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64
프로이드적인 의미에서 즉 정통 심리학에서 나르시시즘은 '자기 도취'를 의미한다. 그러나 개인 심리학이 아니라 오늘날의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지배적 요소로서의 나르시시즘은 '자기 도취'가 아니라 '타인 의존'이다: "나릇시스트는 승화에 대한 능력이 결핍되어 있다. 그 결과 그는 남들로부터의 끊임없는 인정과 찬사를 고취시키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한다."(크리스토퍼 라쉬 '나르시시즘의 문화' p60) "나르시시스트는 패배자로 낙인찍히는 것이 두려워서 '승자들'을 존경하고 그들과 동일시하게 된다. 그들은 승자들이 반사하는 열기로 자신의 몸을 덥히려고 한다."(p110) "나르시시스트는 내적으로 축적된 자질을 별로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자아 의식에 대한 정당성을 불어넣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눈을 돌린다."(p249) 저자의 유다른 해석에 의하자면, 현대의 나르시시스트에게는 자아 이상에 필요한 건강한 '자기 도취'의 통로가 막혀 있는 대신, 자의식에 찬 '타인 의존'의 가능성만이 열려져 있다.
2. 67
원재길의 '오해'를 읽고
권태기의 "해결책은 환경을 바꾸는 데 있다"는 것을 깨달은 두 사람은, 연애 시절을 더듬은 끝에 "좋았던 지난 시절에는 하나같이 배경에 자연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에 서로 동의하고 강뫼마을로 이사를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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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의 예가 보여주는 것처럼 자연 속으로 은거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내면은, 한마디로 인간에 대한 진실된 애정 부재와 불성실한 사회관계를 표상하고 있다. '오해'의 주인공들이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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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섭 강유정 부부가 서울을 떠나 강뫼마을로 가기로 쉽게 합의한 것은 그러므로 결혼생활의 권태 때문이 아니라, 두 사람이 공히 나누고 있는 개인주의적 성격 때문이다.
3. 77
헨리 밀러의 '속 북회귀선'을 읽고
헨리 밀러의 소설을 읽다 보면 그가 너무나 진솔하게 자신을 고백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순간 독자의 마음이 순정해지는 순간을 만난다. 현대 소설을 많이 읽은 독자라면 현대 작가의 작품으로부터 이런 순백한 경험을 맛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크리스토퍼 라쉬에 의하면 현대 작가들이 사용하고 있는 고백조 문학은 그들의 기억을 통해(역사감, 시간적 깊이) 작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관심을 끌 만한 것을 폭로하는데 의존하며(순간적, 현재적) 그나마 농담, 조롱, 냉소 등등의 기술을 사용해 저자는 자기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지만 그것이 진실인지에 대해서는 나도 알 수 없다는 기만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고 한다. 그럴 때 현대의 고백적인 작품은 박고백으로 타락한다. 적어도 헨리 밀러는 그런 잔꾀를 모른다: "내가 원하는 것은 개방하는 거야. 내 안에 무엇이 있는가를 알고 싶을 뿐이야. 나는 모든 사람이 개방하는 것을 원해. 나는 지구를 개방하기 위해서,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의아해 하면서, 손에 깡통의 따는 것을 가지고 있는 저능아와 비슷한 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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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은 쌓여 있고 그것들은 서로 연결되기를 기다린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겠지만 나 역시 서로 비슷한 주제의 두 권의 책이나 아니면 아주 다른 개성을 가진 두 권의 책을 한꺼번에 읽는데, 그것들을 결정하는 과학적인 기준은 없다.
4. 81
F.S 피츠제럴드의 '밤은 부드러워'를 읽고
1924년 '재즈의 시대', 피츠제럴드는 그 시대의 모든 미국 예술가들이 꿈꾸었던 파리로 날아갔고, 스물아홉이 되던 그 이듬해 사계의 절찬을 받은 '위대한 개츠비'를 썼다. 그러나 그는 파리 체류 7년 동안 아무것도 더 건진 게 없었다. 그래서 스스로 "낭비와 비극의 7년간"이라고 말했다. '밤은 부드러워'는 행복하지 못했던 자신의 결혼 생활과 방탕했던 파리 생활을 청산하고, 재기를 위해 내놓은 회심작이었으나 그 결과는 썩 만족스럽지 못하다.
5. 115
류환의 '상자 속의 생'을 읽고
특별한 직종과 특별난 경험을 가진 문인들의 글쓰기가 늘어나면서 독자들이 얻는 즐거움의 크기도 커진다. 그러나 글쓰기의 동력이 체험의 문자적 번안에만 주력될 때 오히려 소설의 크기는 줄어든다. 류환의 이 소설은 그런 일장일단을 가지고 있다.
6. 148
원재길의 '별똥별'을 읽고
평범하게 살기를 단연코 거부했던 한 남자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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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특별난 존재가 되고 싶다. 누구도 평범한 사람이 되고 싶어하지 않는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그 흔한 욕망을 우리는 일요일에 방영되는 전국노래자랑 시간에 실컷 보게 된다. 어색한 음정 박자에 설익은 춤이지만 어쨌든 튀려고 하는 출연자들, 그 안간힘을 보면서, 눈물이 그렁해지도록 웃으면서, 우리는 무언가에 들킨다. 딱히 저런 방식으로는 아니었지만 나 역시 특별난 인간이 되고 싶었던 건 사실이야!
7. 158
시나리오 작가 김대우씨가 자신의 첫 장편 소설의 원고를 보여주다. 가제는 '비만의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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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등단은 충격적이고 화려한 게 좋다는 생각에서 시간이 걸리더라도 문학상 공모를 권해 보았으나 정작 그는 자신의 원작으로 영화 연출을 하겠다는 또 다른 욕심이 우선이라 아무데서나 빨리 출간할 수 있기를 원한다. 여러 출판사를 생각한 끝에 민음사의 이영준형에게 원고를 보이기로 마음먹다.
8. 197,198
파리라고 해서 특별난 것은 없다. 내가 대구와 여러 도시들 예컨대 서울이나 제주에서 살았던 방식 그대로를 살려고 한다. 제일 먼저 책으로 병풍을 치는 일, 오디오를 마련하는 일. 이제 겨우 내 얼음집을 다 지었다...... 나는 에스키모다. 그들은 적도에 가서도 얼음을 구해 이글루를 짓고 그 안에 들어가 있으려 할 것이기 때문에......
작년에 처음 파리에 와서 '해바라기'라는 희곡과 오늘 이야기 될 소설을 구상하기는 했지만 여기서 쓴 건 아니다. 그래서 그 국제적 감각이란 걸 느껴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나보코브와 포우, 그리고 에밀 졸라의 소설을 이곳에서 다시 읽거나 돌이켜 기억하면서 창작가로서보다 독서가로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이곳의 십대들을 보지 않고서는 열다섯 살의 양녀를 사랑하는 '로리타' 속의 험버트가 소아애자로 보이겠지만 신체적으로 너무나 잘 발육해 버린 이곳의 십대들을 볼 때, 변태라서가 아니라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몇 백 년 전부터 형성되었다는 이곳의 꽉 닫힌 아파트 구조를 볼 때 포우나 크리스티 같은 추리 소설 작가들이 왜 밀실 살인에 대해 강박적으로 써 댔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사는 가옥의 구조를 생각하면서 에밀 졸라의 '살림'을 읽는 느낌이란......
9. 228
독서는 쾌락이라고 말해 온 나는 저자의 다음과 같은 말에 동의한다: "독서는 유별나게 고독한 작업이다. 서적을 읽는 인간은 말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고, 자기의 동족들로부터 몸을 빼어, 자기를 둘러싼 세계로부터 고립한다."(에스카르피 '문학의 사회학' p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