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세기
캐런 톰슨 워커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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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는 24시간, 일 년은 365일이다. 이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보편의 진리다. 누구도 하루가 25시간, 26시간으로 늘어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우리는 재앙이라 믿을 것이다. 규칙은 사라지고 불안과 혼돈의 시간을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랑하며 살 수 있을까?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리는 어른과 다르게 아이들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캐런 톰슨 워커의 <기적의 세기> 속 열한 살 줄리아처럼 말이다.

 

 아무런 예고 없이 지구의 자전 속도가 느려진다. 조금씩 천천히 하루가 길어질 뿐이다. 그러나 방송과 언론은 이 현상을 ‘슬로잉’이라 부르며 무서운 미래를 예측한다. 캘리포니아 해안 근처에 사는 줄리아의 집도 마찬가지다. 배우를 했던 감성적인 엄마는 쉽게 동요한다. 산부인과 의사인 아빠의 출근도 막으려 한다. 아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로 엄마의 불안을 무시한다. 줄리아도 평소와 같이 스쿨버스를 타고 학교에 간다. 선생님은 술렁거리는 아이들을 달랜다. 어른들은 식료품을 구매하거나 어디론가 떠난다. 그러나 사춘기에 접어든 줄리아의 관심은 오직 세스뿐이다. 같은 선생님께 피아노 레슨을 듣는 아픈 엄마가 있는 아이, 세스. 어른들은 슬로잉에 대해 요란하게 공포를 드러내지만 줄리아는 주변을 관찰할 뿐이다. 하늘에서 떨어진 죽은 새를 발견하거나 무심한 듯 아이들 속에서 세스를 찾는다.

 

 ‘시간은 계속해서 늘어났다. 우리의 하루는 삼십 시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루가 이십사 시간이었다는 사실이 아주 낯설게 여겨지기 시작했고, 하루를 호두 껍데기처럼 매끈하게 두 번의 열두 시간으로 딱 잘라 나누는 건 불가능하게 생각되었다. 그토록 단순하게 나눈 시간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의아스러웠다.’(104~105쪽)

 

 슬로잉이 계속되자 정부는 새로운 정책을 시행한다. 클락 타임제,  그러니까 시간에 맞춰 생활을 하는 것이다. 해가 뜨지 않아도 아침 9시가 되면 등교를 하고 출근을 한다. 이에 반하여 태양이 뜨고 지는 것에 따라 생활하는 리얼 타임 생활자도 존재한다. 중력의 변화로 백야는 늘어났고 새들은 날지 못하고 고래는 떼로 죽어간다. 어쩌면 아빠가 엄마가 아닌 피아노 선생님에게 마음을 준 것도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처럼 모두에게 예측할 수 없는 삶이 주어졌지만 누군가는 슬로잉에 빠르게 적응하고 누군가는 슬로잉 증후군을 앓는다.

 

 ‘그 해 봄은 시간이 굉장히 빠르게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세스의 머리는 눈을 찌를 정도로 길게 자랐다. 나는 앞머리를 길렀다. 세스는 내 앞머리가 마음에 든다고 했다. 나는 다리털도 밀고, 브래지어도 착용했다. 이번에는 가슴에 딱 맞는 것을 구입했다. 어느 캄캄한 오후, 세스는 내게 스케이트보드 타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가로등이 켜진 거리에서 세스가 내 옆에 바깥 붙어 뛰면서 한 손을 내 등에 얹었을 때의 느낌이 아직도 기억난다. 보도의 갈라진 틈에 스케이트보드 바퀴가 빠져 넘어질 듯 휘청거리면서도 나는 흐뭇했다.’(315~316쪽)

 

 작가는 피할 수 없는 자연의 재앙을 열한 살 소녀의 시선으로 아주 담담하게 그려낸다. 몸과 마음이 자라는 사춘기의 심리적 변화를 솔직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더 아름답고 눈부신 소설이다. 어떤 재난도 오직 한 번 뿐인 첫사랑이 주는 기적만큼 대단하지 않았다. 슬로잉으로 인해 무너지는 어른들의 삶이 아니라 제목처럼 기적의 세기를 경험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지지 않는 해와 뜨거운 열기에 대해 어떤 걱정도 없이 세스와 함께 모든 순간에 최선을 다하고 즐긴다. 특별한 성장소설로 기억되는 이유다.

 

‘미래에 대한 예측은 점점 더 어두워져만 갔다. 하지만 세스와 나는 끄떡없었다. 몸속에 활기가 가득했다. 죽음은 이따금 삶의 증거가 되기도 했다. 쇠약해진다는 건 때로 살아 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우리는 어렸고, 늘 배가 고팠다. 그렇기 때문에 점점 더 튼튼하고 강해졌다. 활기가 넘쳐 몸이 터질 지경이었다.’(332~3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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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이라서 그런지 자꾸 시집이 눈에 들어온다. 도서정가제가 실시되기 전에 갖고 싶고 읽고 싶은 시집을 구매하겠다고 생각했다. 낮에 친한 블로그 이웃과 통화를 하면서도 시집에 대해 언급했다. 최근에 구매한 시집들의 제목과 몇 권의 시집에 대해 콕 찝어 말했다. 그러니까 민음사 시집이었다. 문정희의 <응>, 성동혁의 <6>이다. 한데, 우리의 대화를 지니가 들었는지 이런 이벤트가 시작되었다.

 

  ‘시 읽기 좋은 계절, 민음사 시집 알라딘 단독 40% 할인을 진행합니다.’  가을, 시와 사랑에 빠지다

 

 소장하고 있는 민음사의 시집 중에서 좋아하는 시집은 허 연의 <나쁜 소년이 서 있다>, 김행숙의 <타인의 의미>, 김지녀의 <시소의 감정>, 손미의 <양파 공동체> 정도다. 그리고 궁금했던 황인찬의  <구관조 씻기기>, 이장욱의 <내 잠 속의 모래산>,  천수호의 <아주 붉은 현기증>은 이 기회에 곁에 두어도 좋을 듯하다. 부담스럽지 않은 착한 가격이니 자꾸 장바구니가 무거워진다.

 

 

 

 

 

 

 

 

 

 

 

 

 

 

 

 

 

 

 

 

 믿음사에 이어 문학과지성사도 가을 내 책장을 위한 마지막 선물을 기획한다. 조만간 창비와 문학동네도?

 

 

 

 

 

 

 

 

 

 

 

 

 그리고, 이 가을에 반복해서 읽고 있는 건 이런 시.

 

 

 살 무르고 눈물 모르던 때

 눈 감도고 당신 얼굴을 외운 적 있었지만

 한번 묶은 정이야 매듭 없을 줄 알았지만

 시든 꽃밭에 나비가 풀려나가는 것을 보니

 내 정이 식는 길이 저리할 줄 알아요

 

 그래도 마음 당신 생각을 못 이기면

 내 혼은 지읒 시옷 홑겹으로 날아가서

 한밤중 당신 홀로 잠 깰 적에

 꿈결 듯 눈 비비면 기척도 없이

 베갯머리에 살비듬 하얗게 묻어나면

 내가 다녀간 줄로 알아요, 그리 알아요

 -「눈 감으면 흰빛」전문

 

 

 비가 올 거라고 했고

 우산을 가지고 나오겠다고 했다

 

 당신은 우산을 착착 접은 뒤

 사거리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렸다가

 횡단보도를 건널 것이다

 

 비가 올 것 같다는 말은

 어쩐지 희미해

 

 눈을 감으면

 4층에서 1층까지

 

차례로 전등에 불이 들어온다

 

 티스푼으로 뜬 것처럼

 빗물이 파낸

 작은 홈들이 길게 이어진다

 

 반지를 빼서 주머니에 넣는다

 약지에

 흰 띠가 남아 있다

 -「연애」전문

 

 

 눈썹 하나 뽑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손금 들여다보네

 

 손바닥 오므렸다

 손바닥 펼치면

 숱 많은 꽃길이 갈라지고

 비단꽃문 열리고

 

 그 길은 길고 가늘어서

 너는 거기 서 있었네

 

 세상의 이불 덮고

 두잎이 포개는 소리

 꽃물 번지네

 

 너는 오래도록 서러웠고

 내 귀는 닫혀 있었네

 

 꽃길 열리고

 꽃문 닫히고

 비단이불 위에 너의 속눈썹

 꽃술 떨어지네

 당신이 저무네 

 -자귀나무 꽃살문 전문

 

 

 

 

 

 

싱고, 라고 불렀다 신미나 / 창비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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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날이었던 지난 9일, 오후 8시를 오전 8시로 알고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검색했다. 온라인 서점에도 노벨문학상을 검색하기도 했다. 아무리 찾아도 수상자는 없었다. 나의 손은 그렇게 엉뚱한 일을 하고 있었다. 연관 기사를 검색하고 읽고, 모두 손으로부터 시작된 일이다. 읽고 싶은 도서나 관심 가는 도서에 대한 리뷰를 읽고 공감을 누르는 일도 손이 하는 일이다. 책을 구매하는 일, 훔치고 싶은 문장을 옮겨 적는 일, 손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나는 손에 대해 고맙게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사랑하는 오른발을 주무르고 매만지는 일도 손이 하는 일인데, 그저 발만 안아주고 말았다. 눈이 보고 놀라는 일에 대한 표현도 눈이 보고 좌절하는 일들 끝에도 손이 있었다. 내가 당연하게 여기는 손을 고마움을 문득 생각한 건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문장도, 소설도 결국엔 손에 만들어내는 게 아닐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세계문학이 아닌 책으로 읽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는 이제 더이상 파트릭 모니다노만의 문장이 아니다. 책은 읽은 저마다의 독자에게 새로운 문장이 되었다. 그는 어떤 생각으로 그 문장을 썼을까. 그가 문장을 써 내려가는 동안 손은 얼마나 봤을까. 이런 맹랑한 생각을 한다. 파트릭 모디아노는 명확하게 잡을 수 없는 기억과 존재, 정체성에 대한 주제를 놓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내 짐작일 뿐이다. 나는 아직 그의 다른 소설을 접하지 못했고 친절한 출판사가 제공한 글을 통해서 말이다.

 

 

 문학의 존재와 가치에 대해 잠깐 생각한다.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 시를 읽고 마음을 다스리는 이유는 어쩌면 소설로나마 타인의 내부를 경험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은 아닐까. 그것은 반대로 내가 전하지 못하는 은밀한 내부를 누군가 알아주기 바라는 그런 마음인지도 모른다.

 

 

 

 노벨문학상의 가치는 어떤 걸까. 내가 알지 못하는 나라의 작가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는 문장, 태어나는 인물, 다시 살아나는 역사의 부조리, 모두가 알아야 하는 감춰지고 숨겨진 잘못들이 그들의 손에 의해 다시 복원된다. 개인 혹은 나라를 다시 주목하게 만드는 힘, 그들의 손은 위대하다. 그래서 『16인의 반란자들』이란 책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문학의 힘을 믿는 사람들, 문학의 기능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 어떤 체제와 사상에 반하여 추방되고 생명까지 위협받는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

 

 

계속 글을 쓸 수 있는 힘을 얻었다는 것이, 글을 쓰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아요.”  주제 사라마구의 말이다.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글을 쓸 수 있는 것이라니, 그건 도대체 어떤 사명이었을까. 그들 중 누군가는 사라졌고 누군가는 여전히 글을 쓰고 있다.

 

 

 이제 새로운 반란자를 만나고 싶다. 나의 보잘 것 없는 손이 그들의 고단한 손을 감싸는 일은 그들의 문학을 읽는 것이리라. 그러니 이런 책을 먼저 읽어야 한다. 세월호를 바라보는 작가의 눈 『눈먼 자들의 국가』를 펼친다. 제대로 읽을 자신이 있는 건 아니다. 다만,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난 4월 16일, 나는 뉴스를 보면서도 걱정하지 않았다. 안산(安山)에 아는 이가 없었고 전원구조, 란 말을 믿었기 때문이다. 꽃같은 아이들이 꽃처럼 지고 있었다. 황정은의 손이 쓴 글처럼 어떻게 지내십니까, 누군가에게 묻는다.

 

 

 어떻게 지내십니까. 내 경우 4월 16일 이후로 말이 부러지고 있습니다. 말을 하든 문장을 쓰든 마침내 당도하기가 어렵고 특히 술어가 잘 떠오르지 않는다. 문장을 맺어본 것이 오래되었다. 그런 참에 질문을 해보라는 청탁을 받았다. 물을 수 있는 것이 없는데, 라고 생각하면서도 쓰겠다고 대답했다. 질문이든 뭐든 말하고 싶다는 욕망 자체가 사라져버렸고 이대로는 내내 아무것도 쓰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무력감을 어떻게든 견디고 내가 좋아하는 소설, 문장을 쓰는 생활로 돌아가고 싶다는 이기가 있었다. (황정은 - 「가까스로, 인간」 중에서)

 

 

 다음 주면 사건이 발생한지 6개월이 된다. 내가 사는 이곳의 아이들은 다시 수학여행을 떠난다. 그저 말간 얼굴로 조금은 들뜬 마음을 드러내며 손을 흔들며 떠날 것이다. 봄, 여름, 가을이라는 계절이 지나고 있다. 깊은 바다만이 알고 있는 진실을 언제쯤 알 수 있을까. 나의 손은 당신의 손과 달라서 부끄럽게도 이제 세월호를 검색하지 않는다. 당신의 손이 만든 문장을 읽으며 다시 나의 손이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한다. 그저 닿을 수 없는 온화한 마음을 보낼 수 있는 작은 댓글을 달고 공감 버튼을 누르는 보통의 손, 위대하고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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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화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3
김이설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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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이 닿은 곳마다 예쁘고 아름다운 것들이 넘쳐난다. 그래서 세상은 특별한 것에 주목한다. 말을 바꾸자면 개성을 존중한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세상의 기울기는 독특한 것보다 예쁘다는 쪽에 기운다. 그러니 선천적으로 얼굴에 거대한 흉터를 지닌 여자가 세상을 향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분명 잘못한 일이 없는데도 움츠리게 된다.

 

 주인공 선화는 오른쪽 얼굴을 덮은 짙은 흉터로 세상과 화해하지 못한 서른다섯 살의 여자다. 꽃집을 운영하면서 꽃을 잡고, 꽃을 만지고, 꽃과 함께 살아간다. 선화의 상처를 알지 모르는 누군가는 꽃과 보내는 일상을 아름다움의 결정체라 여기며 부러워할 것이다. 하지만 선화는 단 한 번도 꽃처럼 환한 미소를 보인 적이 없다.

 

 존재만으로도 가족에게 짐이었던 선화였다. 할머니는 선화뿐 아니라 엄마에게도 험한 말을 내뱉었다. 언니 연화는 흉터 때문에 엄마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선화를 증오했다. 결국 선화가 연화의 얼굴에 엄마의 화침을 던지면서 엄마의 사랑은 거둬진다. 더이상 엄마의 꽃집은 선화에게 안식처가 아니었다. 

 

 ‘오른손으로 얼굴을 칠 때마다 내가 세상에서 사라지기를, 제발 이 자리에서 사라지게 해달라고 빌었다. 짝, 짝, 짝, 짝, 소리가 반복될수록 짝, 짝, 짝, 짝, 감각은 무뎌지고 짝, 짝, 눈물도 흐르지 않았다. 멀리 언니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어느샌가 엄마가 내 이름을 부르며 나를 흔드는 것 같았지만 나는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사라질 수 없다는 것이 너무 절망스러웠다.’(45쪽)

 

 자신의 흉터에는 눈길조차 닿지 않았지만 언니의 상처를 매만지는 가족들, 선화는 세상의 모든 불운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것처럼 두려웠을 것이다. 거기다 두 딸을 남기고 생을 마감한 서른다섯 살의 엄마를 이해할 수도 없다. 그래도 선화는 언제나 최선을 다했다. 휴학을 반복하며 대학을 졸업했고 이력서를 냈지만 선화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세상은 나 같은 존재 자체를 아예 인식하지 못했다. 대꾸할 가치조차 없는 존재, 쳐다볼 이유조차 없는 존재, 신경쓸 겨를도 없는데다, 필요도 없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 한낱 먼지와 같은 것이었다.’(95~96쪽)

 

 아무도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는 세상을 향한 절망과 분노는 선화의 감정을 앗아갔다. 사랑, 연애, 결혼은 선화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이 아닌 꽃을 향해 열렸다. 옛 연인에게 꽃을 보내는 영흠, 농장에서 나무를 키우는 병준을 통해 선화는 다시 세상을 보려 한다. 어쩌면 선화에게 꽃은 선화가 되고 싶었던 유일한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특정한 이름을 부여하지 않아도 누구에게나 꽃은 특별한 의미니까.

 

 김이설의 소설 <선화>는 우리에게 수많은 선화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만든다. 한눈에 보이는 것만이 아닌 누구도 보려 하지 않았던 흉터 뒤에 가려진 깊고 상처를 말이다. 또한 선화 스스로가 세상과 화해하기 위해, 자신의 얼굴과 먼저 대면하게 만든다. 꽃보다 아름다운 얼굴,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말이다. 이제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귀한 선화라는 이름의 꽃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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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언가 되고 싶었던 시절이 있었다. 어떤 대상을 흠모했던 시절이기도 하다. 여전히 그 대상은 굳건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무언가에 대한 애정의 온도는 식지 않았다. 하지만 끓는점을 향해 올라가지 않는다. 그러니까 미지근한 온도라는 말이다. 누군가는 무엇이 되고 있다. 누군가는 무엇에 가까이 다가서고 있다. 그것은 그들의 열정이 끓는점을 넘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실을 적확하게 알고 있다는 게 싫다. 괜한 투정이다. 억지스러운 마음이다.

 

 10월이 되었고 끼니처럼 불안이 몰려온다. 지난 시간에 대한 후회와 절망이 나를 감싼다. 하고 싶다는 마음을 핑계로 삼았다. 옅어지는 간절함을 당연하게 담았다. 어떤 움직임 없이 앞으로 나갈 수 없다는 걸 절감한다. 그러니 이 마음을 드러내서도 안 된다. 그러나 드러내지 않으면 다짐은 사라지고 만다. 부서질 다짐이라도 말이다. 무언가 되고 싶었던 시절의 열정이 소모되지 않았다면 다시 끓어오를 수 있을까. 거창한 도전이라는 이름이 아닌 부단한 노력만이 그것과 맞닿을 수 있을 것이다.

 

 여하튼 10월은 자책의 시간으로 시작된다. 누군가의 개인적인 사랑 연서인 <정확한 사랑의 실험> 뒤적이며 (알았더라면 구매 여부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시집을 둘러본다. 제목이 매혹적이다. <죄책감>, <우울은 허밍>이라니. 지난 시간을 허투루 보낸 내가 읽어야 할 시가 될 것 같다. 그날을 잊지 않기로, 그날을 새겨야 하는 이유를 작가들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는 책 <눈먼 자들의 국가>, 이언 매큐언의 신간 <이노센트>, 친구에게 선물할 김동률의 <동행>까지.

 

 

 

 

 

 

 

 

 

 

 

 

 

 

 

 

 

 겨우 오늘 아침에 여름 이불 빨래를 끝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꺼내는 이불처럼, 생각의 두께도 달라지면 좋겠다. 바람의 크기와 냄새에 맞는 적당한 이불처럼 현명한 사람이 되고 싶다. 저마다 열심을 내는 치열한 삶 속에서 정말 읽는 것만으로도 괜찮은 걸까. 나는, 이대로 괜찮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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