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베개 - 장준하전집 1
장준하 지음 / 세계사 / 199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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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가 지금까지 보아 온 한국의 위정자들은 태반이 (궁극적으로)사리사욕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었고, 도대체가 뒤끝이 깨끗한 인간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 적어도 내가 보기에 - 깨끗한 인물, 오로지 공익을 위하여 헌신하였던 인물을 지금까지 두 사람 발견하였는데, 그 중 한 명이 여운형이고 나머지 한 명이 장준하이다.

 

 이 책은 장준하가 스물일곱 살 때 왜적의 학도병으로 끌려 갔다가 탈영하여 광복군을 찾아가고, 이후 해방공간에서 김구를 위시한 임시정부를 수행하기까지 약 2 년간의 체험을 기록한 수기이다.

 그가 학도병에 끌려간 것은 결혼한 지 불과 열흘만의 일이다. 중국으로 파병되어 서주에서 훈련을 받다 탈영을 한 그는, 이 탈영이 학도병으로 끌려 나갈 때부터 계획된 것이었으며, 굳이 중국으로 파병된 것도 자신의 의지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니까, 중국으로 가서 탈영을 한 후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나 광복군을 찾아가 독립에 기여하겠다는 생각을 진작부터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게 사실이라면 참 대단한 사람이라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가 학도병 시절 목격한 다음 이야기를 보면 실소를 금치 못하게 된다.

 

「더욱 내가 괴로워했던 일은 한국사람들의 그 기막힌 행동들이었다...

 ...고참병들인 일본놈들이 외출갔다 돌아오면 매식으로 배부르니 별로 병영음식이 먹고 싶지 않아 계란을 깨어서 비벼 몇 젓가락 먹다 말고 선심 쓰듯 던져주는 밥 한 그릇을 더 받아먹고자 혈안이 된 우리 동료들, ...매식을 하고 들어온 그들이 자기 몫을 개, 돼지에게 던져주듯이 던져주는 그 밥 한 그릇을 우르르 몰려들어 받아먹는 그 치사하고 밸없는 꼴들.」

 

 내가 듣기로 당시에 저런 사람들이 꽤 많았던 것 같다. 지금도 우리나라엔 잠재적인 저런 사람들이 꽤 많을 것이다. 나부터 좀 반성을 해야겠다.

 아무튼 장준하는 동지 몇 명과 함께 왜군부대에서 탈영을 하게 되었고, 온갖 죽을 고비를 넘긴 끝에 6천 리 길을 걸어 중경 임시정부에 도착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온갖 에피소드들이 펼쳐지는데, 나는 여기서 당시에 왜군을 상대로 매춘부 일을 하면서 정보활동을 했던 여성 공작원들도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지금 우리는 참 좋은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당시 중국군의 실태에 대한 이야기도 상당히 흥미로웠는데, 이는 그들이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우선은 쪽발이들과 전쟁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내전이 횡행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떠돌았다.

 

「그때 중국군에는 <호른부땅빙(好人不當兵)>이란 말이 유행되고 있었다. 이 말은 <좋은 사람은 병정에 가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바꾸어 말하면 병신이나 바보만이 병정이 된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돈 있고 빽이 있으면 군대를 가지 않았다고 한다.

 장준하는 임시정부에 도착하기 전까지 여기저기서 독립운동 단체들을 접하게 되는데, 그 단체들의 실상을 알고 난 후에는 매번 실망을 하게 된다. 어느 단체든지 제대로 독립운동을 하는 꼴을 볼 수가 없고 그저 허송세월만 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것이 싫어 궁극적으로 찾아간 임시정부에서도 그러한 습성은 똑같았다고 한다. 하는 일이 하나도 없고, 오히려 젊은이들이 한 무더기나 오니까 서로 자기 당파에 끌어들이려고 작업을 하더라는 것이다. 장준하는 이런 꼴이 싫어서 동료들과 함께 무력시위까지도 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임시정부에서도 실망을 한 장준하는 장안의 광복군 부대로 가서 미군과 합동 침투훈련을 받기로 한다. 그 훈련이 거의 끝나갈 즈음 김구가 위로차 시찰을 왔는데, 이때 김구의 담력을 알 수 있는 에피소드가 하나 발생했다.

 

「폭발은 이들의 바로 뒤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폭발물은 단순한 폭약의 매몰로서, 어떤 수훈생이 얼마나 놀라나 하는 것을 측정하기 위해 미리 장치해 놓았던 것을 계획대로 폭발시킨 것뿐이었다.

 이 폭발에도 김구 주석께선 태연히

 "허허...이게 무슨 소린고?" 하실 뿐이었다. 그러나 독립군 총사령관인 장군이 에크! 하며 들고 있던 식기를 놓칠 정도로...」

 

 3 개월간의 훈련 후 서울로 낙하 침투하려던 계획은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이후 장준하는 김구의 수행원으로서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고, 이후 20일 정도의 이야기가 진행되다 이 책은 끝이 난다. 익히 알다시피 당시의 임시정부에도 분열이 있었다. 아니, 오히려 심화되었다.

 

「환국한 임정의 각료들 안에서까지 일치구국의 염이 허사이면, 또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이 형세, 이 난국에서 집중된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단 한마디도 제시하지 못했다는 것이 무엇보다 가슴아픈 일이었다.

 각료회의는 뻔한 결과를 가지고 산회되었다. 김구 주석의 말씀처럼, 과연 여러 파, 여러 층을 한보따리에 싸서 내던지고 온 것인가? 그보다는 오히려 끼고 들어온 파벌의 보따리를 더 크게 벌이고자 하는 결과일 뿐이다.」

 

 장준하가 본 우리의 독립운동사와 정치사는 온통 대립과 반목으로 점철되어 있는 것이었다. 단결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장준하가 이 수기를 완성한 때는 1971년도인데, 당시의 정치 상황에 개탄을 하며 경고의 차원에서 이 책을 펴낸다고 밝히고 있다.

 

 '돌베개'는 장준하에게 하나의 이상이며 목표이자 짐이었다. 본문을 보면 각 사연마다 자신의 감정을 구구절절 적어놓고 있는데, 가끔은 그것이 지나치게 절절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었다. 또한 장준하는 평북 의주 출신으로서 학도병으로 끌려가 중국으로 떠난 이후 가족을 일절 보지 못하였다고 밝히고 있는데, 해방 후에 가족과 상봉을 하였는지의 여부가 나와 있지 않아 궁금증이 해소가 되지 않았다.

 아무튼 이렇게 나름 깨끗하고 고결한 삶을 산, 고생도 많이 한 사람이 졸지에 의문의 사고사를 당하는 현실은 그리 옳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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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지도 - 동양과 서양, 세상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선
리처드 니스벳 지음, 최인철 옮김 / 김영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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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원주의 사회니 문화 상대주의니 하는 말들은 요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매우 익숙한 용어일 것이다. 이러한 용어들은 사실 득세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며, 백 년은 커녕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세상은 이분법적인 사고가 지배하고 있었다 - 적어도 메인스트림인 서구의 경우는 확실히 그랬다. 그러다가 최근 들어 동양적인 일원론적 사고 방식을 기반으로 하는 다원주의가 대두되기 시작하였고 심지어 가스통 바슐라르(1884-1962)는 "합리주의가 획득했다고 믿은 객관성이라는 것도 결국 주관적인 오류의 하나일 뿐"이라고까지 말했다. 이 말은 곧 서양 철학자들이 줄기차게 탐구해온 객관적 진리라는 것이 백 날 찾아봤자 그것을 객관적이라고 믿고 주장하는 순간 그것을 객관적이라고 믿는 - 혹은 믿고 싶은 - 철학자 개인의 주관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 리처드 니스벳 역시 이러한 다원주의의 관점을 가지고 있음이 확실해 보이며, 절대적인 진리에 대한 믿음을 - 완벽하지는 않지만 - 최대한 배제하는 자세로 저술에 임하였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일단 책을 받아들고 본문을 대충 훑어보다가 어느 대목을 보고 순간 놀랐다. 그 대목은 바로 저자가 본문 중에서 역자인 최인철 교수의 이름을 언급하는 부분이었는데, 그 언급의 농도가 단순한 인물 소개의 수준이 아닌, 같이 연구를 수행한 동료로서 상당한 연대감을 보여주는 류의 것이었기 때문에 적이 놀랐던 것이다. 처음에 그냥 책을 받았을 때에는 표지만 보고 그저 '흥미롭겠구나'하는 생각 정도만 가지고 있었는데, 본문 중의 역자 이름을 보고 나니 책 자체에 대하여 대단한 신뢰감이 생겼다. 이는 꼭 원서가 아주 좋은 책일 것 같다는 신뢰감이기 보다는 번역의 충실함에 대한 기대감 및 신뢰감이었던 것이다. 역자가 저자와 단순한 친분만 있어도 번역이 훨씬 충실해 질텐데 하물며 역자가 저자의 제자임에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스스로 적지 않은 책들을 읽어 보았다고 자부하는 터에 번역과 교정이 엉망이라서 책 전체를 망친 경우를 상당히 많이 봐왔기 때문에 이러한 생각은 더해졌다.

 

 저자가 지나친 범주화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으므로 나 역시 이 책에 대한 도식화나 범주화는 지양하고 되도록 자연스럽게 글을 전개하고자 한다.

 저자는 스스로의 출신성분(?)을 극단적인 서양 사람, 즉 미국에 사는 앵글로 색슨 청교도의 범주에 두고 동양과 서양 간 사고 방식의 차이와 그 원인에 대하여 다양한 연구 실험 결과들을 가지고 증명을 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각 문명권 간의 사고 방식의 차이는 다양한 분야에서 나타나며, 그 원인 또한 다양하다. 그리고 그는 그 원인과 사고 방식이 순환하여 서로 영향을 줌으로써 항상성을 지님을 서론에서 주장하고 있다.

 

「동양과 서양이 여러 분야에서 나타내는 차이는 '항상성'을 가지고 있다. 즉, 특정한 사회적 행위들은 특정한 세계관을 가져오고, 그 세계관은 특정한 사고 과정을 유발하며, 그 사고 과정은 역으로 원래의 사회적 행위들과 세계관을 다시 강화시킨다.」

(20쪽)

 

 이후 전개되는 본문에서는 수없이 많은 실증적 연구 결과들이 인용되었으며, 대부분이 흥미로운 것들이었다. 특히 실험 방법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실제 실험에 사용된 갖가지 문제들이 제시되었는데, 내가 그 문제를 풀어보면 십중팔구는 동양인들의 결과와 일치하여 신기하기까지 하였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실험 절차에 대한 설명을 읽는 도중에 내가 생각한 것은 '같은 재료로 된 물체'였다.

 

「'코르크'로 '피라미드'를 만들어서 보여주고 사람들에게 그것이 닥스(Dax)라고 알려주었다. '닥스'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실험자가 임의로 만들어낸 이름이다. 그런 후에 두 물체를 보여주었는데, 그 중 하나는 모양은 앞에서 본 피라미드와 같았지만 재료는 코르크가 아니라 하얀 플라스틱이었다. 다른 하나는 재료는 같았지만 모양은 피라미드가 아니었다. 그러고 나서 사람들에게 어떤 것이 '닥스'인지 고르게 했다. 그 결과 매우 놀랍게도 미국인들은 주로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물체를 선택했고, 일본인들은 '같은 재료'로 만들어진 물체를 선택했다.」

(83쪽)

 

 그밖에도 자존감의 차이에 대한 논의 같은 것이 대단히 흥미로웠으며, 다음과 같은 이야기는 실로 공감이 되었다.

 

「동양인들은 진보보다는 '회귀'를 추구하고, 극단적인 것들 사이의 '중용'을 추구한다. 그리고 동양의 유토피아는 '과거'에 존재하며, 인간의 소망은 '현재 상태에서 과거의 완전한 상태로 회귀하는 것'이다.」

(104쪽)

 

 중국인들은 항상 황제나 요순우탕을 그리워 하며 '격양가'를 다시 부르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 대부분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 - 요임금 시절의 태평성대는 그렇게도 절실히 원하는 "과거의 완전한 상태"임은 재론의 여지조차 없다.

 한편 위 인용문에서 "중용"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였는데, 이는 저자가 동양 문화의 특징 중 하나로 계속하여 언급하는 용어이고, '대부분의 우리'도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이 '중용'은 동양인이 아닌 저자도 매우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그 증거는 오로지 이 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책의 서론 본론 에필로그 등 모든 곳을 둘러보면 저자가 자신의 주장만이 옳다고 강력하게 어필하기 보다는 다양성을 존중하는 관점에서 - 어떻게 보면 다소 소극적으로 - 주장을 펼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는 결론 역시 서양이 먹는다, 동양이 먹는다 하는 식의 이분법을 무시 - 할 때조차 온건한 입장으로 '그것들도 나름 타당하지만'하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 하고 두 문화는 결국 수렴되리라는 주장으로 마무리짓고 있다. 이 주장은 지극히 당연하고, 타당하다. 그리고 현실이 또한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저자가 인용한 연구 결과들은 실로 다양하였으며, 그것들을 검토하느라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었다. 동서양 사고 과정의 차이를 과학적으로 규명하여 집대성한 최초의 저서라는 의의 말고도 앞으로의 방향 제시의 역할을 꽤 훌륭하게 수행해냈다는 점에 이 책의 또다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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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두교 : 왜곡된 아프리카의 정신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41
라에네크 위르봉 지음 / 시공사 / 199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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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제목은 '부두교; 왜곡된 아프리카의 정신'이다. 제목만 봐서는 부두교 자체가 왜곡되어 있는 - 부정적인 종교라는 것인지 사실 별 문제가 없는데도 왜곡된 모습으로 알려져 있는 종교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답은 후자이다. 나는 사실 처음에 책 제목을 보고 전자쪽으로 생각을 했었다. 나 역시도 이분법적이고 닫힌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중 하나였나보다.

 저자는 프랑스 사람인데, 그래서인지 한때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아이티의 부두교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원래 나는 아프리카의 원조 부두교를 알고 싶어서 책을 읽은 건데 그 점에는 다소 실망을 했다.

 아무튼 아이티의 부두교를 설명하려다 보니 그 섬의 역사에 대한 서술이 선행되었는데, 정말 안타까운 것은 아이티 원주민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16세기 초, 아이티에는 130만 명의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으나 강제노동, 학대, 질병 등으로 인하여 15년만에 인구가 6만 명 미만으로 격감하였다고 한다. 비유를 해보자면, 135만 명이 사는 대전광역시에서 중구 대흥동 주민들만 빼고 죄다 몰살 당한 것과 마찬가지다. 정말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 자리에 흑인 노예들이 들어오게 되었다. 여기는 내가 얼마 전에 읽은 흑인 노예에 관한 책과 겹치는 부분이 많았다.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이 흑인들을 잡아다 팔았다는 내용이 나올 때 유독 나의 눈길을 끈 문장은 다음과 같다. "데피 란 기넨, 네그 라이 네그(기니에서 이미 검둥이들은 검둥이들을 중오했다)." - 크레올語로 된 격언

 부두교는 기괴한 흑마술(이를테면 좀비 만들기)을 사용하고 우상을 숭배하며 사람을 제물로 바친다는 등의 왜곡된 이미지로 알려져 있다. 저자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그러나 부두교도에게 부두교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마술이나 주술과 동일시되지 않는다. 둘을 혼동하는 사람은 주로 외부 관찰자이다. 그들은 언뜻 듣기에는 '현실적인' 부두교도의 말에 현혹되고 종교체계의 위계질서 개념에 몰두해 자신들의 종교가 억압하는 것을 부두교에 투영하고자 했던 것이다.」

 

 가톨릭 교도들이 자기들 내면에 억눌려 있던 욕구를 부두교에게 뒤집어 씌웠다는 것이다.

 사실 부두교는 우리의 무속 신앙과 다른 점이 거의 없었다. 그들은 죽은 조상들을 숭배하고 그들에게 기원을 올리는데, 이 점은 우리랑 다를 게 하나도 없다. 우리에게 샤먼(무당)이 있는 것처럼 부두교에도 '운강'이 있다. 둘의 개념은 완전히 똑같다. 그러니까, 그 자신이 매개체가 되어 신과 소통하고 일반인들에게 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부두교도들은 정령(르와)들을 신봉하는데, 우리나라도 터줏대감이니 제석님이니 서낭신이니 하는 수많은 신들이 있다. 그들과 정령들은 전혀 다른 점이 없다. 책에는 부두교의 의례 절차가 대강 나와 있었는데, 이도 내가 구전문학 수업 때 배운 무당의 굿놀이 절차와 유사한 점이 많았다. 한마디로 부두교와 우리 무속 신앙은 거의 완전히 일치했다. 다만 한가지 다른 점은 부두교의 경우 일반 신도들도 신이 들릴 때가 많으며 좀 더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뭐 일반인이야 신 들릴 일은 극히 드무니까 말이다. 또한 무속을 그렇게 심하게 믿는 사람도 별로 없다.

 부두교는 그동안 무수히 탄압을 받아왔는데, 그때마다 가톨릭의 등 뒤에 숨어서 명맥을 유지하였다. 탄압의 주체가 가톨릭인데 그 뒤에 숨었다는 것이 일견 아이러니컬하기도 하다. 부두교도들은 가톨릭을 믿는 척 하면서 마음 속으로는 르와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마리아 그림을 앞에 두고 기도하면서 여자 르와를 떠올리는 식이다.

 

 서두에 이야기했지만 아프리카 본토의 부두교를 별로 다루지 않아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프리칸들의 부두교가 동아시아의 무속신앙과 거의 일치한다는 점은 참으로 신기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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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
해럴드 램 지음, 강영규 옮김 / 현실과미래 / 199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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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는 해럴드 램이라고 1962년도에 작고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늦어도 20 세기 중반쯤에 씌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일견 책이 명저이기(가치가 인정되었기) 때문에 1998년도에 이르러 한국에서 번역 출간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칭기즈칸은 빈털털이 - 이다 못해 쫓겨 다니는 - 신세로부터 전세계를 정복한 황제로 벼락출세한 사람이다. 여기서 주목할만한 점은, 칭기즈칸이 누군가의 후원을 받아 성장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 힘만으로 성공한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그도 사람들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들은 칭기즈칸과 동등한 위치, 혹은 부하로서 도움을 준 것이지 칭기즈칸을 능가하는 힘을 가진 사람이 그를 도와준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칭기즈칸을 경외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하나로 충분하다.

 그리고 칭기즈칸의 용인술은 자못 훌륭하였다. 그는 부하들의 특성을 파악하여 적재적소에 배치할 줄을 알았다.

 

「테무친이 어떤 부하를 두고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예수타이(Yessoutai)만큼 용감한 사람은 없어요. 그와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은 매우 드물어요. 그러나 그는 자기가 오랜 행군에도 지치지 않고, 허기와 갈증을 느끼지 못하니까, 다른 장교와 병사들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그에게는 높은 자리를 맡길 수 없는 겁니다. 장수들이 부하들의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허기와 갈증에 대해 생각할 수 있어야 해요..."」

 

 우리나라의 - 대부분이 쓰레기 같은 - 군대 지휘관, 간부들도 이러한 사실을 깊이 좀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책을 보니까 저자는 아시아 지역의 역사에 대하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미국인이 날고 기어봤자 동양의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기는 힘든 법이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한편 금나라 관리들은 이 새로운 임금에게 바칠 조공 목록과 함께 칭기즈칸에게 특사를 보냈다......그러나 칭기즈칸은 뻣뻣이 서서 특사에게 물었다.

 "새로운 황제의 이름이 뭐요?"

 "위왕입니다."」

 

 자고로 중국에서 당대의 황제는 항상 '천자'나 '폐하'로 불려왔을 뿐 '위왕' 같은 칭호로 불린 적은 단 한번도 없다. '위'의 칭호는 그 황제가 죽고 나서 시호로 추증되어 후세에서 그렇게 불리는 것일 따름이다. 유럽 사람들이야 재위 기간에도 '리처드'니 '루이'니 이름을 내걸고 있었겠지만 중국의 경우는 다르다는 말이다(물론 몽골족인 칭기즈칸은 재위시에도 칭기즈칸이라고 불렸다).

 아무튼 칭기즈칸은 유목국가들을 통일한 후 중국을 유린하고 서쪽으로 뻗어나갔다. 전투마다 연전연승. 생각해 볼수록 신기하다. 최신무기를 갖춘 것도 아니고, 병법을 체계적으로 연구해 본 적도 없는 오랑캐 칭기즈칸이 어떻게 전세계를 유린할 수 있었을까? 내 개인적인 생각인데, 이는 몽골족의 특수성에 의해 가능했던 일로 보인다.

 물론 아직도 몽골족이 전투에서 상승(常勝)하였던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그들이 멀리까지 뻗어나가서도 별 무리없이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조금 알만하다. 원래 군대란 본거지에서 멀리 나가 있을수록 불리해지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게 불리해지는 가장 큰 원인은 보급의 문제 때문인데, 몽골족은 항상 보급품을 현지 조달했기 때문에(한마디로 약탈) 보급 때문에 골치를 썩을 일이 없었다. 그들은 아쉬움이나 망설임없이 파괴를 일삼는 민족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또한 몽골족은 태생적으로 사막 기후에 적응되어 있는 종족이었기 때문에 중앙아시아의 험난한 산맥을 넘거나 서남아시아의 사막 지대를 행군할 적에도 별다른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책에 보면 유일하게 - 인도 지역만은 무더위를 견디지 못해 공격을 중단했다고 한다.

 칭기즈칸 자체도 매우 신속한 사람이었다. 이슬람을 정복할 때의 기록을 보면, 도시 하나를 점령한지 불과 두 시간만에 초스피드로 약탈을 끝내고는 미련없이 다른 도시를 치러 갔다고 한다.

 

 책을 읽어보니 칭기즈칸은 아주 잔인한 사람이었다. 본문을 인용해 보겠다. 

「(칭기즈칸은)어느 날 자신의 텐트에서 한 몽골군 장교에게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자네는 인간을 가장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폐하께서 다스리는 드넓은 초원, 청명한 날씨, 최고의 준마, 토끼 사냥용 매, 이런 것들이 아닐까요?" 장교는 평범한 대답을 했다. 

"아니야. 이 세상 최고의 일은 적의 패배, 적의 죽음, 적의 가족들의 울음 소리를 직접 확인하는 것이지." 이것이 칭기즈칸의 최대 행복이었다.」

  악마다. 책에는 이슬람 도시들에 대한 대학살의 기록과 함께 다음과 같은 기록도 있다. 

「...몽골인들의 캠프는 사람을 찾아서 살육하기 위한 캠프였다. 그들은 너무나 많은 무고한 주민들을 잔인하게 학살했다... ..."나의 특별한 지시가 없는 한, 적들에게 부드러움을 보여 주는 모든 행위를 금하겠다. 두려움만이 그들을 고분고분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칭기즈칸은 진정한 야인이었다. 일반적인 동양 군주들은 중국의 수도를 점령하여 왕조를 멸할 경우 스스로 칭제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고 싶어하는 법인데, 칭기즈칸은 금을 정복하고는 아무 미련없이 몽골로 돌아갔다. 그는 제국을 건설한 후에도 따로 궁전을 짓지 않고 단지 천막을 크게 지었을 뿐이며, 죽을 때에도 전쟁을 나갔다가 진중에서 병으로 객사하였다. 저자는 야인 칭기즈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그는 가족과 몽골인들에게 주고 싶은 것들을 얻기 위해 세계를 정복했다. 칭기즈칸은 이런 목적으로 전쟁을 일으켰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목적을 쟁취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하지 않는 것들은 모두 파괴해 버렸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이용하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야인이었던 칭기즈칸은 고향 땅의 산속에 묻혔다. 능묘의 위치는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의 무덤은 아주 조촐하였을 것이 확실해 보인다. 이제는 흔적조차 없어진 칭기즈칸의 무덤. 칭기즈칸은 최후까지도 야인이었다!

 - 오탈자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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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 : 세계의 기둥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14
로베르 들로르 지음 / 시공사 / 199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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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크거나 강한 생물에 매력을 느낀다. 코끼리는 크고 강하다. 특히 아프리카코끼리(Loxodonta africana) 같은 경우는 더욱 그렇다. 때문에 예전부터 찜해놓고 있었던 책을 - 이번에 사 보게 되었다.

 

 책의 서두에 저자인 로베르 들로르는 문학박사이자 이학박사라고 밝혀져 있으나 파리8대학에서 중세의 역사를 가르치곤 하였다는 것을 보면 이학보다는 인문학 쪽에 더 전문성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따라서 이 책 역시 코끼리의 생태보다는 코끼리와 인간 사이의 관계와 그 관계로써 만들어진 역사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나는 여기서 다소 실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과의 관계라면 카리스마 있는 아프리카코끼리보다는 유들유들한 인도코끼리가 훨씬 더 친밀하고 돈독하니까 자연히 아프리카코끼리는 비교적 적은 비중으로 다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책은 코끼리의 생태에 한 장, 코끼리와 인간 사이에 일어난 역사 서술에 세 개의 장 및 여러 편의 발췌문을 할애하고 있다. 제1 장인 '코끼리의 가계'에 따르면, 매머드는 인도코끼리와 골격 구조가 비슷하지만 덩치는 아프리카코끼리 정도 크기이며, 최장 70센치에 이르는 털로 덮여 있고 무게 125키로에 길이가 5미터나 되는 상아를 한 쌍 가지고 있었다.

 아시아에서는 살아있는 코끼리를 길들여서 가축화시키는 데 애를 쓴 반면 아프리카에서는 코끼리를 사냥해서 고기와 상아를 얻는 데 주력했다. 이는 인도코끼리가 유순하고 영리한 반면 아프리카코끼리는 변덕이 심하고 다소 멍청한 데 이유가 있는 듯 하다. 물론 아시아인들은 문명이 발달했지만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석기시대의 생활을 고수하였던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최근의 코끼리 개체 수 감소에는 상아에 대한 인간의 탐욕이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인도코끼리는 상아가 작다).

 코끼리에 대한 보호의 움직임은 생각보다 일찍 시작되어 프랑스에서는 1905년도에 이미 '코끼리애호인협회'가 창설되었다. 저자는 보호와 수렵 사이에서 나름대로 균형 잡힌 시각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며 - 물론 보호를 더 부르짖기는 하지만 - 수렵을 정당화하는 자들의 주장도 그대로 실어놓고 있다.

 

「...백인에게 코끼리는 오랫동안 단지 상아를 제공하는 동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흑인에게 코끼리는 오로지 고기, 그것도 운이 좋으면 독을 바른 투창 하나로 가장 많은 고기를 얻을 수 있는 동물로 인식되어 왔다...

 ...진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은 코끼리 사냥의 금지를 요구했고, 멀리서 코끼리들에게 열렬한 사랑을 보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실질적 행동은 회피하고, 그저 시늉만으로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서구의 관념론이 취해 온 전형적인 태도이며, 모렐이 완벽한 본보기였다...」

 

 구라파 사람들은 지금껏 대부분의 환경 파괴를 자신들이 저질러 놓고는 이제 와서 위선을 부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코끼리에 대한 갖가지 정보들이 넘쳐난다. 상아의 거래를 금지하는 국제조약이 체결되자 매머드의 화석화된 상아들이 각광을 받고 있다든지, 아시아에서 신격화되고 있는 코끼리(브라만교의 가네시 神, 흰코끼리 등)라든지, 전쟁에서 활약하였던 코끼리들의 기록이라든지 하는 다양한 모습의 코끼리를 보여준다(한니발의 코끼리 부대를 그린 삽화를 보면 전부다 아프리카코끼리던데 과연 정말 그랬을지 궁금하다).

 

 책을 읽고 나니 웬지 코끼리가 친근감 있게 느껴지는 것 같다. 물론 이런 감정이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다.--; 번역문은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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