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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권수연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3월
평점 :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에서 기억은 아주 중요한 주제다. 그의 소설에서 기억은 모든 감정의 집합체로 나타난다. 한 사람에 대한 기억을 찾는 여정,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나를 아는 누군가를 만나기를 바라는 마음, 조각난 기억을 맞춰 삶을 이어가고 싶은 간절함이 가득하다. 잊었다고 믿었던 기억이 불쑥 떠오르는 순간의 감정을 색으로 표현하자면 무슨 빛일까? 인디언 핑크처럼 아련한 색일까. 그게 어떤 색이든 선명한 색은 아닐 것이다.
여전히 기억을 탐미하는 파트릭 모디아노의 『네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는 기억이란 그 자체가 존재의 증명이라는 걸 말하는 듯하다. 노년에 접어든 소설가 장 다라간에게 젊은 시절의 기억은 별처럼 반짝이는 아름다운 빛과 동시에 우울하고 암울한 기억이기도 하다. 그것은 유년의 어느 시절에서 기인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는 그것을 점차 잊고 지냈다. 모두가 그러하듯이.
잃어버린 수첩이 장 다라간에게 돌아오듯 그 시절의 기억이 돌아온다. 수첩을 돌려받는 자리에게 장 다라간은 한 남자의 이름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 그의 소설 속에도 등장한 인물. 과연 그는 누구일까. 장 다라간과 마찬가지로 독자는 그가 궁금하다.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은 기억을 더듬는 여정으로 이어진다. 잃어버린 수첩, 낯선 남자, 기억에서 지워진 이름, 어렴풋이 떠오르는 하나의 사건.
‘예전에는 새로운 만남이 급작스럽고 거침없기 일쑤여서 사람과 사람이 어린 시절 타던 유원지 범퍼카처럼 길에서 서로 맞부딪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모든 게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잃어버린 수첩, 전화 속 목소리, 카페에서의 만남…… 그래, 모든 게 꿈결처럼 가벼웠다.’ (64~65쪽)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설정은 이미 익숙하다. 기억 저편에 자신을 다정하게 돌보는 여자와 그 곁에 한 남자, 낯선 거리, 그리고 선명하게 떠오른 하나의 장면. 그랬다. 꿈처럼 흐릿했던 기억은 점차 선명하게 그 존재를 드러낸다. 파트릭 모디아노는 애써 모든 사실을 설명하지 않는다. 낯선 장소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주소를 적은 쪽지에 ‘네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란 세심한 마음까지 전했던 여자의 실체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왜 부모님과 헤어져 그 여자와 살았는지, 왜 자신을 버렸는지. 그저 천천히 기억을 따라 장소를 거닐고 그곳을 묘사할 뿐이다. 누구나 그런 기억 하나쯤 간직하고 있다는 걸 말하는 듯. 그러니 사건은 해결되지 않아도 괜찮다. 기억은 아픈 상처를 증명하기도 하고 그리움의 다른 말이며 현재를 만든 조각이라 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때로 잊으려 애쓰고 새로운 기억으로 덮는다. 그래야만 살아갈 수 있다. 그러다 우리는 어느 순간 찾아오는 기억이라는 감정과 마주할 것이다. 흐릿해지다 점점 선명해지는 기억과 말이다. 그때는 소설 속 장 다라간처럼 한 발 떨어져 가만히 바라봐야겠지.
‘우리는 불편하거나 너무 고통스러운 인생 소사들을 결국에는 잊는다. 깊은 물 위에 눈을 감고 누워 물을 가만가만 실리기만 하면 된다.’ (10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