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의 밥도둑
황석영 지음 / 교유서가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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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식을 먹는 일은 위대하고 숭고한 일이다. 생명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엄마는 타지에 나간 자식에게 항상 밥 먹었냐고 묻는다. 물론 밥 한끼 굶는다고 큰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니다. 끼니를 놓칠 정도로 바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함께 밥 먹을 누군가가 곁에 있기를 바라는 마음인 것이다. 그 마음을 온전히 아는 나이가 되었을 때 엄마는 곁에 계시지 않았다. 그러니 밥을 짓거나 계절마다 제철 음식으로 상을 차릴 때마다 슬그머니 그리움이 올라온다.

 

 좋아하는 사람과 먹었던 음식, 좋아하는 이가 즐겨 먹었던 음식을 먹을 때마다 그를 떠올리는 건 당연하다. 함께 먹었던 즐거운 기억을 다시 쌓고 싶은 간절함. 그러니까 음식은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추억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매개체가 된다. 산문 『황석영의 밥도둑』엔 그런 애틋한 그리움과 삶이 있었다. 전쟁을 피해 피난민으로 보냈던 시절의 맛, 감옥의 고독함을 달래주던 맛, 다시 맛 볼 수 없는 북한의 맛, 타국의 시간을 채워준 맛, 절집을 떠돌며 방랑했던 시간의 맛, 친구와의 이별로 기억되는 맛이 있다. 누구보다도 질곡의 세월을 살아낸 황석영을 든든히 지켜준 맛을 하나하나 맛본다. 아무리 상상해도 나는 그 어떤 맛도 짐직조차 할 수 없지만 말이다. 그저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가족과 친구가 생각나고 언젠가는 꼭 같이 먹어야겠다 다짐하는 마음만 얹을 뿐이다.

 

 황석영이 들려주는 맛은 모두 특별한 인생의 맛이다. 나의 부모 세대가 그랬듯 어렵고 힘든 생을 꾸준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맛이라 그렇기도 하고 지금은 곡진한 그리움의 맛이 되었기 때문이다. 감히 그 삶을 안다고 할 수 없는 나는 감옥에서 카드깡으로 들어온 아이와 부침개를 먹으며 나누던 짧은 대화를 몇 번이고 읽다가 울컥 목이 멘다. 아무 생각 없이 차려주는 대로 먹던 밥상과 무심했던 일상의 소중함을 놓치고 사는 뒤늦게 밀려오는 후회. 어제와 같은 오늘이, 오늘과 같을 내일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나는 그 아이와 같은 마음이 된다.

 

 “왜 그래, 뜨거워서 그러냐?”

 “아니요.”

 “그럼 뭣 땜에 그래?”

 “어머니 생각 나서요.” (44쪽)

 

 나이가 들면서 점점 음식을 만들고 먹는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생각한다. 단순히 음식을 먹는 게 아니라 하나의 음식을 먹을 때 그 안에 담긴 노고와 정성을 먹는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러니까 먹는다는 일은 거룩한 일이다. 함께 먹는 즐거움도 말이다. 어디서든 생을 이어가기 위해 우리는 먹어야만 한다. 무엇을 먹든 얼마나 먹든. 허투루 대충 끼니를 때우는 일을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산다는 건 대단하게 아니라 먹고사는 일에 불과하다는 어른들의 말에 담긴 속뜻을 조금은 알 것 같다. 황석영 역시 그런 마음을 전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의 생을 따뜻하게 채워준 사람들과 음식에 대한 찬가이면서도 소박하고 평범한 우리네 밥상 이야기. 책을 통해 들려주는 친절하면서도 독특한 조리법, 식재료에 대한 자세한 설명, 지역별 다양한 향토음식, 시대의 풍경까지. 뭔가 대단한 밥상 이야기가 아니라 이웃과 친구와 함께 음식을 먹는 즐거움과 그들에 대한 애정과 감사가 내게로 전해지니 말이다.

 

‘무엇보다도 음식은 사람끼리의 관계이며, 시간에 얹힌 기억들의 촉매이다.’ (267쪽, 초판 서문 중에서)

 

 식욕을 돋우는 제철 음식이 있듯 그리움을 불러오는 음식이 있다. 큰언니가 떠나고 처음 맞는 봄이다. 멸치와 다시마로 육수를 내고 된장을 푼 냄비에 쑥과 냉이를 가득 넣어 끓인 된장국을 먹을 때마다 맛있다며 먹었던 큰언니가 함께 한다. 좀 더 많이 같이 밥을 먹고 맛있는 음식을 해줄 걸 아쉬움이 남는다. 평범한 일상의 맛을 그리워하는 삶이 지속된다.

 

 맛을 음미한다기보다 허기를 채우는 목적으로 쉽고 빠르게 김밥 한 줄, 컵라면 한 개, 샌드위치 하나가 밥도둑이 되는 요즘이다. 그것은 얼마나 외롭고 쓸쓸한 맛인가. 아무리 떠올려도 따뜻한 인생의 맛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진수성찬이 아니더라도 좋은 사람과 음식을 먹으며 수저를 들고 고개를 들며 눈을 맞추는 일은 세상 그 무엇보다 성스럽다. 밥을 함께 먹는다는 건 상대에게 나를 보여주는 일이며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며 소중한 추억을 공유하는 일이다. 올봄에는 의미 없이 지나가는 말로 밥 한 번 먹자는 말이 아니라 ‘봄날에는 ‘사람의 눈빛이 제철’’이라는 시구절처럼 내 곁에 있는 좋은 이들과 밥을 먹고 싶다. 갓 지은 밥과 쉰 김장김치로 김치찌개를 끓이고 매콤한 냉이 무침과 개나리처럼 노란 계란말이의 소박하고 단출한 상이라도 충분히 행복한 맛으로 배부를 테니. 진정한 밥도둑은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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