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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호러 단편 100선
에드거 앨런 포.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 외 지음, 정진영 엮고 옮김 / 책세상 / 2005년 7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저는 호러에 약합니다. 호러 영화를 제대로 끝까지 볼 수 없는 몸입지요. 무서운 장면에서는 어디론가 도망쳤다가, 잠시 후 돌아와서 같이 보던 사람에게 '어떻게 됐어? 어떻게 됐어?'...하고 귀찮게 캐묻는 것이 특기입니다.
그런 주제에 호러의 스토리는 좋아해서 호러 게임에 덧없이 도전했다가 나가떨어진 역사가 몇 번.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게임 [판타즈 마고리아]의 공략집을 어느 게임 잡지에선가 읽었을 때였습니다. 공략집만 읽고도 어찌나 무서운지 밤에 악몽을 꾸고 깨어나 벌벌 떨었을 정도..=ㅅ= 그밖에도 [쿠툴루의 부름]이라고 하는 TRPG 룰북의 소개를 읽고는 악몽을 꾸지 않나. 게임 [붉은 나비]의 플레이에 도전, 게임 패드를 친구에게 떠맡기고 엔딩을 보는 민폐도 발휘했지요(...)
그렇게 호러에 대한 호기심에 자기자신과 때때로 남까지 괴롭히는 저이지만, 딱 한 가지 무섭지 않은 게 있습니다. 그건 바로 호러 소설입니다=ㅅ=
예전에는 쿠룰루 신화를 만든 러브크래프트라는 작가를 굉장히 동경했으나 정작 그의 작품을 소설로 읽으니 시시하지 뭡니까. 나아가 [세계 호러 걸작선]에도 도전했으나 전혀 감흥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책, [세계 호러 단편 100선] 또한....
예를 들어 '소름끼치는 밤'. 주인공 사내가 사냥을 갔다가 그만 나갈 수 없는 깊은 계곡에 떨어져버린 이야기입니다. 동물이고 사람이고 할 것 없이 한 번 떨어지면 나가지 못해, 부패한 시체를 먹고 간신히 생명을 연명하는 생물밖에 살아남지 못하는 구덩이... 이 구덩이에서 주인공은 엄청난 공포와 고뇌를 느끼는데....
저로서는 무서워할 수 없었던 것이
그곳에서 주인공은 세 마리 늑대와 친해집니다(....)
늑대들도 그곳에서 쓸쓸했는지 주인공을 친구로 받아줘요!(....)
그리고 마침내 주인공의 용감한 친구가 밧줄을 내려 구조해 주었을 때, 주인공은 늑대 친구들을 비롯해 그 구덩이에서 목숨이 붙어있는 다른 동물들을 모두 구해줍니다........
이 얼마나 감동적이고 훈훈한 이야기입니까!!!(....)
그리고 '해로비 저택의 워터 고스트'. 해로비 저택의 상속인이 저택의 방이나 그가 묵는 방 어디에서나 크리스마스 이브 자정에 나타나는 여자 물귀신에게 시달린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저택의 상속인들은 대대로 그 물귀신에게 맞닥뜨려서 놀라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자신을 포함해 방이 온통 젖어버리는 난감한 일에 더 골머리를 앓지요. 그리하여 물귀신을 퇴치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강구하는데... 마침내 물귀신을 퇴치하고 만 삼대째. 그 퇴치하는 방법도 배를 잡고 웃을만큼 기발했지만, 무엇보다 그가 머리를 짜내게 된 이유 중 하나가 크리스마스 이브에 그놈의 물귀신(여자지만)때문에 자신과 밤을*-_-* 보낼 여자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은 정말 웃겼습니다. 오오 솔로탈출 오오
'문법적인 유령'도 정말이지 무섭긴 커녕....
유서깊은 필라델피아의 고풍스러운 가문의 노처녀 리디아 커루가 죽어, 서부에서 온 듣보잡 아가씨들이 저택을 상속받게 되어 일어나는 해프닝입니다. 서부 아가씨들의 분방한 취미를 고쳐 주려고 리디아 커루의 유령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죠. 그런데 이 리디아 커루가 마침내 참지 못하고 사라지게 된 것은... 서부 아가씨들의 오라버니가 와서 지독히 문법 파괴적인 언행을 해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말마따나 '몰염치한 부정사의 분리와 전치사의 잘못된 위치' 및 '이중부정의 사용'. ....우리도 지독한 문법적 오류를 보고 '세종대왕님이 무덤에서 일어나시겠다' 운운하는 경우는 있습니다만, 같은 방법으로 유령을 무덤으로 돌려보낼 수도 있는 겁니다.
....개그하냐!!!
물론 고딕풍의 아주 섬뜩한 단편도 몇 개쯤 있었지만.... 대체로 그런 단편에서 볼 수 있는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일들은 대체로 자업자득인 경향이 커서요. 도무지 실감이 안 나는군요=ㅅ=
....저는 미디어보다 글의 가치를 지지하는 편이지만 호러에서는 그게 안되는군요.
반면에 아무리 꿰고 있는 내용이라도 게임 [붉은 나비]는 정말 무서웠어요..... 아주 조용하면서도 순간순간 오싹한 배경음, 느닷없이 떨리는 듀얼쇼크 패드의 진동.... 얼마 전에 D양 집에 가서 재도전해봤는데, 수시로 패드를 내던지고 달아나려고 하는 걸 D양이 마구 윽박질렀습니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