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쇼코의 미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7월
평점 :
가끔 생각나는 이들이 있다. 지금은 연락이 닿지 않는 대학 동기, 학창 시절 함께 예배를 드렸던 이들, 친구의 친구로 잠깐 알고 지냈던 이들이다. 그들은 나를 기억하지 않을 것이고 나도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이도 있다. 아득하게 떠오르는 얼굴. 그런 이들의 이름은 기억하려 애쓰다 마주하는 이름이 있다. 우습게도 소설 속 인물이다. 그러니까 실재하지 않는 이름, 그러나 내게는 친구 같았고 동생 같았던 이름. 김이설의 『환영』 속 윤영, 김금희의 단편 「너무 한낮의 연애」속 양희, 가장 최근에 만난 정미경의 단편「못」속 금희, 그리고 최은영의 소설 속 인물인 쇼코나 영지.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을까. 조금은 더 나이를 먹고 삶의 파도를 무던하게 받아들일까. 모두가 여성이다. 좋아하는 소설가가 여성 작가이기도 하고 내가 여자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길게 이야기를 시작하는 건 최은영의 『쇼코의 미소』때문이다.
이 소설집은 여러 번 읽었다. 화려하거나 특이한 문장이 생각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런 건 김금희다. 최은영의 소설은 너무 평이하다 할 수 있다. 그런데 잔상이 남는다. 그것도 길고 짙게 말이다. 표제작 「쇼코의 미소」는 고등학교 때 잠깐 만난 쇼코와 나의 이야기다. 한국에 온 쇼코와 함께 지낸 며칠. 일본과 한국이라는 다른 공간에서 살아가지만 편지로 서로의 일상을 나눈다. 그러다 점점 멀어진다. 모든 관계가 그러하듯이. 사소한 모든 것을 알고 싶었던 순간은 사라진다. 시간을 핑계로 서로를 얼마나 좋아했었는지 잊고 만다. 쇼코와의 우정과 사랑, 그리고 관계의 성장.
어떤 연애는 우정 같고, 어떤 우정은 연애 같다. 어떤 연애는 우정 같고, 어떤 우정은 연애 같다. 쇼코를 생각하면 그애가 나를 더이상 좋아하지 않을까봐 두려웠었다.(「쇼코의 미소」, 24쪽)
그리고 쇼코와 나에게는 모두 할아버지가 있다. 쇼코는 자신의 할아버지를 증오하고 분노의 대상으로 말하지만 사실은 반대였다. 시간이 흘러 일본에 방문한 내가 만난 쇼코는 아픈 상태였고 할아버지가 쇼코를 지키고 있었다. 영화 공부를 하고 감독을 꿈꾸지만 다른 현실을 사는 나는 손녀를 보러 온 할아버지에게 화를 낸다. 아픈 몸으로 병원에 다니러 온 것도 모르고 돌아가시고 나서야 할아버지의 존재를 확인한다. 「쇼코의 미소」를 읽고 생뚱맞게도 나는 피천득의 인연이 생각났다. 세 번의 만남, 피천득은 아사코와 세 번째는 만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 했지만 쇼코와 나에게는 세 번째 만남은 다음 만남을 약속한다. 헤어질 때 다시 만날 약속을 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벅찬 일인가 생각한다. 그래서 역사적 사건이라는 소재와 개인의 삶을 연결한 「씬짜오, 씬짜오」 속 투이와 나의 이별, 먼 타국의 수도원에서 만나고 헤어진「한지와 영지」를 떠올리면 가슴이 아프다. 서로에게 상처가 된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좋았던 순간 마저 꺼내보지 못하는 감정까지.
시간은 지나고 사람들은 떠나고 우리는 다시 혼자가 된다. (「한지와 영지」, 164쪽)
시간이 지나고 하나의 관계가 끝날 때마다 나는 누가 떠나는 쪽이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생각했다. 어떤 경우 나는 떠났고, 어떤 경우 남겨졌지만 정말 소중한 관계가 부서졌을 때는 누가 떠나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알 수 없었다. 양쪽 모두 떠난 경우도 있었고, 양쪽 모두 남겨지는 경우도 있었으며, 떠남과 남겨짐의 경계가 불분명한 경우도 많았다. (「씬짜오, 씬짜오」, 89~90쪽)
한 사람과의 만남으로 인해 삶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생각한다. 그 사람이 사랑하는 연인이나 친구라며 그 파장은 더욱 크다. 떠난 자리는 그가 아닌 다른 누구로도 다시 채워질 수 없으니까. 관계가 끝났다 하더라도 그렇다. 누군가는 그런 만남과 헤어짐의 반복을 겪으면서 삶은 단단해지는 거라고 말하지만 너무 아픈 건 어쩔 수 없다. 최은영은 그런 관계를 아주 세밀하게 그려낸 작가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