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두막
윌리엄 폴 영 지음, 한은경 옮김 / 세계사 / 200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오두막(The Shack) / 윌리엄 폴 영 / 세계사

매켄지(Mackenzie), 오랜만이군요. 보고 싶었어요.

 다음 주말에 오두막에 갈 예정이니까 같이 있고 싶으면

 찾아와요.” – 파파

 긴박한 사건이 이 소설의 핵심은 아니다. 단지 정교한 대화와 예상을 뛰어넘는 등장인물(?)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한다. 어쩌면 이 부분이 이 소설의 매력이기도 하다. 
소설 오두막(The Shack)에서 하나님은 기다리시는 하나님으로 등장한다. 불행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중에도 미리 막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침묵하시는 하나님은 아이를 괴한으로부터 지켜주지 못한 무기력한 아버지와 다를 것이 없다.

오두막은 외로움의 장소이다. 혼자 있기 때문에 외로운 것이 아니라 같이 있으되 같이 있어서는 안 되는 관계가 주는 잔인함 때문이다. 함께 있어서는 안 되는 관계가 있다는 것이 우리를 더욱 외롭게 한다
 

함께 있기에는 너무나 잔인한 그 곳 오두막’. 그 곳에서 하나님은 매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 다시 함께해서는 안 되는 관계가 연출된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복수심으로 가득한 한 사람을 초대한다. 그의 저주와 분노가 폭발한 그 곳에서 하나님은 이제 침묵을 깨고 말씀하신다. 책 안에만 들어 있는 하나님이 아니었다

소설 속의 하나님은 오늘도 여전히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다. 그것도 강요나 협박을 통해 답을 얻어내는 하나님이 아니라 죄 많은 인간이 그 말씀의 의미를 깊이 깨닫게 하기 위해 그리고 진정한 의미에서 수용할 때까지 끊임없는 인내로 설득하여 순종하게 하시는 하나님이다. 그야말로 설복의(說服) 하나님이다

신학적으로도 어려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고민어린 저자의 날카로운 영성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관계에 대한 깊은 통찰도 돋보이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내가 여자로 나타나서 당신에게 파파라고 부르라고 제안한 건 단순히 상징들을 뒤섞이게 하고, 또 당신이 종교적인 조건화에 쉽게 빠지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죠

위의 글은 하나님을 남성으로 생각하는 일반적인 견해에 대해 성()을 초월한 하나님을 저자는 말하고 싶은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을 초월하신 하나님을 다분히 인간화시킨 것이다

또한 사람들이 죄를 지었다고 해서 내가 벌줄 필요는 없어요. 죄는 그 자체가 벌이기 때문에 안에서부터 당신을 집어삼키죠. 내 목적은 죄를 벌주는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그걸 치유하는 것이 나의 기쁨이죠라는 저자의 글은 읽는 이로 하여금 안도와 함께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외면하도록 만든다. 사랑과 공의는 하나님의 분명한 속성이다. 인간은 사랑하시지만 죄를 미워하여 반드시 벌하셔야만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 그 절박함이 이 소설에는 많이 무뎌져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사랑받도록 창조되었어요. 그러니 당신이 사랑받지 않는 것처럼 산다면 그게 바로 당신 삶을 제한하는 것이라며 하나님의 사랑을 감격적으로 표현하였다.

저자가 말하는 교회는 너무도 아름답다. 저자의 말처럼 교회란 주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살아 숨 쉬는 공동체이지 어떤 건물이나 프로그램이 아니다.
하나님은 동사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을 통하여 드러내어 지지를 원하신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침묵하시는 이유이다

이 소설은 침묵 속에 분명히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전하고 있다. 오늘도 나의 작은 삶을 통해 놀랍도록 위대한 하나님을 드러내는 영광을 주심에 감사의 날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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