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트
이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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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은 자주 악몽 같다. 악몽이라면 잠에서 빠져나오면 그만일 텐데. 그럴 수 없어 더욱 고통스럽다. 이유의 소설집『커트』속 인물은 하나같이 잔혹한 꿈같은 현실을 사는 듯 보인다. 표제작인 「커트」는 단호하면서도 강렬한 의지가 느껴진다. 잔혹학고 섬뜩하다고 하는 게 맞겠다. 미용사인 ‘나’는 과거를 단절하고 싶다. 과거의 자신을 버리고 새로운 곳에서 삶을 시작하고 싶다. 그러나 여전히 불안하고 계속 무언가를 잘라야만 후련한 기분이 든다. 기이하면서도 무서운 장면인데 이상하게 시원한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날카롭게 벼려진 가윗날이 허공을 가로지르며 유연하게 휘면서 다가왔다. 매서운 바람 소리와 함께 가건물이 붕 떠올랐다. 가윗날에서 뿜어지는 빛이 눈앞에서 부서진다. 잘린 머리통 하나가 바닥을 굴렀다. 다름 아닌 내 머리통이었다.

 “엄마 아파?

 아이가 태연스레 물었다.

“목이 잘렸는데 안 아프겠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온갖 잡냄새로 시달리던 머리통이 몸에서 분리되자 막혔던 숨이 트였다.  (「커트」, 221~222쪽)


 안면인식장애라는 병에 걸린 형사가 아내를 구분하지 못하는 「낯선 아내」는 마치 영화를 보는 듯하다. 어제는 분명 아내를 알아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범인과 아내를 혼동한다. 아무리 아내의 특징을 떠올려봐도 속수무책이다. 결국 자신도 알아보지 못할 미래를 앞둔 것이다. 과연 형사인 그만 그럴까? 얼굴만 못 알아보는 게 아니라 우리가 모르면서도 안다고 하며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아내와 나의 대화는 나와 누군가의 대화로 겹쳐질 수 있다.

 

 당신은 나를 몰라.”

 홀리듯 그런 말을 했다.

 “걱정 마, 당신도 나를 모르니까.” (「낯선 아내」, 18쪽)

 

 그런가 하면 가방을 보면 무조건 가방을 열어봐야만 하는 남자의 이야기 「가방의 목적」과 밤마다 집에 침입하거나 주위를 맴돌며 무서운 살기를 보내는 회색 후드를 입은 인물에 대해 묘사하는 「밤은 후드를 입는다」도 흥미롭다. 가방의 노예라는 소설 속 인물의 말처럼 진짜 우리는 점차 노예의 삶으로 전락하는 게 아닌가 싶다. 가방을 대신한 것들은 차고 넘치는 세상이 되었으니까. 가장 기억에 남은 소설은 ‘나’의 복제인간을 주문하는 「빨간 눈」이다. 나와 똑같지만 온전한 나는 될 수 없는 나를 관찰한다. 수많은 나로 존재할 수 있는 나. 언젠가는 그들 가운데 진짜 나를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아내를 기억하지 못하는 형사처럼.

 

 나는 나를 주문했다. 너는 포장 없이 걸어서 내게 왔다. 주문한 상품에 두 다리가 달렸으니 어쩌면 당연한 방식이었다. (「빨간 눈」, 90쪽)

 

 얼마 뒤 너는 쟁반에 받쳐온 세 개의 잔을 테이블에 내려놨다. 커피 위 휘핑크림을 한 숟갈 떠서 아이에게 내미는 너의 해맑은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나는 한동안 무거운 고철덩어리로만 느껴지던 카메라를 들었다. 아이는 네게 내민 크림을 받아먹었다. 너의 몸이 자연스레 아이 쪽으로 움직였다. 주하가 고개를 들어 너를 봤다. 나는 숨을 참고 프레임 속 피사체 덩어리를 끌어당겼다. 아이의 머리 위로 두 입술이 맞닿았다. (「빨간 눈」, 107쪽)

 

 꿈꾸는 대로 현실에서 이뤄지는 세상이 온다면 어떨까 상상하게 만드는 「꿈꾸지 않겠습니다」와 자신이 원하는 삶, 그러니까 꿈꾸는 삶을 찾아 야츠로 떠난 남자의 이야기 「지구에서 가장 추운 도시」는 꿈을 꾸는 달콤한 행복이 아닌 꿈이 현실이 됐을 때 벌어지는 잔혹한 현실을 실감 나게 그렸다. 악몽에서 벗어나려 애쓰는 일이 현실로 나타난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악몽이나 흉몽 같은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 이들에게 이유의 소설은 잔인하지만 강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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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03-23 19: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은 사진으로 볼 때는 잘 몰랐는데, 서재에 와서 보니, 프로필 사진이 더 예뻐요.
햇볕 환한 봄 느낌도 들고요. 그리고 하얀 레이스 보이는 신발도요.
자목련님, 즐거운 금요일 보내세요.^^

자목련 2018-03-26 14:55   좋아요 1 | URL
예쁘다 해주시니 진짜 예뻐 보입니다, ㅎ 좋아하는 스커트와 신발이에요. 미세먼지가 사라지고 진짜 봄이 오기를 기다려요. 건강 잘 챙기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