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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평점 :
진정한 책이라면 어김없이 자신을 넘어서는 다른 무언가를 가리킬 테니까. (11쪽)
한 번 책에 빠지면 완전히 다른 세계에, 책 속에 있기 때문이다…… (16쪽)
한 사람의 생을 하나의 단어로 집약해서 말할 수 있다면 그는 성공한 삶을 산 것일까. 아니면 후회 없는 생을 살았다고 자신할 수 있는 것일까. 보후밀 흐라발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이 이런 생각을 불러왔다. 삼십오 년째 폐지 더미에서 일하는 남자 한탸, 그는 습기로 축축한 지하 공간 때로 쥐가 출몰하는 더러운 공간에서 책과 폐지를 압축하며 살고 있다. 책 더미에서 귀한 책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며 말이다. 그의 삶은 오직 책과 폐지, 그리고 맥주가 전부다. 외부와 단절한 채 자신의 내부로 파고드는 삶처럼 보였다. 그에게는 충분한 삶이었다. 은퇴 후 압축기를 장만해 외삼촌의 정원에 둘 계획까지 세웠으니까.
내가 혼자인 건 오로지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 살기 위해서다. 어찌 보면 나는 영원과 무한을 추구하는 돈키호테다. 영원과 무안도 나 같은 사람들은 당해낼 재간이 없을 테지. (18~19쪽)
책으로 둘러싸인 삶이었지만 그가 마주하는 책은 쇠락의 유품이었다. 더 이상의 존재 가치를 잃어버린 삶을 말해주는 것들이었다. 그 안에서 한탸는 작업을 하면서도 책을 읽는다. 소중하게 건져올린 장서들을 집으로 가져와 읽고 또 읽는다. 책과 폐지를 압축하는 반복되는 일상이 전부처럼 보였던 소설에는 한탸의 외로움과 고독이 가득했다. 그를 찾아오는 이들의 삶도 그러했다. 폐지를 가득 담아오는 집시 여인들과 폐지 더미에서 자신의 책을 찾기를 바라는 철학교수들은 그들의 방식대로 한탸와 소통했다. 소장은 그런 한탸를 질책하며 새로운 압축기 소식을 전한다. 지금껏 한탸가 해왔던 작업과는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양을 압축하고 정리하는 기계였다.
하나의 시대가 끝나고 다른 시대가 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한탸는 절망한다. 자신의 손으로 버튼을 누르며 반복했던 일들이 컨베이어가 대신하고 젊은 노동자들은 우유와 코카골라를 마시며 휴식을 취한다. 심지어 그들은 휴가 계획까지 세운다. 자신의 존재 가치가 사라지는 걸 통감한다.
저 거대한 압축기가 다른 모든 압축기에 치명타를 가할 것이고, 내가 몸담고 있는 직업에도 상이한 유형의 사람들과 직업 방식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었다. 실수로 그곳에 버려진 책들과 사소한 기쁨도 끝이었다!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 나처럼 늙은 압축공들이 누렸던 좋은 시절도 끝이 나고 만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게 되었으니까. 매 꾸러미에서 책을 한 권씩 골라 보너스로 준다 해도 나는 거기서 끝장이었고, 내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책 속에서 근본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찾겠다는 열망으로 우리가 종이 더미에서 구해낸 장서들도 모두 끝장이었다. (91쪽)
변화를 받아들이고 과거를 딛고 일어나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한탸는 용기를 낼 수가 없다. 상실을 감당할 수 없다. 그러나 한탸가 사랑했던 만차는 달랐다. 어린 시절 그녀에게 닥친 두 번의 시련을 이겨내고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었다. 한탸의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돌아가신 어머니, 홀로 고독사로 발견된 외삼촌, 한때 사랑했던 집시 여인, 그리고 책과 폐지도 곧 사라질 것이다.
단순히 책을 좋아하는 한 남자의 인생일 거란 예상을 벗어나 인간의 고독에 대해 집중하게 만든다. 30여 년 전에 한탸가 느꼈을 공허와 쓸쓸한 인생은 머지않아 마주하게 될 우리네 그것과 같아 보였다. 모든 것은 소멸한다. 하지만 그것을 사랑하고 기억하려는 아름다운 노력은 영원하다. 한탸는 스스로 그것을 증명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