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운 배 - 제21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이혁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1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일을 한다. 각자 주어진 시간에 주어진 업무를 하고 월급을 받거나 일당을 받는다. 그것으로 누군가는 풍족하게 살고 누군가는 겨우 살아간다. 일하는 것만으로도 축복받은 인생이라고 말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니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열심히 일이라 하라고 말한다. 힘들고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젊으니까 괜찮다고, 훈계 비슷한 조언을 내뱉는 이들도 있다. 모두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생각이 옳다고 확신하는 이들이다. 그들은 다른 말로 기성세대, 선배로 부른다. 처음 입사한 회사에서 어떤 상사를 만나느냐에 따라 직장생활은 그 판이 달라진다. 업무를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에 대한 가치를 배우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일을 해주고 월급을 받는다는 생각만 하는 건 아니니까. 일을 할수록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과 회사에 대한 애정도 커지기 마련이니까. 때문에 일에 대한 가치가 흔들리면 매일 고민한다. 이 일을 때려치워야 하나, 참고 다녀야 하나. 일은 생계로 이어지기에 현재의 일이 어렵고 힘들다고 쉽게 다른 일로 바꿀 수 없기에.

 

 문 기사의 고민도 그렇게 시작되었을 것이다. 배가 쓰러지니 어서 회사로 들어오라는 팀장의 전화를 받았을 때는 짐작할 수 없었다. 진수식을 마친 2002호가 누워버렸다는 게 무슨 말인지도 몰랐다. 당연히 회사에서 누운 배를 세우든지 정리하든지 잘 해결할 거라 믿었으니까. 그러나 회사의 입장은 달랐다. 모든 것이 이익으로 귀결되었다. 원칙과 기준은 무용지물이었고 아무도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았다. 보험 업무를 팀장이 맞지 않았다면 회사의 지시대로 움직이며 회사와 일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소모하며 살았을 것이다.

 

 ‘사실은 사실로 판가름 나지 않았다. 사실을 판가름하는 것은 힘이었다.’ (65쪽)

 

 수직관계로 이어지는 힘의 위력을 누운 배를 통해 절감했다. 줄을 잘 서야 한다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회장의 측근은 책임이 아닌 권리만 주어졌고 진짜 일을 하는 이들에게는 싫으면 나가라는 식으로 대했다. 불합리했지만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전혀 상관없는 업무를 배당하고도 알려주는 이가 없었고 실적으로 내기를 바랐다. 사장이 바뀌고 기사에서 대리로 승진을 했지만 회사에 대한 애정은 2년째 누워 있는 배처럼 멈춰 있었다. 중국이라는 배경만 다를 뿐 한국 사회의 전형적인 모습이 곳곳에 있었다. 너 아니어도 일할 사람은 많고 협력할 업체도 많다며 으름장을 놓고 사람들을 무시했다. 회사란 등대의 불빛은 꺼지고 있었고 그것을 알아차린 이들은 그곳을 떠났다.

 

 ‘앞서간 사람들은 각자 이정표였다. 그만큼 갔다는 것일 뿐 그곳이 끝이라는 뜻도, 그 길로만 갈 수 있다는 뜻도 아니었다. 꿈이나 이상은 인생이 주는 것, 젊음이 주는 것이다. 가능성이 사그라지고 살아갈 날보다 더 많은 과거들이 자신의 뒤로 퇴적하면 꿈은 가벼워지고 옅어지며 이윽고 공기처럼 보이지 않게 된다.’ (298쪽)

 

 누구나 그렇게 사는 거라고, 그냥 이렇게 요령을 익히고 월급을 받고 때가 되면 승진하는 거라고 말했지만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의 선택은 오직 자신에게만 있다. 젊음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소모만 강요하는 회사의 미래는 어두울 뿐이다. 직장인이라면 한 번쯤 고민했을 문제라는 점에서 충분한 조사와 경험을 바탕으로 쓴 이혁진의 『누운 배』는 많은 공감을 불러온다. 생생하고 세밀하게 그려낸 소설을 읽다 보면 2002호가 누워 있는 중국의 바닷가의 현장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단순하게 직장생활의 애환이나 한국을 떠난 해외로 눈을 돌린 청년실업의 문제를 거론했다고 단정 지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누운 배’자체가 우리의 현재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배가 처음 누웠을 때 올바른 판단으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며 어영부영 시간을 끄는 회사의 모습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정부나 기관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배가 누울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기초를 쌓고 기본에 충실하지도 않았으면서 말이다. 

 

 ‘보이는 대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라면, 인생은 단지 요행과 허무일 따름이다. 사람들은 보이는 대로만 봤기 때문에 저 배를 썩도록 내버려뒀고 썩은 다음에야 일으켰으며 일으킨 다음에야 썩은 줄 알았다. 내 인생을 보이는 대로 볼 수는 없다. 내가 알고 있는 이치와 진실을 통해 똑똑히 들여다봐야 한다. 선택하고 결정해야 한다. 아직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을 때 그래야 한다. 나는 이미 누웠는지도 모르지만, 너무 오래 누운 것은 아닐 것이다.’ (328~329쪽)

 

 우리네 인생도 그렇다. 주어진 시간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고 기본을 건너뛰면 무너지고 누울 수 있다. 언제나 젊음을 유지할 수 없다. 누구나 늙고 누구나 자신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때가 온다. 소설 속 문 대리는 서른 초반이다. 젊은 나이로 가능성의 존재다. 소모한 시간 속에 누워있지 않고 가치에 대하여 고민하고 나가는 젊음, 부럽다. 무엇이 자신의 가치를 빛내줄 것인지 아는 젊음은 아름답다. 설령 그 젊음이 조금 늦었다 할지라도. 인생은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은 것이니 지금 일어나 한발 한발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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