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정한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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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소설이란 무엇일까. 읽는 동안 내내 다른 생각은 끼어들 수 없는 흡입력 높은 소설과 읽고 난 후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는 소설로 나눈다면 나는 후자를 선택하겠다. 굳이 표현하자면 삶 속으로 파고드는 소설이라고 할까. 정한아의 단편집『애니』가 그런 소설이다. 유쾌하고 맑은 소설이 아니다. 소설 속 가족은 위태롭다. 경제적인 이유로 아이를 갖지 않는 부부, 부모는 이혼을 했거나 끔찍한 사건으로 죽거나, 자식을 돌볼 여유조차 없이 살아간다. 제대로 된 성장을 기대할 수 없고 친밀한 관계는 기대할 수 없다. 보살핌 없이 자립해야 했고 성급하게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 떠나려 한다. 그러다 자신도 그들과 똑같은 어른이라는 걸 뒤늦게 마주하고 달라지려 노력한다.

 

 이처럼 소중한 사람을 잃고 의지까지 잃어버려 흔들리고 무너지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죽음으로 인한 부재, 상실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우울증을 앓거나 섭식 장애가 있거나 트라우마로 힘들어한다. 그것은 가장 가까운 존재 가족에서 비롯되었고 정한아는 그들의 상처를 공감하고 치유할 누군가를 불러온다. 우울증을 앓다 혼자 암으로 죽은 어머니의 흔적을 찾아 한국에 온 「그랜드 망상 호텔」속 윤슬에겐 미술작가 명, 아버지와 헤어지고 다른 사람이 된 어머니를 지켜보며 아무렇지 않게 지내려 애쓰는 「빈방」의 중학생에겐 동생을 돌보는 베이비시터 아주머니, 이혼 후 새로운 자아를 찾고 성공한 어머니와 다르게 거식증을 앓는 「오픈 하우스」속 딸에게는 치료소 동기, 아내가 떠나고 홀로 키운 딸이 이혼을 후 손을 벌리는 상황까지 견뎌야 하는 「애니」의 운전강사 권에게 운전을 배우는 배우 마리아의 존재가 그렇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거나 잠시 속마음을 털어놓으면서 자신의 상처를 바라보며 근원지를 향해 나간다. 꽁꽁 숨겨왔던 울분을 표현할 수 있는 용기, 울고 싶을 때 울고 소리치고 싶을 때 소리칠 수 있는 그런 서툰 발걸음을 통해 정한아는 삶에 대한 긍정과 희망을 말한다. 부디 늦지 않기를 바라면서, 당신 때문이 아니라고, 이제라도 시작할 수 있다고 건네는 것이다. 하여 정한아의 소설은 읽다 보면 이미 영혼까지 피투성이가 돼버렸지만 작은 몸짓과 미세한 온기만으로 상처가 나을 수 있다는 믿음 같은 게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선명한 행복이나 운이 맞닿는 결말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하지만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감에 따라 조금씩 천천히 상처가 아물고 새살이 돋아나듯 우리네 삶도 그럴 거라 믿고 싶어진다.

 

 ‘그것은 별다를 것 없는 이야기였다. 실패한 두 사람이 만나서 서로를 특별하다고 느끼고, 앞으로도 좋은 시절이 올 거라고 믿고, 그날이 오리라는 것은 너무나도 요원하지만, 그 둘만은 굳건히 믿고, 또 믿는 그런 이야기.’ (「애니」, 74쪽)

 

 좋아하는 작가의 성장을 지켜보는 일은 기쁨이다. 성장이란 말이 적절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정한아는 ​등단작 『달의 바다』를 시작으로 언제나 작지만 따뜻한 온기를 소중하게 지킨다. 그 작은 온기가 곧 커져서 뜨거운 불길이 되어 주위를 환하게 밝혀줄 거라는 걸 알기에 그녀의 소설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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