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린이 아닌 모든 것
이장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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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냇물이 바다를 향해 흐르고 있다고 믿으며 흘러가듯 우리의 생도 끝을 모르는 어딘가를 향해 나간다. 누군가는 빠르게 속도를 내고 누군가는 천천히 늦은 걸음으로 살아간다. 그 안에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 관계를 맺는다. 그들에게서 소설 같은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소설이 아닐까 싶은 장면을 목격하기도 한다. 이장욱의 소설이 그랬다. 정말 소설 같은 이야기구나 싶다가도 어딘가에 이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어떤 소설 속 인물은 너무도 기묘할 정도로 놀랍고 어떤 인물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을 정도로 평범해서 놀랐다.

 

 이장욱이 그린 인물들은 다른 듯했지만 같았다. 소설 속 인물은 서로가 서로에게 겹쳐졌고 하나의 단편이 끝나고 다른 단편에서 다시 태어나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여행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일본인 답지 않은 일본인 하루오와의 만남을 그린 「절반 이상의 하루오」와 언제나 그곳에 있었지만 존재를 증명하지 못하다가 죽은 후 부재를 통해 존재를 증명하는 「우리 모두의 정귀보」는 하루오가 정귀보처럼 여겨겼다. 강렬한 인상을 준 것도 아닌데 순간순간 떠올리게 되는 인물 말이다. 어쩌면 하루오와 정귀보는 우리와 가장 친숙한 누군가와 닮은 사람인지도 모른다.

 

  ‘내 삶의 모든 페이지에서 여전히 그 사람이 살아가고 있는 느낌이랄까요. 페이지를 넘기면 그 자리에서 숫자가 차례차례 바뀌듯이 말예요. 물론 어느 페이지는 찢어진 채 버려져 있겠지요……’ (「우리 모두의 정귀보」, 154쪽)

 

 그들이 우리가 스치고 지난 사람 중 하나였다면 물에 대한 이미지를 시작으로 평범했던 욕실이 어느 순간 무서운 공포로 돌변하는 경험을 들려주는 「어느 날 욕실에서」속 인물과 집주인인 작가가 여행 중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낯선 집에서 방이 움직이는 환상을 보는 「이반 멘슈코프의 춤추는 방」의  주인공은 살면서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사람 같았다. 두 단편의 인물들은 우리가 모르는 다른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랄까.

 

 일주일에 세 번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파출부로 일하는 집주인의 물건으로 성향을 짐작하며 상상의 나래를 펴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아르놀피니 부부의 결혼식」와 안다고 믿었던 사람과 삶이 언제라도 우리를 배신할 수 있는 걸 한 남자의 죽음을 통해 확인하는 「칠레의 세계」는 산다는 게 무엇인가 누군가에게 묻고 싶어지는 소설이다. 한 치 앞도 모르면서 미래를 계획하는 어처구니없는 인생이라니. 곳곳에 웅덩이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피할 수 없이 건너야 닿을 수 있는 게 우리의 삶이라는 현실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세계를 견딜 수 있는 건 하루오나 정귀보 같은 인물이 우리 곁에 존재해서다.

 

 ‘마약성 진통제와 오케이캐시백의 아름다운 조화 속에 인생이 있는지도 모르니까. 죽어가면서도 습관처럼 오케이캐시백 포인트를 적립하는 게 빌어먹을 인생이라는 것이니까.’ (「아르놀피니 부부의 결혼식」, 47쪽)

 

 ‘우연이라는 향기로운 공기로 가득한 세계가 곧 낙원 아니겠나? 그런데 어쩌겠는가. 그 낙원의 공기 안에, 치명적인 의지의 고리, 무서운 인과의 사슬이 숨겨져 있다면 말일세. 이불 속의 바늘처럼. 향기로운 포도주 속의 독극물처럼.’ (「칠레의 세계」, 191~1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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