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속의 그리스도
이근호 지음 / 대장간 / 2010년 7월
평점 :
품절


'잠언 속의 그리스도'를 쓴 이근호 목사님은 은혜를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픔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이 덮친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성도의 위대성은 자신의 완벽함이 아니라 그 안에 고통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그분의 자비와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예수님의 관점에서 잠언을 관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잠언에서 보여주는 지혜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철저한 자기비움이 지혜입니다. 그러나 '자기비움'은 자발적인 행위라기 보다는 말씀과 지혜의 책망에 의한 죄성의 폭로입니다. 그러니까 지혜는 우리를 책망하여 스스로 지혜이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지혜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죽음을 통하여 이 지혜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죽음보다 강한 사랑으로 우리를 품으셔서 주신 것이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참지혜는 피가 흐릅니다. 여기에서 저자는 색다른 의견을 제시합니다. 신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피'주제가 구약에서는 '가난'이라는 주제로 나타난다고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경외'를 실패하는 이유는 가난을 겁내는데 있다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나를 가난하게 만드는 예수를 나는 믿을 수 있는가?'
저자가 던지는 화두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라는 측면에서 보면 두 가지 주제가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스바냐에서 '남은 자'는 심령이 가난한 자라기 보다는 경제적으로 박해받는 가난한 자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는 전인적인 구원이기 때문에 '가난'이라는 부분에 국한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저자가 이 부분에서 좀더 세밀한 언급이 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
저자는 잠언을 예수님과 동행의 구조로 보았기 때문에 더욱 가난의 논리가 비약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내가 인생의 주인공에서 내려와 주님의 구조 속에 들어가 함께하는 것이 잠언이라면 거기에는 가난한 자만이 갈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남편이란 결혼했다고 남편이 아니라 지혜와 말씀이 남편을 그때그때 만들어 낸다는 저자의 표현이 너무 멋있습니다. 이웃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과 지혜가 만든 구조 속에서 보면 '사랑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여건에 있는 사람이 이웃'입니다. 말씀이 이웃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말씀의 구조 속에서 구원은 역설입니다. 구원되고자 하는 자는 구원받지 못하고, 구원될 자격이 없음을 자인하는 자에게는 오히려 구원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말씀과 지혜는 권리를 포기하는 자에게 주시는 권리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었던 것이 모두 허상임을 고백할 때 진정한 믿음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어쩌면 순서는 다를 수 있습니다. 진정한 하나님을 만남으로 우리의 허상들을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십자가'는 철저한 포기이면서 동시에 철저한 죽음입니다. 진정한 기도는 포기입니다. 가난한 자도 부한 자도 모두 자기포기를 통해, 즉 십자가를 통해 진정한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은 무엇일까요?
저자는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는 것이라고 거침없이 말합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이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될 때 진정한 행복이 있습니다. 행복을 쫓다보면 불행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 앞에서 늘 하나님의 질점(質點)으로 살아야 한다는 저자의 지적은 멋진 피날레입니다.

'잠언 속의 그리스도'는 주님의 지혜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은 자들인가를 고백하게 합니다. 정말 지혜의 배고픔을 느끼는 자들은 복있는 자들입니다. 우리들이 폭식하는 이유는 어쩌면 지혜의 허기를 식탐으로 알고 음식으로 채우려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나님의 대사 - 성령을 따라 담대하게 사는 삶 하나님의 대사 1
김하중 / 규장(규장문화사) / 201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종종 이런 종류의 책을 읽을 때면 '특별한 은사'를 특별한 분에게 주셨구나라는 생각으로 자신을 위로하며 도망치는 분들을 보곤 합니다. 저 자신도 그런 경험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출판된 책의 제목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은사가 아닙니다. 이 책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한 일종의 실천편이나 워크북(workbook)처럼 느껴집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몇 가지 놀란 점들이 있었습니다. 우선 저자의 꼼꼼한 기록입니다. 전에 이보다 더 충격적인 책들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등장인물이 무명이거나 가명 혹은 막연한 기억에 의존한 기록들로 가득했습니다. 아마도 저자는 등장인물보다는 신비한 체험에 더 집중하며 조명하는 듯했습니다. 그렇지만 사실관계 여부나 추후 일어나는 일들에 관해서는 함구함으로 감동을 감소시켰습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지나칠 정도로 자세하게 등장인물의 이름과 지금 맡고 있는 직위 등을 섬세하게 적어 놓았습니다. 따라서 저자의 단순한 느낌에 의존하지 않았음을 드러냄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둘째, 저자의 신앙 성숙과 성장속도입니다. 신앙의 햇수보다는 하나님을 향한 마음과 자세가 훨씬 중요함을 새삼 느꼈습니다. 형들보다 어린 다윗을 부르신 하나님이 오늘도 햇수가 아닌 신앙의 태도를 보고 계십니다. 무명의 기도용사들이 곳곳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음을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책을 통해 그들이 유명인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라 곳곳에서 무명의 기도용사들의 무릎을 보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 힘이 솟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기독교인들은 없습니다. 다만 올바르게 구하는 기도를 드리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짧은 바른 기도가 오랜 시간 붙들고 있는 그릇된 기도보다 더 중요합니다. 특별히 최근 해외강의에서 들려주신 성령의 음성은 너무나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기도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말의 선포를 통하여 일하고 계셨습니다.  

 셋째, 자신보다는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구하는 저자의 마음입니다. 기도는 자신을 먼저 내려놓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들어도 선포할 수 없고 들어도 순종할 수 없습니다. 이론적인 기도가 아니라 성령 안에서 기도가 무엇인지를 삶 속에서 보여준 책입니다.  

우리는 너무 이론적인 기도에 매달려 온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늘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말하지만 정작 들으려고 하지 않았고 그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비정상적인 것을 정상처럼 생각했던 것입니다. 지식의 오류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성령님께서는 새로운 준비를 하고 계셨습니다. 바로 '감동'입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 1:21). 성령이 주시는 감동을 느껴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성령의 감동이 오늘도 우리에게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골리앗 세상에서 다윗으로 살기
오대식 지음 / 생명의말씀사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책 표지에 부제처럼 쓰여진 말이 있습니다. '세상을 따를 것인가? 하나님을 좇을 것인가?' 일반적으로 앞에 '하나님'을 두고 질문하는데 저자는 세상을 먼저 두고 묻습니다. 마치 우리의 정답을 비웃기라도 말입니다. 정답은 뻔한데 막상 답을 쓰기에는 양심이 찔리는 문제가 사실 제일 어려운 문제입니다.

 전에 학교에서 '도덕'을 가르치는 아버지학교 형제님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저에게 고민을 털어놓으셨는데... 고민인즉, '시험지 채점을 하다보면 문제의 정답을 100%맞춘 백점짜리 학생과  60점 맞은 학생 중에 후자가 더 헌신적이고 희생적으로 남을 배려하고 성실할 때 도대체 점수를 어떻게 주어야하는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점수와 삶은 전혀 무관할까요. 아는 것하고 실재로 그렇게 사는 것하고는 차이가 많습니다. 성경은 정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정답을 향한 우리의 자세와 태도 그리고 마음을 요구합니다. 성경박사가 신앙생활의 박사는 아닙니다. 어쩌면 너무 많이 알기 때문에 법을 교묘히 피하가는 법학자처럼 우리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저자는 이러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경건의 모양'이라는 신앙의 가면들을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있습니다. '비행기 조종사가 낙하산 생각하듯 한다'라는 말이 던지는 단도에 아직도 가슴이 저밉니다. 비행기 조종사는 위기의 순간에 낙하산이 자신을 죽음에서 구해 줄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또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한 번도 그 낙하산을 사용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우리들의 무기력한 믿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자는 우리가 잘못알고 사용하는 용어들에 대해서도 자세한 설명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경건이라는 말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한자적 의미보다는 원어적 의미로 설명하면서 경건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과 사람 그리고 저신 앞에서 진실'임을 밝힙니다. 이런 우리들의 교회는 어느 덧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칼과 투구를 찾느라 헤매이며 나약해져서 세상사람들에게 조차 밟히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상대적으로 우리 시대에 바알과 사주팔자는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러한 무기력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이 책을 통하여 동시에 회개와 회복을 외칩니다. 어디가 아픈지를 알아야 치료가 가능합니다. 정확한 진단은 완전한 치료를 위해서 필수적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자의 검맥은 탁월합니다.  

물론 아쉬운 부분도 있습니다. 문제를 지적하다 보니 교회의 건강한 부분들은 간과된 측면이 있습니다. 어쩌면 아직 건강하기에 수술도 가능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몸 안의 병균도 중요하지만 이겨낼 수 있는 몸의 건강은 더 중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우리의 영적 건강체크에 매우 유용합니다.ㅋ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두막
윌리엄 폴 영 지음, 한은경 옮김 / 세계사 / 200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오두막(The Shack) / 윌리엄 폴 영 / 세계사

매켄지(Mackenzie), 오랜만이군요. 보고 싶었어요.

 다음 주말에 오두막에 갈 예정이니까 같이 있고 싶으면

 찾아와요.” – 파파

 긴박한 사건이 이 소설의 핵심은 아니다. 단지 정교한 대화와 예상을 뛰어넘는 등장인물(?)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한다. 어쩌면 이 부분이 이 소설의 매력이기도 하다. 
소설 오두막(The Shack)에서 하나님은 기다리시는 하나님으로 등장한다. 불행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중에도 미리 막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침묵하시는 하나님은 아이를 괴한으로부터 지켜주지 못한 무기력한 아버지와 다를 것이 없다.

오두막은 외로움의 장소이다. 혼자 있기 때문에 외로운 것이 아니라 같이 있으되 같이 있어서는 안 되는 관계가 주는 잔인함 때문이다. 함께 있어서는 안 되는 관계가 있다는 것이 우리를 더욱 외롭게 한다
 

함께 있기에는 너무나 잔인한 그 곳 오두막’. 그 곳에서 하나님은 매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 다시 함께해서는 안 되는 관계가 연출된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복수심으로 가득한 한 사람을 초대한다. 그의 저주와 분노가 폭발한 그 곳에서 하나님은 이제 침묵을 깨고 말씀하신다. 책 안에만 들어 있는 하나님이 아니었다

소설 속의 하나님은 오늘도 여전히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다. 그것도 강요나 협박을 통해 답을 얻어내는 하나님이 아니라 죄 많은 인간이 그 말씀의 의미를 깊이 깨닫게 하기 위해 그리고 진정한 의미에서 수용할 때까지 끊임없는 인내로 설득하여 순종하게 하시는 하나님이다. 그야말로 설복의(說服) 하나님이다

신학적으로도 어려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고민어린 저자의 날카로운 영성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관계에 대한 깊은 통찰도 돋보이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내가 여자로 나타나서 당신에게 파파라고 부르라고 제안한 건 단순히 상징들을 뒤섞이게 하고, 또 당신이 종교적인 조건화에 쉽게 빠지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죠

위의 글은 하나님을 남성으로 생각하는 일반적인 견해에 대해 성()을 초월한 하나님을 저자는 말하고 싶은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을 초월하신 하나님을 다분히 인간화시킨 것이다

또한 사람들이 죄를 지었다고 해서 내가 벌줄 필요는 없어요. 죄는 그 자체가 벌이기 때문에 안에서부터 당신을 집어삼키죠. 내 목적은 죄를 벌주는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그걸 치유하는 것이 나의 기쁨이죠라는 저자의 글은 읽는 이로 하여금 안도와 함께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외면하도록 만든다. 사랑과 공의는 하나님의 분명한 속성이다. 인간은 사랑하시지만 죄를 미워하여 반드시 벌하셔야만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 그 절박함이 이 소설에는 많이 무뎌져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사랑받도록 창조되었어요. 그러니 당신이 사랑받지 않는 것처럼 산다면 그게 바로 당신 삶을 제한하는 것이라며 하나님의 사랑을 감격적으로 표현하였다.

저자가 말하는 교회는 너무도 아름답다. 저자의 말처럼 교회란 주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살아 숨 쉬는 공동체이지 어떤 건물이나 프로그램이 아니다.
하나님은 동사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을 통하여 드러내어 지지를 원하신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침묵하시는 이유이다

이 소설은 침묵 속에 분명히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전하고 있다. 오늘도 나의 작은 삶을 통해 놀랍도록 위대한 하나님을 드러내는 영광을 주심에 감사의 날을 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왜 일하는가>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왜 일하는가 - 이나모리 가즈오가 성공을 꿈꾸는 당신에게 묻는다 서돌 CEO 인사이트 시리즈
이나모리 가즈오 지음, 신정길 옮김 / 서돌 / 201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한 권의 철학책을 읽은 느낌입니다. 철학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깊은 사색에서 나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독특한 경험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 책의 경우는 후자입니다. 깊은 사색에서 나오는 딱딱한 철학이 아닙니다. 현장에서 건져올린 살아숨쉬는 철학입니다. 읽는 중에 가슴이 뜨거워지고 어느 구절에서는 불끈 주먹이 쥐어지는  그런 책입니다. 저자에 대한 편견을 뒤로하기 위해 약력이나 저자소개를 읽지 않고 바로 읽기를 시작했습니다. 딱딱한 제목과 달리 놀라운 흡입력이 있었습니다. 저자가 성공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걸어온 넓지 않은 길을 나도 걸어가고 싶은 강한 충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일을 통하여 스스로를 단련하였고, 마음을 갈고 닦았다고 합니다. 일은 삶의 가치를 발견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행위라고 하였습니다. 처음 이 부분에서 저자가 상당히 일중독(workaholic)에 빠진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실재로 그랬습니다. 저자는 일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무엇인가 달랐습니다. 일을 향한 순수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노동은 맡은 일을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 완성을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물론 인간이 원죄때문에 노동이라는 의무를 떠안았다는 저자의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노동은 타락의 결과가 아니라 창조의 기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현대인들에게 노동이 왜곡되어 필요악이자 고통스러운 것이라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저자는 지혜로운 자였습니다. 일을 대하는 자세가 달랐습니다. '신이 손을 뻗어 도와주고 싶을 정도로 일에 전념하라'고 외친 그에게 불행과 시련은 가혹한 운명이 아니라 신이 준 최고의 선물이었습니다. 정신적으로 나태하고, 기회주의자가 되어버린 현대 직장인들에게 낯설은 멘트이지만 평생을 돈에, 명예에, 학벌에 끌려 다니는 삶이 아니라 끄는 자로 살았던 저자의 강인함이 잘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에필로그에 소개된 '인생 방정식'에서 그는 순수한 동기와 긍정적 사고방식으로  플러스 인생을 살았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물질의 풍요 속에 나약해진 정신력과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한 사고방식으로는 플러스의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이미 마이너스로 결산된 인생인 것입니다. 한 줄의 스펙에 목숨을 거는 어리석은 삶에 조용하지만 분명한 경종입니다.  

52쪽에 나오는 저자의 고백은 뜨거웠습니다. '무리하면서까지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시작한 일이 열의로 바뀌고,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마침내 어느 순간부터는 그 일을 내가 있다는 자부심으로 마음이 벅찼다' 저자는 이것을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사소한 것에 감동합니다. 사랑은 완벽을 꿈꿉니다. 사랑은 불태우는 것입니다. 사랑은 지속입니다. 이것이 그가 체험한 사랑입니다. 그가 창조한 사랑의 세계가 놀랍습니다.  

창조는 사랑을 통해서만이 가능합니다. 그 사랑의 대상이 무엇이든 미칠듯한 사랑이 없이는 어떤 창조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