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여인
장 필리프 투생 지음, 박명숙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1월
평점 :
품절


 하나의 소설을 읽는 일은 한 사람에게 천천히 다가가는 것과 닮았다. 첫인상에 끌렸지만 내내 잘못된 만남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처럼 강렬했던 첫 문장은 끝내 아쉬움으로 남기도 한다. 알고 있다고 믿었으나 알면 알수록 여전히 낯설고 모르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는 사람이 있듯 읽고 있어도 잘 모르겠는 그런 소설도 있다. 어쩌면 계속 만나고 대화를 나누고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야만 그 사람을 깊게 알고 사랑할 수 있듯 어떤 소설은 쉽게 곁을 내주지 않는다. 이런 불친절한 책 같으니라고.

 

 장 필리프 투생의 『벌거벗은 여인』속 마리가 그러했다. 속을 알 수 없는 여자, 당당하고 대담한 듯 보이지만 여리고 부드러운 감정의 소유자. 그 여자, 마리에 대해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마리를 사랑하는 소설 속 ‘나’ 역시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그 묘한 분위기를 말이다.  사실 마리의 일생을 다 알려면 장 필리프 투생의 다른 소설을 먼저 읽어야 한다. 작가는 마리의 일생을 4권의 연작소설로 썼고 『마리의 진실』에서는 봄과 여름을, 『벌거벗은 여인』 은 가을과 겨울을 그렸다. 그러니까 나는 마리의 가을과 겨울만 먼저 만난 셈이다. 소설에서 ‘나’는 마리와 연인이다. 어떻게 만났으며 둘 사이의 연애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그저 현재는 마리와 헤어졌다는 것뿐이다.

 

 마리는 도쿄에서 독특한 패션쇼를 열였다. 모델이 벌거벗은 채 몸에 꿀을 바르고 무대에 오르는 것, 그것은 꿀 드레스였다. 기이하면서도 이상한 무대. 그런 마리를 ‘나’는 몰래 훔쳐본다. 마리의 의도는 무엇일까. 파리로 돌아온 후 마리와 ‘나’는 여전히 이별한 상태. 그러다 마리는 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면 전화를 했다. 마리는 해야 할 이야기는 뒤로 미루고 엘바 섬의 그녀 아버지의 저택을 관리하던 마우리치오가 죽었다고 그의 장례식에 함께 가자고 말한다. 그곳은 마리와 사랑을 나눈 공간이며 마리에게 아주 소중한 추억의 공간이다. 가족 같았던 이의 죽음을 애도하러 도착한 엘바 섬에서 그들을 맞은 건 연기였다. 초콜릿 공장에 난 불, 연기엔 초콜릿 냄새가 가득했다.

 

 ‘나’는 그저 마리의 뜻대로 마리가 이끄는 대로 따른다. 아버지의 저택에 도착했지만 스산한 분위기만 감싸고 누군가 허락 없이 공간을 사용한 흔적에 마리는 그곳을 떠나 호텔로 향한다. 아버지를 기억할 수 있는 저택, 그 공간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던 마우리치오의 죽음은 마리에게 치유할 수 없는 상실감을 안겨주었는지도 모른다. 엉망이 된 마음으로 장례식에 참여하기 위해 길을 나서지만 정확한 시간과 위치를 알지 못하는 마리와 ‘나’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창백하고 불안한 표정의 마리는 불쑥 임신 사실을 말한다. 해야 할 이야기였다. 인생은 아이러니하게 죽음과 삶이 동행한다. 마우리치오의 죽음과 마리의 임신 소식.

 

 마리가 오늘 오후 마우리치오의 무덤을 발견하지 못하고, 우리는 장례식 때문에 특별히 파리에서 왔는데도 그녀가 묘지를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은, 그녀가 올바른 묘지를 찾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녀가 그것을 찾기 원하지 않았던 것은, 그녀가 엘바 섬에서 머무르는 동안 내게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이었기 때문이 아닐까.’(144쪽)

 

 마리와  ‘나’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그들은 헤어진 연인이 아닌 걸까. 엘바 섬에서 사랑을 나누고 이별한 후 자신에게 벌어진 일들을 가만히 들려주는 마리. 호텔방의 난방설비를 수리해야 했기에 그들은 호텔을 나오고 도착한 곳은 저택이었다. 그들이 머무를 곳은 오직 그곳밖에 없는 것처럼.

 

 ‘나는 현재와 과거의 시간에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다. 마리가 새벽에 내 방으로 나를 찾아왔던 지난 8월말과, 못질한 덧문으로 창문이 막힌 이 밀폐된 방의 완전한 어둠 속에서 마리의 품속에서 흔들리는 지금을 동시에 살고 있었다. 과거와 현재에 속한 장소와 인물들과 우리의 감정은 모두 똑같았다. 오직 계절만이 달라져 있었다.’ (161쪽)

 

 나는 마리에 대해 여전히 잘 모르겠다. 그녀가 견뎠을 상실과 슬픔을 알지 못한다. 마리와‘나’의 사랑도 그렇다. 그들을 둘러싼 계절은 흐를 것이고 삶이 계속될 거라는 분명만 사실을 기억할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