힌트는 도련님
백가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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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것은 변한다. 시간이 흐르면 얼굴은 변한다. 성격이 변하기도 한다. 외부의 변화는 쉽게 인식할 수 있지만 내부의 변화는 감지하기 어렵다. 변화는 좋을 것일까, 나쁜 것일까. 어떤 변화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좋은 쪽으로 받아들인다. 오랜만에 백가흠의 단편집과 읽으면서 백가흠이 변화와 만났구나 생각했다. 겨우 한 권의 단편과 장편소설을 읽었을 뿐이고 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나는 그렇게 판단하기로 했다. 시니컬한 분위기는 같았지만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호쾌한 소설이라는 건 아니다.

 

 뭔가 기묘한 사건이 발생했다는 걸 암시하는 「그리고 소문은 단련된다」의 소설은 소문에 대한 이야기다. 작은 읍에서 두 명의 여인이 사라진다. 한 명은 황 약사의 며느리 장 약사로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소문이 난다. 다른 하나는 농장에서 일하는 탈북여성 림혜숙과 그 딸이다. 농장의 김 씨는 림혜숙을 애타게 찾으려 하지만 약국집은 남들에게 알려지는 걸 원하지 않는다. 소설의 제목처럼 단련된 소문은 기괴한 소문으로 확장되고 이를 대하는 김 씨와 황 약사의 태도가 흥미롭다. 예측 가능한 결말을 살짝 뒤틀린 반전이라고 해야 할까. 몰입할 수 있는 소재와 전개가 좋다. 백가흠답다.

 

 표제작 「힌트는 도련님」과「그래서」와 「P」는 작가의 자전적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힌트는 도련님」는 소설 쓰기의 고단함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화자인 ‘나’와 ‘나’가 쓰는 소설을 동시에 만날 수 있다. 마감을 앞두고 소설을 쓰지 못하는 작가의 괴로움과 동시에 작가로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반면 「그래서」는 작가가 아닌 은퇴한 비평가의 이야기다. 서재에서 책을 읽는 게 하루 일과인 노인은 세상과 단절된 삶을 이어간다. 가족은 물론 이웃과의 교류도 전혀 없다. 그런 그에게 과거 자신의 제자였던 소설가 백이 등장한다. 글씨가 사라지는 절망적인 글쓰기로 고통받는 소설가 백은 백가흠의 분신이 아닐까 싶다. 자전소설을 쓰겠다고 펜션을 운영하는 희경에게 전화는 거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P」​는 10년이라는 시간의 잃어버린 기억을 복원하기를 원하는 P와 희경의 대화로 소설에 대한 고민을 만난다. 세 편의 소설을 통해 백가흠의 소설에 대한 애정 혹은 고단함을 상상해본다.

 

 약자와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시선도 여전하다. 150센티미터의 작은 키로 회사나 사회에서 있는 듯 없는 존재인 이혼한 정수기 영업사원의 분투기 「그때 낙타가 들어왔다」와 고엽제 피해자로 약에 취해 비참하게 삶을 견디다 결국 죽음을 맞는 원덕 씨의 이야기「통(通)」과 베트남에서 농촌으로 시집온 어린 신부 ‘쯔이’와 소통하지 못하는 남편과 시댁 식구의 갈등을 그린 「쁘이거나 쯔이거나」는 약자와 변두리의 삶을 잘 보여준다. 특히 아내가 아닌 성적 대상으로 쯔이를 대하는 시댁의 폭력은 잔혹 그 이상이다.

 

 「그런, 근원」은 어린 시절 집을 나가 사라진 아버지와 동생과 자신(근원)을 버리고 재혼한 어머니가 죽어가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는 여정을 다룬다. 든든한 울타리가 없이 성장한 근원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목욕탕에서 때밀이를 하던 중 만난 사장에 눈에 들어 매니저로 일한다. 화려한 세상에 입문했으니 근원은 과거와 다른 삶을 살고 있다고 여기지만 그를 그렇게 대우하는 이는 없다. 어머니를 만나면 자신의 삶을 인정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지만 그를 기다린 건 신원을 알 수 없는 시체뿐이다.

 

 어쩌면 이 소설집을 통해 전하고 싶었던 근원이 찾고 싶었던 자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은 아니었을까. 소설가에게 근원은 소설 쓰기의 즐거움과 동시에 소설로 자신을 증명하는 일이다. 사느라 자신의 근원을 잊고 사는 독자에게는 부재한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든다. 가족과 친구, 그리고 이웃을 잃어버린 우리에게 가장 기본적인 삶과 사회의 근원을 놓치지 말라고 조언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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