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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 - 서영은 산티아고 순례기
서영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걷기는 자연과 대지의 신비를 탐색하는 모노드라마이다. 그 드라마는 수고와 기쁨의 양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수고이면서 동시에 기쁨이 되는 것이 걷기이다. 다리가 수고하면 가슴에는 기쁨이란 이슬이 맺힌다. 머물러 있는 자의 시야는 정지되어 있다. 그는 풍경을 바라보지만, 그 바라봄은 피동적인 것이어서 풍경의 겉면만 보게 된다. 걷는 자는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새로운 풍경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바라봄을 스스로 만들어낸다. 대상이 거기 있어 보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씩 나아감으로써 풍경 속에 뛰어들어 풍경 전체를 살아 있는 무대로 만든다.
- 다시 길 위에서-아멘이야기127p
이럴 수가!
종교인이 아닌 내게도 ‘카미노 데 산티아고’ 이야기를 하는 걸 자주 들을 수 있다. 자연과 함께 걷기를 하기보다는 몰링malling족에 가까운지라 올레길 한 코스도 제대로 못한 상황이라 뭐라 이야기할 수 없지만 심란해지는 마음과 대리 만족으로 산티아고에 관한 책을 읽었다. 이 책도 그런 연장선에서 제법 평이 좋아 도서관에 신청을 하여 읽어보게 되었는데, 첫 장에서 문학상 심사 이야기가 나오는 걸 읽으며 ‘어? 이 서영은이 내가 아는 소설가 서영은?’ 이었다. 보통은 출판사도 살피고 글쓴이도 살피는데 웬걸 덜컥 신청하고서는(아마도 내 책이 아니어서가 아니었을까?^^) 책 표지의 느낌이나 ‘산티아고’의 길을 걷던 젊은이들이 생각나서 당연 젊은(??) 작가일거라 막연히 짐작한 모양이었다. 책을 읽으며 뒷장을 잘 뒤적이지 않는데 첫 장을 읽다말고 사진에서 작가의 모습이 보이는지 먼저 확인하게 된 책.
내가 문학을 시작할 때 내 문학이 있을 자리는, 그 낡은 구두, 제 몸을 아무리 부딪쳐도 삶이 양지로 변하지 않는, 또는 끝내 양지 쪽으로 자리를 옮길 수 없는 비통한 증거로서, 다 해진 그 구두가 있는 자리라 여겼다. 그것을 계층의 문제가 아니라, 스스로 자기의 소임을 선택한 자의 숙명 같은 것이다. 그러고 보면, 택시 기사의 말에서 섣부른 자부심을 가질 게 아니라, 부끄러움을 느껴야 마땅했다. 나의 외모는 허상을 추구해온 결과였다.
-올 것이 왔다 13p
그저 무연히 창밖을 내다보고 있노라면 ‘사는 게 왜 이렇게 재미가 없을까, 마음에 생기가 없어’하고 남의 말 하듯 중얼거리곤 했다.
-길이 나를 불렀다 21p
산티아고 순례 길을 떠나는 사람들의 공통점을 보면 대체로 ‘나의 외모는 허상을 추구해온 결과’(13p)를 돌아보며 길이 불러 떠나게 되는 산티아고 인 모양이다.
여행이라면, 준비 없이 떠나서 어떤 돌발사건을 만난다 해도 그것대로 겪어보는 것이 나의 무지막지한 방식이었다. 하물며 ‘카미노 데 산티아고’는 여행이 아니었다.
나의 준비는 단 한 가지, 자신에게 ‘고독하라, 죽을 만큼 고독하라’고 일러주는 것이었다.
고독은 침묵을 요람 삼아 홀로 자존自存하는 상태이다. 흙 속에 파뭍혀 살지고 있는 고구마처럼 ‘되어져가며’ 사는 것이다. 크나큰 섭리의 품에 안겨, 스스로 넘치도록 강하고 편안한 것이다.
-고독하라, 죽을 만큼 35-36p
여행의 준비라고는 참으로 심플하라. 죽을 만큼의 고독이 준비물이라...
그런데 처음 길을 나서기 전에는 괜찮았는데, 그 후 읽는 내내 불편하다
‘내가 살아 있는 것도 기쁘고, 내가 이곳에 와 있다는 것도 기쁘고, 자연의 이런 속살을 볼 수 있다는 것도 기쁘고, 소똥 말똥도 기쁘고, 개돼지도 기쁘고.....내가 소똥이 되어도 기쁘고....’ 기쁘다 앞에 무엇을 갖다 붙여도 기쁘고, 나를 무엇에 갖다 붙여도 다아 기쁘다.
이슬라에서_ 네 번째 꿈 268p
대체
이 늙은이의 아집이 길의 끝에서 어찌 되나 보자 싶은 심정으로 읽게 됐다.
길을 가는 중에 ‘성령에게 들리어진’ 그의 모습을 보며 간증을 하는 책으로 보는 크리스천이 많이 있지만 비종교인이 나로서는 ‘성령에 들리어진’ 사람이 세상의 작은 미물(微物)도 예뻐 보이면서 뻣뻣하게 길을 따라 나서더니 길을 가는 내내 동행자에게 여유 없는 마음을 가지면서 내내 까칠하게 구는 것이 참말로... 하면서
혼자 여행을 떠날 때가 많아 동행자가 있으면 좋겠는데 하고 생각했던 적이 많았는데, 치타의 입장으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됐다.
산티아고에서의 40일 이후 기도로 40여 일을 보내고도 힘들었던 모자 속 이야기를 다 털어내지 못할 만큼의 어깨에 앉은 무게가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로서가 아니라 인간 서영은의 속내를 많이 들여다보게 된 이 책 불편했다.
단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던 책인데 오랫동안 복잡한 생각을 하게 한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