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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로열 - 제149회 나오키상 수상작
사쿠라기 시노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2014.11.08~11.09
"성이 아닌 생의 금기를 건드리는 연작소설 일곱 편"
처음 들어보는 작가에, 처음 보는 소설인데
꽤 오랜시간동안 아마존재팬 베스트에 올라있던 소설이 있었다.
어두운 방 잔뜩 웅크린채로 침대에 앉아있는 여자가 표지로 그려진 책이었는데, 제목도 <ホテルローヤル>.
대체 뭐길래 그랬나 했더니 나오키 수상작이라서 그랬나보다.
재미있을 것 같긴 했지만, 그렇다고 원서로 읽어볼 만큼의 적극성을 보일 책까지는 아니라는 판단에 덮어뒀었는데
번역본이 발매됐다.
(번역본으로도 나온지는 좀 됐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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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로열>이라는 러브호텔을 배경으로 그려지는 짧은 일곱개의 단편이 담겨있다.
러브호텔이라니.
순진했던 건지 기회가 없었던 건지, 러브호텔을 풍문으로만 들었던 내게, 이 책의 배경이 주는 호기심도 꽤 컸다.
사랑하는 남녀가 사랑을 나누기 위한 용도로만 찾는다는 러브 호텔.
그렇다면 이 책은 분명, 엄청 야한 이야기를 다루려나.
포르노성이 짙기만 해서 나오키상에 수상되진 않았을텐데. 등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궁금증을 가지고 책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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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편의 이야기는 모두 다른 주인공의 다른 이야기들이지만, 배경은 한 곳이다.
홋카이도 습원 위에 지어진 "호텔 로열"
이야기의 시간적 구성도 역순행이다.
그러니까, 첫번째 이야기인 <셔터 찬스>가 시간적으로 보면 호텔로열이 문을 닫은지 한참 지난, 가장 늦게 일어난 일이고
<선물>이라는 이야기가 가장 오래된 이야기인 셈이다.
일단은 밝지 않다.
낭만적인 사랑얘기가 그려지진 않을거라는 생각은 원서의 표지를 보고 이미 감이 왔었지만,
뭐랄까.
좀 찝찝하기도 하고, 애잔한 이야기들이다.
-사진 작가를 꿈꾸는 남자친구에게 올누드 사진촬영을 제안받고, 호텔로열에서 모델이 되어주는 여자친구.
-가난한 절 주지의 아내가 되어, 고객인 '단가'들에게 몸으로 봉사하는 미키코.
-아버지가 운영하던 러브호텔을 이어받아 어렵사리 근근히 운영하던 여자와 '쎅꾼'으로 불리는 성인용품 판매 영업사원의 이야기.
-가난한 살림에 방도 많지 않아 시아버지와 아이들의 틈 속에서 남편과 잠자리도 함께 하지 못한 부부이야기.
(그래도 이 이야기가 그나마 '낭만'이 있었다.)
-아내의 불륜에 대해 말도 못하고 사는 한 교사의 이야기
-무능하지만 착하고 어린 남편을 둔 호텔 청소부 아줌마의 이야기.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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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87
"지난 십 년 동안 남자든 여자든 몸을 이용해 놀아야 할 때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일했어.
나는 그런 일을 뒤에서 도와주는 거라고 나 자신에게 되뇌면서.
그게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해."
P.172
눈물이 나건 웃음이 나건 내 몸 움직여 일해야 하는 하루하루는 이어졌다.
묵묵히 일할 수밖에 없는 나날이었다.
시간이 돈이 되고 그 돈으로 입에 아슬아슬 풀칠을 한다.
'아슬아슬'이라는 말은 남에게서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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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내내, 아니 러브호텔이 이렇게 울적한 곳인가.라고 생각될 정도로 낭만은 없고 울적함만 있었다.
비가 오는 축축한 날씨 속에, 곰팡이가 가득 핀 어두운 싸구려 모텔의 느낌.
이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은 갑자기 불행에 빠졌다던가, 남들은 이해할 수 없는 큰 어려움 속에 살고 있다던가 하지 않았다.
이 삶들은 결국 이 시대를 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가까웠다.
사람들마다 한두가지씩은 가지고 있을 법한 고민들을 담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야기의 끝은 항상 희망을 예고한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에 이상하게 깔끔하고 기분 좋은 여운이 남았던 것도 그러한 희망때문이었겠지.
지금은 이렇게 가난하게 살며 갑작스럽게 생긴 돈으로 러브호텔을 찾았지만,
사랑하는 남편과 또다시 그 곳에서 사랑을 나눌 희망에 적은 돈이라도 벌어보겠다는 아내의 모습에서,
의처증을 보이고 있는 아내와 살면서, 그 아내와의 소문으로 안정된 직장을 잃고 성인용품을 판매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첫 여자인 그 아내를 따뜻하게 보듬어주며 살겠다는 남자의 모습.
모두가 희망을 바라보며 살아내고 있다.
+
예전엔 '사랑'이라고 하면 그저 낭만적인 상상만 떠올렸다.
아픔도 없고 슬픔도 없는, 그저 행복하고 하트만 온 세상을 덮는 기분의 상태.
그런데 점점 나이를 먹으면서 느끼는 '사랑'은 행복 이상으로 아픔도 있고 상처도 있고 슬픔도 있고, 그에 따른 성숙도 있었다.
내가 그걸 몰랐다면, 어쩌면 이 책은 그저 조금 야한(?)책으로 스치듯 지나갈 수도 있었겠다.
그 주인공들의 삶 속에서 이야기하는 희망을 읽을 수 있게 되고, 다양한 모습의 사랑을 찾아낼 수 있고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게
이제 연륜이 되어가나-싶은 마음에 좀 뿌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