하는 것이다. 집단의 구성원은 계급결집으로 이전에 형성되었던 한 개체와는 전혀 다른 특성을 가지게 된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청소년 문제가 심각해지는 것은 개체로서의 청소년의 문제가 아니라. 위상전이 과정에서 벌어지는 집단 구성원으로서의 청소년 문제다. 결국, 청소년 문제는 가정의 문제이며 교육제도의 문제이고 궁극적으로 우리 사회의 문제이다. 뒤르켐이 자살의 원인을 개인적 문제 아니라 사회적 문제라고 지적했듯이 청소년기에 발생하는 왕따 문제도 사회적 문제로 바라봐야 할 것 같다. 2012.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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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학교 오지 마! 나무그늘도서관 1
김현태 지음, 홍민정 그림 / 가람어린이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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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학년 동화 [엄마, 학교 오지 마!] 김현태 글, 홍민정 그림, 가람어린이, 2012

 

동화는 항상 유쾌한 결말을 보여준다. 특히 저학년 동화는 그렇다. 이제 글을 배우고 책읽기를 시작하는 아이들에게 재미있고 유쾌한 이야기는 무한한 상상력의 공간으로 아이들을 인도한다. 아이들은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공간에서 차가운 현실을 어렴풋이 느낀다. 동화가 소설보다 더 쓰기 어렵다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동화작가는 아이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이야기한다. 동화작가는 현실과 상상력의 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아이들을 한 걸음 한 걸음 차가운 현실로 이끌어 간다.

 

“민지네 엄마는 다른 엄마들보다 나이도 많은데다 몸매도 아주 뚱뚱했어요.”

 

참관수업을 앞둔 아이 눈에 비친 엄마의 모습이다. 동화책 속 주인공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만혼이 늘어나면서 할머니 할아버지 같은 엄마 아빠가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조금 뚱뚱하거나 늙어 보이면 어떤가? 건강을 위해서 살을 빼고 조금 젊은 옷을 입고 다니면 좋지 않은가. 부모에게는 간단한 해답이 있지만 아이들에게는 어려운 문제다. 아주 어려운 문제다. 도망갈 수도 없고 숨을 수도 없는 현실. 이 동화처럼 유쾌한 해답을 찾을 수도 있지만, 그 답을 영영 못 찾을 수도 있다.

더 높은 벽도 있다. 장애가 있거나 헤어날 수 없는 빈곤의 늪에 빠져 허덕이는 부모를 둔 아이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학교 선생들마저 학교 교육의 일부를 사교육에 맡기려는 현실에서 텔레비전에 나오는 열혈 선생이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지도 않는다. 동화처럼 현실은 유쾌하지 않다. 본격 소설이 차가운 현실만을 그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일 것이다.

요즘 동화는 본격 소설이 풍겨내는 차가운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그려내고 있다. 이전에도 역사적 맥락 위에 서있거나 사회적 이슈의 상징성을 녹아내는 생활동화도 있었다. 그렇지만 동화 속에서 사소한 일상을 만나는 것은 재미가 없다. 아이들에게 현실을 외면하는 환상 속에 빠뜨리는 것도 문제지만 아이들에게 넘을 수 없는 현실을 벽 아래서 바둥거리 것을 보는 것도 재미가 없다.

작가의 고민도 독자의 고민도 여기서 시작되고 여기서 끝나는 것은 아닐까. 2012.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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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정 2018-02-25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홍민정 작가의 동화책이 참 좋네요.^^
최근에 ˝엄마 출입금지˝라는 책을 읽었는데, 어른인 나에게도 많은 공감을 가지게 되는 내용이었어요. 사춘기를 시작하는 자녀와 엄마사이의 갈등을 생생하게 그렸고, 함께 맞추어가는 모자관계를 무척 잘 그려놓았습니다. 앞으로도 작가님의 동화책을 많이 기다리겠습니다.
 
삶을 일깨우는 옛이야기의 힘
신동흔 지음 / 우리교육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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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교양 [삶을 일깨우는 옛이야기의 힘] 신동흔, 우리교육, 2012

 

내가 신동흔 선생을 만나건 도서관에서 열린 ‘옛이야기’ 강좌에서였다. 그 후 선생이 쓴 몇 권의 책을 읽었다. 내가 듣고 읽은 선생은 옛이야기에 미친 사람이었다. 이 책에서도 보이듯이 신동흔 교수의 삶에서 ‘옛이야기’를 빼면 내놓을 만한 것이 없는 것 같다. 선생은 ‘[옛이야기’에 미친 사람이 분명하다.

‘미친’이라는 단어에는 부정적인 함의도 있지만, 생각을 조금 바꾸어보면 ‘삶을 지배한다’는 의미도 찾을 수 있다. 선생의 삶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 더 나아가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이야기다. 인간이 인식하고 사유하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 이것은 구비문학 연구자나 소설가의 주장이 아니다. 이것은 최근 인지생리학자들이 밝혀낸 인지 메카니즘이다.

최초의 이야기를 ‘누가 만들어냈는가?’에 대한 논의는 중요하지 않다. 인간은 이야기고 그 수많은 이야기 중에서 몇몇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왔고, 전승된 그 이야기 속에 어떤 힘이 있는가? 전승된 이야기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것이 중요하다. 선생은 이 책의 제목처럼 ‘옛이야기의 힘’은 우리의 ‘삶을 일깨우는 데 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삶을 일깨우고 내가 걷고 있는 인생이라는 길을 되돌아보게 하는 것은 종교적 성찰일 수도 있고, 개개인이 맞닥트리는 극한의 경험일 수도 있고 위대한 고전일 수도 있다. 고전은 읽을 능력이 있는 자로 한정되어 있고, 개인적 경험이나 종교에도 일정한 제약이 존재한다. 지금도 회자하고 있는 옛이야기만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보편적으로 인간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이야기가 전해진다는 것은 듣기와 말하기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작용하는 힘이 공감이다. 아무리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공감되지 않으면 전해질 수 없다. 선생은 ‘공감’이라는 단어 대신 神性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신성은 종교적 의미에서의 성스러움이 아니다. 인간의 본성인 人性과 짐승의 본성인 獸性수성과 대비되는 의미로서의 신성으로 인간이 도달하려고 하는 본연의 목표, 보편적인 인간의 궁극적인 지향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이 중요하다. 무조건적인 권선징악이 우리 삶의 목표일까. 권선징악이 옛이야기의 모든 귀결점은 아니다. 옛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하는 트릭스터(trickster)는 “도덕과 관습을 무시하고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신화 속의 인물이나 동물 따위를 이르는 말”로서 사기꾼 이상의 위상을 가지고 있다. 트릭스터가 옛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우리가 거기에 공감을 보내는 것은 윤리적 측면에서의 인성과 본능적인 측면에서의 수성이 인간의 본성이며 이러한 본성에서 어떤 측면이 보이느냐에 따라서 신성의 의미도 달라지는 것이다.

하나의 옛이야기는 받아들이는 사람이 어떤 측면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 있고 같은 사람이더라도 직면한 상황이나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달리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은 옛이야기의 소재, 등장인물 하나하나가 메타포적인 요소를 함의하고 있고, 이야기 전체가 하나의 알레고리로 작용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하나의 이야기로 인생을 바꿀 수는 없다. 단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을 다른 눈으로 볼 수 있게 만들어 줄 뿐이다. 이 책은 선생의 이야기에서 옛이야기로 옛이야기에서 선생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어떻게 보면 선생의 편협한 해석에 불편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한국구비문학대계]라는 거대한 원전도 있지만 이 책은 구하기도 힘들고 읽어내기도 힘들다. 옛이야기에 익숙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선생이 엮은 [세계민담전집01-한국편](황금가지)를 먼저 읽고 이 책을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먼저 원전을 읽어보고, 전문 연구자의 의견과 내 생각이 어떻게 다른지 알아보는 것도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재미일 것이다. 2012.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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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 이호준의 터키여행 2
이호준 지음 / 애플미디어(곽영완)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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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 이호준, 애플미디어, 2012

 

차도르, 아바야. 부르카. 여기에 히잡이란 단어도 있다. 언 듯 떠오는 것은 모슬렘 여성들이 몸 전체를 가리기 위해 입는 옷이다. 페르시아어, 아랍어, 사막의 베두인들의 언어처럼 어원도 다양하고 색깔도 신체를 가리는 부분도 다양하다. 직접 눈으로 보지 않고, 책에서만 읽어서는 잘 알 수 없다. 학교 시험공부를 하듯이 외우고 또 외워도 우리에겐 익숙하지 않다. 그렇다고 이것을 알기 위해서 무작정 떠난다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공부를 위해서 여행이 필요하고, 여행을 하기 위해서도 아이러니하게 공부가 필요하다. 여행지의 간단한 상식부터 조금 더 깊은, 이 책의 필자가 보여주는 것처럼, 여행지의 역사에 관한 폭넓은 공부를 하면 좀 더 다양한 것을 볼 수 있다. 이 유쾌한 여행기를 통해서 여행을 하려면 공부는 해야 된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 당나귀를 만난 건 넘루트 산을 올라가던 중이었다.”

 

이 멋진 문장 뒤에 나오는 에피소드는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산을 넘다가 당나귀를 타고 오는 노인을 본 것뿐이고 그 장면을 사진으로 담은 것뿐이다. 흔히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았던 장면 중 하나일 뿐인데, 이 장면이 저자의 가슴 깊숙한 곳에 박힌 것은 왜일까?

 

낯설음이 느껴지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이질적인 공간에서 오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이것은,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말처럼, 익숙한 세계에서 멀어져 가면 갈수록 ‘나’ 자신이 낯설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지금도 새로운 시간은 속으로 걸어가고 있다. 우리는 1초 앞의 세상을 알지 못한다. 갑자기 심장마비가 올 수도 있고, 점심 먹으러 갔다가 교통사고를 당할 수도 있고, 이번 주말에 로또가 당첨될 수도 있다. 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은 어디서 어떻게든 벌어질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단단한 시간의 고리 속에서 안정된 삶을 살고 있다고 착각을 한다. 미래를 예상하고, 주말 계획을 세우고, 점심 메뉴를 떠올리고 있다.

 

낯선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나를 둘러싼 익숙한 공간이 만들어내는 착각이 단단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나를 단단하고 박아놓았다. 굳이 인지생리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가지고 오지 않더라도, 익숙한 공간에 길들여진 ‘나’는 진짜 ‘나’가 아닐 수 있다.

 

여행은 익숙한 나를 낯설게 보는 것이다. 끊을 수 없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다른 공간으로 빠져드는 여행은 새로운 ‘나’를 발견g하게 만든다. 낯선 공간은 오감을 통해서 낯설음을 내 안으로 밀어 넣고, 우리의 오성은 언제나 새로울 수밖에 없는 시간을 감지하고, 그 흐름 속에 떠다니는 낯선 ‘나’가 발견 된다.

 

‘젊은 시절에는 여행을 많이 해라.’

‘여행보다 더 훌륭한 교육은 없다.’

 

그렇지만 준비 없는 여행은 고생이고 노역일 뿐이다. 우리의 시간은 크눌프가 방황했던 시간보다 더 빠르게 흘러간다. 헤세가 그리던 그런 삶의 여정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빠른 시간을 부여잡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하고 공부가 필요하다. 노란색 가방을 멘 유치원생들이 재잘거리며 돌아보는 박물관 견학을 여행이라고 할 수 없듯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가이드를 쫓아가는 여행을 여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 2012.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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