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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각 각신들의 나날 2
정은궐 지음 / 파란(파란미디어) / 2009년 7월
평점 :
“행복할 수 있겠소?”
그녀의 눈이 뜻을 알 수 없는 그의 질문을 되물었다.
“두 사람이 각자 자신의 이름으로 돌아가면 당신은 행복할 수 있겠소? 집안에 갇혀 나의 아내로만 살아가는 것이 행복하겠소?”
이 사람의 아내로만 사는 것. 이 사람을 위해 거울을 보고 화장하고 치장을 한다는 건 분명 설레는 일이다. 이 사람에게는 세상의 어떤 여인들보다 아름답게 보이고 싶은 욕심 또한 감출 수가 없다. 이 사람 앞에 이런 사내 차림으로 서는 건 싫다. 하지만 그의 물음에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선준이 답 듣기를 포기하고 앞서 걷기 시작하였다.
윤희가 그의 뒷모습을 향해 최선을 다해 대답하였다.
“당신 품에 안길 수 없는 지금도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선준이 뒤돌아 뒷걸음으로 걸었다. 윤희와 마주 보고 걸으며 만족한 듯 환하게 웃었다. 그의 미소를 통해 깨달았다. 이 사람은 지금 너무 많은 희생을 하고 있구나. 너무 오래 기다리고 있구나. 이런 사람의 아내로만 사는 거, 행복할 수 있다. 완벽하게 행복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보다 행복할 수는 있다.
“아랑, 확실할 수 있습니다. 분명 행복하리라고. 적어도 세상의 어떤 여인들보다는 행복할 수 있다고.”
“당신의 그 답이 나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내로 만들어 주었소.”
139-140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에서보다 이 2권에 나오는 내용이 성별을 바꿔 사는 이와 그와 혼인한 관계인 이의 고뇌가 가장 잘 담긴 부분이라 할 수 있다.
현대를 배경으로 한다고 해도 황당한 설정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가끔 영화에서나 있음직한 여장남자나 남자여자들의 이야기가 가끔 있긴 하지만 말이다.
하긴, 조선시대 중 고민하는, 깨어 있는 정조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니 가능하다. 조정에서 노,소론으로 시,벽파로 싸우는 와중에 새로운 정치를 펼치고자 하는 정조의 고민을 알 수 있는 부분도 인상적이다.
“상감마마, 소신을 이리 급히 입궐시킨 연유가 무엇이옵니까?”
“잠을 잘 수가 없어서.”
만약에 말 그대로 잠을 잘 수가 없어 부른 것이었다면 선준은 진정으로 화를 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은 왕의 등의 지나치게 어지럽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무슨 뜻이온지......”
“선준아, 이 규장각이 그리도 쓸모없는 것이냐? 어째서 나의 편이길 바라는 나의 신하들조차 나를 반대하는지 알 수가 없구나.”
왕도 청벽서의 정체를 알게 된 것 같았다. 선준은 왕이 보는 곳과는 다른, 궐 밖의 하늘을 보았다. 그의 눈 끝에는 수많은 궐내각사와 궐외각사가 있는 듯하였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헌 것은 새것을 경계하고, 새것은 헌 것을 배척하는 것은 변화가 정한 이치이옵니다.”
왕이 돌아서서 선준의 옆얼굴을 보았다. 그는 무너짐 없이, 심지어 웃음까지 머금은 채로 왕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다른 관청이 경계하지 않고 불만을 가지지 않는 규장각이라면 지금이라도 없어지는 것이 낫지 않겠사옵니까? 소신 또한 다른 관청으로 옮겨지면 규장각을 향한 경계를 늦추지 아니할 것이옵니다.”
찰나의 순간 동안 선준이 보았던 방향으로 움직였다가 돌아온 왕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너도...... 꿈을 꾸고 있느냐? 선준아, 너와 나는 꿈을 꾸는 것이냐? 이대로 꿈만 꾸다가 끝날까, 두렵지 않느냐?”
“꿈조차 꿀 수 없던 시절도 숱하게 있질 않았사옵니까. 우리 소신들은 꿈이나마 꿀 수 있으니 그 어떤 임금의 신하들이 소신들보다 행복하겠사옵니까. 상감마마께오서는 죄인의 아들에게 꿈을 꿀 수 있는 바탕을 주셨사옵니다.”
왕은 비록 윤희의 어깨엔 손을 올릴 수 없었지만, 선준의 팔은 잡고 기댈 수 있었다.
“나의 바탕은 너희들이다. 내가 꿈을 꾸고자 너를 살려 두는 것이야. 그래야 나도 살기에.....”
왕은 오래도록 선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그러다가 멀어졌을 때는 평소의 왕으로 돌아와 있었다. 왕이 한쪽 눈과 한쪽 입술을 슬쩍 올리고 말하였다.
“선준아, 장안이 시끄럽도다. 시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도다. 그래서 잠을 잘 수가 없도다. 잠을 잘 수 없으니 꿈을 꿀 수 없도다. 그러니 네가 조용히 시켜 줘야겠다.”
이번에는 선준이 근심 어린 고개를 떨구었다.
“만약에 조용해지지 않으면 나도 더 이상 어쩔 수가 없다. 노론인 네 손에 소론인 두 녀석을 쥐어주마.”
350-352
이 대목을 읽으며 지금은 과연 "꿈 꿀 수 있는 시대인가?"고민고 해보고...
성균관 유생일 시절보다 더 정신없이 바빠 집에 갈 시간도 없는 규장각 각신들도 나름, 생활은 하고 연애도 한다. 하긴 [하버드의 공부벌레들]이라고 공부만 하는 건 아니니까...
퓨전 스타일이라 글도 현대글로 읊어내고, 명랑한 터치로 이야기하고 있어서 수월하게 읽힌다. 성균관에서도 활약하던 가랑, 대물, 걸오, 여림 4인방의 활약이 이번에도 볼 만하다. 상감에게 더 가까이 있을 수 있어 직언을 할 수도 있고, 홍벽서, 청벽서의 색출에도 맹활약을 한다. 청나라 사신으로 보내지는 뒷이야기도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