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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조선피로인 - 일본 나에시로가와 조선인 사회의 명암 ㅣ 민속원 아르케북스 109
김정호 지음 / 민속원 / 2018년 8월
평점 :
업무상 임진왜란 관련 자료를 취합하기 위해 고군분투....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자료 신청까지 해가며 준비하다가 설상가상 민속원 책을 주기적으로 읽고 싶어하는 병까지 도져 자료 중 표제를 발견한 이 책을 선택했습니다.
생각해보면 대한민국의 역사 교과서에 '임진왜란 중 조선 도공이 일본으로 끌려가 도자기 기술을 전수했다' 등으로 간단히 서술되어 있지만, 그 뒤에는 어떻게 생활했는지.... 일본에서 자체적으로 도자기를 생산하게 된 후에는 어떠한 대접을 받았는지 알려진 바는 없지요.
그들의 운명을 결정짓는 양국 정부의 회담이 '전원 쇄환'으로 결론이 났지만 정말로 그대로 이루어졌다면 이 책이 나올 이유는 없었을 터입니다. 공식적인 외교 문서에 누락된 이래, 사츠마 번에서 특별 대우인지 차별인지 모를 대접을 받으며, '일본 속의 작은 조선'으로 260여년간이나 정체성을 유지해야 했던 나에시로가와의 조선인들.
.....또한 현대의 대한민국에는 그런 처지의 사람들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요. 재일 한국인, 베트남의 라이따이한, 필리핀의 코피노 문제가 대한민국과 아예 관계가 없노라고 단언할 수 있겠느냔 말이죠.
저자도 이와 같은 생각에서인지 정부의 역할을 몇 번이나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명당 대사가 왜란 중, 왜란 후 몇 차례나 일본과 교섭을 하였지만 도쿠가와 막부는 본인의 의사에 맡긴다고 주장하며 대외적으로는 조선의 지지를 위해 융숭히 환대하면서(회답겸쇄환사에게 무례를 범하면 참수한다는 명이...) 내부적으로는 조선인 노예를 거느린 다임를 배려하는 등 대내 안정을 추구합니다. 결국 사명당 대사와 역관 박대근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원 쇄환의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지요.
남겨진 조선 피로인은 일본군과 내통한 자, 동화에 적극적이었던 자를 제외하면 비참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를 전후해 일본 정세가 불안정했던 탓인데 에도 막부가 수립되고 사츠마 번의 지위가 안정된 이후에는 나에시로가와로의 이주를 적극적으로 추진합니다. ....이곳에 대한 자료를 연구한 재야사학자이자 문필가인 오오다케 스스무의 서술이 인상 깊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피로인의 납치와 연행이라는 과거가 있다.
역사는 시간으로서 과오를 범한다. 그에 대한 반성과 함께 이 책을 구성해보려 한다.
이 나에시로가와에서, 조선인들은 어떻게 지냈는가.... 그들을 공격한 일본인을 그 친족까지 처벌할 만큼 나름 보호받으면서도, 정작 그들이 일본 이름과 의복을 원하면서 동화되길 바라는 소망은 단호하게 묵살했습니다. 그러나 일본 사회에 정착하길 바라는 이들도 있었지만 조선어와 조선 문화를 지켜가고자 하는 사람도 있었으니, 조선인이 사츠마 번에 표류하였을 때 통역을 맡고 대응하는 역할을 하는 조선통사라는 지위는 대대로 나에시로가와의 조선인 가문에서 계승했으며 그들은 그에 대한 자부심, 표류한 조선인에 대한 동포애가 있었던 듯 합니다. 조선통사의 조선어 학습서인 [표민대화]에 서술되는 대화는 표류자들을 극진히 대하는 통사의 언행이 엿보입니다.
사츠마 번에서는 그들을 일종의 특별한 전리품처럼 대했다는 인상이 있습니다. 조선인 마을에 다이묘가 머물 수 있는 차야를 두고, 그곳에서 마을 사람들의 조선 무용을 관람했다지요. ...그 광경은 정녕 일제강점기 경복궁에서 개최되었다는 조선 물산 공진회와 차이가 있었을까요?
......그들은 메이지 유신이 되어서야 평민으로 편입되었으며, 비로소 일본 성씨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중 박무덕- 도고 시게노리는 일본 제국 정부의 동화 정책이 성공적이었다는 사례로서 숱하게 인용되었다지요. 그러나 그의 집안이 그만한 사회적 지위를 얻기까지는 장장 200여년, 그 전까지는 격리나 다름없이 생활하였음을 생각하면... 더욱이 조선인 혈통이라 결혼조차 여의치 않아 독일인 여성과 결혼했음을 생각하면, 과연 어떨는지요?
틈새의 사람들. 그 삶의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 걸까요?
조용히 생각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