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시절, 끼니를 때우는 것만으로도 일상이 버겁던 시절, 학교 다닐 돈도 격려해주는 어른도 없던 여자애가 하나 있었다고 했다. 아무리 울고, 소리 질러도 변하는 건 하나도 없는데, 아무것도 할 게 없어서 그냥 울 수밖에 없던 여자애가 있었다고 했다. 그 애가 어느 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고 했다.


그날, 그 애가 하늘을 올려다 본 건 운명이었을까, 꿈이었을까.


그 옛날에 하늘을 날고 싶었던 여자애, 박경원의 이야기는 영화가 만들어지기 전, 그렇게 입소문을 타고 수십 년을 흘러 다른 여자애들을 설레게 만들었던 이야기였다.


그래서 영화 <청연>을 본다는 것은 박경원의 삶을 스크린에서 보고 싶다는 당연한 욕망, 혹은 이미 각자 완성한 박경원 스토리를 감독과 작가가 어떻게 재현했는지 확인하고 싶은 욕망의 선택일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후자를 택했고, 당연하게도 실망스러웠다.


충실하게 박경원의 라이프 스토리를 따라 영화를 보았다면, 나는 박경원과 함께 몇 년씩 휴학을 하면서 비행학교를 다닐 수 있었을 것이고, 대포 한 잔, 담배 한  개비로 울분을 삭일 수 있었을 것이고, 구름을 뚫고 하늘을 날 수 있었을 것이고, 시대와 다른 꿈을 꾸었던 스스로가 애처로워 눈물을 흘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감독은 관객의 감정과 판단의 개입을 허용치 않고 교과서적인 설명을 함으로서 나의 모든 감동을 빼앗아갔으며, 영화를 둘러싼 친일담론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들을 노골적으로 배치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역사교과서보다도 재미없는 과거를 재현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극기 휘날리며>, <태풍>, <실미도>와 같은 한국남성판타지시대물 사이에서 거액을 투자한 식민조선의 여자비행사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상영될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는 것이 관객의 역할이라면, 궁시렁대며 만족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현재는 여기까지. 딱 여기까지다. 식민시절에 독립이나 생존의 꿈을 가지지 않고, “다른 꿈”을 꾸었던 어떤 사람의 이야기나, 아버지나 남편에 순종하지 않고 “다른 꿈”을 꾸었던 어떤 여자의 이야기나, 딱 여기까지만 그려질 수 있는 것이다.


그나마 영화가 개봉될 즈음 포탈사이트를 달구었던 박경원 친일논란에 관한 뉴스와 그에 달린 수천 개의 리플. 그것들이 주는 끔찍함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상영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영화를 본 지 일주일이 훌쩍 넘었는데도 <청연>을 떠올리면 씁쓸한 기분이 드는 건 이런 복잡하고도 단순한 생각들 때문이었다. 그리고 구름을 뚫고 하늘을 가르던 박경원의 비행기가 여전히 "다른 꿈"일지도 모르겠다는 비관 때문이었다. 내가 너무 지나친가?

1월 6일 저녁, 단성사에서 M과 함께 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