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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은 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가? - 신학과 인문학의 대화
김용규 지음 / IVP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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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부제는 '신학과 인문학의 대화'입니다. 참고문헌을 제외하면 110쪽에 불과한 얇은 책입니다. 한 손에 잡히는 책의 두께처럼 신학과 인문학의 관계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했습니다. "시대를 불문하고 인문학이 신학에-크든작든,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부단히 영향을 끼쳐 왔다"는 저자의 말처럼 철학과 역사는 물론 문학, 수사학, 논리학 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 신학은 영향을 받아왔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는 통찰력이 깊어졌습니다. 사실 모든 지혜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니 일반은총 속에 주신 지혜라도 계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계시를 공부하지만 동시에 시대 속의 존재이기에 시대의 제한과 영향에 그대로 노출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입니다. 특히 중세신학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플라톤주의 반대급부의 성격이 강하고, 종교개혁의 인문주의는 신본주의에 눌려있던 인간의 이성이 반란을 일으킨 사건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은 이제 인간이라는 전체가 아니라 '나'라는 개인에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저자는 이러한 사상의 변화를 마치 이야기하듯이 이끌어 갑니다. 

이제 우리는 진리의 상대성과 다양성을 외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저자는 기독교 신학의 본질과 사명을 이렇게 말합니다."성서를 지주로 삼음으로써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 나라에 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문학을 지주로 삼음으로써 기독교 신학은 이 땅에 뿌리내릴 수 있기 때문이지요" 


무엇보다 저자의 경고가 이 책에서 너무나 크게 울림이 됩니다. "인간의 이성이 신으로 등극한 근대 이후, 자연은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되었고, 인간의 삶은 갈수록 무의미해졌으며, 사회는 무한 경쟁의 지옥으로 변했다는 것은 이제 어린 아이까지 아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우리가 깨달은 것은 신의 죽음이 곧바로 인간의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것,신본주의 가치의 몰락은 동시에 인본주의 가치의 몰락을 의미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시대의 어둠과 그늘 앞에 온전한 신학을 추구하는 삶과 사명이 우리에게 놓여있다면 우리는 주저없이 공부하는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이제 선택이 아닙니다. 신학을 공부했고 지금도 하고 있는 자로서 여전히 일반 은총 속에 지혜인 인문학과 대화를 통해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계시를 보다 선명하게 분별해야 할 것임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과학과 기술분야도 더 이상 문외한 영역으로 방치해서는 안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배워야 할 것도 많아졌고,알아야 할 것도 많아졌습니다. 쌓인 지식 앞에 벌써 지치지만 여기서 대화를 중단할 수 없기에 차근차근 따라가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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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함이 길이다 - 우리의 힘, 그리스도
제임스 패커 지음, 윤종석 옮김 / 디모데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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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강해지기를 원합니다. 약육강식의 동물의 세계처럼 서로 먹고 먹히는 사회에서 강함은 너무나 큰 매력입니다. 강하지 않으면 비굴한 인생, 비참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평범한 인생조차 가만히 두지 못하고 괴롭히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약함이 길이라니... 제임스 패커라는 이름은 익히 들어보았고 그의 책들도 읽어 보았을 것입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그가 말하는 약함이 궁금했습니다.

저자가 말하는 약함이란 '철저히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개념'입니다. 죄는 우리를 모든 면에서 무능하게 만들었다는 저자의 견해에 동의합니다. 여기까지는 이미 우리가 동의하는 바가 아닙니까? 저자는 '자신의 무력함을 깨달아야 비로소 의존하게 된다'라고 강조합니다. 아 그렇습니다. 믿음이란 의지요, 의존이 아닙니까. 어린 자녀들이 부모를 절대 의존하는 것은 그들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사춘기를 지나며 나름 자신들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부모의 곁을 떠나 마이웨이(My Way)를 외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의 오해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자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성인아이(Adult Child)처럼 비정상적 미성숙의 신앙에 머물라는 말씀은 더더욱 아닙니다. 의존이란 성장과 성숙을 통해 그 깊이를 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정말 연약함을 떠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은 저자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사실 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힘입이 연약함을 품고 살아갈 힘을 얻은 자입니다. 약함이 우리를 떠날 수 없다면 적어도 외적으로 우리의 여건이 달라질 수 없다면 내면을 날마다 새롭게 하시는 과정을 통해 힘과 에너지를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사는 것이 지혜일 것입니다.

연약함은 영광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고 찬양과 경배를 통해 하나님께 드리는 것도 영광이지만 하나님이 계속해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변화시키는 작업으로서의 영광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연약한 가운데 하나님을 진정으로 의지했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처럼 일시적으로, 문제해결만을 위해 또는 자신의 유익을 아버지 하나님을 의지한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연약하여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아버지와 하나가 된 것입니다.

 

 

저자의 말처럼 연약함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길입니다. 약함은 그분과 하나가 되는 비결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삶으로 그것을 보이셨습니다. 출애굽에 나오는 바로를 보십시오. 그의 완악함 속에는 강함이 있어지만 그 강함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교만이요 거만과 오만이었습니다. 자신의 절대적인 부족함을 알면서도 강한척 한 것입니다. 실로 약함이야말로 교만과 오만의 위장을 뚫고 나와 우리의 힘이 되시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게 하고 뗄 수없는 아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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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 부인의 조선 견문록
릴리어스 호턴 언더우드 지음, 김철 옮김 / 이숲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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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릴리어스 호톤 언더우드 / 조선 견문록 / 이숲출판사

언더우드 선교사의 부인이자 그녀 또한 조선의 선교사로서 15년동안 경험한 것을 기록한 책입니다. 서문에 밝힌대로 '한국 사람들의 관습과 성격, 그들의 도덕과 정치의 분위기를 충분히 관찰하게 함으로써' 선교 사업에 다양한 기회들을 제공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지난 1월에 있었던 남수단 연합집회를 가기전에 이 책을 읽었습니다. 작년 7월에 있었던 단기선교와 달리 2차 남수단 사역은 현지에서 먹고 자는 생활 속에서 집회를 가졌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힘들었습니다. 씻는 것에서부터 먹고 자는 것까지 공동체 생활이었고 무엇보다 영양분이 풍성한 음식을 섭취할 수 없어서 나름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특히 당조절이 되질않아 고생이 많았습니다.

그때마다 이 책이 생각났습니다. 초기 조선에 들어온 선교사들의 삶을 보며 내가 겪는 어려움이 별것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적어도 안전은 보장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겸손한 선교'
이 책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입니다.

'거칠고 검은 그들의 긴 머리털은 빗질을 하지 않아 엉망진창이었는데 더러는 한 가닥으로 땋아 내리기도 했으나...목과 얼굴 언저리에 흘러내린 머리카락들은 흉측하고 지저분해 보였다'

'가난한 사람들이 입는 이 옷은 한 달에 두 번꼴로도 갈아입지 않는 것이었다'

이 장면을 읽는 순간...남수단에서의 모든 불평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우리 조상들도 그러했다는 사실이 남수단 선교에 우리를 부르신 이유를 분명히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같은 분단의 국가로, 전쟁을 경험한 국가로 한국은 남수단 사역의 최적의 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캄캄한 어둠이며, 지독한 시끄러움이며, 소름 끼치는 냄새며, 험악한 도로 상태며, 아무튼 번연의 죽음의 계곡에 딱 어울리는 모습이랄 수 있었다'
이 단란을 읽다보면 선교지에서 보았던 많은 길들이 생각납니다.
C국에서 보았던 소떼들에 의해 막힌 도로들, 밤에 손전등없이는 영락없이 추락할 좁다란 길의 필리핀, 어둠이 짙은 태국의 산악...
이러한 땅에 오신 예수님...그리고 우리를 믿고 보내신 그분의 은혜가 가득한 곳
그곳이 선교지입니다.

'헤론 박사가 죽던 날...'
죽음의 소식은 이 책에도 어김없이 등장했습니다.
낯선 땅에 와서 복음을 전하다가 객사한 그들...

겸손한 선교...문화우월주의에 빠지지 않는 낮아짐의 선교
선교 선배에게 배우는 아름다운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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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진수로 나아가라
호라티우스 보나르 지음, 이태복 옮김 / 지평서원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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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양떼를 떠나서 길 잃어버린 나
 목자의 소리 싫어서 먼길로 나갔네...'

찬송가 277장입니다. 이 찬송을 작시한 자가 바로 호라티우스 보나르입니다. 그는 19세기 스코틀랜드 복음 전도자요 찬송가 작시자이었습니다.
그는 스코틀랜드 교회가 분열하는 아픔을 겪을 때 철저하게 복음주의 입장에 섰던 목회자자이었습니다. 그런 그의 철저함이 이 책에 흥건하게 젖어있습니다. 이 부분이 고스란히 이 책의 장점이면서 동시에 단점이 됩니다.

그 흔한 예화도 없습니다. 나름 저자가 사용하는 예(例)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입니다. 저자는 철저하게 말씀만을 인용하여 복음을 선포합니다. 다소 거칠고 세련되지 못한 표현들이 있고 딱딱해서 금방 페이지를 넘길 수 없지만... 여유를 가지고 읽으면 복음의 단물이 쏟아지는 책입니다. 오히려 읽다보면 중간에 손을 놓을 수 없는 중독성이 강한 책입니다.

"그분이 우리 가까이 오셨다는 사실을 아는 것, 바로 이것이 복음의 시작"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이 모든 신앙의 초석"임을 강조합니다. 그가 말하는 인간은 그야말로 총체적인 타락에 빠진 자들입니다. 선한 행동을 통해 하나님께 범한 악을 상쇄하려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로 나아갈 자격증을 스스로 만들려는 사람들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성품 중에서 장점들을 모두 더함으로써, 그리고 우리 자신의 선한 감정이나 행위를 생각하거나 우리의 믿음과 사랑과 회개에 대해서 생각함으로써 일어나는 평강이나 담대함은 교만으로 구성되어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런 평강이나 담대함의 기초는 자기 의로움이거나, 최소한의 자기 만족입니다."(p.38)

저자의 이런 인간이해는 반대로 철저한 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안에 우리 자신의 행위를 바라보지 못하게 하시고, 오직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 시선을 고정하도록 만드십니다."(p.53)

또한 저자는 우리시대가 겪는 '믿음'의 정체성을 명료하게 정의합니다.
"믿음의 직무는 무슨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중단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직무는 무엇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이미 이루어졌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입니다."(p.92)
아! 얼마나 명료한 말입니까. 그분이 주시는 믿음이라는 선물 앞에 과연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이 신적 근거가 분명한 이 믿음이야 말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절대 행위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입니다.(158쪽)...그러나 "우리에게 믿을 수 있는 힘이 존재한다고 스스로 상상하는 한, 우리는 절대 그리스도의 품에 안기지 않을 것입니다."(156쪽)라는 저자의 지적은 믿음과 의지라는 양 갈래 속에서 방황하는 우리의 자세를 바르게 지적한 것입니다. 의지하는 믿음을 가진 자는 죄를 향하여 고집을 부리지 않습니다. 저자는 죄를 사랑하는 나머지 무슨 일이 있어도 죄와 결별하지 않으려고 고집을 부리는 죄인은 죄인 중에서도 괴수라고 말합니다.

저자가 말하는 복음은 이렇게 결론납니다.
"무가치하고 전혀 사랑스럽지 않으며 무감각한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저는 개인적으로 저자가 가지고 있는 분명한 복음적 질서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복음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았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는 콜쿠훈 박사의 말을 인용해서 말하기를 "회개는 바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수단이 아니라 믿음이 지향하는 목적(177쪽)"이라고 단언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에게 나아오는 죄인에게 그 어떤 종류든지 사전 준비를 절대 요구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탁월한 복음적 질서는 성령과 그리스도와 관계입니다.
"그리스도는 여러분이 먹어야 하는 약이요, 성령은 여러분을 돌봐야 하는 의사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통해 무엇인가 엉킨 영적 질서들이 분명해 짐을 느꼈습니다.

저 자신도 막 읽어내려간 책은 아니었습니다. 다소 반복되는 내용에다 딱딱함이 마음에 걸렸지만 씹을수록 단맛을 내는 쌀처럼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렀을 때는 큰 마음의 수확을 얻었습니다.

인상 깊은 구절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런 세상에 그토록 큰 사랑을 낭비하신다는 것이 정말 사실인지, 또는 그 일이 정말 가능한 일인지 의심에 가까운 생각을 합니다."(2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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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5대 제국 - 통通박사 조병호의
조병호 지음 / 통독원(땅에쓰신글씨)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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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짧은 식견으로 역사를 볼 때 역사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인물중심의 역사이고 다른 하나는 사건 중심의 역사입니다.
전자의 경우처럼 모든 시사문제를 인물중심으로 보는 것이 'Time紙'입니다. 반면에 'Newsweek紙'는 사건중심으로 시사문제를 바라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전자에 해당할까요 후자에 해당할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성경은 철저하게 인물중심의 책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한 인물에 철저하게 맞추어져 있습니다.
역사는 사람들의 삶의 궤적입니다. 사건보다 사람이 먼저입니다. 어떤 인물이 그 자리에 있느냐는 어떤 자리이냐 보다 중요한 문제입니다.

'성경'은 역사(history,歷史) 속에서 역사(役事)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his story)입니다.
성경은 사건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초점은 언제나 사람이셨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자들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가이사 아구스도('존엄하신 황제께서'라는 뜻으로 로마의 초대 황제 옥타비아누스에게 원로원이 바친 존칭, p.293)가 그런 인물입니다. 그는 자신이 내린 '호적령'이 성경의 예언을 이루는 계기가 될 것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모든 인류의 왕이신 예수님의 탄생이라는 중요한 시기에 황제로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던 그야말로 영적으로 무지한 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자 중에는 옥타비아누스처럼 영적으로 무지한 자들도 많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이 대단한 존재인 것처럼 살았지만 실은 하나님의 경영아래 있는 자들에 불과했습니다.

역사의 주인공은 언제나 하나님이십니다. 다만 부지 중에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자들이 자신들이 역사의 주인공처럼 착각하였을 뿐입니다. 조연이 조명 받는다고 주연이 되지는 않습니다.

이에 반해 둘째는 하나님의 의로운 손에 사로잡혀 그분의 계획에 적절하게 쓰임받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모두 사명감으로 하나님의 일들을 감당했습니다. 그 쓰임받음에 감격했고 감사했습니다. 일반 역사에 미치는 영향은 미비했을지 모르지만 역사는 그들을 통해 흘러갔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다윗입니다. 그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주권에 복종한 자였습니다. 밧세바의 유혹에는 넘어졌지만 제국의 유혹에는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역사 속에서 '제국'은 조직이 아니라 한 생명체입니다. '한 사람'을 향한 제국의 철학이 무엇이냐에 따라 흥망성쇠를 이어갔습니다.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는 하나님의 나라는 여전히 건재하지만 한 사람의 소중함을 망각했던 제국들은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마치 사람의 생명을 함부로 여기는 자들이 사회에서 격리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교회는 이 시대의 소망입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 한 영혼에 대한 소중함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한 영혼에 대한 뜨거운 사랑은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소중한 가치입니다. 큰 인물도 국가나 민족이라는 조직을 벗어나면 한 생명에 불과합니다. 제국의 옷에 자신의 초라한 몸을 감추었던 수 많은 영웅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연약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애써 외면했던 그들을 역사의 창으로 넘겨보면서 진한 아쉬움을 갖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시는 역사(history), 그 한 페이지에 한 부호(符號)로 불러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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