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즈칸
해럴드 램 지음, 강영규 옮김 / 현실과미래 / 1998년 4월
평점 :
품절


 저자는 해럴드 램이라고 1962년도에 작고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늦어도 20 세기 중반쯤에 씌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일견 책이 명저이기(가치가 인정되었기) 때문에 1998년도에 이르러 한국에서 번역 출간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칭기즈칸은 빈털털이 - 이다 못해 쫓겨 다니는 - 신세로부터 전세계를 정복한 황제로 벼락출세한 사람이다. 여기서 주목할만한 점은, 칭기즈칸이 누군가의 후원을 받아 성장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 힘만으로 성공한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그도 사람들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들은 칭기즈칸과 동등한 위치, 혹은 부하로서 도움을 준 것이지 칭기즈칸을 능가하는 힘을 가진 사람이 그를 도와준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칭기즈칸을 경외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하나로 충분하다.

 그리고 칭기즈칸의 용인술은 자못 훌륭하였다. 그는 부하들의 특성을 파악하여 적재적소에 배치할 줄을 알았다.

 

「테무친이 어떤 부하를 두고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예수타이(Yessoutai)만큼 용감한 사람은 없어요. 그와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은 매우 드물어요. 그러나 그는 자기가 오랜 행군에도 지치지 않고, 허기와 갈증을 느끼지 못하니까, 다른 장교와 병사들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그에게는 높은 자리를 맡길 수 없는 겁니다. 장수들이 부하들의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허기와 갈증에 대해 생각할 수 있어야 해요..."」

 

 우리나라의 - 대부분이 쓰레기 같은 - 군대 지휘관, 간부들도 이러한 사실을 깊이 좀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책을 보니까 저자는 아시아 지역의 역사에 대하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미국인이 날고 기어봤자 동양의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기는 힘든 법이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한편 금나라 관리들은 이 새로운 임금에게 바칠 조공 목록과 함께 칭기즈칸에게 특사를 보냈다......그러나 칭기즈칸은 뻣뻣이 서서 특사에게 물었다.

 "새로운 황제의 이름이 뭐요?"

 "위왕입니다."」

 

 자고로 중국에서 당대의 황제는 항상 '천자'나 '폐하'로 불려왔을 뿐 '위왕' 같은 칭호로 불린 적은 단 한번도 없다. '위'의 칭호는 그 황제가 죽고 나서 시호로 추증되어 후세에서 그렇게 불리는 것일 따름이다. 유럽 사람들이야 재위 기간에도 '리처드'니 '루이'니 이름을 내걸고 있었겠지만 중국의 경우는 다르다는 말이다(물론 몽골족인 칭기즈칸은 재위시에도 칭기즈칸이라고 불렸다).

 아무튼 칭기즈칸은 유목국가들을 통일한 후 중국을 유린하고 서쪽으로 뻗어나갔다. 전투마다 연전연승. 생각해 볼수록 신기하다. 최신무기를 갖춘 것도 아니고, 병법을 체계적으로 연구해 본 적도 없는 오랑캐 칭기즈칸이 어떻게 전세계를 유린할 수 있었을까? 내 개인적인 생각인데, 이는 몽골족의 특수성에 의해 가능했던 일로 보인다.

 물론 아직도 몽골족이 전투에서 상승(常勝)하였던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그들이 멀리까지 뻗어나가서도 별 무리없이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조금 알만하다. 원래 군대란 본거지에서 멀리 나가 있을수록 불리해지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게 불리해지는 가장 큰 원인은 보급의 문제 때문인데, 몽골족은 항상 보급품을 현지 조달했기 때문에(한마디로 약탈) 보급 때문에 골치를 썩을 일이 없었다. 그들은 아쉬움이나 망설임없이 파괴를 일삼는 민족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또한 몽골족은 태생적으로 사막 기후에 적응되어 있는 종족이었기 때문에 중앙아시아의 험난한 산맥을 넘거나 서남아시아의 사막 지대를 행군할 적에도 별다른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책에 보면 유일하게 - 인도 지역만은 무더위를 견디지 못해 공격을 중단했다고 한다.

 칭기즈칸 자체도 매우 신속한 사람이었다. 이슬람을 정복할 때의 기록을 보면, 도시 하나를 점령한지 불과 두 시간만에 초스피드로 약탈을 끝내고는 미련없이 다른 도시를 치러 갔다고 한다.

 

 책을 읽어보니 칭기즈칸은 아주 잔인한 사람이었다. 본문을 인용해 보겠다. 

「(칭기즈칸은)어느 날 자신의 텐트에서 한 몽골군 장교에게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자네는 인간을 가장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폐하께서 다스리는 드넓은 초원, 청명한 날씨, 최고의 준마, 토끼 사냥용 매, 이런 것들이 아닐까요?" 장교는 평범한 대답을 했다. 

"아니야. 이 세상 최고의 일은 적의 패배, 적의 죽음, 적의 가족들의 울음 소리를 직접 확인하는 것이지." 이것이 칭기즈칸의 최대 행복이었다.」

  악마다. 책에는 이슬람 도시들에 대한 대학살의 기록과 함께 다음과 같은 기록도 있다. 

「...몽골인들의 캠프는 사람을 찾아서 살육하기 위한 캠프였다. 그들은 너무나 많은 무고한 주민들을 잔인하게 학살했다... ..."나의 특별한 지시가 없는 한, 적들에게 부드러움을 보여 주는 모든 행위를 금하겠다. 두려움만이 그들을 고분고분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칭기즈칸은 진정한 야인이었다. 일반적인 동양 군주들은 중국의 수도를 점령하여 왕조를 멸할 경우 스스로 칭제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고 싶어하는 법인데, 칭기즈칸은 금을 정복하고는 아무 미련없이 몽골로 돌아갔다. 그는 제국을 건설한 후에도 따로 궁전을 짓지 않고 단지 천막을 크게 지었을 뿐이며, 죽을 때에도 전쟁을 나갔다가 진중에서 병으로 객사하였다. 저자는 야인 칭기즈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그는 가족과 몽골인들에게 주고 싶은 것들을 얻기 위해 세계를 정복했다. 칭기즈칸은 이런 목적으로 전쟁을 일으켰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목적을 쟁취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하지 않는 것들은 모두 파괴해 버렸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이용하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야인이었던 칭기즈칸은 고향 땅의 산속에 묻혔다. 능묘의 위치는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의 무덤은 아주 조촐하였을 것이 확실해 보인다. 이제는 흔적조차 없어진 칭기즈칸의 무덤. 칭기즈칸은 최후까지도 야인이었다!

 - 오탈자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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