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stella.K > [퍼온글] 이규태의 지하실에 들어가다

24년동안 칼럼을 연재하고 세상을 떠난 <조선일보> 전 논술고문의 서재
1만권이 넘는 책들과 엄청난 메모들이 행복한 글쟁이의 인생을 증명한다

 

▣ 김창석 기자 kimcs@hani.co.kr

24년 동안 8391일에 걸쳐 6702회까지 이어진 초유의 신문 고정 칼럼(‘이규태 코너’), 스스로 주도한 대형 신문 시리즈물 37개, 120여 권에 이르는 저서….

지난 2월25일 별세한 이규태 <조선일보> 전 논술고문이 평생에 이룩한 기록은 한국 언론에서는 이례적이라고 할 만하다. 한국은 저널리스트들이 꾸준히 자신의 분야를 개척하고 그 분야의 전문가로 거듭날 수 있는 제도와 경험이 일천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원천과 생명력은 무엇이었을까. 그를 아는 많은 이들이 이 전 고문의 자택 지하실 서재를 물리적 원천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 서울 서초구 반포동 이 전 고문의 자택 지하 서재 모습. ‘이규태 코너’의 아이디어와 글 재료가 이곳에서 나왔다.

그 서재를 직접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었다. 이 전 고문의 장남인 이사부(41·<스포츠조선> 엔터테인먼트부 부장대우)씨는 <한겨레21>의 취재 요청에 흔쾌히 동의하고 서재를 공개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이 전 고문을 모시고 살아왔다. 서울 서초구 반포동 이 전 고문의 자택에 들른 것은 3월8일 오후 2시였다.

사람 얼굴을 다룬 책만도 30권

20~25평 정도 돼 보이는 지하실 서재는 책과 각종 스크랩, 서류들로 가득 차 있었다. ‘미니 도서관’이라는 말이 적당할 듯했다. “책이 정확하게 몇 권이나 되느냐”는 질문에 이씨는 “정확하게 세어보지 않아서 알 수는 없지만, 대략 1만2천~1만3천권 정도 될 것 같다”며 “원하는 자료를 모으는 기쁨과 행복으로 한평생을 산 분이었기 때문에 이 공간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셨다”고 말했다. 이 공간을 마련한 때는 10년 전이었다. “아파트에 살 때만 해도 온 집안의 벽이 책으로 가득 찼죠. 10년 전 이사를 하는 데 가장 먼저 고려하시는 게 이 공간이더라고요. 이런 곳을 마련할 만한 경제적인 여유는 없었지만 무리를 해서 이사한 겁니다.”

이 전 고문은 평생 수입의 상당 부분을 책 사는 데 써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씨는 “너무 많이 사다 보니 대형 서점들에서는 아예 일본 책들이 한꺼번에 들어오면 책 제목과 간략한 내용이 담긴 리스트를 부친께 먼저 보내줄 정도였다”며 “새로운 전집류가 집에 들어올 때면 ‘우리나라에 한 질밖에 없는 것’이라면서 흐뭇해하시던 기억이 난다”고 회고했다.


△ 그는 <조선일보> 입사 뒤 45년 동안 근속하면서 글을 썼고 퇴직 뒤에도 2년 동안 계속 글을 써왔다.

책들은 대부분 한글과 일본어, 그리고 한자로 된 것들이었다. 영어책은 거의 없었다. 전집류는 한쪽 벽에 몰아서 정리됐다. 국사책에서 제목만 외웠던 것들이 눈에 띄었다. <연려실기술> <성호야설> <조선왕조실록> <대동야승> <불교대장경>…. 최근에 발간된 것보다는 1960~80년대에 나온 것들이 많았다.

전집류를 제외한 나머지 책들은 주제에 맞게 분류됐다. 도서관처럼 고유번호를 붙여서 체계적으로 분류한 것은 아니지만, 나름의 분류법이 있는 듯했다. 설화와 신화, 시조·한시 등 한국문학, 삼국시대, 한국전쟁, 한국의 건축, 한국의 음식, 한국의 의류문화, 인간관계 등 주제에 따라 책들이 따로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역사와 문화와 관련한 방대한 주제의 자료들이었다. 그에게 ‘한국학’ 전문가라는 타이틀이 붙은 이유를 알 만했다. 예를 들어 사람의 얼굴에 관한 연구를 다룬 책들만 해도 족히 30권은 돼 보였다. 어떤 책들에는 책 겉표지에 색깔이 있는 스티커가 붙어 있었고, 책갈피에 메모지가 붙어 있는 책도 있었다. 책을 사지 못한 경우에는 책 전체를 복사해놓기도 했다.

이 전 고문이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는 데 집착에 가까운 열정을 보였다는 점은 나름대로 만든 색인 목록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났다. 도서관에서나 볼 수 있는 색인 분류 도구를 서재 한쪽에 마련한 그는 ‘창기’(娼妓), ‘향약’ ‘기후’ 등 각각의 주제별로 이용할 수 있는 자료의 내역을 정리해놨다. 예를 들어 기후나 풍속과 관련한 주제에 대해서는 고려사 공민왕편 몇 년에 해당하는 곳에 해당 자료가 있다는 식으로 돼 있다.

둘째형 월북으로 마음 고생

이 전 고문은 ‘자료수집광’인 동시에 ‘메모광’이었다. 서재 한쪽엔 수십 권의 노트와 스크랩들이 모여 있었다. 신문기사들을 모아 오려붙인 기사 스크랩과 직접 손으로 해당 주제에 대해 메모한 것들이었다. 아들 이씨는 “부친께서는 책을 읽으면서 인상적인 부분이 나오면 항상 노트에 메모하는 습관이 있었다”면서 “사소한 것이라도 못 버리는 스타일이었다”고 전했다. 인터넷으로 쉽게 찾을 수 없는 재료들로 글을 쓸 수 있는 배경이 여기에 있는 듯했다. 미처 쓰지 못한 새 대학노트들도 스무 권이 넘어 보였다.

이 전 고문은 인터넷과는 별로 친하지 않았다고 한다. ‘독수리 타법’으로 기사를 쓰고 그것을 이메일로 보내는 정도까지만 컴퓨터를 활용했다. 모으고, 분류하고, 재활용하는 모든 행위를 아날로그 방식으로 했던 셈이다. 그러다 보니 그는 문구점을 사랑했다. “새로운 파일이 나오면 꼭 사야 하고 노트도 항상 새것이 몇 개 이상씩은 있어야 했다”는 게 아들 이씨의 말이다. 이 전 고문은 마지막 칼럼(2월23일치)에서 자신을 “어린 시절 종이를 처음 보고는 너무 신기해 잠을 이룰 수 없었던 소년”이라고 일컬었다.

물론 그의 칼럼이 항상 호평만을 들은 건 아니다. 9·11 사태 이후 아랍인들의 특징에 대해 “극단을 오가는 기후 틀에 마음도 틀이 박혀 매사에 극단적”이며 “복수에 민감하고 호전적”이라고 썼다가 “환경결정론이며 인종주의적 편견”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고, 1994년 10월에는 하루치 칼럼의 상당 부분이 일본 <아사히신문>의 논설위원이 쓴 글과 겹친다는 지적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일보> 칼럼니스트들이 끊임없이 시민사회와 충돌했던 것에 견줘보면 1990년대 이후 계속 높아져만 간 반조선일보 기류에 휩쓸리지 않았다.

그가 비교적 한쪽으로 쏠리지 않은 내용의 글로 일관했던 배경에 대해 아들 이씨는 “부친께서 들려준 말씀이 있다”고 털어놨다. “한국전쟁 당시였는데 둘째 큰아버지가 좌익 고위 간부였다가 월북했다는 사실 때문에 당신을 포함한 가족과 친척이 연좌제 때문에 고생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당신도 잘못하면 돌아가실 뻔한 위기까지 갔는데 당시 경찰서장이 봐줘서 살아났다는군요. 신문사에 입사한 이후로도 조카들이 취직할 때 보증까지 서야 했다고 하셨죠. 제가 대학에 들어갈 때도 ‘데모하는 것은 좋은데 연좌제로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라’고 충고하셨습니다.”

숨이 멎기 3일전까지 칼럼 써

서재의 책들은 3월 말께 연세대 도서관으로 옮겨갈 예정이다. 수십 년간 때를 묻힌 책들에 대해서 이 전 고문은 “그렇지만 나만큼 책을 정독하거나 완독하지 않은 사람도 없을 것”이라며 시치미를 뗐다고 한다.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부분만을 짧은 시간에 집중적으로 발췌해서 봐야 하는 기자들의 노동 방식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은 셈이다. 아들 이씨는 “장례식장에서 한 스님이 이규택 코너 24년치를 모두 복사해서 보관해오던 것을 가지고 온 것을 보고 ‘부친께서 행복한 삶을 사셨구나’ 하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 전 고문이 쓴 모든 글을 한데 묶어 ‘이규태 전집’을 만들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이 전 고문은 숨이 멎기 3일 전까지 칼럼을 썼다. 폐암 말기 증상 때문에 마지막 몇 회는 기력이 달려 구술했다. ‘독자와 세상에 대한 유언’이나 다름없는 그의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글로 먹고사는 놈에게 항상 무언가를 쓸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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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키노 > 현장영화인 20인의 추천도서 [1]


1953년생 백전노장 임재영 조명기사부터 스물다섯살 터울의 1978년생 강동균 현장편집기사까지 현장영화인 스무명이 마음에 품었던 책을 꺼냈다. 경험과 연령차는 있지만 이들은 공히 장편영화 3편 이상을 작업한 각자의 분야에서 인정받는 노련한 기사급 스탭이다.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작업하고 있거나 오랜만에 휴식을 취하는 그들에게 책을 추천받고 자필 원고를 청탁했다. 그 결과 영화작업에 실용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전문도서에서 예술적 영감을 주는 화집이나 산문집까지 다양한 분야에 걸맞은 다양한 책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현장영화인 20인이 바쁜 시간을 쪼개어 직접 써내려간 추천사와 함께 그들이 오랫동안 탐독했던 책 스무권의 첫 페이지를 이제 넘겨본다.

오감으로 그려낸 인간의 얼굴

<존 버거의 글로 쓰는 사진> 존 버거 지음/ 김우룡 옮김/ 열화당 펴냄

류성희/ 미술감독

수전 손탁은 이렇게 존 버거를 치켜세웠다. “내가 보기에 오늘날의 작가들 중에서 존 버거에 견줄 만한 작가는 없다. 로렌스 이후로 양심의 명령에 따르는 책임감과 감각적인 세계에 대한 배려를 동시에 보여주는 데 존 버거만큼 성공한 작가는 없었다.” 이 시대의 가장 뛰어난 재능을 꼽을 때 그를 빼놓을 수 없다. 저명한 미술평론가이자 소설가, 에세이스트, 사진이론가, 좌파 정치 이론가 등 모든 분야에서 최상급의 역할을 보여준다. 그는 논쟁할 때 열정과 사나움을 가지고 분노할 수 있는 힘이 있지만 동시에 그의 글은 섬세하고 직관적이며 문장이 지닌 음악성은 울림을 남긴다.

<존 버거의 글로 쓰는 사진>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에는 존 버거가 직·간접적으로 만난 사람들의 모습이 시각적인 문체로 그려져 있다. 작가는 그를 분석하지 않는다. 그렇다. 관찰하는 눈이 있을 뿐이다. 너무도 순수하고 성실한 관찰자의 시선으로 인물과 상황을 치밀하게 묘사하는 데 모든 시각적, 음악적, 후각적인 방법을 사용한다. 그래서 하나하나의 에피소드, 인물들을 대할 때마다 한장의 사진에서 얻는 감흥과 비슷한 무엇을 느끼게 된다. 그리하여 읽는 이가 각자 자신만의 한장의 흑백사진을 찍어내게 만든다. 때로 그것은 그들의 주름과 한숨, 조롱이 담긴 표정의 클로즈업일 때도 있고, 런던광장에서 병든 비둘기를 돌보고 있는 미국산 운동화를 신은 노숙자 여인의 풀숏이기도 하다. 읽는 이는 그 모습에 감춰진 비밀을 탐구하는 데 동참하게 된다. 그럼에도 그가 삶과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의 근심어린 행복한 시선이 너무도 따뜻해서 종종 눈물이 난다. 마치 아직도 희망이 있다고 비밀스러운 제안을 하는 듯하다.

그가 묘사하는 인물들을 연민하고 사랑하고 안타까워하지만, 결코 직접적으로 그런 투로 얘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모든 문장, 조화, 묘사 속에서 그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진실을 갈구하는 젊은 관찰자의 열정, 그리고 세상의 숨겨진 구조를 파악해내려는 지식인의 예리함을 동시에 지닌 훌륭한 작가다. 그의 이런 시선과 방식을 진정 배우고 싶다.

비틀어 보기의 매력에 제대로 빠지다

<르네 마그리트> 수지 개블릭 지음/ 천수원 옮김/ 시공사 펴냄

신보경/ 미술감독

어릴 적 대가족의 품에서 자랐지만 유난히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그래서 항아리 아줌마가 나에게 걸어와 말을 건네거나 요술봉을 흔들면 방 안이 궁전으로 변한다는 등의 상상으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특히 요술쟁이로 분한 내가 골목 어귀에 앉아 즐기던 마법은 사람을 난쟁이로 만드는 일이었다. 한쪽 눈을 감고 손을 들어 감지 않은 눈 가까이로 당겨서 지나가는 사람의 발바닥 높이와 잘 맞추면 행인은 금세 난쟁이로 변했다. 같은 방법으로 돌멩이 위에 집을 얹거나 먹던 사과 위로 똥개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게 했다. 이런 유치한 장난은 시간이 흘러 친구와 노는 즐거움을 알게 된 뒤에는 자연스레 잊혀졌다. 그런데 사춘기를 막 지날 무렵 미대를 다니던 언니의 책상 위에서 어릴 적 내가 즐기던 그 유치한 놀이를 그림으로 그려낸 책을 발견했다. 표지에는 르네 마그리트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렇게 처음 만난 마그리트 화집은 장난 같은 그림투성이었다. 파이프를 그려놓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말장난을 하거나 비슷한 스케치를 늘어놓고는 이름만 다르게 붙이는 등 그것은 엉성한 화집의 전형이었다. 다만 바다 위 허공에 떠 있는 커다란 바위성을 표현한 그림은 꽤 마음에 들었다. 그래도 고흐의 불꽃 같은 그림 옆에는 나란히 놓일 수도 없고 다시 펼쳐보지 않아도 될 책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마그리트와의 인연은 오래 지속됐다. 미대에 입학한 뒤 미술사 시간에 초현실주의를 강변하던 선생님이 보여준 슬라이드 화면에는 바로 그 유치한 그림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여전히 마그리트의 그림은 나에게는 에곤 실러나 구스타프 클림트보다는 별반 매력없이 느껴졌다. 달라진 것은 예전보다는 훨씬 묘사력이 있다고 생각했을 따름이다. 그 묘사력을 왜 저렇게 쓸까 하는 아쉬움과 함께 말이다. 하지만 예전보다는 가까운 자리에 마그리트의 화집을 두고 심심할 때마다 펼쳐보게 됐다. 몇년 뒤 르네 마그리트를 다시 떠올린 건 <매트릭스>를 보고 나서였다. <매트릭스>와 마그리트의 그림은 왠지 모르게 닮았다. <매트릭스>를 보며 느낀 현재와 실재성에 대한 화두는 내던졌던 마그리트의 화집을 진지하게 다시 집어들게 했다. 그리고 발칙한 비틀어 보기와 삶의 고정관념에 대한 무한한 반문을 제기하는 마그리트 그림의 매력에 나는 제대로 빠져들었다. 마치 오래된 친구와 사랑에 빠진 것처럼 지금은 그의 그림을 탐닉한다.

가슴을 찌르는 선배 프로듀서의 말씀

<만추, 이만희> 우리 영화를 위한 대화 모임 지음/ 커뮤니케이션북스 펴냄

이진숙/ 엔젤 언더그라운드 대표

영화감독과 프로듀서들이 영화제작 체험에 관하여 직접 쓴 책들에 관심이 많았다. 프랑수아 트뤼포, 로저 코먼, 로버트 로드리게즈, 시드니 루멧, 크리스틴 바숑 등이 직접 쓴 책들이 그것이다. 요즘은 거의 모든 DVD에 메이킹 비디오들이 수록되어 있어 이런 유의 책들을 대신하는 자료들이 많아졌지만, 프로젝트를 책임지는 이들이 제작현장과 비즈니스계에서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고뇌에 찬 글들의 가치를 넘어서지는 못한다.

지난해 가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구하게 된 <만추, 이만희>는 이런 맥락에서 나를 사로잡았으며, 게다가 ‘앞으로 영화로 나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주었다. 물론 해답까지 주지는 않는다. 필름이 남아 있지 않아 한국 영화사에서 전설처럼 회자되는 이만희 감독의 <만추>를 문헌상으로 복원하는 의미에서 출간된 이 책은 제작자 호현찬, 촬영감독 서정민, 시나리오 작가 김지헌과 백결, 배우 신성일과 문정숙, 윤정희, 그리고 이만희 감독의 딸인 영화배우 이혜영 등의 인터뷰와 젊은 영화평론가들의 글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이만희 감독에 관한 회고전적 책이라기보다 그 시대에 영화를 만들었던 제작자, 스탭, 배우들이 회상하며 함께 쓰는 제작일지 성격을 띠고 있다. ‘제작자 킬러’로 정평이 난 이만희 감독의 성깔과 실력을 존중하며, 가산을 탕진해가면서까지 만들어내고야 마는 제작자 호현찬 선생의 집념에 감동받게 되고, ‘대사가 없는 영화 한번 만들어보자’며 의기투합했던 시나리오 작가 김지헌 선생의 창의적 연대감에 감탄하게 된다. 실패한 가장이었지만 성공한 영화감독이었던 아버지를 재해석하는 배우 이혜영의 인터뷰도 묘한 감흥을 준다.

“저의 제작자로서의 신조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내 영화는 실패하지 않는다이고 다른 하나는 영화가 좋으면 관객이 든다는 거죠”라는 호현찬 선생의 말씀이 비수가 되어 꽂힌다.

잊을 수 없는 캐릭터들의 향연

<대부> 완역본 마리오 푸조 지음/ 이은정 옮김/ 늘봄 펴냄

심산/ 시나리오작가

영화 <대부>를 극장에서 본 것은 아마도 중학생 시절이었던 것 같다. 당시에 그 영화를 속속들이 이해했다고 말한다면 새빨간 거짓말이 될 것이다. 그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어른들의 세계’라는 것이 있고, 그곳에서는 매우 멋지면서도 무시무시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으리라는 느낌에 압도당했던 것 같다. 나이가 들어서 다시 본 <대부>는 전율할 만한 영화였다. 그것은 ‘비우호적인 진실’을 지그시 응시하는 영화였다. <대부>가 유행시킨 관용어를 그대로 차용한다면 ‘거절할 수 없는’ 작품이었던 것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 이 영화는 마리오 푸조의 밀리언셀러를 각색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과연 그 원작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있던가? 내 기억 속의 소설 <대부>는 전부 날라리 번역 아니면 제멋대로 편집되고 윤색을 덧붙인 불량품들뿐이다. 지금도 나는 어느 유수한 출판사에서 펴낸 <대부2>라는 소설을 보유하고 있는데, 어이없게도 영화 <대부2>를 그저 ‘소설적 문체’로 바꾸어 얼기설기 엮어놓은 책이다. 이쯤 되면 ‘해적판’도 아니고 ‘해괴한 변종 창작품’이라고 해야 한다. 그러므로 최근에나마 길벗출판사에서 저작권자인 마리오 푸조의 유족과 정식계약을 맺고 펴낸 완역본 <대부>의 출간은 실로 경하할 만한 일이다.

완역본 <대부>는 내가 아마도 서른번 정도는 보았을 영화 <대부>의 관극 체험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었다. 각색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은가? 그렇다면 소설 <대부>를 탐독해보라. 캐릭터들의 백과사전을 가지고 싶은가? 그렇다면 소설 <대부>를 품에 안으라. <대부>는 서양 범죄학의 <삼국지>이며 잊을 수 없는 캐릭터들의 각축장이다. 나는 <대부>를 보면서 영화에 관한 모든 것을 배웠고 <대부>를 읽으면서 비로소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직시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지독한 슬픔의 대사는 이것이다. “비즈니스는 비즈니스일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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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람 책 안읽는다
美 ‘NOP월드’ 조사 30개국중 꼴찌, 인도1위



[조선일보 신용관 기자]

우리나라 사람들의 활자매체 독서 시간이 세계 최하위권인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뉴욕에 있는 시장조사기관 ‘NOP월드’ 조사에 따르면 한국은 책과 신문, 잡지 등 활자매체를 읽는 데 할애하는 시간이 1주일에 평균 3.1시간으로 조사 대상 30개국 중 꼴찌였다고 BBC 인터넷판이 27일 전했다.


주당 활자매체 독서시간 1위는 인도(10.7시간)로, 한국보다 3배 이상이었으며, 미국(5.7시간)보다 2배 가량 ‘읽는’ 시간이 많았다. 인도 다음으로는 태국(9.4시간), 중국(8.0), 필리핀(7.6), 이집트(7.5) 순이었다. 반면 일본(29위·4.1시간), 대만(28위·5.0), 브라질(27위·5.2) 등의 국민은 독서 시간이 매우 적었다. 세계 평균은 6.5시간이었다.




이번 조사는 지난해 12월부터 올 2월까지 전세계 30개국에서 13세 이상 3만명을 대상으로 개별 심층면접조사 등을 통해 이뤄졌다. ▲TV 시청 ▲라디오 청취 ▲독서 ▲컴퓨터와 인터넷 사용 등 네 가지 항목에 사용하는 시간을 조사했으며, 컴퓨터·인터넷의 경우 업무를 위한 사용 시간은 제외됐다.


한국 국민은 주당 TV 시청 시간은 15.5시간으로 세계 평균(16.6시간)보다 조금 적었고, 라디오 청취는 3.0시간으로 세계 평균(8.0시간)보다 많이 낮았다. 30개국 중 TV는 태국(주당 22.4시간)이, 라디오는 아르헨티나(주당 20.8시간)가 가장 높았다. 반면 여가 시간에 컴퓨터나 인터넷을 사용하는 것은 한국이 세계 평균인 8.9시간보다 많은 9.6시간으로 12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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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콜 아이리버의 진짜 주인은 이 사람
[도깨비 뉴스]

인 터 뷰 ‘애니콜’  ‘아이리버’ 만든 세계적 산업 디자이너 김 영 세
“또라이,  Why not?,  What if?가  창의력 3대 키워드”




●“열망은 기회를 자석처럼 끌어당긴다”  
● 디자인은 1%의 시장을 보고 뛰어드는 모험
●‘심플 쌈빡’ ‘화장기 없는 미인’이 성공 디자인 요체
● 디자인의 업(業)은 요리, 디자이너는 요리사
● 이건희 삼성 회장과 하루 종일 디자인 얘기

영국이 자랑하는 롤스로이스와 재규어가 독일과 미국의 자동차 회사로 넘어갔을 때, 자동차 종주국의 자존심은 한껏 구겨졌다.
그러나 영국은 중후장대한 자동차 산업은 버렸을 망정 자동차 디자인 산업에선 손을 떼지 않았다. 세계적인 자동차 메이커, GM과 크라이슬러 그리고 포드의 핵심 디자이너들이 모두 영국인이란 사실만 봐도 그렇다.
자동차 산업의 ‘머리’를 빼앗기지 않은 영국은 막대한 부(富)를 창출할 디자인 산업에 국가적 역량을 집중한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천재급 디자이너를 찾아라!”
요즘 한국에서도 디자인 산업의 중요성이 새삼 부각되고 있다. 지난 4월 삼성 이건희 회장은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최고 경영진에서 일반 사원까지 디자인의 의미와 중요성을 다시 깨닫고, 세계 일류에 올라선 삼성 제품을 명품으로 만들라”고 계열사 사장들에게 당부했다.
“천재급 디자이너를 확충하라”는 이 회장의 지시에 삼성 임원들은 인재를 찾느라 분주하게 눈을 번뜩이고 있다.

이제 디자인은 소비자의 감성을 자극하는 촉매제일 뿐 아니라 소비자가 겉모습만 보고도 어느 회사 제품인지 알 수 있도록 기업의 정체성을 각인시키는 역할까지 하고 있다. 이런 시대에 김영세 이노디자인 사장은 가히 보배 같은 존재라 할 만하다.
세계적인 디자이너들과 어깨를 겨룰 수 있는 한국인 디자이너인 그는 한국 제품뿐만 아니라 한국의 미(美)를 세계에 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디자인한 MP3 플레이어 ‘아이리버’는 올해 초 라스베이거스 전자쇼에서 기조연설을 한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회장이 들고 나오면서 명성을 날렸다. 또 그의 작품인 태극 문양을 새긴 펜과 명함케이스는 미국 시카고 현대미술관에 전시돼 있다.
그는 세계적인 디자인상을 숱하게 탔고, 경제적으로도 성공했다. 그와 손잡은 레인콤은 일약  MP3 업계의 ‘무서운 아이들’로 성장했고, 삼성 LG 동양매직 등 국내 유수 기업이 그와 함께 일하고 있다. 최근 그는 자신의 디자인 철학을 담은 책 ‘이노베이터’(랜덤하우스중앙)를 펴내 주목받기도 했다.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일하는 김 사장을 서울 청담동 사무실에서 만났다. 얼굴이나 옷 스타일을 보면 대충 나이를 짐작할 수 있지만, 김 사장의 나이는 좀체 짐작하기 힘들었다. 가슴 바로 위까지 단추를 풀어낸 흰 와이셔츠와 짧지만 멋스럽게 세워 올린 머리 스타일은 20대 후반 같고, 얼굴은 40대 초반처럼 보였다.


-나이를 물어보면 실례입니까.
“신문을 보면 꼭 괄호 열고 나이를 적던데. 나이에는 세 종류가 있다고 봅니다.
‘쯩(주민등록증)’ 까면 나오는 나이가 있고, 외모에서 풍기는 나이가 있어요. 마지막이 가라오케 나이예요(그는 말을 하다 말고 두 곡의 노래를 멋들어지게 불렀다).
꽃 피는 동백섬에 봄은 왔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 우네…(젓가락이라도 두드려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이내 그는 다른 노래로 옮겨갔다). 좋은 사람 사랑했었다면 헤어져도 슬픈 게 아니야 이별이 내게 준 것은 곁에 있을 때보다 너를 더욱 사랑하는 맘….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부르면 40~50대로 올라가고, 박효신의 ‘좋은 사람’을 부르면 20대가 돼요. 가라오케 나이로 치면 나는 20대이고, 외모로 보면 ‘변장’을 잘하니까 30대 후반이고, ‘쯩’ 나이는 알아서 생각하세요(참고로 그는 1950년생이다).”

1%의 변화, 99%의 불안
-모든 분야가 그렇겠지만, 특히 디자이너에겐 차이를 만드는 능력이 가장 중요할 텐데, 나름의 비결은 무엇인가요
.
“‘또라이’가 되는 게 중요합니다. 우리는 대개 튀는 행동에 대해 거부감을 갖는데, 거기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현실의 한계를 인정하고 조금 찾다가 없으면 바로 포기하는 경우가 많아요. ‘Why not?(왜 안 돼?)’의 문화가 없기 때문인 것 같아요.
  왜 이런 물건이 없을까, 왜 아무도 안 만들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면 불편함을 참지 말고 해결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하죠. 다른 디자이너들이 ‘내가 왜 진작 이 생각을 하지 못했지?’ 하면서 안타까워하면 그 디자인은 반드시 시장에서 성공합니다.

디자인은 1%의 시장을 보고 뛰어드는 모험이에요. 1%는 한 방울의 물감이 바닷물에 떨어진 것처럼 미미한 것이 아니라 마치 한 방울의 향수가 커다란 방 전체를 새로운 향기로 채우는 것과 같은 위력을 갖습니다. 좋은 디자인을 쓰는 1%를 보고, 나머지 99%의 기업이 불안해하기 때문이죠.

하나 더 보태자면 ‘What if?(만약∼이라면)’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자주 합니다. 나에게 미래의 프로젝트를 주는 거예요. 다음에 디자인을 한다면 어떻게 할까, 좀더 장기적인 미래를 그린다면 어떻게 할까. 이럴 땐 편안한 의자에 앉아, TV를 켜놓고-물론 보지는 않습니다-깊은 생각에 빠져듭니다. 이러면 새로운 아이디어가 새록새록 나오고, 피로도 풀려요.”

-문제는 그런 ‘또라이’를 알아줄 사람을 만나는 것일 텐데요.

△ 김영세 사장의 바람은 그가 디자인한
    모든 제품에 '디자인 바이 이노'를
    새겨넣는 것이다.
“열정이 있으면 꼭 만납니다. 열망(desire)이 운명과 만남을 주선하는 것 같아요. 내가 그랬어요. 커서 뭐가 될까하고 고민하던 열여섯 살 때 친구네 가서 미국 디자인 잡지를 보고 ‘이거다’ 했거든요. 말하자면 운명을 만난 것인데, 그래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게 됐죠(의사인 그의 부친은 아들이 미대를 간다고 하자 극구 말렸다고 한다. 미술 계통은 그때만 해도 배고픈 직업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는 고집을 꺾지 않고 서울대 산업디자인학과에 들어갔다. 그 뒤 미국 일리노이 대학원에서 공부했고, 그 대학 교수도 역임했다).

미국에서 창업하고 어려움을 겪을 때도 운명적인 만남이 있었어요. 골프백을 디자인하고 제작까지 마쳤는데, 10만달러나 쏟아부은 골프백의 판로가 막막했어요. 돈 빌려준 벤처 캐피털리스트는 갚으라고 난리죠. 생각다 못해 직접 골프 상품 박람회가 열리는 플로리다로 날아갔습니다. 막판까지 간 거죠. 전시회장 한옆에 초라하게 부스를 차려놓으니 처량한 생각이 절로 들어요.

힘의 원천, 조직에서 개인으로
그런데 한 노인이 아주 오랫동안 내가 디자인한 골프백을 보는 겁니다. 뜨거운 시선을 느낄 수 있었어요. 나중에 알았는데, 미국 굴지의 플라스틱 제조업체인 플램보사(社) 회장이었어요. 그의 초청을 받아 전용기를 타고 플램보 공장을 방문했습니다. 그는 나더러 ‘아이디어가 독특하고 재능 있는 디자이너 같다’고 격려해줬어요. 그러면서 ‘디자이너가 판매에 얽매이면 많은 일을 놓칠 수 있다’고 하더군요. 이 말이 마음에 와 닿았어요.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이 맞아요. 열망이 있으면 기회가 따라오는 것 같아요. 필연이기도 하고 운명이기도 하고, 우연이지만 열망의 에너지가 컸다고 할까요. 열망은 미래를 자석처럼 당겨주는 것 같아요.”

-창업을 하면서 디자이너로서 명성을 떨치게 됐는데,
창의적인 감성을 발현하려면 언젠가는 모두 창업을 해야 할까요?

“모두 창업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골치가 아파지는데요, 핵심은 이겁니다. 조직의 힘이 개인의 힘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 개인의 역할을 인정해주는 사회로 가야 한다는 거죠. 한국 기업의 중심이 하드파워(hard power)에서 소프트파워(soft power)로 넘어가야 할 시점이에요.
일부는 벌써 그렇게 가고 있어요. 예를 들어볼까요. 한국이 2002년 월드컵에서 4강에 올랐을 때 나는 큰 변화를 발견했어요. 축구팀보다 축구 선수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거든요. 이영표, 안정환, 박지성 같은 개인들이 부각됐어요.

그전엔 그러지 않았어요. 한국팀이 어느 팀을 이겼다, 졌다는 얘기만 있었죠. 팀 단위에서 팀 플레이어로 흥미가 바뀌는 것, 이게 인간주의예요. 21세기 변화의 핵심은 힘의 원천이 조직에서 개인으로 옮겨간다는 겁니다. 이런 변화가 한국의 회사 조직에서 나타나야 하는데, 아직은 분위기가 딱딱해요.”

-김사장이 경영하는 이노디자인은 개인의 역량을 키우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 회사 디자이너들은 모두 회사의 주주이자 파트너예요. 능력 있으면 20대에도 거부(巨富)가 될 수 있어요. 우린 사장과 직원, 회사와 근로자가 아니라 똑같은 직원과 직원이라는 생각으로 일합니다.”

-국내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학생들이 가장 가고 싶은 직장으로 이노디자인을 꼽는데,
입사하려면 어떤 조건을 갖춰야 합니까.

“디자인에 인생을 거는 열정이 가장 중요해요. 다음으로 재능이 있어야 하는데, 재능은 꼭 학점하고 상관있는 건 아닙니다. 어쨌든 재능은 기본적인 겁니다. 난 사람을 뽑을 때 꼭 지원자의 미래 희망을 들어봅니다.”

-‘아이리버’를 생산하는 레인콤 양덕준 사장과의 일화가 재미있던데요. 기존의 MP3와 다른 모양의 디자인을 궁리하던 중 프리즘 모양의 MP3를 고안해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잖아요. 그때 레인콤 엔지니어들이 김 사장에게 제품 크기를 1mm만 늘려줄 수 없냐고 요구하자 양 사장이 “꾸겨넣어!”라고 했다죠? 경영진의 디자인 마인드가 없다면 디자이너로서 꿈을 실현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다른 기업의 경영자들은 어떻습니까.
“삼성, LG 같은 대기업 경영자는 디자인에 대한 애정이 남다릅니다. 9년 전 경기도 안양의 골프클럽 옆, 말 타는 곳에서 삼성 이건희 회장을 만났어요. 이 회장은 나와 하루 종일 디자인에 대해 얘기를 나눌 만큼 열정적이었어요.
디자인의 중요성, 그리고 ‘아름다운 것이 결국 이긴다’는 얘기를 나눈 기억이 납니다. 그때 이 회장은 산업의 큰 그림을 그린다든지, 미래가 어떻게 될지 예측하는 뛰어난 경영자라는 인상을 받았어요. 구자홍 전 LG전자 회장(현 LG전선·LG산전 회장), 동양매직 이영서 사장과도 디자인에 관해 많은 얘기를 나눴어요.”


△ 목걸이형 MP3를 스케치한 그림
보기 좋고, 쓰기 편하고, 만들기 쉽게
-천호균 쌈지 사장, 아침이슬의 김민기 학전소극장 대표와 경기고 동기시죠? 내로라하는 패션회사 대표, 한 시대를 풍미한 예술가, 그리고 세계적인 디자이너를 배출한 게 눈에 띄는군요.

“우연이 아니었을까요. 우연히 같은 시간에 그런 사람들이 모인 것 같아요(김 사장은 대학 시절 김민기씨와 ‘도비두’라는 듀엣활동을 했다. 천 사장과는 사업 파트너로 쌈지의 운동화 구두, 텅슈즈를 함께 제작한 바 있다).”

-사무실 탁자나 의자 등 곳곳에 ‘디자인 바이 이노(Design by Inno)’라는 로고가 새겨져 있네요.
“‘디자인 바이 이노’를 사용하는 ‘이노족(族)’을 확산시키고 싶어요. 우리가 디자인한 모든 상품에 ‘디자인 바이 이노’를 새겨넣을 겁니다. 제 추산으로 지금까지 ‘이노스런’ 디자인을 소비한 사람은 세계적으로 2000만명쯤 된다고 봅니다. 우리가 디자인한 MP3, 휴대전화, 신발, 옷, CJ에서 출시한 칼국수, 오뚜기의 맛있는 밥을 소비한 사람이 그 정도 돼요.

디자인은 마술과도 같습니다. 마약 중독자처럼 한 번 빠지면 디자이너의 매력에 끌려 다니게 돼요. 이젠 누가 만들었는가보다 누가 디자인했느냐가 소비자의 구매 이유가 되고 있어요. 소비자의 개성이 강해져서 그렇습니다.”

-‘이노스럽다’는 것은 어떤 겁니까.
“한마디로 ‘심플 쌈빡’하다는 거죠. 디자인은 간결해야 합니다. 군더더기가 없어야 진정한 아름다움이 보입니다. 화장기 없는 미인과 같아요. 간결한 것은 경제적입니다. 생산 공정이 간결해지면 제조원가에서 경쟁력이 생겨요. 그러면 최종 혜택이 소비자에게 돌아갑니다.
더 아름답고, 더 값싼 제품을 만들 수 있다, 이것이 디자인 정신이에요. 디자인이 좋아서 많이 팔리면 생산물량이 많아지고, 가격경쟁력이 생깁니다. 디자인은 장식이 아니에요. 디자인은 보기 좋고, 쓰기 편하고, 만들기 쉬워야 한다는 세 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합니다.”


미래를 여는 힘은 내부에 있다
-레인콤의 MP3 ‘아이리버’와 삼성 휴대전화 ‘애니콜’ 디자인을 맡고 계신데, 요즘 MP3는 카메라, 휴대전화는 물론 전자사전 기능까지 갖춘 복합 디지털 기기로 변신하고 있습니다. 휴대전화 역시 마찬가지예요. 휴대전화와 MP3 중 어떤 것이 살아남을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둘 다 살아남을 것 같아요. 시야를 넓혀서 세계 시장을 보면 소비자들은 어느 한 가지 유행을 쫓아가지 않습니다. MP3를 좋아하는 소비자가 있고, 휴대전화를 좋아하는 소비자가 있어요. 입맛이 다양하기 때문에 각각의 시장이 있습니다. 너무 성급하게 결론 내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디지털 컨버전스(convergence·융합) 시대에 생존하려면 누구보다 앞서서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이야깃거리 중 하나가 디자인이죠. 디자인의 업(業)은 요리에 비유할 수 있고, 그렇다면 디자이너는 요리사예요.
  같은 재료를 써도 음식을 맛있게 요리하는 주방장이 있잖아요. 성공한 경영자는 맛과 멋을 가미한 제품을 재빨리 내놓는 사람입니다. 타임 투 마켓(Time to Market·적절한 시간에 시장에 제품을 내놓는 것), 선두주자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디자인에도 때가 있어요. 빠를수록 좋아요. 창의적이면서도 빨라야 하죠.”


△ 스크린이 회전되도록 고안한 김영세 사장의 스케치를
    제픔으로 실현시킨 삼성 애니콜 휴대전화.
-쉴새없이 머리를 쓰려면 몸 관리가 필수일텐데, 어떻게 체력관리를 합니까.
“골프는 치는데, 일부러 열심히 하는 운동은 없어요(업계에는 그의 골프 실력이 상당한 수준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냥 나를 자유스럽게 놓아두려고 노력합니다. 일하는 시간도 특별하게 정하지 않아요. 몸을 편안하게 하려고 세계에서 가장 편한 의자로 정평이 난 의자(허먼 밀러사의 애론 체어)를 사용해요. 몸과 마음이 자유로울 때 아이디어가 나와요.”

-한국이 디자인 강국이 되려면 당장 무엇부터 해야 할까요.
“이노디자인이 한 것처럼 하면 됩니다. 소프트 파워를 발휘해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성공하면 됩니다. 중국이 하드웨어는 쫓아올지언정 소프트웨어 경쟁력까지 따라오지 못하게 앞서가야 합니다. 정부가 정책적인 측면에서 도와줄 수도 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내면에 힘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거예요. 개개인에게 파워가 숨어 있어요. 형태를 만드는 것은 쉽지만, 내면의 힘을 이끌어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미래를 이끌어가는 파워는 내재해 있음을 경험하는 것이 필요해요.”

인터뷰 말미에 사진을 몇 장 찍으면서 김 사장과 별생각 없이 나눈 얘기는 또 다른 그의 이면을 엿보게 했다. 그는 “미국에서 직장에 다니는 딸이 요가를 열심히 연습하고 있는데, 요가 선생이 되겠다고 욕심을 부려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순간 30여 년 전 김 사장의 부친이 아들의 미대 진학을 반대했다는 얘기가 생각났다. 말해놓고도 그걸 눈치챘는지, 그는 금세 씩 웃으며 “사실, 걱정 안 해요. 지가 알아서 잘하겠지 뭐”라고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버지들의 마음은 다 같은가보다.


기사제공= 신동아  박성원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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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람] '9·11 참상' 8500여 장 사진에 담아
90여 개국서 전시한 미국 사진작가 미야로위츠 방한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의 세계무역센터가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그로부터 열흘쯤 뒤 2만여 평의 참사 현장(그라운드 제로) 울타리 안으로 한 사진작가가 들어섰다. 그는 상상을 넘어선 파괴에 '외경심'까지 느끼며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 이듬해 6월까지 8개월 반 동안 거의 매일 그곳을 찾아 8500여 장의 사진을 찍었다. 그는 이 가운데 28장을 골라 '9.11 이후-그라운드 제로의 이미지'란 이름으로 세계 90여개국 400여개 도시에서 전시했다. 모두 400여만 명이 봤다고 한다.

조엘 미야로위츠(67). 그는 사진작가로는 유일하게 9.11 테러 현장에 무제한 접근해 사진을 찍었던 사람이다. 한국HP의 전문가용 포토프린터 출시 행사에 참석차 최근 방한한 그를 만나봤다.

-어떻게 해서 '그라운드 제로' 사진을 찍게 됐나.

"(참사가 발생한 뒤) 뉴욕 토박이로서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살펴봤다. 흔히들 헌혈이나 기부를 했는데 난 그 이상의 일을 하고 싶었다. 알아봤더니 (현장을 기록하는) 사진가가 없었다. 그건 잘못된 거였다. 그래서 뉴욕시 당국을 설득했다."

-사진을 통해 보여주려고 했던 건.

"뼛속까지 울리는 고통이랄까 슬픔같은 것을 전달하고 싶었다. 그라운드 제로에 섰던 유일한 사진작가로서 받은 느낌을, 그곳을 보지 못한 사람들까지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전시회까지 하게 된 계기는.

"국무부에서 연락이 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전세계에 보여주자고…. 실제로 관람객으로부터 '비디오로 볼 때는 영화의 특수효과 같았는데 사진을 보니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겠다. 참 비극적이다'란 얘기를 많이 들었다."

미야로위츠가 사진을 하게 된 건 실로 우연이었다. 오하이오대에서 미술사와 추상화를 전공한 그는 당초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했다. 1962년 어느 날, 업무차 한 사진작가를 찾아갔다가 그의 일하는 모습에 매료돼 바로 사진계에 뛰어들었다.

"사진작가라 하면 흔히 (모델에게) 이런저런 포즈를 취하라고 한 뒤 사진을 찍는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역동적으로 움직이면서 자신을 찍었다. 마치 시간을 정지시킬 수 있는 듯한 모습으로…. 바로 그날 오후 직장을 관두고 카메라를 빌려 거리로 나섰다." 그 사진작가가 바로 사진집 '미국인들'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로버트 프랭크다.

미야로위츠는 처음부터 컬러 사진을 찍었다. 당시만 해도 예술 사진계에서 컬러 사진은 경박하다고 '멸시'받았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어느덧 그는 흑백 사진에 대한 급진적 반동 운동인 '뉴 컬러'의 중심에 선 인물로 사진사에 기록됐다. 78년 나온 그의 첫 작품집 '케이프 라이트'는 컬러 사진의 고전으로 평가받는다. 지금까지 13권의 책을 내고 350여 회의 전시회를 열었다.

글=고정애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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