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군함도 세트 - 전2권
한수산 지음 / 창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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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전쟁을 알지 못한다. 나는 나라가 없는 삶을 알지 못한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종종 일본 단어를 쓰셨지만 할머니의 삶의 어느 한 조각에 서린 슬픔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않았다. 전쟁을 겪은 할머니와 부모님의 생에 그것이 얼마나 가혹한 일상이었는지 모른다. 어느 역사에도 전쟁이 존재한다고 한다. 이미 많은 소설을 통해 전쟁의 참상과 그 안의 사랑을 접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타인의 삶이었다. 내 나라 내 역사 속 전쟁을 제대로 들여다보기란 쉽지 않았다. 사실이라는 기록, 누군가의 삶이었다는 것을 글로도 체득하기가 두려웠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의 군수기업 미쯔비시가 운영하던 하시마 탄광에서 벌어진 사실을 바탕으로 쓰인 소설이라는 걸 알면서도 일본의 반인류적인 행태에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어느 시절이든 그저 평범한 일상을 소중하게 지키고 싶은 이들이 있다. 그것이 그들에겐 최상의 삶이었다. 아이를 가진 소식을 남편 지상에게 빨리 전하고 싶은 소형이 그러했다. 일제강점기를 살고 있었고 시댁이 친일파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현재의 삶이 충만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징용을 떠났고 누군가는 여전히 소식을 알 수 없지만 다정한 남편 지상이 곁에 있었기에.

 

 “아름답게 살고 싶어. 난 그렇게 살 거야.”

 “그게 어떤 건데요?”

 “새처럼 나무처럼 풀처럼 사는 거. 저 강물처럼 사는 거. 나 때문에 남들이 고통스러워하지 않는 삶. 새나 나무는 저 자신을 위해 남을 괴롭히지 않잖아.” (『군함도 1』 73쪽)

 

 우리네 삶에는 반드시 감당해야 할 고통이 주어지는 것처럼 지상은 장남 대신 징용을 나가게 되었다. 친일파라는 거대한 방패도 소용없었다. 소설은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일본으로 향하는 이들의 이야기, 섬 모양이 군함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군함도’에서 일본의 가혹한 노동착취 현장을 생생히 들려준다. 태평양 전쟁이 거의 끝나갈 무렵, 여전히 일본은 조선인을 학대했다. 지하 깊은 갱에서 탄을 깨는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죽었다. 그들의 혼을 불러오는 장면은 뭐라 설명하기 어렵다. 왜 그들이 그곳에서 주검이 되어야 하는지 따지고 싶을 뿐이다. 그러니 이미 군함도에서 인간 이하의 생활을 하던 조선인은 탈출을 시도했지만 그곳을 떠날 수 있는 방법은 죽음뿐이었다. 그러나 지상은 그곳을 떠나야 했다. 서형이 낳은 아이를 만나기 위해, 사람답게 살기 위해 탈출을 선택해야만 했다. 목숨을 담보로 군함도를 떠난 지상과 우석, 아버지의 소식을 찾아 일본으로 온 길남, 조선에서 남편을 기다리는 서형의 이야기가 교차로 펼쳐진다. 소설을 읽으면서 내내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소설 속 조선인들이 하나, 둘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발, 지상과 우석이 살아남아 고향 춘천으로 돌아와 아내 서형과 만나기를 바라고 바랐다.

 

 ‘이 모래알 같은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으로는 항거할 수 없이 크고 엄청난 어떤 집단이나 제도가 거대한 악이 되어 우리를 내리누르며 지배하고 있는 거다. 집단의 탐욕과 편견이 거대하게 뒤엉키고 제도와 제도 간의 경멸과 증오와 부패가 거기 뿌리 깊게 자리 잡아 그들만의 거대한 악을 구축하고 결속시킨다. 우리들 하나하나의 저편에 그 거대한 악이 있는 거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죄악, 국가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거대한 죄악, 그것은 자멸하는 것밖에 제어할 길이 없는 불가항력의 악일 것이다.’ (『군함도 2』 284쪽)

 

 하시마 섬을 떠났지만 지상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미쯔비시중공업 나가사키 조선소에서 통역을 하며 삶을 이어간다. 그곳에서 지상은 하시마에서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된다. 미국이 전쟁을 끝내려 한다는 것. 그러니까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패한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일본은 조선인을 도구로 삼을 뿐이다.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짐과 동시에 무참하게 사멸하는 과정은 너무나 선명하다. 살아남았지만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구호와 치료 모든 것에서 배제되고 일본인의 폭력의 대상이 된다. 한수산 작가가 이토록 세세하게 묘사한 이유는 무엇일까. 히로시마 원폭 피해를 입은 조선인에 대해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시작도 거기에 있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많은 이들이 징용과 위안부로 끌려가 치욕과 고통의 삶을 살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원폭 피해를 입었다는 걸 나는 알지 못했기에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이다.

 

 ‘산다는 것, 사랑하는 것들과 곁에 있는 것, 정겨운 것들과 기쁨도 단란함도 함께하는 것, 햇살이 비껴드는 방과 맨드라미가 자라는 뜨락이 있고 강아지 한 마리가 있는 것, 산다는 건 그런 게 아니었던다. 그것이 사는 것이었다. 나는 아직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고향이 남아 있고 남아 있는 가족이 있다. 산다는 것의 의미도, 믿음도, 가치도 다 잃어버렸지만 그래도 남아 있는 그 마지막 그루터기, 그 사랑. 그것이 남아 있기에 삶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제 나는 그 소중함을 안다. 결국 사람이라는 것을, 그 사이의 사랑이라는 것을. 사람과 사랑이다. 이제 안다. 마지막까지 기대고 부둥켜안아야 하는 것은 사람이며, 사람 사이의 사랑이다.’ (『군함도 2』 416쪽) 

 

 역사를 제대로 안다는 건 무엇일까. 그 역사의 끝에 내가 존재한다는 걸 우리는 쉽게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라가 없다는 걸 상상해 본 적 없는 나에게, 할머니와 부모님 세대가 살아온 어느 시절과 맞닿은 『군함도』는 아픔이면서도 곡진한 소설이다. 소중한 사람과 사랑하며 산다는 것, 그 평범한 일상을 누릴 자격은 누구에게나 있다는 걸 아로새기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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