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모음>
바빌론의 탑
★이해
영으로 나누면
네 인생의 이야기
일흔두 글자
인류 과학의 진화
지옥은 신의 부재
외보 지상주의에 관한 소고: 다큐멘터리
이해
1. 59
계속 이런 식으로 놀라워하게 되는 것일까? 예의 악몽이 사라지고 마음 편히 지낼 수 있게 된 이래 내가 처음으로 깨달을 것은 독서 속도와 이해력이 향상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언젠가는 읽을 생각으로 책장에 꽂아 두긴 했지만 시간이 나지 않아 방치해 두었던 책들을 실제로 읽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난해한 기술 서적까지 말이다. 대학 시절 이미 나는 내가 흥미를 느끼는 모든 분야를 공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마음이 부풀었다. 다음날 책을 안아름 안고 집에 돌아왔을 때는 한껏 들뜬 상태였다. 그리고 방금 동시에 두 가지 일에 마음을 집중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2. 67
무엇을 관찰해도 나는 패턴들을 본다. 수학, 과학, 예술과 음악, 심리학과 사회학을 망라하는 모든 학문에서 게슈탈트를, 음표들 속에 존재하는 멜로디를 보는 것이다. 텍스트를 읽어 보면 저자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관련성을 찾아 장님이 앞을 더듬듯이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힘겹게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밖에는 받지 않는다. 마치 음악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바흐 소나타의 악보를 들여다보며 어느 음표가 어느 음표로 이어지는지를 설명하려고 하는 사람들처럼.
3. 77
사회의 평범한 패턴들은 내가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아도 자연히 드러난다. 거리를 걸으며 사람들이 용무를 처리하기 위해 돌아다니는 것을 보면, 그들이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배후에 깔린의미를 뚜렷하게 알 수 있다. 부근을 산책하는 젊은 커플의 경우에는 한 쪽의 경애가 상대방의 묵인에 부딪혀 되튕겨 나오고 있다. 어떤 비즈니스맨에게서 깜박거리던 불안이 고정된다. 그는 자기 상사를 두려워하고 있으며, 아까 자신이 내렸던 결정에 의문을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어떤 여자는 짐짓 세련된 분위기를 몸에 두르고 있지만, 진짜로 세련된 여자가 옆을 지나가자 허상이 벗겨지고 만다.
어떤 인간이 수행하는 역할은 당연히 그보다 훨씬 더 성숙한 인간에 의해서만 인식된다. 내 눈에 이들은 놀이터에서 노는 어린애들처럼 보인다. 나는 그들의 진지함을 재미있어 하고, 나도 과거에는 이들과 똑같이 행동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창피함을 느낀다. 그들의 활동은 그들 입장에서 볼 때는 적절한 것이지만, 나는 이제 도저히 그런 일에 참여할 수가 없다. 성인이 되었을 때 나는 유치한 일들과는 인연을 끊었다. 이제 보통 인간들의 세계에 대한 접촉은 오로지 나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부분에만 한정시킬 생각이다.
영으로 나누면
4. 119
칼이 레네를 처음 만난 것은 대학 동료가 주최한 파티에서였다. 칼은 레네의 얼굴에 매료당했다. 놀랄 정도로 평이한 데다가 언제나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듯했지만, 파티에서 그는 그녀가 미소 짓는 것을 두 번, 찡그리는 것을 한 번 보았다. 그럴 때마다 레네의 이목구비 전체가 마치 다른 표정은 아예 모른다는 듯 완전히 돌변하는 것을 보고 칼은 깜짝 놀랐다. 평소에 자주 미소 짓거나, 자주 찌푸리는 얼굴이라면 설령 주름이 없다고 해도 금세 알아볼 수 있는 법이다. 저토록 깊이가 있는 표정을 지을 수 있으면서 왜 평소에는 그것을 전혀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일까.
레네를 이해하고 그 표정을 읽을 수 있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일흔두 글자
5. 222
극히 미세한 정자인간 호뭉쿨루스들로 이루어진 거품이었던 것이다. 호뭉쿨루스의 몸은 투명했지만, 전체적으로는 둥그런 머리와 머리카락 같은 팔다리가 서로 들러붙어 희끄무레하고 조밀한 거품을 이루고 있었다.
"병 속에 사정한 다음에 정액을 데웠어?"
"모든 건 균형을 얼마나 잘 잡느냐에 달렸어. 물론 정확한 온도를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것들을 자라게 하려면 정확하게 배합된 영양분을 공급해야 해. 너무 엷으면 배를 곯고, 너무 진하면 필요 이상으로 활발해져서 서로 싸우기 시작하거든."
창작노트
6. 395
소설에서 우리가 가장 높이 평가하는 요소 중 하나로 놀라운 동시에 불가피한 결말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기계 디자인의 우수함, 이를테면 매우 정교하면서도 극히 자연스러운 발명품 따위를 논할 때도 들어맞는 표현이다. 물론 우리는 이런 것들이 정말로 필연의 산물은 아니며, 그것들을 일시적으로라도 그렇게 보이도록 만드는 것은 인간의 창의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