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 문학과지성 시인선 301
오규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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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규원의 시집을 갖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한 잎의 여자」의 시인 오규원의 시집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란 시집에는 무엇과 무엇이라는 형식을 갖춘 제목의 시가 전부다. 가와 나, A와 B처럼 동격인 그것들이라고 해도 좋을까. 아주 평이한 사물과 단어들. 목차를 보면서 시인의 의도는 무엇일까, 생각했다. 생각한다고 궁금해한다고 내가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면서, 생각했다.


 

호수와 나무

ㅡ서시


잔물결 일으키는 고기를 낚아채 어망에 넣고

호수가 다시 호수가 되도록 기다리는

한 사내가 물가에 앉아 있다

그 옆에서 높이로 서 있던 나무가

어느새 물속에 와서 깊이로 다시 서 있다


 

시집의 문을 여는 시를 보면 이 시집은 시인 오규원이 가만히 관찰하는 풍경에 대한 기록이 아닐까 짐작하게 된다. 하나의 사물을 관통하는 그것, 시인의 통찰력으로 빚어진 시라고 말이다. 하나의 풍경은 풍경 너머의 것들을 담고 있다. 그것은 쉽게 보이지 않는다.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쉬이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가만히, 오래토록 지켜보야만 알 수 있다. 자세히 보아야만 알 수 있다. 애정을 가지고 그렇게.



앞의 길이 바위에 막힌 붓꽃의

무리가 우우우 옆으로 시퍼렇게

번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왼쪽에 핀 둘은

서로 붙들고 보랏빛입니다

그러나 가운데 무더기로 핀 아홉은

서로 엉켜 보랏빛입니다

그러나 오른쪽에 핀 하나와 다른 하나는

서로 거리를 두고 보랏빛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붓꽃들이 그림자를

바위에 붙입니다

그러나 그림자는 바위에 붙지 않고

바람에 붙습니다 (「꽃과 그림자」, 전문)



대충 보면 알 수 없는 미세한 떨림, 사물과 사물 사이에 오가는 감정을 새긴다고 할까. 간단하고 명료한 글이 아름답다, 짧고 평이한 글이 감동적이다. 오규원의 시를 더 읽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늦었지만 오규원의 시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 이 시집을 읽으면서 떠오른 이가 있다. 그도 이 시집을 좋아할 것 같은 기분.


 

편지를 한 통 받았습니다
눈송이가 몇 날아온 뒤에 도착했습니다
편지지가 없는 편지입니다
편지봉투가 없는 편지입니다
언제 보냈는지 모르는 편지입니다
발신자도 없는 편지입니다
수신자도 없는 편지입니다
한 마리 새가 날아간 뒤에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한 것을 알았습니다
돌멩이 하나 뜰에 있는 것을 본 순간
편지가 도착한 것을 알았습니다
(「돌멩이와 편지」,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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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6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제목의 오규원시집도 있었군요....

자목련 2017-09-28 14:54   좋아요 0 | URL
네, 제목처럼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물에 대한 시를 만날 수 있었어요. 개인적으로 아주 좋았어요^^
 
가수는 입을 다무네
정미경 지음 / 민음사 / 2017년 8월
평점 :
품절


낯익은 장소는 아니었어. 당신이 남긴 소설의 첫 문장을 읽으면서 오래 기억하겠노라고 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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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봄날의 소품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6년 12월
평점 :
절판


 글은 글쓴이를 상상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아니, 그건 글쓴이의 재주일 것이다. 나는 나쓰메 소세키의 책을 여러 권 가지고 있지만 아직 제대로 읽지는 못했다. 나중에, 나중에 읽어야지 하고 미뤄둔 것이다. 거장이라는 두려움, 모두가 좋다고 하는 글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이라도 해두자. 어쨌거나 나는 그렇게 나쓰메 소세키와의 만남을 『긴 봄날의 소품』으로 시작했다. 이 책에는 두 편의 단편과 수필이 담겨 있다. 단편과 수필은 제법 다르다. 그러니까 전혀 다른 사람의 글을 읽는 것 같은 기분이다.


 단편 「이백십일」은 두 친구가 아소산에 오르는 과정을 들려준다. 정말 친한 친구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아소산에 오르는데 그 이야기를 듣노라면 산행은 잊어버리고 만다. 즐거운 수다, 유쾌한 수다에 빠져드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열흘 밤의 꿈」은 제목 그대로 열흘 동안의 꿈에 대한 이야기인데 꿈속이라는 배경 때문인지 정말 꿈속을 거니는 듯하다. 현실에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들, 언제 육지에 닿을지 알 수 없는 배를 타고 있거나, 어떤 여자를 따라가거나, 죽은 남편을 위해 기도를 드리거나. 열 밤의 화자가 모두 동일하다고 할 수도 없다. 어쩌면 그래서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여러 날에 걸쳐 읽은 책이다. 쉽게 읽지 못했다는 말이다. 재미의 유무를 말하기는 어려운 종류, 그러니까 산문이 그러했다. 산문에서는 다양한 일상을 만날 수 있었다. 나쓰메 소세키의 하루를 그려보기도 했고 그가 가족을 대하는 무표정한 얼굴도 상상할 수 있었다. 잘 알려진 작가로 많은 이들의 방문을 받고 혼자 조용히 쉴 시간이 없었겠구나 생각했다. 표제와 같은「긴 봄날의 소품」의 수필에서는 천을 훔쳐 간 도둑을 잡는데 더 많은 시간과 돈이 든다는 이야기, 평소에는 밥만 주고 돌보지 않던 고양이가 죽고 난 후 고양이 제삿날을 챙기는 다소 색다른 이야기, 런던 유학시절 하숙집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건강이 나빠져서 제목처럼 유리문 안에서 생활해야 했던 시절의 이야기인 「유리문 안에서」는 가장 인간다운 모습이 보였다. 아픈 몸에 대한 사색, 늦둥이로 태어나서 다른 집에 입양이 되었다가 다시 돌아왔지만 여전히 부모님을 할머니, 할아버지로 불렀다는 글과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적은 글에서는 그 시절을 어떻게 견뎠을까 안쓰럽기도 했다. 젊은 나이에 폐병으로 죽은 형에 대한 이야기는 형제를 잃은 슬픔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해지고 했다. 여전히 많은 이들의 방문을 거절하지 않고 병세를 물어보는 이들에게 그럭저럭 살아 있다고 말하다 누군가 원래의 병이 지속되는 것이 아니겠냐는 말을 듣고 쓴 글은 강한 울림과 감동을 전한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내가 모르는, 또한 자신들조차 알아채지 못하는, 지속되고 있는 것이 얼마든지 숨어 있는 게 아닐까. 만약 그들의 가슴에 울리는 커다란 소리로 그것이 한꺼번에 파열된다면 그들은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 그들의 기억은 그때 그들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리라. 과거의 자각은 이미 사라져버렸으리라. 지금과 옛날, 그리고 그 이전 사이에 아무런 인과를 인정할 수 없는 그들은 그런 결과에 빠졌을 때 자신을 뭐라고 해석할 생각일까. 결국 우리 각자는 꿈꾸는 사이에 제조한 폭탄을 안고 한 사람도 빠짐없이 죽음이라는 먼 곳으로 담소를 나누며 걸어가는 게 아닐까. 다만 어떤 것을 안고 있는지 남도 모르고 자신도 모르기에 행복한 것이리라.’ (「유리문 안에서」, 286쪽)

 

나쓰메 소세키와의 만남은 무겁고도 경쾌했다. 무겁다는 것은 깊다는 뜻이라 말하고 싶다. 아직 읽어야 할 그의 소설이 많다. 다음의 만남은 어떤 느낌일까. 점점 더 그에게로 다가갈 수 있으니 조금 설렌다는 말로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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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 - 제22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강화길 지음 / 한겨레출판 / 201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괜찮은 사람이 되기를 바랐던 그녀가 다른 사람, 다른 삶으로 향하기를 바란다. 아직 읽기 전이라 내가 말하는 다른 사람과 강화길의 다른 사람이 같은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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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사이 비가 내렸다. 빗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했다. 그저 비가 오는구나, 생각하며 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나니 부산에 폭우로 많은 피해가 있었다는 걸 알았다. 밤이 지나는 사이, 다른 하루가 시작되는 사이,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벌어진 것이다.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집을 떠나 이곳에 온 지 일주일이 지나고 있다. 먼지를 제거하고 주인을 잃은 이불을 빨고 시들어가는 나무에 물을 주었다. 그리고 좋아하는 동생과 문자를 주고받았다. 보내온 사진에는 너무도 마른 그녀가 있었다. 왜 이렇게 말랐냐며 나는 많이 먹고 많이 자라고 했다. 천고마비의 계절 가을이니까, 살이 쪄야 한다고. 동생은 어떻게 지내냐고 물었다.  8월의 어영부영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하루하루가 감사하면서도 하루하루가 어렵고 힘들다고 답했다.
 
 가을이 시작되었고, 등에 조급함이 매달리기 시작한다. 하고 싶은 일이 할 수 있는 일과 같은 확률은 얼마나 될까. 문득 궁금해진다. 오후가 되니 아이들 목소리가 제법 크게 들려온다. 소리를 듣노라면 달리고 싶어진다. 즐거움에 소리를 지르는 아이들, 최선을 다해 노는 아이들. 건강한 웃음소리. 아이들이 이렇게 많이 있었던가. 그동안 올 때마다 문을 닫고 살았던가.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자라는 선인장(화분의 나무들도 다르지 않다)을 보는 일은 어떤 시간을 상상하게 만든다. 아주 미세하게 움직이고 아주 미세하게 자신을 단련시키는 어떤 것.

 

 

 

 

 

 

 황정은의 인터뷰가 궁금해서 『악스트』를, 조해진과 정용준의 단편이 궁금해서 『이해 없이 당분간』을 구매했다. 집으로 돌아가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호퍼의 그림에서 영감을 얻어 쓴 소설들 『빛 혹은 그림자』도 관심이 간다. 그런데 지금 읽고 싶은 책은 그 책이 아니다. 어제 방송에서 타일러가 추천한 작가의 책을 검색했다. 『푸른 밤』이라는 제목이 자꾸 나를 유혹한다. 여름에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이미지다. 가을밤에 여름밤을 불러올 것 같다. 왠지 그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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