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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경쟁 - 패자 부활의 나라 스위스 특파원 보고서
맹찬형 지음 / 서해문집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아름답고, 그럴 듯한 제목의 책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겐 선뜻 사서 읽고 싶은 생각이 드는 책은 아니다. 요즘 이런 분위기의 책이 워낙 많기 때문이다. 책 말미 저자의 말대로 이미 거스를 수 없는 변화가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런 책이 많이 출간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따뜻한 경쟁'이라는 일견 모순적인 어구를 통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책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도 느껴진다. 책을 읽으면 저자가 기자로서 스위스에서 보고 경험한 '따뜻한 경쟁'의 사례들이 많이 등장한다. 저자는 어릴 적부터 치열한 경쟁 속에서 남을 배려하지 못 하고 승자 독식의 지옥 속에서 허우적대는 한국 사회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스위스 사례를 이용한다. 다행히 스위스의 모든 것이 미화되지는 않는다. 그 사회를 그대로 모방하자는 주장은 아니고, 스위스 사회의 많은 장점을 취하자는 것이다.
너무 뻔한 내용이 가득할 거라는 기대와 달리 책에는 나를 포함한 한국인들 다수의 직관에 반하는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한다. 나에게 케이블카는 (저자의 추정대로) 환경을 파괴할 뿐 아니라 비싼 요금을 내야하는 쓸데없는 물건으로 보이지만, 저자는 한국의 무수한 등산객들의 발이 산을 오히려 망가뜨리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스위스의 아름다운 풍경을 케이블카 덕분에 힘이 없는 노인과 장애인도 함께 즐길 수 있지 않냐고 지적한다.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스위스 정부에서 각 가정, 농가에 보조금을 줘가면서 목가적인 풍경을 만들어서 외국인 관광 수입을 챙긴다는 얘기는 비록 다른 국가지만 내가 유럽 몇 개 국가에서 받은 인상과도 일치한다. 무조건 고층 빌딩을 만들려는 한국의 건축 대기업들과는 대조적인 태도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특이한 스위스 사회의 모습들이 등장한다.
책에서 무엇을 기대할지는 독자마다 다를 텐데 나는 이 책의 성격이 무엇인지 의아했다. 기자이기에 학술서적의 엄밀함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책의 구성이 짤막짤막한 기사들의 모음집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기사 형식의 글이 그 자체로 좋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읽는 과정에서 흐름이 자꾸 끊어졌다. 더구나 스위스에서의 경험에 대한 책이라는 소개와 달리 내용 중에는 스위스와 전혀 무관한 것들이 적지 않다. 어떤 내용은 책의 제목인 '따뜻한 경쟁'과 얼마나 연관이 되는지도 잘 모르겠다. 또 꼭 스위스에서 살아봐야 알 수 있을만한 내용이 많은 것 같지도 않다.
두어 가지 점을 이야기하고 리뷰를 마치려고 한다. 우선 스위스의 정치 제도에 대한 부분이다. 책에는 스위스의 국민/주민 투표라는 직접 민주주의적 제도에 대해 잘 설명했다. 직접 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가 가장 유명하고 대표적이며 역사상 존재했던 흔치 않은 사례이다. 보통 이야기되듯이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국가가 작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쉽지 않다. 인터넷과 미디어 혁명으로 사회의 모습이 급변하고 시민들의 직접 정치 참여 가능성이 갈수록 높아지는 듯 보이지만 한국 사회에서 빨리 실현될 것 같지는 않다. 지방 자치는 이제 제법 역사가 되었지만 여전히 중앙 정부에 크게 의존하고 있으며, 지역민들이 활발하게 지역 정치에 참여하는 것 같지도 않다. 스위스에서는 되는데 왜 한국에서는 안 되냐고 한탄할 문제가 아니라 두 나라의 다른 조건들을 고려하고, 올해의 두 번의 큰 선거를 통해 반영될 민심에 기반해서 현 지방 자치 제도에 대한 대안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 근본적으로 서울과 수도권에 집중된 말 그대로 모든 것의 집중, 쏠림이 완화되지 않는 한 지방 자치는 요원한 일이 될 것이다. 피켓 시위라도 조금 더 자주 하라는 저자의 암시 정도는 당장이라도 한국인들이 해야 할 일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경쟁은 '따뜻'할 수 있는가? 아마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문제지 스위스 사회의 경쟁이 따뜻하기만 할 리가 없다. 책에서는 어릴 적부터 공부할 청소년은 따로 분류해 힘들게 공부시키고, 나머지는 일찍부터 다양한 직업을 갖게 되며, 한국과 달리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이라도 월급이 적지 않으며 사회적으로도 열등함을 느끼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복지국가 체제의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책은 한국의 복지 논쟁에 대한 비판으로서 복지가 돈을 까먹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사회의 장기적 발전 전략임을 강조한다. 많은 부분에서 공감한다. 하지만 소위 선진국의 사례라서 들여와야 한다기보다 우리나라가 나름의 혼란을 겪고 나서야 복지, 사회보장의 중요성에 대한 진정한 공감대가 형성될 것이다. 해방 이후 한국의 민주주의가 수많은 시행착오를 여전히 거치는 중이듯이 사회보장 제도도 쉽게 정착되기는 어렵다. 한국은 점점 차가워지는 살벌한 경쟁의 대가를 이제서야 절감하며 조금은 더 따뜻한 대안을 찾아가는 중이다. 결국 공동체란 차가운 인간 관계로는 유지될 수 없는 법이다. 하지만 경쟁은 불가피하고, 그것이 따뜻할 수는 없다. 아마 따뜻함보다 경쟁 자체가 문제시 되어야 할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