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주의 영화 - 공선옥 소설집
공선옥 지음 / 창비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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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의 영화, 공선옥 지음, 창비, 2019


유복하지 않지만 화목한 가정


요즘의 자기소개서에도 등장하는 문장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때 이 말은 자기소개서에서 공식과 같은 말이었다. 어린 시절의 어렵고 힘든 가정사를 긍정적으로 포장해주는 혹은 사소한 것으로 바꿔주는 마술과도 같은 말이었다. 나 역시 화목한 가정이란 어떠해야 하는지 깊이 고민하지 않고, 가족간에 큰 마찰이나 문제 없이 함께 모여 다정다감하게 사는 것이란 어림치의 이미지만 갖고 사용하였다.


때로는 정말로 화목한 가정이라 할 수 있을까 자기검열을 하며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그러면서 내가 가정을 이루면 유복하지 않지만 화목한 가정이라는 단어에 자괴감이나 자기검열이 들지 않도록 정말 화목한 가정을 꾸려야겠다는 작은 소망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살아가며 만나게 되는 다른 가족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많은 가족들이 저마다의 사연으로 화목하지 못한 상황에 놓여있고, ‘화목한 가정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으며, 화목한 가정의 이미지는 대체로 비슷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보통 삼대의 가족이 함께 살거나 자주 왕래하며 살고, 서로가 큰 마찰 없이 서로 도우며 화기애애하게 살아가는 모습, 가족 간에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양보와 절충을 통해 원만히 해결하는 모습을 화목한 가정으로 그리고 있었다.


저마다의 개성이 다른 인간이 모인 집단으로 최소 단위인 가정도 저마다 다를 수 있음에도 비슷한 이미지를 떠올리는 건 아마도 TV 드라마 속에 비춰진 화목한 가정이라는 판타지가 작용한 건 아닐까 싶었다.


드라마 속 등장인물들(가족, 연인, 친구, 동료 등)은 절대악과 절대선으로 구분되고, 이로 인해 많은 갈등을 가지고 있지만 이들의 갈등은 언제나 해결가능한 문제이다. 대체로 절대악이 절대선으로 전향하거나, 비극적 최후를 맞게 됨으로써 권선징악의 해피앤딩으로 귀결된다.



현실에서 가족 간의 갈등과 마찰은 쉬 봉합되거나 해피앤딩으로 끝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친구나 동료와의 갈등보다 가족 간 갈등의 골이 더 깊다는 것을 안다. 이웃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 평생 얼굴 마주하지 않고 살아가는 가족의 이야기는 주위에 얼마든지 있다. 혹은 어떠한 조건들로 인해 절대로 화목한 가정이라는 판타지적 이미지에 접근할 수 없는 가족들도 얼마든지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내가 가진 이미지화 된 화목한 가정을 기준으로 화목하지 않은 가정’, ‘불행한 가정으로 딱지를 붙이고 있음을 자각하게 되면서 드라마를 보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화목한 가정이라는 판타지를 깨고 다른 사람, 다른 가정에 대해 가치판단하지 않게 되었다. 아니 <은주의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그렇게 되었다고 믿고 있었다라고 하는게 맞을 것 같다.



<은주의 영화> 속에 등장하는 가족들은 모두 저마다의 아픔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화목한 가정이라는 이미지에 부합되지 않는다. 또한 이들은 반드시 화목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지 않는다. 모두가 저마다의 어려움 속에서 일상을 살아내고 있는 사연에 가슴 아파지고, 이들을 통해 나의 관계를 돌아보게 되었다

그러는 한편 나는 <은주의 영화>에 소개된 8편의 소설을 읽으면서, 화목과 불행이라는 엉터리 이분법으로 이들을 불행한 가정이라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각인된 판타지는 쉽게 깨지지 않음을 절감했다.



현실의 어려움 일상이 늘 우울하거나 암울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은주의 영화>에 소개된 8편의 소설 속 주인공 들은 저마다 아픔이 있고,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그러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웃음을 자아내는 작은 에피소드들이 있지만 결코 가볍게 웃을 수 없었다.


행사 작가 K<대낮의 매운탕>이라는 작품을 아주 오래전 발표한 후 소설은 쓰지 못하고 잡문만 쓰면서 살고있을 즈음 <대낮의 매운탕>이라는 소설 제목으로 인해 식도락가의 전국 맛집 탐방행사에 매운탕 전문 작가로 섭외된다. 그리고 회는 매운탕 다음에 나오니 매운탕 전문 작가는 회도 잘 알 것 아니냐며 회 투어 행사에도 섭외된다.


섭외 당시 작가 K<대낮의 매운탕>은 매운탕과 관계 없이 암울한 시절을 극복하는 젊은 세대의 이야기이기에 행사 섭외를 미덥지 않게 생각했지만, 행사비를 받은 이후 회 투어에서는 책도 찾아보고, 직접 전어회도 먹으며 전문 작가이미지를 갖기 위해 노력한다.


부탁을 받았으니, 지난번 매운탕 행사에 응했을 때 그랬던 것처럼
공부를 미리 해둬야 할 것 같았다.(
)
전어 횟집 순례객들 앞에서 매운탕 전문 작가는
회 전문 작가로 변신해야 할 것이다.(
)
회 전문 작가가 그들과 같은 양의,
같은 깊이의 정보만을 나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명색이 전문작가가 아니냔 말이다. (17)


그러나 전어 회는 매운탕이 나오지 않는다는 대목에서 실소가 나오면서도 마음껏 미소지을 수도 없었다.


K는 부지런히 전어회를 씹는다.
부지런히도 씹어보고 천천히도 씹어본다.
이리저리 살펴도 본다.
이번에 뛰는 횟집 탐방 행사는
지난번 매운탕 때보다 잘하고 싶다,는 생각도 씹는다.
이제 곧 매운탕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전어회는 매운탕이 안나온다는 것을
회를 먹고 나서야 알았다. (19~20)


<은주의 영화>에서는 어린 시절 만화 속 노래가 들려 미소가 절로 지어지고, 멜로디가 들리는 듯 하지만, 등장인물들의 어려운 상황과 오버랩되며 씁쓸해지기도 했다.


, 그러면 내가 노래해줄까?
개구리 소년 빰빠바 개구리 소년 빰빠바
니가 울면 무지개 연못에 비가 온단다
비바람 몰아쳐도 이겨내고 일곱번 넘어져도 일어나라
울지 말고 일어나 빰빠바 피리를 불어라 빰빠바
……계속 운다
요리 보고 조리 봐도 음음 알 수 없는 둘리 둘리
빙하 타고 내려와 음음 친구를 만났지만
일억년 전 옛날이 너무나 그리워
보고픈 엄마 찾아 모두 함께 나가자
아아아아 외로운 둘리는
……계속 운다(121)


8편중 <은주의 영화>는 일종을 씻김굿같기도 했다. 카메라로 찍은 화면에 빨려들어 영상 속 화자가 내가 되고, 현실에서의 내가 영상 속 화자가 되는 체험. 이모 상희와 이웃집 친구 철규가 되어 차마 말하지 못했던 일들을 쏟아내면서 아파하고, 묻어둔 말을 꺼냄으로써 위로받고 위안 삼는 씻김굿과 같다고 느꼈다.


이모가 웃었다. 분명히 카메라 속에서 이모가 웃었는데
현실에서의 나도 웃고 있었다.(
)
카메라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카메라가 숨을 쉰다.
카메라가 큰 숨으로 나를 빨아들인다.
나는 저항하지 못하고 카메라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카메라 속에서 카메라를 찾는다. 그리고 나는 알았다.
카메라 속에서는 카메라가 필요 없다는 것을.
카메라 속에서는 내가 카메라이고 카메라가 이모다.
나는 이제 이모가 되었다.(82~83)


그놈들이 바지를 추켜 입으면서 그래.
죽이기에는 애가 둘이나 있다고. 애들 봐서 죽이지는 못하겠다고.
철규가 나를 살렸어.
내가 숲에서 나왔을 때 철규가 은주를 업고 기다리고 있더라고.
철규는 울지 않았고 은주도 울지 않았다고.
나도 울지 않았지. 다만 갈매기만 울드만, 파도만 울드만,
우리는 결코 울지 않았다고, 철규도 나도 아무 소리 안했어.
그냥 가만히 있었어, 울지도 않고, 그것이 다여.
자네 안 들어오는 동안 우리한테 그런 일도 있었다고.
그러나 그것은 암것도 아니라고, 살았으면 된 거라고.(125)


쇠고랑을 차는 한이 있어도, 내가 이 말을 해놓고
죽는 한이 있어도 말을 해야겠지, 말을.
철규야, 이 엄마를 용서해라. 그리고 이 엄마를 잊어버려라.
나도 인자부터 너를 잊어버릴 테다,
잊어버리고 새 인생을 살아갈 거다.
너도 다 털어놓고 훨훨 날아가라, 니 가고 싶은 데로 날아가라.
우리 인생에는 그런 시기가 있단다. 막 미쳐 돌아가는 시기가 말이여이.
남한테 절대로 털어놓을 수 없는 한 시기가
있는 모냥이여, 우리 인생이.(122~123)


나도 말해야겠네. 진짜 말 못했는데,
울 아부지 제삿날 우리 은주한테도 못한 말을 철규한테 할라네,
우리 아들 철규 앞에서는 할라네.(123)


 화목한 가정이라는 내 안의 판타지를 다시금 깨닫는 계기가 된 <은주의 영화>를 다 읽고 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품고 있는 아픔을 쉽게 동정하거나, 용기랍시고 이겨내라는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게 되었다. 동정이나 위로는 나의 가치판단이 개입된 것이란 걸 알게 되었다. 함께 아파하고 공감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역할임을 깨닫게 되었다. 내 주변 사람들의 인생에 가치판단이 들려 할 때마다 꺼내봐야 할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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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의 천사 에드거 월리스 미스터리 걸작선 4
에드거 월리스 지음, 양원정 옮김 / 양파(도서출판)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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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속 유산을 노린 천사같은 약혼자. 억울한 누명으로 옥살이와 살해당한 상속자. 이를 막기위한 친구이자 변호사의 노력. 이 소설의 결말이 해피앤딩일까, 아닐까 무척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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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뭘 기대한 걸까 - 누구도 나에게 배려를 부탁하지 않았다
네모토 히로유키 지음, 이은혜 옮김 / 스노우폭스북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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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뭘 기대한 걸까, 네모토 히로유키 지음, 이은혜 옮김, 스노우폭스북스, 2019


<나는 뭘 기대한 걸까>상대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사람이 그러한 능력으로 인해서 상처받고 고통받는 이유와 그 해결방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저자 네모토 히로유키는 심리활동가로 18년간 활동하며 2만 여명의 사람을 만나면서 상대의 마음을 잘 헤어리는 능력 탓에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괴롭고 고통스러운 상황을 바꿔주기 위해 <나는 뭘 기대한 걸까>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으로 인해 상처받은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처는 특히 가족과 친구와 같이 아주 가까운 사이에서 비롯되거나, 직장 상사, 동료 등 많은 시간을 함께하는 관계 속에서 비롯된다. 애초에 나쁜 의도를 가지고 상처를 주는 경우도 많지만, 대개는 사소한 오해, 소통의 부재에 따른 각자의 편견에 따라 상처를 주는 일이 많다.


우리는 무의식중에 상대도 나와 마찬가지 일거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이를 투영의 법칙이라 한다.
내가 상대의 마음을 헤아렸듯이
상대도 분명 내 마음을 헤아려 줄 것이라 생각한다.(25)


그러한 가운데, ‘상대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먼저 살피기 때문에 상대에게 미안한 마음에 잘 표현하지 못해 오해를 사고 상처를 받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상대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사람은 말로 자신의 행동을 알리는 일에 매우 서툴다.
이런 말을 하면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생각하고,
그 말을 들은 주변 사람들이 미안해하거나 기분이 상하지는 않을지
상대의 마음을 살피기 때문이다.(20)


상대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사람들 중에
나만 참으면 다 잘 될거야라는 생각에 얽매어 있는 사람을 흔히 볼 수 있다.(24)


상대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상대의 의도를 파악해 그에 맞추어 행동한다.
하지만 때로는 의도를 잘못 파악해서 당황하는 경우가 생기는데
이것도 역시 상대에게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었다는 증거라 할 수 있다.(27)


상대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사람도
처음에는 자신만의 기준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자신의 행동을 알아주지 않거나 오해하고,
돌아오는 보상이 없으니 허탈해지고 서운한 마음이 들면서
마음속이 불만으로 가득 차게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알아주었으면하는 욕구가 생기고
자기 기준이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불만과 자기부정이 나타난다.(65)


우리 마음속에는 상대도 기뻐해 줬으면 좋겠다는 욕구가 존재한다.()
당신을 위해 고른 선물이니 그에 걸맞은 반응을 보여 줘라는 오만함()
그래서 상대가 확연히 드러나게 기뻐하지 않으면 실패했다고 느낀다.()
이것은 거래. ‘선물을 주었으니 기뻐해 줘라며
상대에게 강요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나아가 실은 하고 싶지 않지만 안하면 미움받을 것 같아서 하는,
안 하면 안 될 것 같아서하는 희생으로까지 이어진다.(70~71)


이처럼 상대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사람은 상처를 많이 받지만 이러한 능력은 그들만의 장점이라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상대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능력은
매우 훌륭한 능력이다.
다른 사람과 비교할 필요도 없이 당신의 장점이며 가치다.
이 능력을 스스로 비하하고 제대로 인정핮하지 않으면
타인에게 지나친 기대감을 품고 오해를 하게 된다.(32)


상대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눠 보면
항상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최선을 다해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정작 자신은 소홀히 대하는 경우가 안타까울 정도로 많다.(58)


<나는 뭘 기대한 걸까>는 다양한 상담 사례를 바탕으로 실제 생활에서 벌어지는 상황과 이에 대한 대처방안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부모나 예전 상사에게서 들은 말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얽매여 있거나 자신과 맞지 않는 가치관을 따르고 있다면
지금 당장 버려야 한다.
그것만으로도 일과 사람을 대하는 마음이 편해지면서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40)


효과적인 긍정적 단언 활용법
첫째, 상대를 부정하는 말은 넣지 않는다.
둘째, ‘나는’, ‘남편은처럼 주어를 명확하게 한다.
셋째, ‘선택한다’, ‘신뢰한다’, ‘행복하다와 같은 주체적인 말을 넣는다.
넷째, 안심할 수 있고 힘을 얻을 수 있는 괜찮다라는 말을 넣는다.(92)


상대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사람은 겸손한 편이기 때문에
내가 당신을 이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하는 일에 서툴겠지만,
그 생각을 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153)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린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당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사랑을 느낄 수 있다.
그때부터 신기하게도 마음이 안정되고 기쁨을 느끼기도, 감동을 하기도 한다.(188~189)


다른 사람을 위한 배려로 인해 되려 상처를 받는 경우가 많은 사람이라면 <나는 뭘 기대한 걸까>를 통해서 그러한 상처받는 상황을 바꾸기 위한 좋은 방법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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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았다, 그치 - 사랑이 끝난 후 비로소 시작된 이야기
이지은 지음, 이이영 그림 / 시드앤피드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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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았다, 그치, 이지은 지음, 이이영 그림, 시드앤피드, 2019

 


오늘의 삶이 아름답고 가치 있는 건 삶에 끝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사람은 태어나면 언젠가 죽는다. 태어나고 죽는 것 사이에 우리의 삶이 있기에 삶은 살아가는 과정이면서 동시에 죽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지나간 시간이 되돌아 오지 않고, 다가올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지만 끝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오늘 이 순간을 살아내는 일상이 아름답고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랑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한 사람의 삶이 영원하지 않듯, 한 사람에 대한 사랑도 영원하지 않다.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는 과정은 동시에 이별로 향하는 과정이다. 매 순간 이별을 염두하고 사랑할 필요는 없지만 이별에 이르는 과정이라 생각하면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 오늘의 사랑을 더 소중히 여기지 않을까 싶다.


 

너무 끓이면 까맣게 타 쓴맛만 남고
다 식고 나면 쉽게 깨져 조심해야 하는,
그렇지만 깨진 파편까지도 달콤한 그거.(
)
달고나 말고, 사랑.(23)



물론 고통 없는 이별은 없다. 이별 후에 찾아오는 고통은 영원할 것처럼 느껴지고, 다시는 사랑을 하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과 불안감도 든다. 그렇지만 이별의 고통은 영원하지 않고 우리는 다시 사랑할 수 있고, 또 다시 사랑하고 있다. 물론 또 이별이 찾아오겠지만


 

<참 좋았다, 그치>는 상대의 사랑이 변해 이별을 직감한 순간부터 이별과 함께 찾아온 고통의 시간들,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지난 사랑을 떠올리며 이별을 이겨내는 과정을 담았다. 에피소드가 시간적 연속성을 갖는 것은 아니지만, 감정에 대한 사실적 표현으로 인해 마치 한 권의 일기장을 보는 듯했다.


 

사실 그보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어제 우연히 발견한 카페의 기막힌 라떼라든가,
우리 둘이 함께 알고 있는 친구에게 생긴 귀여운 사연이라든가,
너에게 꼭 들려주고 싶었던 참 뿌듯했던 일.
모든 것들이 하루 사이에 부질없는 이야기가 되었다.(44)


 

48.
새로운 목적지를 향해 달려줄 열차가 도착하기까지 필요한 시간이란다.
전광판의 글씨들이 아른아른 번져갔다.
문득 내가 다시 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시간도
딱 저 정도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부족하지도, 너무 길지도 않은 시간.(63)


 

어리석었다. 애쓰지 말았어야 했다. 안 보이면 잊혀지도록,
기억하려 해도 떠오르지 않도록.
선명하게 새겨 놓은 기억이 자주 아파 하루는 울었고,
울고 나서 개운해진 마음으로 또 하루를 살아냈다.

그 후에는 또다시 주저앉아 울고 싶은 날들이 반복되었다.(71)


 

어찌 되었든 내게도 이런 날이 오고야 말았네요.
그 사람이 무뎌지는 날, 그립지도 아프지도 않은 날.
우리는 무엇을 위해 수많은 밤들을 함께 울고 웃었던 걸까요.
뜨거웠던 그때의 우리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을까요.(188)


 

여고 시절, 친구들과 식당에 갔을 때였다.
멋있는 직원이 냄비에 담긴 음식을 가져다주었는데,
그가 잡은 냄비 손잡이를 나도 한번 잡아보고 싶다며 손을 댔다가 데인 적이 있다.
좋아하는 감정이란 그런 것 같다. 뜨거울 거야, 데일 거야, 아플 거야,
나를 위한 모든 사고를 정지시키는 것.(222)


 

다정한 연인의 연애시절을 기록한 사진 같은 일러스트는 이별의 아픔을 이야기하는 에피소드와 대비되어 더욱 애틋하게 느껴졌다. 어디든 나홀로 있을 땐 그저 흔한 일상이겠지만, 연인과 함께 있다면 그 흔한 일상도 특별한 순간으로 느껴지듯 일러스트 속 연인을 바라보며 옛 추억을 떠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짓기도 하고, 이별의 에피소드와 대비되며 애잔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별로 인해 생긴 상처에 딱지가 생기고 흉터 없이 잘 아물 수 있도록 마음을 보듬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이는 누군가 대신해 주는 일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이겨내야 한다. 그렇게 흉터 없는 상처를 통해 더 아픈 사랑(?), 후회 없는 사랑도 할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위로는 일회용 밴드 같은 거라서
잠시 달래줄 뿐
결국 새살을 돋게 하는 일은
스스로의 몫.(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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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 스쿼드 - 내 마음에 불을 지른 역대 최강 여성팀 20
샘 매그스 지음, 젠 우돌 그림, 강경이 옮김 / 휴머니스트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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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걸 스쿼드, 샘 매그스 지음, 젠 우돌 그림, 강경이 옮김, 휴머니스트, 2019

 


걸 스쿼드는 강한 유대감과 동료애로 뭉친 절친한 여성들의 집단을 일컫는다고 한다.저자 샘 매그스는 “‘걸 스쿼드가 요즘 들어 유행을 선도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결코 새로운 게 아니(7)라고 이야기하며, <걸 스쿼드>를 통해 선구적인 여성들이 최초이자, 아마 가장 중요한 걸 스쿼드라말할 수 있는 여성팀을 소개하고 있다.


 

걸 스쿼드란 여자들이 자기 이야기를 들려줄 때 서로를 지지하고 믿어주는 일이다.
단 한 명에게만 배정된 여성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것을 멈추고
우리 모두에게-민족과 인종, 계급, 성적 지향, 성정체성, 능력과 상관없이- 자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일이다.(8~9)


 

최근 차별을 개선하기 위한 긍정의 흐름들이 있지만 건전한 토론보다는 혐오적 언어들이 미디어를 통해 기계적 균형으로 다루어지는 것을 보면 아직 갈 길이 멀어보인다. 혐오는 결코 표현의 자유로 보호받아야 할 언어가 아니다.


아무튼 저자 샘 매그스는 여성 연대를 통해 차별의 장벽을 넘어설 수 있다고 이야기하며, 그 사례들을 <걸 스쿼드>에 모아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여성 연대에 대한 긍정적 사고는 우리 여성들이 친구들과 관계 맺는 방식도 변화시킨다.
우정의 마법 같은 힘으로 우리는 우리를 주저앉히는 장벽을 허물 수 있다.
그러니 우리는 서로 보살피기보다 경쟁하도록 부추기는 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없다.
우리는 서로를 일으켜 세운 역사 속 여성들에게서 영감을 얻을 수 있고,
우리 삶에서도 똑 같은 일을 할 수 있다. 분열하는 대신 연대할 수 있다.(8)

 


 

부제 내 마음에 불 지른 역대 최강 여성팀 20’이라고 소개된 것과 같이 스퐃포츠, 정치/사회운동, 전사, 과학자, 예술가 다섯 분야의 20팀을 소개하고 있다.


 

스포츠 스쿼드

해녀 : 대한해협의 겁 없는 프리다이버들

셜리 퍼스와 샤론 퍼스 : 스키로 올림픽까지 간 캐내다 원주만 쌍둥이 자매

1964년 일본 여자 올림픽 배구팀 : 배구계를 휘어잡은 동방의 마녀들

메디슨 키스와 슬론 스티븐스 : 네트 너머로 손을 내민 테니스 신동들의 우정


 

정치/사회운동 스쿼드

쯩짝과 쯩니 : 한나라에 맞서 봉기를 이끈 베트남의 자매

마농 롤랑과 소피 그라샹 : 프랑스 혁명의 앞줄에 앉은 두 친구

이란 애국여성동맹 : 평등한 권리를 위해 싸운 페르시아의 여성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소니아 소토마요르, 엘리나 케이건 : 미국 연방 대법의 슈퍼 대법관들


 

전사 스쿼드

다호메이의 전사 : 세상을 놀라게 한 왕실 근위대

앤 보니와 메리 리드 : 거친 바다를 다스린 해적들

홍등조 : 중국을 지킨 슈퍼 파워 여전사들

핀란드 여성 적위대 : 불평등에 도전한 좌파 투사들


 

과학자 스쿼드

아난디바이 조시, 사바트 이슬람블리, 케이 오카미 : 서양의학을 공부한 최초의 동방박사들

애든버러 세븐 : 영국 최초의 여자 의대생들

남극대륙의 과학자들 : 지구의 끝을 탐사한 연구팀

웨스트 에어리어 인간 컴퓨터 : 인류를 달에 보낸 흑인 여성 수학자들


 

예술가 스쿼드

트로베리츠 : 중세 프랑스를 열광시킨 페미니스트 음악가들

블루스타킹협회 : 런던의 여성 문인들

살로메 유레냐와 인스티투토 데 세뇨리타스’ : 도미니카공화국의 혁명적 여성 작가들

조라 오케스트라 : 아프가니스탄 최초의 여성 합주단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 예술과 일상 까지 모든 분야를 망라한 여성팀을 소개하고 있다. 또한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이야기로 어느 한 시기에 편중되지 않았으며, 모든 대륙에 걸쳐 소개되어 어느 한 대륙 혹은 국가에 치우치지도 않고 소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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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판이다 보니 해녀가 먼저 소개된 듯하지만, 걸 스쿼드의 첫 사례로 해녀를 접하고 나니 해녀야 말로 삶의 공동체로서 진정한 걸 스쿼드가 아닐까 싶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다. ‘해녀라는 단어가 익숙한 만큼 해녀에 대해서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걸 스쿼드>을 보니 그동안 표상적인 것만 단편적으로 알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먼저 해녀는 신화 속 인어의 실제라는 표현이 해녀에 대해 너무도 깔끔하게 정리한 듯해마음에 들었다. 호흡장치 없이 깊은 바다에서도 인간의 한계를 넘어, 생과 사의 경계에서 삶을 영위하기 위해 바닷속으로 들어가는 해녀’. <걸 스쿼드>는 과거에는 물질하는 남자, 해남도 있었으나, 여자만 물질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있으며, 물질이 얼마나 힘든 작업인지를 해녀들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해녀들의 목소리로 전달하고 있다.


 

인어는 실제로 있다.
서울에서 비행기로 한 시간 거리의 한국의 화산섬 제주에서 그들을 만날 수 있다.
(
) 그들은 엄청나게 용감한(그리고 엄청나게 노련한) 프리다이버들이다.
해녀라고 불리는 이들은 신화 속 인어들보다 훨씬 억세다.(15)


 

해녀들은 바다를 채취의 대상으로만 인식하지 않고,
끊임없이 가꾸어 공존하는 방식을 택했으며,
그 과정에서 얻은 지혜를 세대에 걸쳐 전승해왔다.(25)


 

여자들만 잠수를 하게 된 배경에는 정치적 영향도 적지 않다()
남자와 여자가 옷을 벗고 함께 물질하는 것을 금지하는 유교원칙()
제주 사람들이 섬을 떠나는 것을 금지()
전복과 해초로 대단히 많은 진상품을 바쳐야 했는데,()
남자들이 전쟁에 징집되거나 어업 사고로 죽는 일이 잦았고,
여자들은 본토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금지됐다.(22)

 


 

<걸 스쿼드>에 소개된 모든 이야기가 흥미롭지만 그 중에서도 두 개의 이야기는 최근 영화로 먼저 접한 이야기여서 보다 흥미롭게 읽었다.


첫 번째는 영화 <세상을 바꾼 변호사>로 국내에 소개되었는데, 영화에서는 미국 연방 대법원의 여성 대법관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걸 스쿼드>는 긴즈버그 뿐만 아니라 다른 여성 대법관인 소니아 소토마요르, 엘리나 케이건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으며, 이들이 팀으로써 미국 사회의 차별을 깨는 데 의미 있는 판결과 의견을 내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소니아는 보통 사람들에 대한 열정을 결코 잃지 않았다.()
그녀는 대법원 판결문에 불법 이민자대신에
서류 미비 이민자라는 표현을 처음 쓴 사람이기도 하다.(126~127)


 

차별금지법의 지형을 바꿔놓은”() 루스가 레디베터 대 굿이어 타이어회사판결에 대해 쓴 반대의견을 이 세상의 가장 감동적인 반대의견이라고 표현했다.
이 소송은 2009년 릴리 레드버터 공정임금법을 낳았다.
동등한 임금을 얻기 위한 여성들의 투쟁에서 기념비가 될 만한 법이다.(134~135)

 


두 번째는 영화 <히든 피겨스>로 미국과 소련의 우주경쟁에서 잊혀진 여성 계산팀에 대한 이야기이다. NASA의 웨스트 에어리어 여성 계산팀 일원인 도로시 본, 캐서린 존슨, 메리 잭슨. 이들은 미국의 최초 수식어를 만들어 내며 미국의 우주선 발사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1960년대 미국과 소련의 우주경쟁. 냉전이 절정이던 시절, 우주공간의 선점은 체제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것을 넘어, 안보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한 미국과 자본주의 진영의 명운이 달린 경쟁이었다. 우주공간에서 미사일이 비처럼 내릴 것이라는 공포. 그것을 막는 유일한 방법은 먼저 우주공간을 선점하는 것이었다. 최초로 우주를 유영한 포유류인 라이카(), 최초로 우주를 유영한 사람 유리 가가린을 쏘아 올린 소련은 우주 경쟁에서 최초라는 수식어를 쏟아내며 미국을 앞서고 있었다. 미국 케네디 대통령은 1960년대가 끝나기 전에 사람을 달에 보내겠다고 연설했고, 1969년 아폴로 11호를 달에 보내고 무사히 귀환시킴으로써 우주경쟁은 미국의 승리로 끝났다.


이들은 유색인종으로 차별받는 가운데에서도 우주에서 재진입 발사지점과 착륙지점을 계산해냄으로써 우주경쟁에서 미국이 소련을 앞설 수 있는, 아니 미국이 우주경쟁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게 기여했다.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가 50여 년이 지나서야 알려졌다는 것이 놀라웠고, 이들 중 한 명인 캐서린 존슨이 2015년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 자유 훈장을 받았다. 그녀의 나이 97세에 영화에서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인종 차별이 없어지는 듯 묘사하지만, 인종차별은 여전하다. 50여 년이 지나서야 훈장을 추서하는 상황, 그것도 유색인종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차별을 연대의 힘으로 넘었고, 미국 사회의 인종 차별을 깨는 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강하고 영리하며 놀랍도록 성실한 이 웨스트 에어리어 여성 계산팀은
미국 곳곳의 흑인 여성들이 수학자와 동료 학자이자 직장 동료로서
진지하게 대우받을 수 있는 문을 열었다.(
)
그들 팀의 연대는 비길 데 없었고 놀라웠다.()
웨스트 에어리어 계산원들은 자매 같았다.
그들의 자녀들도 여전히 친구처럼 지낸다.(267)


 

<걸 스쿼드>를 통해 교육이나 미디어를 통해 접하게 되는 내용들이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시각으로 그려지고,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시각은 가려져있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러한 편향된 시각이 의도된 것이든, 의도하지 않은 것이든, 의도와 무관하게 인간의 존엄을 해치고 우리 사회의 다양성을 해친다. 민주주의의 생명은 다양성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다양성의 가치를 훼손한다는 건 반민주적 행동이라 보아도 무방할 듯 하다.


책 한권으로 모든 편견을 깼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모든 차별에 대해 눈떴다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걸 스쿼드>를 통해 내 주변에서 의식하지 못한 차별이 있는지, 혹 내 행동에 또는 내 말 속에 차별이 담겨 있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겠다는 다짐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절친한 여자 친구들에게만 문자로 보낼 수 있는 내용이 몇 가지 있다. 어떤 내용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P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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