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8
예술에서 말하는 유미주의, 탐미주의와 비슷한 맥락에서 유서주의, 탐서주의라는 말을 적용해도 좋을 듯하다. 그렇다면 탐서주의자는 '책의 소유를 삶의 유일지상의 목적으로 삼고, 책 내용보다는 책 자체를 중시하며, 책을 진과 선 위에 두는 사람'이 된다.
                                                                               
2. 41
이탈리아에서 폭넓은 인기를 누리는 작가로 주세페 폰티지아가 있다. 그의 집에는 복도나 침대 밑 등 구석구석마다 책이 넘쳐흘렀고, 소장한 책이 4만 권이 넘었다. 여간한 애서가라 해도 개인이 그 정도 수효의 책을 소장한다는 건 드문 일이다. 그의 독서 철학은 이른바 필독서나 추천 도서를 거부하고 각자 자유롭고 즐겁게 책을 읽자는 것이다. '배우기 위해, 즐거워지고 싶어서, 글을 쓰기 위해, 또는 연설을 하기 위해, 회상하기 위해 책을 읽지 말라. 아무런 목적 없이 독서를 해야 한다. 현재를 읽기 위해 지금 이 시간에 독서하라.'

3. 94
- 보들레르 시선 중 '허무의 맛' -
져서 지쳐빠진 정신아! 늙은 도둑인 너에게는,
사랑도 이제 말다툼처럼 아무 재미가 없다.
그러니 잘 가라, 나팔의 노래도 피리의 한숨도!
쾌락들아, 토라진 어두운 마음을 더 꼬드기지 말라!
근사한 봄이 제 향기를 잃었구나!

4. 121
- 미키 기요시 '독서론' -
책과 마주치는 기쁨은 사람과 마주칠 때의 기쁨과 똑같다. 독서의 기쁨은 해후의 기쁨이다. 그런데 모든 역사적 사건이 단순한 우연이 아닌 것 같이 독서에서의 해후도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해후란 말은 한편으로 어느 필연성을 뜻해야 한다. 완전히 우연하게 마주친 것 같지만 그것이 역시 필연이었다고 끄덕일 수 있는 것이 해후이기도 하다. 그것은 단순한 외적인 필연성이 아니라 오히려 내적인 필연성이다.
 이리하여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해후했고, 괴테와 실러도 해후했다. 독서에서도 똑같이, 혹은 스승으로서의 혹은 친구로서의 책과 해후하게 된다. 일생 이런 해후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많은 책을 읽어도 결국 아무것도 안 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며 우리는 어떻게 그런 해후를 경험할 수 있을까? 스스로 구해야 한다. 구하는 것이 없는 자는 마주치는 일도 없을 것이다. 가령 마주친다 해도 그것임을 모르고 지나칠 것이다.

5. 135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어느 바보의 일생' 中
도쿄 간다의 어느 고서점 풍경의 일부 -

이윽고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열심히 책등에 박힌 글자를 더듬어나갔다. 거기에 죽 꽂혀 있는 것들은 책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세기말 그 자체였다. 니체, 베를렌, 공쿠르 형제, 도스토예프스키, 하우프트만, 플로베르...... 그는 어두컴컴함과 싸우면서 그들의 이름을 세어나갔다. 하지만 책들 스스로도 나른하고 울적한 그림자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는 서양풍의 사닥다리를 내려오려고 했다. 그러자 마침 그의 이마 위에서 갓이 없는 전등 하나가 툭하고 불이 켜졌다. 그는 사닥다리 위에 멈춰 선 채로, 책들 사이에서 움직이고 있는 점원과 손님을 내려다보았다. 그들은 묘하게 작아 보였다. 뿐만 아니라 모두 초라해 보였다. '인생은 한 구절의 보들레르보다도 못하다.'

6. 145
- 보들레르 -
그대의 어깨를 눌러 땅바닥에 짓이기는 시간의 끔찍한 짐을 느끼지 않으려거든 쉼 없이 취하라. 무엇에 취하냐고? 술에든, 시에든, 미덕에든, 그대 마음대로. 다만 취해 있어라.

7. 163
아버지의 서가나 서재가 갖는 의미를 새삼 되새겨보면 이렇다. 우선 그것은 새롭고 넓고 다양한 지식의 세계로 들어가는 가장 가까운 관문 구실을 한다.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추억의 실마리가 되어준다. 마지막으로, 그것은 금단의 영역처럼 느껴지던 어른들의 세계로 간접적으로나마 첫 발을 내디뎌보는 연습을 할 수 있게 해준다. 가보지 못한 넓은 세상과 만날 수 있는 통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어디로든지 떠날 수 있는 마법의 창문,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위해 일단 의지해야할 거인의 어깨. 내 아버지의 서가가 그러했듯이 나의 서가도 아이에게 그런 곳이 될 수 있기를!
 그런데 나는 아직까지 어머니의 서가나 서재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는 사례를 접하지 못했다.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서가나 서재가 있는 가정은 예나 지금이나 극히 드물 것이기 때문이다.

8. 190
독서와 공부, 나아가 어려운 처지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권면하는 고사로 중국의 역사서 '진서'에 나오는 형창설안이 있다. 차윤은 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읽었지만 가난하여 불밝힐 기름을 늘 얻지는 못했다. 그는 여름철이면 수십 마리의 반딧불이를 모아 그 불빛으로 책을 읽었다. 손강 역시 집안이 가난하여 기름을 얻을 수가 없어 겨울에 내린 눈에 비춰 책을 읽었다.
 반딧불이와 눈빛으로 책을 읽은 차윤과 손강의 시력이 나빠지지 않았을까 걱정되기도 한다. 평소 책을 많이 읽는 독서인이라면 책을 읽을 때의 조명에도 각별히 신경써야 한다.

9. 191
- 모티머 애들러 -
모든 책은 빛이다. 다만 그 빛의 밝기는 읽는 사람이 발견하는 만큼 밝아진다. 독자에 따라서 그것은 빛나는 태양일 수도, 암흑일 수도 있다.
               
10. 227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책을 소장하고 있는 개인은 5만5,300여 권을 소장하고 있는 신영길 씨로 알려져 있다. 일제 침략사 관련 책 2만여 권, 경제학 및 역사학 책 각각 1만여 권, 정치 및 법률 관련 책이 8천여 권, 희귀본 1,500여 권, 국내에 한 권밖에 남아있지 않은 책 3백여 권 등이라고 한다. 1952년부터 책 수집을 시작한 신영길 씨는 기본적인 생계비 외의 돈은 책 사는 데 들였고, 여행도 잘 다니지 않았으며 술과 담배도 하지 않았다니 대단한 열정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신영길 씨가 책과 인연이 깊다고 할 수 있는 직종인 교수나 문필가가 아니라, 은행에 근무하는 샐러리맨이었다는 점이 더욱 각별하게 다가온다.

11. 229
서가를 둘러보면 꽂혀 있는 책들에 어떤 맥락이나 결이 보이지 않고 마구잡이다. 그렇다고 마구잡이 서가 풍경 개선을 위해 목록을 정리해본다든가, 수집 방향을 궁리해본다든가 한 적도 거의 없다. 책, 독서, 출판 등을 주제로 하는 책, 이른바 책에 관한 책Books on Books을 비교적 집중적으로 수집하리라 마음먹고 조금씩 모으고 있는중

12. 230
- 토머스 프로그널 딥딘 '한 문학적 삶의 회상'-
리처드 히버의 집은 놀라움 바로 그것이었다. 방, 벽장, 복도, 회랑이 온통 책, 책, 책으로 가득 차 숨막힐 지경이었다. 모든 곳에 채깅 두 겹, 세 겹으로 열 지어 서 있었다.

13. 232
♣책은 일사불란한 서가 풍경을 자아내는 수집과 소장 취미의 소중한 대상이어도 좋다. 난장 풍경을 자아내는 마구잡이 잡독가의 남획물이어도 좋다. 단 한 줄도 읽지 않고 서가에 고이 모셔둔 채 흐뭇하게 바라보기만 해도 좋다. 거실을 장식하여 한껏 뽐낼 요량으로 구입해도 좋다. 책의 오용과 남용을 꾸짖는 모랄리스트의 훈계 따위는 무시할지니, 책을 구하거나 소유하거나 읽거나 사용하는 모든 사람, 모든 경우에 대하여 책의 이름으로 다만 너그러워지고 자유로워질 일이다.

14. 264
우리들 각자의 독서 대차대조표는 어떤 상황일까?
일단 양적으로 몇 권의 책을 읽었는지, 지적으로 혹은 정서적으로 크게 도움이 된 '결정적 한 권'은 없었는지, 책 읽을 시간을 확보하려 애썼는지, 한 분야에 편중된 독서를 하지는 않았는지, 자녀의 독서 생활에 신경을 썼는지. 이런저런 사항들을 가만히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그 결과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다면 독서 계획을 세워보는 것도 좋은 일이다.

15. 265
중점 독서 분야 같은 것을 정하여, 해당 분야의 입문서에서부터 전문적인 내용의 책까지 차례로 읽어나가는 방법도 좋다. 매년 분야를 바꾸어가며 그렇게 하기를 여러 해 거듭하다보면, 스스로를 눈을 비비고 다시 보는 괄목상대의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16. 266
책 읽을 시간을 또 어떤가? 세계에서 가장 바쁜 사람일 듯한 빌 게이츠는 "잠들기 전 잠깐의 시간이라도 매일 책을 읽으려 노력한다. 특히 주말이나 휴일에는 서너 시간 정도 책이든 잡지든 반드시 읽는다"고 말한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전쟁터에서까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지니고 다니며 거듭 읽었다는 나폴레옹이 있다. 뜻이 있는 곳에 길도 있고 책 읽을 시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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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67
김 팀장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이 지니고 있는 능력 가운데 어떤 능력을 계발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어느 시점에 배우는 지식이나 받아들이는 정보는 그 시점에서 유용할 수 있지만, 변화무쌍한 환경 앞에서는 그 지식이나 정보도 곧 무용지물이 되어버리게 마련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지식과 정보는 고정적이지만 환경은 가변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줄기차게 새로운 정보와 지식을 찾아내고 익혀서 내 것으로 만드는 노력을 해야만 합니다."

2. 68
"내가 지금 어떤 전문가여야 하는가를 생각해보십시오. 모두 마케팅 팀원들이죠. 여러분은 어떤 분야의 전문가여야 합니까? 당연히 마케팅 분야의 전문가여야 합니다. 어느 수준까지? 제 생각에는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마케팅 이론과 업계의 실제'에 대해서 강의를 할 수 있을 정도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하겠습니까. 마케팅 원론서는 물론 기타 관련 서적들을 여러 번 정독해야 하고, 새로운 마케팅 기법과 트렌드에 대한 자료를 모으고 또 분석해야겠지요. 항상 긴장을 늦출 수가 없을 테지만, 저는 그 긴장은 삶을 탄력 있고 싱싱하게 만들어주는 고마운 긴장감이라고 생각합니다.

3. 79
"믿을 건 자신뿐이지. 기획 인간은 자신을 믿는 사람이네. 하지만 자신을 믿는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을 배척하고 잘난 척하라는 뜻은 아니네.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으려고 하기 전에, 누군가를 모델로 삼아 그 사람이 걸었던 길을 답습하려 하기 전에 자기 스스로 자신을 돕고, 자기 스스로 자신의 모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네.

4. 95
박지은이 '운명'이란 단어를 되뇌이며 자신의 손금을 내려다보았다.
"홍 대리님, 과연 운명이란 게 있을까요?"
홍 대리는 박지은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박지은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자신도 시선을 옮겼다.
"운명이란...손금에 있지 않아요."
박지은이 고개를 들어 홍 대리를 바라보았다.
"그럼 어디에 있지요?"
"운명은...바로 손금을 바라보는 자신의 눈 속에 있어요."

5. 101
홍 대리는 공룡을 만든 아이를 보며 생각했다.
'맞아, 저 아이가 한 일이야말로 전형적인 기획의 모습이 아닐까. 기획자는 손에 쥐어진 재료를 가지고 머릿속에 목표를 그린 다음, 항상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지. 그리고 그 새로운 것은 자신이 아닌 또 다른 이들을 즐겁게, 편하게, 그리고 기쁘게 하지.'

6. 104
"팀장님, 저는 잘 이해가 안 됩니다. 업무 지시를 하는 사람이 좀 더 명확하고 자세하게 지시를 해주면 그만큼 일을 받아서 하는 사람들 입장도 편하고, 또 그게 조직의 효율성을 높이는 방안 아니겠습니까?"
김 팀장은 뭔가 깊은 상념에 잠기는 듯했다.
"내가 후배들에게 진정 해주고 싶은 말은 바로, '과제 설정 능력'을 키우라는 것이지. 내가 경험한 수십 개의 기업과 조직에서는 아직도 문제 해결 능력만을 중요시 여기고, 과제 설정 능력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개념조차 파악하고 있지 못하는 실정이야. 그래서 빚어지는 조직 내의 병폐가 바로, 창의성의 결여, 환경 대처 능력의 약화, 직급에 따른 권위주의 팽배 현상 등이지. 이번 프로젝트도 마찬가지야. 홍 ㄷ리, 자네가 나한테 뭐라고 했나, 왜 구체적인 질문을 사장님에게 하지 않느냐고 했지? 그래, 구체적인 질문을 할 수도 있지. 하지만 그렇게 되면 결국 사장님의 의견에 집착하게 되고, 객관적인 의사 결정보다는 '사장님이 이렇게 이야기했으니까'하고 자꾸 편향된 시각을 갖게 되지. 이제부터, 홍 대리 자네와 나는 스스로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정하고, 스스로 평가하고 통제하며 프로젝트를 수행해야 하는 거야. 이게 바로 내가 말하는 과제 설정 능력의 핵심이지."

7. 168
호기심형 인간이 되는 법
다양한 잡지를 정기 구독할 것
동호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할 것
전문 서적을 탐독하라

8. 181
'전략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전략형 인간들은 '전략을 짜는 사람'이기 이전에 '전략적으로 사고하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업무나 일상 속에서 '전략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선 그것은 감정을 배제한다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많은 '비전략형 인간'은 감정에 치우친 결심을 많이 한다. 이를테면 '이번 기회에 뭔가 사장한테 보여줘야 해', '이 프로젝트를 통해서 사내외적으로 나를 알려지', '옆 동기보다 반드시 좋은 실적을 달성해야만 해' 등등.
이러한 성취욕, 과시욕, 경쟁심 또는 조급함과 불안감 등 감정적인 요인이 전략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면 차지할수록 시야와 사고의 폭이 좁아지게 되어 있다. 당연히 좋은 전략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감정을 배제하고 대상을 바라보면, 정말 무엇이 우선적으로 중요한 요소이고 현 시점에서 어떤 목표가 수립되어야 하는가 등에 대해서 날카로운 관찰과 판단을 할 수 있게 된다.

9. 191
과거 지향적인 인물들은 자기 고집만을 내세우며 변화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오로지 과거 자신의 경력이나 공적을 끌어안고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라기만 한다.
미래를 지향하는 비전형 인간은 과거의 실적이나 공적에 집착하지 않고 오히려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의도적인 노력을 한다. 과거 자신이 성공했다고는 해도, 그 사례에서 문제점을 낱낱이 찾아내고 그 결점을 스스럼없이 남에게 이야기한다. 그러고는 새로운 업무에 적용함으로써 진일보하는 결과를 얻게 된다.

10. 200
이야기꾼은 꼭 필요한 말을 한다.
꼭 필요한 말을, 꼭 필요한 시점에 함으로써 상대의 마음과 행동을 나에게 유리하도록 바꾸는 것, 이것이 바로 말을 통한 설득력 내지는 협상력이다. '꼭 필요한'이라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야기를 청산유수 늘어놓는 게 결코 최선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11. 216
우리가 깊은 산속에 은둔해 도를 닦으려는 게 아니라면 우리는 커뮤니케이션에 둘러싸여 살아야 할 운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가족들과 직장 동료들과 우리는 늘 무언가를 주고받으며 산다. 그것이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이든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것이든 우리는 늘 그렇게 교감하며 산다.
...
기획 인간이란 이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커뮤니케이션의 각별한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다.

12. 241
기획자들 중에는 고수와 하수가 존재한다. 나의 경우에도 다른 기획자들을 볼 때 하수인가 고수인가를 판단한다. 그리고 하수일 경우에는 그 수준에 맞는 이야기만 나눌 뿐 그 이상의 광범위한 주제를 두고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그 상대가 모르는 분야이기 때문에 나로서도 답답하고 또 상대도 스스로 답답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대화가 안 통하는 것이다. 그에 비해 고수를 만나면 폭넓은 방면의 대화 그리고 심도 깊은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그렇다면 하수와 고수를 구분 짓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요소는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상황 파악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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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아, 대안 말입니까? 그러니까 제 말은... 기생충을 다시 부활시키자는 거지요.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양만춘은 주머니에서 조그만 병 하나를 꺼냈다.
 "이건 회충알입니다. 이 병 안에 적어도 1천만 개 가량의 회충알이 들어 있지요. 물론 마음만 먹으면 더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이걸 각자 구역을 나누어서 삼겹살집에 공급되는 상추에다 뿌리는 겁니다. 두 날, 적어도 두 달이면 전국에 난리가 날 테고,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우리들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살려달라고 빌 겁니다."
 신라대 김유신이 손을 들었다.
 "우리가 헀다는 게 탄로 나면 어떡하죠?"
 계백도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갑자기 회충이 급증하면 그 원인을 조사할 테고, 그러면 우리의 오늘 모임에 관해서 조사를 할 수도 있을 텐데..."
 "두 분은 언제나 그렇게 걱정이 많으시군요."
 양만춘이 코웃을을 쳤다.
 "우리 나라 사람들 중에는 아직도 봄, 가을로 구충제를 먹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것은 아직까지 우리 사회가 회충의 공포로부터 자유롭지 못핟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회충 환자가 발생하면 '내가 무언가 잘못해서 회충에 걸렸구나'라고 생각하지, 누가 일부러 회충을 풀었다고 생각하겠습니까?" 더구나 우리 나라에서는 아직 회충이 박멸되지 않았습니다. 자, 이렇게 말을 합시다. 근근히 명맥을 이어 가던 회충이 올 겨울의 이상 고온 때문에 급증한 것 같다고."
 참석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말 되네, 기발한 생각이야."
 "양 교수님, 그런데 그 회충알은 어디서 난 겁니까? 구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양만춘은 껄껄 웃었다.
 "이건 제가 만든 겁니다."
 "네? 뭐라고요?"
 "석 달 전, 저희 병원에서 수술을 받던 환자로부터 회충 세 마리가 발견된 적이 있습니다. 그 중 두 마리가 암컷이었죠. 그 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걸 어떻게 이용해 불 수 없을까. 그러다 결심했지요. '내가 먹자!' 혹시 앞으로 유용하게 쓸 일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래서..."
 양 교수는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을 닦았다.
 "회충의 자궁에서 알을 꺼낸 뒤, 인큐베이터 속에서 부화시켰지요. 3주쯤 지나고 난 뒤 그 알들을 모아 빵에다 얹었습니다. 그리고는 두 눈 딱 감고 그 빵을 먹었습니다. 정확히 7주가 지나자 제 대변에서 회충알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전 대변을 볼 때마다 변에서 회충알을 분리해 병에다 모았습니다. 회충알의 수로 보건데, 제 몸에는 적어도 스무 마리 이상의 회충이 들어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회충의 수명을 1년으로 잡는다면, 앞으로 8개월 동안은 얼마든지 회충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조금은 겸연쩍게 회충알의 입수 과정을 설명한 그를 향해, 누군가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박수 소리는 점점 커 갔고, 얼마 후에는 모든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쳐댔다. 박수 소리가 뜸해질 무렵,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 교수, 수고 많았어요. 우리 나라에 양 교수 같은 분만 있다면 이 나라가 이렇진 않을 겁니다. 양 교수가 우리 학회에 처음 들어올 때부터 전 양 교수가 비범한 인물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봤지요. 자, 그럼 그 회충알 살포... 멋있게 '회충 프로젝트'라고 하죠. 그 회충 프로젝트에 혹시 반대하시는 분은 안 계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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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반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내가 하고 있는것 사랑인가?’ 에 대한 강렬한 의문으로 이 책을 손에 들었다. 하루는 나의 연인. 나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만약 그의 부모님을 내가 만나게 되어 “너는 내 아들을 왜 좋아하느냐?”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면 어찌 대답할거냐 물었다. 머릿속이 하얘지는 느낌이었다. 액면 그대로 “저기..잘 모르겠어요. 참 어려운 질문이네요.”라고 한다면 결코 내 얕지 않은 사랑을 의심할테고, “마음이 따뜻하고, 저를 현명하게 만들며, 어쩌구..” 대답하기엔 다수의 연인들 모습에 나 또한 평범하게 묻힐 것 같아 괜히 싫었다. 이도저도 개운하지 않다 싶어 대답을 망설이던 기억이 난다.


그 질문의 대답이 스스로도 무척 궁색하던 차에, 특유의 향을 풍기는 책제목이 바람되어 나를 흔들었다. ‘왜 사랑하느냐?’ ‘사랑은 하느냐?’.. 그렇게 나를 흔들어댔다. 책 첫머리에 나오는 아래의 글을 접하며, 이것이 심상치 않은 책임을 나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삶에서 낭만적인 영역만큼 운명적 만남을 강하게 갈망하는 영역도 없을 것이다. 우리의 영혼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과 어쩔 수 없이 잠자리를 함께하는 일을 되풀이하는 상황에서, 언젠가 꿈 속에 그리던 남자나 여자와 마주치게 되는 것을 운명이라고 믿는다면 용서받을 수 없을까?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그리움을 해소해줄 존재에 대한 미신적인 믿음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일까? 우리의 기도는 절대로 응답받을 수 없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비참한 순환에는 끝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에 하나 하늘이 우리를 가엾게 여겨서 우리가 그리던 왕자나 공주를 만나게 해준다면, 그 만남을 단순한 우연의 일치로 치부해버릴 수 있을까? 한 번만이라도 이성의 검열에서 벗어나서 그 만남이 우리의 낭만적 운명에서 정해진 필연적인 사건이라고 해석할 수는 없을까?”


저자는 철학을 전공한 사람답게, 사랑의 과정에 있는 인간의 심리를 얼음장처럼 차분하게, 타지는 않을만큼만 뜨겁게, 그렇게 부드럽게 잘도 묘사해나간다. 어릴적 색색깔 실을 가지고 놀다 몽땅 얽혀버린 기억이 있을 것이다. 때로는 껌이 머리에 눌러붙어 울상을 지어본 적도 있을거다. 대부분의 경우 그저 실을 방구석에 던져두거나, 껌이 붙은 부분을 가위로 싹둑 자르고 말았을텐데. 이 저자는 ‘사물’과 ‘현상의 미세함’에 얼마나 관심이 많은지, ‘삶’과 ‘시간의 흐름’에 대해 얼마나 진득한지, 밤이 새는줄도 모르고 한 자리에 앉아 그 멋대로 엉킨 실을 한올한올 정리해내고, 수백개의 머리카락을 껌과 분리해내고야 만다. 그런 태도로 사랑을 슥슥 찢어내어 한조각한조각 우리에게 투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을 보고 있자면, 이제껏 정리되지 않고 엉켜 있던 나의 여럿 사랑놀음들이 한줄로 죽 늘어서 나에게 한들한들 손을 흔드는 것 같다. 켜켜이 먼지 쌓인 내 마음을 청소한 것 마냥 잔뜩 시원해지는 것이다.


저자나이 스물다섯 즈음 이 책을 썼다 하니, 그 전에 최소한 한번의 불같은 사랑은 해봤으리라 추측해 본다. 그것이 아니라면 철학공부만으로 ‘사랑의 깊은 이해’를 얻어낸 저자에게 짝짝짝 박수쳐주고 싶다. 주인공이 클로이와 연애 전,중,후에 하는 생각들을 저자는 똑똑한 수다쟁이처럼 가지런히 한권의 책에 뿌려놓았다. 한두번 사랑해보고 나면 ‘사랑은 **다’라고 정의내리길 좋아하게 되고, 무언가 명확해지는 것 같지만, 사랑이 수어 번을 넘어서게 되면 오히려 정의내리길 꺼리고 그제서야 사랑의 애매함 속에서 헤멘다. 처음에는 ‘너? 잘생겨서. 너? 똑똑해서. 너? 착하잖아’ 이런 식으로 좋아하는 이유를 쉽게 들이댈 수 있지만, 막상 사랑의 깊은 의미를 알아가기 시작하면 사랑의 이유가 모호해지는 것이다.


여자에게 몸무게를 물어보는것, 대화상대에게 무턱대고 재산이 얼마냐 물어보는 것 실례이듯이, 연인에게 ‘왜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 실례가 되겠다. 그것이 궁금하다면 스스로에게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먼저 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 질문을 쉽게 툭 던질수 없게 된다.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라는 것은 그저 마음으로 느끼면 되는 것이고, 사랑의 이유라면 결국 머리로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사랑은 둘의 첫만남 자체로 우.연.히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우연’에 이유는 없는 것이다. 억지로 짜 낸다면 ‘너를 만나서 우연히’가 되겠다. 조금 씁쓸한가? ㅎㅎ 너가 태어났고 내 앞에 나타났고. 그렇게 우연히 나는 너를..


이 책은 새로 사랑을 시작할때는 에피타이저, 사랑을 끝낸후에는 디저트, 사랑진행중에는 메인요리에 뿌려진 금가루가 될 수 있을만큼, ‘사랑’의 의미를 절묘하게 요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에피타이저, 디저트, 금가루 없어도 배를 채울수 있지만 뭔가 허전하다. 사랑을 끝낸 사람들, 사랑 진행중인 사람들,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들. 이 책을 읽지 않는다면 많이 허전할것 같다. '사랑이라면 나도 왠만큼 해봐서, 사랑 알것도 같다'하는 사람이라면 특히 가슴 시리게 공감할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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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05-03-01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참 재밌죠? 사랑하는 연인들의 심리를 어쩌면 그렇게 콕 집어내 주는지... 이 사람이 쓴 또다른 사랑 이야기 "섹스, 쇼핑 그리고 소설" 도 읽어 보세요 이번에는 여자 입장에서 쓴 거랍니다 이야기의 화자가 상대방을 더 좋아한다는 점은 똑같구요

진진 2005-03-02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맞아요. 콕콕 집어내더라구요...앗..그 책도 읽어봐야겠네요..요 정도 책을 썼으면 다른건 어떨까 ...

rainjini 2005-08-30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가 넘 맘에 들어요. 깨끗한 문체로 입안에서 맴돌던 느낌을 꼭 꼭 집어내주는것 같아요. ^^. 정말 이책은 얽힌 실타래를 풀어주는것 같은 느낌이죠. 저같이 성질급하고 단순한 사람은 실타래를 풀기도 전에 도망갈듯.ㅎㅎ.

진진 2005-08-31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제가 정말 반한 책입니다. @_@ 처음 뵙습니다. ^^
 

2005.1.13


저자,제목,표지,목차,리뷰.. 아니 느낌에 홀려..
읽어야겠다 여러번 되뇌이던 책들을..
그렇게 이미 익숙해져 버린 책들을..
'다 읽었다'라고 말할수 있는 날 오기를..

♣ 책을 사고 싶은 마음의 속도가. 글자를 읽고 싶은 마음의 속도.를 넘어서려 하고 있다.

♣ 친구에게 '책도장'이 필요하다 말해야겠다

♣ 헌책방엘 가봐야겠다. 그냥 그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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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5-01-13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사고픈 속도가 더 빠르면 책이 쌓이게 되고, 밀린 책 때문에 머리가 아프죠. 하지만 읽을 책이 없어서 못읽는 것보단 그게 나은 것 같아요.

진진 2005-01-13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밀린 책...책이 밀려 있어요..--; 없는것보단 낫겠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