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말해줘
존 그린 지음, 박산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4년 10월
평점 :
절판


 첫사랑에 성공할 확률은 낮다. 여기서 성공이란 오랜 연애와 결혼을 뜻한다. 처음 사랑에 모두 서툴기 때문이다. 사랑을 표현하는 일도 상대의 마음을 읽는 일도 처음이라 어렵고 힘들다. 첫사랑이 애틋하게 남는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닐까 싶다. 첫사랑의 이름과 같은 여자친구를 계속해서 만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누군가는 운명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존 그린의 장편소설 『이름을 말해줘』의 콜린에게 캐서린이란 이름은 인연이거나 악연일 것이다.

 

 한때 신동으로 주변의 기대를 받았던 콜린은 열아홉 번째 여자친구 캐서린에게 차였다. 놀랍게도 열아홉 명의 여자친구 이름은 캐서린이다. 어쩌다 콜린은 캐서린 이란 이름에 빠지게 되었을까. 실연한 친구의 슬픔을 달래기 위해 하산은 콜린에게 자동차 여행을 제한한다. 머리속엔 온통 캐서린이 가득한 콜린과 하산은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무덤이 있는 건샷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린지라는 소녀를 만난다. 

 

 콜린은 린지 엄마의 일을 돕기로 하고 린지의 집에서 머문다. 린지 엄마가 운영하는 공장에서 일했던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건샷에 어떤 곳이며 어떤 일을 했는지 녹취하는 일이다. 그리고 콜린은 지금까지 차인 연애를 증명할 공식을 만들기로 한다. 그러니까 그래프로 지난 사랑을 나타낼 수 있다고 믿었다. 수학 공식은 콜린과 지금까지 만나온 캐서린에게 일어난 일을 통계로 어떤 연애를 하든 콜린이 차일 거라는 공식이다. 그러나 공식을 만들수록 변수가 생긴다.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다른 것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문득 떠올랐다. 애너그램, 책에서 배운 사실들을 뱉어내기, 이미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원주율 99자리 암기하기, 똑같은 아홉 글자의 이름을 가진 여자들과 계속 사랑에 빠지기, 계속 타자를 치고 또 치고 또 치고 또 치고, 그가 독창성을 발휘할 유일한 희망은 이제 그 수학적 정리밖에 없었다.’ (137쪽)

 

 소설은 이처럼 엉뚱한 이별 공식과 함께 콜린과 린지의 지난 시절을 들려준다. 건샷에서 나고 자라 그곳을 떠날 생각이 없는 린지. 콜린이 정리한 이별 공식을 읽으면서 린지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와 애정을 생각한다. 캐서린 외에는 어떤 사랑도 할 수 없다던 콜린도 린지에게 호감을 느낀다. 린지의 남자 친구(또다른 이름의 콜린)가 바람을 피우는 사건으로 둘은 서로에 대한 마음을 확인한다.

 

 이별을 수학공식으로 정리하다니, 정말 기발한 상상이다.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에서 만났던  열정 가득한 십 대의 발랄함과 순수한 사랑을 만날 수 있는 소설이다. 반복되는 짧은 연애를 통해 과거가 된 감정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배우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서 콜린과 린지의 마음은 커진다.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과거는 새로운 이야기가 될 수 있고 미래는 그 이야기를 계속 써나가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된 콜린처럼 조금씩 자란다. 

 

 ‘콜린은 우리가 기억하는 것과 실제로 일어난 일 사이의 간격, 우리가 예측하는 일과 실제로 일어나는 일 사이의 간격에 대해 생각했다. 그 간격 사이에 자신을 다시 만들어낼 충분한 공간이 있다고 생각했다. 신동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는 공간, 그 이야기를 좀 더 낫고 다르게 다시 만들어낼 수 있는 공간, 다시 계속해서 태어날 수 있는 공간이. 뱀을 죽이는 사람, 대공, 또다콜 퇴치자, 어쩌면 천재까지. 누구든 될 수 있는 공간이 거기 있었다. 지금까지의 그를 제외한 다른 사람. 콜린이 건샷에서 배운 것은 다가오는 미래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312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안부를 전하는 일은 얼마의 마음 조각이 필요한 일일까. 곧 닫힐 11월을 보내는 날들이라 그런지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립다. 어느 계절을 마지막으로 목소리를 나눴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여전히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마음이 작아져서가 아니라, 일이 많아서 그렇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불안하고 서운하다. 좋지 않은 일들이 일어난 건 아닌가 쓴 약을 마시는 짐작을 한다.

 

 또 한 해를 살았다는 안도와 함께 제대로 살지 못한 날들을 홀로 원망한다. 매년 올해의 리스트를 작성했지만 2014년에는 쓰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그러니까 반복되는 일상도 기록으로 남기지 않은 것이다. 소수의 사람들과 연락을 취하며 그들의 얼굴을 보고자 했던 다짐도 냉동실 속 아이스크림처럼 얼어버렸다. 이제는 유통기한이 지나 버려야만 한다. 누군가에게 소식을 전하고 누군가의 소식을 듣는다는 건 소소한 기쁨이 아니라 아주 큰 즐거움이다.

 

 작은 소동이든 큰 사건이든 일어나고 해결된다. 죽음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매일 죽음의 소식을 듣는다. 가까운 이, 누구나 다 아는 공인, 나와는 상관없는 어떤 사람의 죽음을 듣는다. 때문에 죽음에 익숙해진다. 때문에 죽음에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러다 마주한 소중한 이의 죽음은 버릴 수 없는 상처가 되고 지울 수 없는 그림이 된다.

 

 

‘누군가 죽는다는 것은 다시는 그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완전한 이별, 미련과 기대와 슬픔마저 사치로 만들어버리는 깨끗한 결단. 종지부. 두부를 삼키면 두부가 눈앞에서 사라지듯이 죽음은 그들을 삼켜 없애버린다.’ (내 침대 아래 죽음이 잠들어 있다 중에서, 187쪽)

 

 어쩌면 나는 박연준의 『소란』에서 그 상처와 그림을 매만질 수 있을 거라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의 문장이 건네는 안부가 오직 나를 위한 것이라는 착각에 빠지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문장에서 그 봄을 떠올리고 잠시 봄의 목소리를 듣는다.

 

 

 ‘사랑이 편애라면, 나는 4월의 나무 이파리들을 편애한다. 꽃 진 다음 이파리가 주인공이라고 외치듯, 막 태어난 색깔인 듯 화사하게, 처녀의 종아리처럼 빛난다. 아직은 떨어질 일이 없다고, 아마 영영 없을 거라고 자신하는 저 몸짓! 앳된 얼굴들. 자전거를 막 배운 아이처럼 생동하는 움직임! 눈물이나 떨어짐, 기우는 일 따위는 모르는 듯 떨다 웃다 선명해지는 저 잎사귀들. 저건 어느 나라 사파이어지? 그늘마저 화사한 4월의 나무들! 좋다. 참 좋다!’ (이파리들 전문, 145쪽)

 

 

 4월을 편애하는 내게 이런 문장은 달콤한 커피처럼 스며든다. 겨울의 중심을 향해 달려가는 시간에 봄으로의 도피를 도와주는 문장이다. 그 봄, 어디든 연두가 춤을 췄다. 그리고 그 봄 부실한 이를 가진 마른 과일 껍질 같던 아버지가 밥상에 고개를 숙인 채 밥을 먹고 있었다. 제 기능을 상실하는 귀로 인해 내 목소리를 잘 듣지 못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팥죽색 얼굴 위에서 하염없이 서성이다

  미소처럼, 아주 조금 찡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지나가는 뱀을 구경했다

 

  기운이 없고 축축한 ― 하품을 하는 저 뱀

 

  나는 원래 느리단다

  나처럼 길고, 나름답고, 축축한 건

  원래가 느린 법이란다

  그러니 얘야,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어둠이 고개를 다 넘어갈 때까지

  눈을 감으렴

  잠시,

  눈을 감고 기도해주렴  -「뱀이 된 아버지」 의 일부

  귀여운 귀여운 아버지

  사그라지는 몸

  사그라지는 목소리

  사그라지는 실체

 

  마침내 잦아드는,

  흘러넘치는

  아버지라는 액체  -「물빛, 정오」 의 일부

 

 

 아버지도 무언가가 되었을까. 시 때문인지 박연준과 아버지는 같은 단어로 여겨진다. 아버지의 마지막을 지킨 큰언니에게 아버지는 어떤 단어로 기억될까. 아직 그 질문을 큰언니에게 하지 않았다. 어쩌면 영영 묻지 못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서로에게 비밀 아닌 비밀이 있다는 걸 안다.

 

 곧 12월이 된다. 잠시나마 세상의 죄악을 덮을 수 있다고 믿는 천사의 눈이 내릴 것이다. 12월의 첫날, 다시 이 문장을 읽을 것이다. 끝이라는 말보다 시작이라는 말을 내뱉게 되는 12월이 될지도 모른다. 12월이 되면 불안을 누르는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나만의 12월을 갖고 싶다. 

 

 

 ‘이상하다. 12월이 되면 모든 것의 윤곽이 흐려진다. 달력의 숫자들조차 꿈틀거리며 도망가려는 듯 보인다. 명징한 얼굴을 보여주길 거부하듯, 12월이 품은 날들은 웬일인지 모두 흐리다. 인디언들은 12월을 ‘다른 세상의 달’ 혹은 ‘침묵하는 달’, ‘나뭇가지가 뚝뚝 부러지는 달’, ‘늙은이 손가락 달’, ‘태양이 집으로 여행을 떠나는 달’ 등으로 부족에 따라 달리 부른다. 재미있다. 우리말로 12월은 ‘매듭 달’이다.’ (12월, 머뭇거리며 돌아가는 달 중에서, 197쪽)

 

 

 여전히 당신의 목소리는 내게로 오지 않는다. 그러니 나의 목소리도 당신에게 닿을 수 없다. 안부 대신 건네는 문장을 당신의 목소리로 읽히는 상상을 한다. 상상은 곧 현실이 되리라는 믿음과 함께. 가느다란 믿음이 이스트를 품은 밀가루 반죽처럼 부풀어 오르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테이트 오브 더 유니언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현재는 과거를 부정할 수 없다. 안타깝게도 그렇다. 누구나 지우고 싶은 과거의 실수와 잘못이 있다. 어떤 것들은 아무도 모르게 감추고 싶은 비밀에 속하기도 한다. 때로 비밀은 판도라의 상자가 되어 현재를 삼킨다. 그러므로 부정할 수 없는 과거를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현재의 삶을 달라진다. 더글라스 케네디의 『스테이트 오브 더 유니언』 속 한나에게 닥친 일이 그러했다.

 

 주인공 한나는 반전 운동에 앞장서는 교수 아버지와 유능한 화가 엄마를 두었다. 그러니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자신이 싫었다. 의대생 댄과 사귀면서 한나는 결혼을 결심한다. 졸업도 하기 전 결혼을 하고 곧바로 아들 제프리가 태어났다. 한나는 평범한 주부의 삶을 시작한다. 1970년대 여대생의 삶을 떠올리면 한나의 선택이 나쁘다고 할 수 없다. 다만 한나가 정말로 원하는 삶이 주부였을까 궁금할 뿐이다. 

 

 댄의 공중보건의 근무를 따라 시골마을 펠험으로 이주한다. 그곳은 사생활이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 모두가 한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바쁜 댄과는 점점 대화가 줄어들고 제프리를 돌보는 일로 지쳐간다. 도서관 사서로 일하면서 숨을 쉬게 된다. 한나의 내부에는 어떤 열망이 자라고 있었다. 위독한 시아버지를 보러 댄이 고향을 떠난 사이 한나의 열망에 불을 지피는 일이 발생한다.

 

 아버지의 부탁으로 여행 중인 급진주의자 저슨에게 숙소를 제공한 것이다. 낯선 사람의 등장으로 마을을 술렁인다. 한나는 대화가 잘 통하는 저슨과 사랑을 나눈다. 자기 자신도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저슨이 여행자가 아니라 FBI의 추격을 당하는 도망자라는 사실이다. 저슨의 협박으로 캐나다까지 그를 피신시키고 돌아온다.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간직한 한나는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아들에 이어 딸 리지를 낳았고 30년이 지난 2003년 현재 댄은 정형외과 의사로 입지를 굳혔고 한나도 교사로 자신의 삶에 만족한다. 변호사인 아들과 펀드매니저인 딸 누가 봐도 완벽한 가족이었다. 그러나 서로에 대해 잘 안다고 착각했다. 유부남과 헤어진 딸이 실종되면서 언론에 노출되고 30년 전의 비밀은 저슨에 의해 책으로 출판된다. 언론과 사람들은 한나를 공격하고 댄은 이혼을 선언한다. 한나는 당당하게 나선다. 한나는 과거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잘못된 부분을 말하고자 노력한다. 외면하는 아들과 남편 대신 마지의 도움으로 싸운다. 변호사를 고용하고 토크쇼에 출연해 자신의 입장을 세상에 밝힌다.

   

 우리와 가장 가까운 사람조차 간혹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한다. 한편으로는 우리 자신도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는 일을 한다. 우리는 타인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을뿐더러 자기 자신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다.’(568쪽)

 

 한나는 리지의 실종과 저슨의 사건으로 인해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길 원했던 엄마와의 마찰, 댄과 연애시절 프랑스 유학을 선택하지 않았던 일, 제프리와 리지에게 좋은 부모가 되고 싶었던 시절, 30년 결혼생활이 진정 행복했는지 말이다. 한나에게 일어난 사건을 보면서 생각한다. 누가 한나의 삶을 평가하고 판단할 수 있는가? 그녀를 질책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한나 자신이 아닐까.

 

 ‘인생이란 일상의 사이사이로 섬광처럼 반짝이다가 지나가는 순간에 불과했다.’(356쪽) 

 

 부정할 수 없는 과거에 대해 피하지 않고 맞선 한나의 모습은 매우 멋지다. 소설을 읽는 동안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는 이가 많을 듯하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삶은 달라진다. 영원하지 않은 생을 살면서 자기 자신의 삶을 안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 아닐까 싶다. 더글라스 케네디는 그것을 알아가는 과정이 삶이라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돌아보면 찰나에 불과한 순간이지만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장을 정리한다. 가만히 책들을 바라본다. 몇 년 전에 환호하며 읽었던 책, 탐났던 문장들, 눈물을 닦아주던 문장들이 거기 있었다. 잊고 있었던 책들도 발견한다. 책날개에는 소중한 이의 손글씨와 내가 남긴 메모가 있었다. 좋아하는 작가의 사인도 눈에 들어왔다. 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에는 단정한 글씨로‘2008. 10.1 김연수’가 적혀 있었다.  

 

 책을 정리하면서 책 속에 숨겨진 욕망을 보았다. 내가 도서 정가제를 핑계로 사들이는(그렇다, 읽기가 목적이 아니라) 분야의 책은 시, 문학, 예술이 많았다. 철학, 인문에 대한 욕심도 있지만 읽지 못할 거라는 걸 잘 알기에 멈춤에 이르렀다. 직접 마주할 수 없는 그림을 예술서를 통해 보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주말을 전후로 구입한 책은 소설가 7인의 옷장이란 부제가 있는 『THE CLOSET NOVEL』, 착한 가격과 함께 호평으로 이어지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기도』, 『개더링』, 『죽음의 수용소에서』, 그리고 이 책 『ART 세계 미술의 역사』다. 갖고 싶은 책을 생각하는 일은 행복한 고통을 선물한다. 『백치, 『악령』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고민은 괴롭다. 그럴 때마다 지인의 추천으로 기운다. 좋아하는 작가들의 추천을 더 잘 알려진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도 함께 담았다. 몇 권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좋아하는 언니를 위한 선물로 『소설가의 일』을 주문했다. 선물을 생각하니 김연수의 『우리가 보낸 순간』이 떠오른다. 연말이 다가오기 전에 미리 누군가에게 이 책을 선물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선물을 받는 이는 김연수의 팬이 아니어야 한다.

 

 

 

 

 

 

 

 

 

 

 

 

 

 

 

 

 

 

 

 

 

 마지막을 위한 마지막 리스트는 끝났다. 목요일 이후에 나는 어떤 책을 마주할 것인가? 어떤 책을 살 것인가? 아니, 어떤 책을 읽을 것인가? 어쩌면 여전히 책을 정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젯밤엔 강한 바람이 불었다. 16년 만에 수능 한파가 찾아온 것이다. 진짜 겨울이 시작되었다고 중얼거렸고 아침에는 쌀가루처럼 내리는 눈을 보며 첫눈이구나 생각했다. 내가 사는 소읍엔 수능이라 해도 출근을 늦추거나 등교 시간에 대한 변경이 없었다. 공무원이나 은행원들은 달랐겠지만 말이다. 주변에 고3이나 수능에 관련된 사람이 없다 보니 그저 춥다는 말이 지배한 하루였다.

 

 저마다 11월 13일을 기억하는 방법은 달랐다. 누군가에게 오늘은 첫눈이 내린 날이며, 누군가에는 평범한 목요일이며, 누군가에게는 김장을 담근 날이며, 누군가에게는 11월 13일은 전태일 열사를 떠올리는 날이다. 물론 내가 전태일 열사의 기일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건 아니다. 덕분에(부끄럽지만) 이런 책을 펼쳐보는 날이다.

 

 

 

 ‘머리채를 잘랐던 어머니는 흉한 머리를 감추기 위해여 한여름 내내 보자기를 뒤집어쓰고 일했다. 태일은 이른 새벽에는 여관을 돌아다니며 구두를 닦고,낮이면 평화시장·남대문시장·중부시장 등에서 시다나 미싱보조로 노동을 하고, 밤에는 껌과 휴지를 팔러 다녔다. 이렇게 하여 그해 가을 모자가 돈을 보태어 2,500원으로 헌 천막 하나를 샀다. 그 당시 남산 중턱에는 골격만 세워놓고 공사가 중단된 큰 아파트형의 건물이 하나 있었는데, 그 건물 뼈대에다가 집 없는 사람들이 합판으로 각각 칸막이를 해놓고 그 안에 들어가 살고 있었다. 빈터라고는 옥상밖에 없었는데, 어머니와 태일은 옥상에다 천막을 쳤다. 밤이 되니 관리인이란 사람이 올라와서 철거하라고 하여 그날 밤만 사정사정하여 새우고, 그 다음날 새벽에 철거를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래서 모자는 또다시 헤어져 돈을 조금 더 모아서 판잣집을 세내기로 하였다. 김장철이 되었을 무렵 어머니는 남산동 50번지의 한 판잣집을 사글세로 얻었고 오랜만에 어머니, 태일, 태삼 세 모자가 함께 살게 되었다.’ (87쪽)

 

 

 

 그 시절을 몰랐던 혹은 경험하지 못한 이들에게 누군가의 삶은 소설이나 영화처럼 다가온다. 나 역사 다르지 않다. 이런 책을 통해서 그들의 시간을 불러올 뿐이다. 천막에서 살아야 하는 삶은 여전히 비닐하우스로 이어지고, 발끝이 닿지 않는 방 한 칸에서 살림을 사는 삶은 줄어들지 않았다. 진실이 아닌 것들이 진실로 보도되고, 권력과 부가 휘두르는 칼에 서민들은 깊고 큰 상처를 입는다.

 

 우리가 바라는 삶은 어떤 것일까? 부자가 되는 것, 명예를 갖는 것,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은 극소수가 바라는 삶이다. 아니 바란다고 될 수 있는 삶이라면 좋겠다. 그저 내 식구가 배고프지 않고 춥지 않게 겨울을 지낼 수 있는 아주 작은 공간을 꿈꾼다. 아프면 참지 않고 바로 병원에 갈 수 있는 세상, 잘못된 부분을 바로 인정하고 시정할 수 있는 세상을 바란다.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맨 먼저 달려온 사람들은 늘 차별과 소외가 있는 곳에서 함께해온 헌신적인 사회단체 사람들과 고통받는 노동자들이었다. 이랜드-뉴코아 여성 노동자들, 코스콤 비정규자들, 며칠 전 고공농성을 마친 GM대우 비정규직들, 재능교육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 전국해고노동자투쟁위헌회 회원들, 그리고 시청 앞에서 성람재단 비리 해결을 위해 끈질기게 천막농성을 벌이고 있는 장애우들 우리 사회 가장 밑바닥에서 자신의 권리를 넘어 전체 차별받는 이들의 권익을 위해 싸우고 있는 이들이었다.’ (189쪽)

 

 

 

 

 

 

 수능은 끝났고 출제경향에 대한 이야기가 끝이지 않을 시간이다. 시험을 치른 아이들이나 그렇지 않은 아이들 모두 특별한 하루가 된다. 자신의 미래를 위해 멋진 꿈을 꾸며 잠드는 이들도 있을 것이며 눈물을 삼키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2014년 11월 13일을 기억하는 수많은 방법 가운데 분노나 절망은 없었으면 좋겠다. 그저 평범한 하루를 마치며 내일을 준비하는 시간에 작은 감사와 평안의 조각이 있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