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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국에서의 일 년
이창래 지음, 강동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10월
평점 :
오랜만에 아주 긴 호흡의 소설을 읽었다. <타국에서의 일 년>은 한국계 미국인 이창래 작가의 9년 만의 신작으로 기대를 모은 작품이다. 그리고 나에겐 처음 읽는 이창래 작가의 작품이기도 하다. 700페이지에 달하는 압도적인 분량에 조금 주춤했지만 동서양을 넘나드는 공간적 배경과 과거와 현재가 교차되는 흥미로운 내용 덕분에 속도가 붙으니 술술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틸러 바드먼은 어린 시절 어머니의 부재로 인해 마음의 결핍을 안고 성장한다.
틸러의 아버지 클라크는 자상하고 다정한, 아이를 믿는 아버지라는 가면을 쓴 방관자이다. 틸러의 깊은 외로움과 결핍은 어머니의 부재, 아버지의 방관에서 시작했다고 생각된다.
그런 틸러의 앞에 갑자기 나타난 '퐁 로우'라는 인물은 틸러의 인생을 한 순간에 다른 방향으로 인도한다.
중국인 사업가 '퐁'은 항상 겉도는 인생을 살던 틸러에게 소속감을 부여하고 무조건적인 믿음을 줌으로써
틸러 본인도 몰랐던 능력을 끌어내게 만드는 인물이다.
처음 퐁에 대한 생각은 소외되고 세상 물정을 아직 모르는 아이를 꼬드겨서 이익을 취하려는 사기꾼이 아닐까? 싶었다. 분명 퐁에겐 그런 점이 없지 않지만, 틸러에게 퐁은 자신을 믿어주는 멘토이자 롤모델, 더 나아가
유사 아버지 같은 존재로 거듭난다.
이 소설에서 특히 좋았던 부분들은 틸러에게 퐁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대화를 나누는 장면들이었다.
부유하며 호탕하고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매력을 지닌 퐁의 진짜 모습은 어떤 걸까?
이야기를 따라가며 추측을 하는 것도 이 소설을 읽는 재미 중 하나일 것이다.
퐁만큼 틸러에게 중요한 인물은 바로 '밸'이다. 연상의 여인 밸에게는 빅터주니어라는 아들이 있다.
밸은 남편 문제로 증인 보호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틸러와 함께 살게 되면서 유사 가족의 형태를 이룬다.
틸러는 항상 어머니의 흔적을 찾고, 단편적인 기억들을 떠올리며 어머니와의 유사성, 연결점을 찾기위해
노력한다. 그런 틸러에게 밸은 이성적인 호감과 함께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역할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이 소설에서 음식은 중요한 매개체로 사용된다.
밸의 아들인 빅터주니어가 틀을 깨고 나오는 분야도 요리이고 요식업을 하는 퐁,
그리고 새로운 사업인 '자무' 역시 건강 음료이다. 작가가 음식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부분은 무얼까?
아마도 어머니의 부재로 인해 생긴 틸러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직접 먹으며 포만감을 줄 수 있는
음식을 택한 게 아닐까?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허기를 달래기 위한 요소라고 생각된다.
이 소설은 밝고 희망찬 20대 주인공의 역경을 이겨내고 일어서는 성장기가 아니다.
분명 틸러는 퐁과 함께 세상을 다니며 많은 경험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자신이 몰랐던 능력을 발견하면서
성장을 하지만 그렇게만 읽기엔 너무 많은 주제를 담고 있는 소설이다. 그렇기에 조금은 난해하고 어렵다.
소설 제10장을 읽어 넘기면서도 대체 이 소설이 가고자 하는 방향은 어디인지, 흐름을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책을 놓지 못하고 더 읽었던 부분이 분명 있기는 하지만.
소설에 등장하는 많은 아시아계 인물에 대한 묘사와 설정이 너무도 과장스럽고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
많아서 불편하기도 했다. '한국계' 미국 작가라는 작가의 정체성을 떠올리지 않고 책을 읽으려고 노력했으나,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런 과한 설정이 과연 '아시아계'라서 작가가 직접 겪고 느꼈 시선인지,
아니면 '미국인'으로써 아시아인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인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또 작품 후반부에 나오는 백인을 향한 피해의식이 가득한 아시아인에 대한 표현도
작가의 의도와 생각이 궁금해지는 지점이었다.
이 또한 내가 아시아인이라서 느끼는 불편함이라고 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처음 읽는 이창래 작가의 작품이기에 이 한 작품으로 내가 감히 작품과 작가에 대해 평가를 내리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저 한 명의 새로운 독자로서 작가의 다른 작품이 궁금해졌다는 것,
그래서 다른 작품도 읽어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다는 것 자체가 이창래 작가가 가진 글의 힘이 아닐까 싶다.
불편한 점도 있었지만 매력적인 소설임에는 분명했다.
잔잔하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흘러가는 이야기가 아닌 살아 움직이는 이야기를 듣는 느낌이었다.
이야기가 어디로 튈지 몰라서 자꾸 다음 페이지를 넘기게 됐으니 말이다. 대체 뭐지? 그래서 어떻게 된다고?
계속되는 물음을 안고 주인공을 따라 미지의 세계를 여행하는 마음으로 새로운 독서 경험을 하고 싶다면
<타국에서의 일 년>을 읽어보시길 권한다.
좋은 책 잘 읽었습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