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담한 빛
백수린 지음 / 창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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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기억은 소멸한다. 어떤 기억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레 지워지기도 하고 어떤 기억은 일부러 기억에서 지운다. 그렇다면 상처로 남은 기억을 간직하는 이는 얼마나 될까. 그러니까 슬픔을 기억하기 위해 슬픔 속에서 사는 이 말이다. 부드러운 햇살이 가득한 방 안을 상상하게 만드는 표지와 달리 돌아갈 수 없는 어떤 날들의 조각으로 이어진 백수린의 『참담한 빛』을 읽고 나는 남겨진 자의 슬픔을 생각했다. 낯선 공간, 낯선 누군가에게서 불현듯 튀어 오르는 어느 시절의 아련한 기억. 그 기억에 의지해 살고 있는 누군가에 대해서 말이다.

 

 기억 밖에 살다가 기억 안으로 소환되는 사람들, 백수린의 소설 속 인물은 그렇게 서로 만난다. 기억에 존재하지 않는 인물도 만난다. 일로 이어지는 만남이거나 누군가의 간곡한 부탁으로 어쩔 수 없이 만난다. 우연처럼, 운명처럼 말이다. 삶은 소설이라고 했던가. 그 만남의 배경을 보면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사연이 숨겨져 있다. 「시차」속 소심하고 겁이 많은 이모에게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아들이,「길 위의 친구들」에서 오랜만에 만난 여행을 떠난 대학시절 친구에겐 내가 모르는 시절이, 「참담한 빛」속 인터뷰를 위해 만난 다큐멘터리 감독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상처가 있었다.

 

  만남은 짧고 단발적이며 나중을 기약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 시간은 서로에게 서로를 보여주는 시간이 된다. 모든 걸 다 말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것처럼. 그러나 차마 하지 못하는 말을 남겨둔다. 처음 만난 사촌 오빠를 보면서 이모의 비밀을 생각하고,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가며 자신의 존재를 기억하면서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저 서로를 향한 마음을 간직하고 살아내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꽃이 피고 진다. 그리고 시간이 더 많이 흐르면 마른 가지에서 또다시 움이 튼다.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은 단지 그런 것뿐인지도 몰랐다. 시간의 흐름이 허락하는 선한 치유.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끝내 지워지지 않는 것들도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시간을 살아낼 것이다.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시차」, 53쪽)

 

 어떤 만남은 그 자체가 상처가 되기도 하고 어떤 만남은 앞으로 살아갈 날의 위로가 되기도 한다. 조만간 시력을 잃게 되는 아버지의 첫사랑의 딸을 만나는 「북서쪽 항구」에서 나와 레나의 만남이나 외할아버지의 재혼으로 외할머니, 삼촌, 사촌이 새로 생긴 「중국인 할머니」에서 새할머니와 나의 만남은 상처이면서도 위로였다. 내부인이 아닌 외부인으로 살면서 견뎠을 어떤 시간의 고통과 고독을 느낄 수 있으므로. 그러다 미처 발견하지 못한 사랑하는 이들의 상처를 확인한다. 「참담한 빛」에서 영화잡지 기자인 정호가 다큐멘터리 감독 아델과의 인터뷰 과정에서 아델의 터널공포증을 앓게 된 계기를 듣는다. 아델이 로베르를 잃고 나서야 그의 지난 삶을 제대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정호는 늦게나마 아이를 유산한 아내의 슬픔에 조금 가까이 다가서는 것이다.

 

 나는 호숫가에서 서서 그 모든 풍경을 바라보다가 내가 미소를 짓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황홀한 정도로 아름답다, 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말예요. 지난해까지도 매년 독립기념일이면 이곳에서 불꽃이 터지는 장관을 함께 구경하던 로베르를, 두번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는데도 말이죠. 이렇게 살아지겠구나. 시간과 함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그것이 치유일까요. 초이, 나는 그제야 비로소 로베르가 왜 그토록 치유되는 걸 두려워했는지 깨달았어요. 그리고 로베르를 보낸 뒤 처음으로 울었어요. 아이처럼. 호숫가의 한가운데, 희미한 빛의 한복판에서요.” (「참담한 빛」, 177쪽)

 

 자신의 삶에 빛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 이들에게 삶은 온통 그림자일 뿐이다. 그러나 그림자는 빛이 있기에 가능하다. 고통과 상처가 지난 자리를 채우는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빛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선명하게 삶을 지배하는 고통에서 완벽하게 벗어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들을 이해하는 완전한 삶은 없으니까. 다만 살아내는 것이겠지. 누군가는 고통의 기억이 사라지기를, 누군가는 슬픔과 함께 살아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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