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생각과의 대화 - 내 영혼에 조용한 기쁨을 선사해준
이하준 지음 / 책읽는수요일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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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우리는 매일 같은 공간에서 하루를 시작한다. 여행이나 출장 같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러니까 외부의 압력과 내부의 의지가 있을 때에만 변화가 가능하다. 두 개의 조건이 충족되지 않더라도 우리의 마음 한 구석에는 매일 어떤 변화를 원한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기를 소망한다. 달라졌기를 바란다. 성장할 정도는 아니지만 조금씩 변화하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소망은 발효되지는 않고 부풀기만 할 뿐이다. 커다란 사건 사고를 겪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게 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본연의 나를 찾고 새로운 삶을 계획하겠다는 다짐은 흐려진다. 그래서 고전과의 대화를 통해 뭔가 거창한 울림을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안타깝게도 저자처럼 고전을 인생의 목표나 동지로 여길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만 그럴 수 없는 나는 그가 들려주는 고전과의 대화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많은 부분은 통했지만 여전히 숙제로 남는다. 해답을 찾을 수 있는 게 책이 아닌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어떤 삶을 살았든, 누구를 사랑했든 현재 필요한 건 나에 대한 회복력이다. 이름으로만 기억하는 그들이 나, 사랑, 관계, 죽음에 관하여 들려주는 이야기는 옳다. 조목조목 정리하지 않아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건 어느 시대를 살고 있건 결국 나로 시작해 우리로 확대되어 다시 나(죽음)으로 순환되는 삶이라는 사실이다. 부정하고 싶어도 그렇다. 해서 학창시절 도덕, 윤리, 철학 수업을 듣는 듯 착각에 빠지게 된다. 중요한 건 그 수업을 듣고 이해하는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니라는 점이다. 모든 걸 그대로 받아들일 정도로 순수하지 않는 나이가 되었다. 그리고 내 환경에 맞게 취할 수 있는 능력은 지녔다. 저자는 이러한 독자의 입장을 충분히 배려한 듯하다. 고전을 등에 업고 자신의 주장을 강요하지는 않으니까. 프롤로그의 이런 부분만 봐도 그렇다. 고전은 만능열쇠가 아니다. 오늘날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한 시대를 살았던 한 인간의 고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12쪽)  그러니까 우리는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의 삶도 현재를 사는 우리와 같았다고 공감할 수 있도록 이끈다.

 

 놀랍도록 빠르게 시대가 변화하고 과학이 발전하여 상상했던 일들이 실현되는 세상을 살고 있지만 독립적이면서도 사회의 구성원으로 존재하고 한 사람을 사랑하여 결혼을 했음에도 서로 다른 사랑을 꿈꾸기도 한다. 그럼에도 쇼펜하우어의 고독을 소개하고 샤르트르와 보부아르의 계약 결혼과 평생을 홀로 지낸 칸트의 결혼론을 꺼낸 것은 다양한 삶을 존중하고 이해해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어서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여 SNS를 통해 보이는 나를 내세워 다른 나를 숨기기도 한다. 어느 순간 나는 편리하다는 이유로 쉽게 지식을 검색하고 그것을 취한다. 귀찮고 바쁘다는 이유나 혹은 나와 상관없다는 핑계로 어렵고 오랜 시간의 사고를 요하는 문제는 회피한다. 어느 순간 정체성을 잃고 혼란에 빠지게 되는 나에게 잊고 있던 데카르트와의 만남은 기쁜 충격이었다. 모든 걸 의심해야 한다고 말하는 그의 명제‘나는 존재한다, 고로 존재한다’, 즉 ‘코기토 에르고 숨’(47쪽)는 현대인에게 가장 필요한 천둥과 번개였다. 어디 그뿐인가. 자기 자신에게 몰두한 몽테뉴는 빛나는 거울이 된다. 우리 내면 본래적 자아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아무 유용성을 따지지 않고 아무 목적 없이 우리 자신이 되는 길이다.’ (94쪽)

 

 고전을 통한 이러한 순간이 나를 회복하는 시간이다.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이나 몽테뉴의《수상록》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된다. 끊임없이 사고하고 질문을 던져야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성숙하고 풍요로운 삶을 위한 길이 아닐까 싶다. 특히 예전과 다르게 이방인과 내국인의 구별이 차별로 이어지는 세상에 우리가 수용해야 할 것을 이미 짐멜은 알고 있었다니 감탄하게 된다. 과연 짐멜의 《이방인에 대하여》은 가장 훌륭한 고전이자 인생 지침서였다. 거기다 어떤 일이든 누구에게든 일어날 수 있는 삶의 경우의 수에 대해 언급하는 저자의 말은 영혼의 저장고에 저장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이방인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차이에 대한 인정이 필요하다.’,‘거리 두기를 기억해야 한다.’ (234쪽) 한 발만 떨어져서 바라보아도 다르게 보인다는 사고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어느 누구도 나와 같을 수 없다는 가장 단순한 진리는 나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니까. 그것은 생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끝날 때까지 이어진다. 그러니 늙음과 죽음을 통해서도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어떻게 수용해야 할까. 계획하는 대로 삶이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이미 알고 있지만 죽음은 영원한 두려움이다. 삶과 죽음이 수많은 철학자의 사유의 대상이며 고전의 주제가 되는 건 당연하다. 개인적으로 1년 간격으로 아버지와 큰언니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나에게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 대한 부분은 남다르다. ‘죽음을 향한 존재란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앞질러서 달려가는’ 존재를 의미한다. 이를 통해 인간은 자신이 자신의 실존적 세계에 던져진 존재임을 자각하고, 물리적 시가니 아닌 자신의 고유한 실존적 시간 속에 살아가며, 자신을 ‘염려’하고 결단해 자기 삶을 기획하게 된다. 결국 하이데거에게 죽음은 생물학적 죽음이 아니라 실존적인 의미의 죽음이다.’ (296~297쪽)

 

 죽음을 의식하며 산다는 건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말하는 것이라 생각한다.결국 고전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도 산다는 것에 대한 문제다. 같은 공간에서 눈을 뜨고 같은 대사을 바라보며 우리 혹은 타인과 조화롭게 살아가는 일. 어제의 나와 같은 내가 아닌 조금은 성숙된 나로 삶을 향해 살아가는 일 말이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방대한 고전, 그 오래된 생각의 숲으로 걸어간다. 나만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충만한 영혼을 위해 나아가려 한다. 설령 그 숲에서 길을 잃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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