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강 소설
한강 지음, 차미혜 사진 / 난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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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살아온 만큼의 시간 끝에 아슬아슬하게 한 발을 디디고, 의지가 개입할 겨를 없이, 서슴없이 남은 한 발을 허공으로 내딛는다. 특별히 우리가 용감해서가 아니라 그것밖에 방법이 없기 때문에.’ (11쪽)

 

 단정한 흰 양말, 유난히 빛났던 교복 칼라, 하얀 고무신, 마당에 핀 흰 수국, 짧게 잘려나간 손톱, 작은 리본 머리핀, 그리고 병원 침대 시트. 흰 것을 생각하자 떠오른 것들이다. 중요한 의미를 지녔거나 특별한 것들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적고 보니 소중한 것들이다. 쓰기 전에는 여기저기 흩어져 부서졌던 말들이 자신의 이름을 듣고 모여 나를 바라보는 듯하다.

 

 시와 소설의 경계를 오가는 듯한 목소리. 그저 어떤 읊조림으로 다가오는 글이다. 아무에게도 들려주고 싶지 않은 목소리, 그러나 누군가 한 사람쯤은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바라는 기도처럼. 한 번도 화를 내 적 없고 한 번도 크게 울지 못한 소리 없는 통곡처럼. 그래서 어느 글에서는 슬펐고 어느 글에서는 짧은 손편지를 받은 것처럼 답장을 써야 할 것만 같아서 머뭇거렸다. 괜찮다고, 나도 당신과 같다고, 잘 지내야 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 목소리의 주인을 한강의 글을 통해 만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이상하게 그랬다. 여의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삶과 죽음 안에 거하는 모든 흰 것들을 말하고 싶었을 마음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궁금해졌다. 소설 속 그녀와 어머니, 그리고 나는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면서도 내가 알지 못하는 낯선 곳에서 존재할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지켜보고 평생을 지우고 못하고 기억하며 살아가는 삶. 사람들은 하얀 비누 거품처럼 후 불어버리라고 말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시간이라는 약도 소용없는 불치병을 앓는 이들과 그 곁에서 눈처럼 녹아버리는 존재들에 대한 애도로 삶의 일부를 내놓은 삶은 우리는 알고 있다.

 

 가만히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을 응시한다. 파도, 달, 모래, 눈, 서리, 안개, 상복, 언니. 그녀에게는 온통 흰 것으로 남은 것들이 내게는 도무지 하얀 빛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무섭고 검푸른 파도를 본 기억, 나무를 잡아먹을 듯 쏟아내렸던 눈의 공포, 자동차 불빛에 의지해 벗어나야만 했던 안개, 너무 커서 자꾸만 밟히던 상복, 하얀 원피스의 슬픔을 남긴 젊은 큰언니.

 

 상처를 감싸고 고통을 지워줄 것 같은 깨끗하게 새하얀 흰 것. 무엇으로도 그것을 뛰어넘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지닌 흰 것. 그러나 흰 것들과 함께 나가야 할 삶은 흰 것을 뛰어넘어야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혼과의 마지막 이별의식으로 땀과 눈물로 얼룩진 수의를 모두 벗어 태워야만 하고 태어남을 증명했던 기쁨의 흰 종이가 영원한 부재를 증명하는 비통의 종이로 바뀌므로.

 

 그러니 한강이 보여주는 흰 것은 온전히 희다고 말할 수 없는 색을 지닌 것이리라. 흰 것들을 통과해야만 볼 수 있는 어떤 빛들에 대해 생각한다. 얼음, 눈, 눈보라, 서리, 성에처럼 차가운 기운이 아니라 뜨거운 온기를 지닌 흰 것들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여전히 흰 것에서 슬픔과 죽음을 본다. 그리고 버티며 살아 내는 삶을 본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그리움의 공간을 채워야 할 숙제를 내주고 떠난 누군가가 있는 거기, 그곳에 존재하는 모든 흰 것들은 아름다운 소리를 내며 빛나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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