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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쳐야 미친다 - 조선 지식인의 내면읽기
정민 지음 / 푸른역사 / 2004년 4월
평점 :
미쳐야 미친다.
이 책을 들고 있는 나를 보며 친구가 배시시 웃고는 말한다.
"그렇지. 미쳐야 미치지!"
미쳐야 미친다?
책의 제목을 보고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친구와 그 뜻조차 깊이 생각지 않은 채 책장을 넘긴 나는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마주하면서도 각자 다른 생각에 골똘해 있었다. 나는 친구의 말을 되뇌며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작가는 머리말에서 이 의아한 제목을 짓게 된 연유를 멋들어지게 설명한다. 어느 하나에 미칠 만큼의 광기와 열정이 있어야만 그 분야의 정점에 미칠 수 있다. 이런 숨은 뜻이 있어 책제목이 더욱 더 가슴에 와 닿는다. 하지만 이 책의 내용을 전부 이르기에는 제목으로써 결핍된 부분이 없잖아 있다.
교육과 고정관념과 편견이 무서운 것을 이 책을 통해 발견케 되고, 또 이 책을 통해 깨우치게 된다. 교육을 통해서 우리는 특수집단의 사상과 이념을 사심 없이 받아들이고 그 바탕 위에 고정관념과 편견이 깔린 채 우리의 눈은 사물을 바라볼 때 이미 색안경으로 물들어 있다. 다른 이들까지 끌어들일 필요 없이 나부터 예를 들자면 옛사람들 하면 왠지 현대인들에 비해 미개하고, 야만적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 세대는 우리 세대가 누리고 있는 컴퓨터, 비행기, 휴대폰 등등이 없었다. 사실 현대인의 대부분은 이것들의 작동원리 조차 모른 채 오로지 옛사람들이 피땀 흘려 생각하고, 기록하고, 실험하여 이룩한 완성된 문명의 껍데기만을 내 것 인양 쓰고 있을 뿐이다.
또 나는 그전까지 우리의 옛 조상하면 떠오르는 단어들이 있었다. 지혜롭고, 슬기롭고, 재치 있고, 다들 효자, 효부이며, 자연을 벗삼아 풍유를 즐길 줄 아시는 분들, 그분들이 바로 내 머리 속에 저장되어 있는 훌륭한 우리 조상들의 이미지이다.
그러나 사실 역사가 돌고 돌듯이, 옛날이라고 해서 선인들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오늘날이라고 해서 악인들만 판을 치고 있는 것은 더 더욱 아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듯이 사람은 나고 지는 반복 속에서도, 어디까지나 땅을 짚고 하늘을 우러러 보며 사는 존재일 뿐이다.
이제껏 제한되고 왜곡된 역사교육을 통해 가까이 하기에는 멀고 어렵게만 느껴지고 다가가기 꺼려졌었던 우리 옛 선조의 때로는 엉뚱해서 웃음 나기도 하고 때론 품은 그 뜻이 깊어 절로 고개 숙여 숙연해지며 또는 우리네 아버지 같은 연정을 감지하며 눈시울 적시며 사람의 온기를 느끼게 되는 책이다. 솔직히 이 책에 소개된 조상을 심적으로 다 이해하지는 못한 나이다. 아니 이해할 수 없는 게 당연한 것이다. 원문을 읽고는 다른 뜻으로 오인하다가 저자의 풀이를 읽고서야 어렴풋이 이해가 되는 시간의 괴리를 어찌 한 번에 다 넘었다 할 수 있으리요?
하지만 나는 이 책을 통해 만난 많은 인물 중 다산 정약용을 다시금 보았다. 그전까지는 다산 정약용 하면 반사적으로 '목민심서'가 떠올랐고 그 것 뿐이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많이 느낄 수 있었다.
머리가 나쁘고 분별력 없이 무던해서 공부에 자신 없어 하는 제자 황상에게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한 번만 보면 척척 외우는 아이들은 그 뜻을 깊이 음미할 줄 모르니 금세 잊고, 제목만 주면 글을 지어내는 사람들은 똑똑하다고는 하나 저도 모르게 경박하고 들뜨게 되는 것이 문제다. 한 마디만 던져주면 금세 말귀를 알아듣는 사람들은 곱씹지 않으므로 깊이가 없다. 너처럼 둔한 아이가 꾸준히 노력한다면 얼마나 대단하겠느냐? 둔한 끝으로 구멍을 뚫기는 힘들어도 일단 뚫고 나면 웬만해서는 막히지 않는 큰 구멍이 뚫릴 게다. 꼭 막혔다가 뻥 뚫리면 거칠 것이 없지. 미욱한 것을 닦고 또 닦으면 마침내 그 광채가 눈부시게 될 것이야. 그러자면 첫째도 부지런함, 둘째로 부지런함, 셋째도 부지런함이 있을 뿐이다. 너는 평생 '부지런함'이란 글자를 결코 잊지 말도록 해라."
나는 이 글귀가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다.
황상은 이렇듯 자신에게 애틋하게 대했던 스승을 잊지 못해 18년 후에 스승을 찾아간다. 노쇠한 스승을 뒤로한 채 집으로 떠나던 중 스승의 부고를 듣고 다시 되돌아가 예를 다했고, 그로부터 10년 뒤에 다시 스승의 집을 방문해 정약용의 아들과 눈물의 재봉을 하고 정씨와 황씨 두 집안간에 계를 맺어 대대손손 이 아름다운 만남을 기억할 것을 다짐한다.
유배시절 가족들과 떨어져 있어 아비 노릇 제대로 못해 자식들이 혹 어긋나기라도 할까 하는 부정이 애틋하게 전해지는 서신들과 막내아들 농아의 죽음에 원통해 하며 피끓는 부심으로 써 내려간 글귀를 읽고 있노라면 절로 눈시울이 붉어지고 눈가에 고인 슬픔이 속절없이 흘러내린다.
이 책을 집필할 당시 작가는 심적으로 많이 지쳐 있었나보다. 책 속의 인물들을 소개하며 그에 비교해 현대인들에게 느낀 적잖은 실망감을 감추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조선시대가 저 진흙 속에 묻혀버린 진주 같은 위인들의 진가를 발견하지 못했던 것처럼, 지금도 그 어딘 가에는 잠시 어둠에 빛이 가린 우리시대의 보석 같은 존재들이 세상에는 많을 것이라고 말이다.
속세에 회의하는 정민 선생께 농으로라도 나는 이렇게 외치고 싶다.
"조선 사람과 대한민국 사람, 뭐 그리 다를쏘냐! 안 그렇습니까?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