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혈육이 아니냐
정용준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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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고 나면 산뜻한 기분이 드는 소설이 있다. 반대로 읽고 나면 우울함으로 빠져드는 소설도 있다. 단도직입으로 말하자면 정용준의 소설은 후자에 속한다. 그런데 중요한 건 그 우울함이 아름답다는 것이다.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담박한 아름다움이다. 정용준의 첫 소설집 『가나』는 지독한 절망의 나열이었다면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는 죽음과 죽음 사이에 놓인 삶을 말한다.

 

 죽음은 삶을 관통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남겨진 이의 삶을 지배하고 어떤 죽음은 영원한 미제(未濟)로 남는다. 정용준의 소설에는 적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죽음이 가득하다. 그래서 아련하고 아프다. 그 죽음으로 인해 누군가의 삶은 죽음보다 큰 고통이 된다. 정용준은 죽음과 함께 존재에 대한 질문을 함께 던지는 듯하다.

 

 마치 자신의 존재 이유가 살인을 위한 도구인 것처럼 15명을 죽이기도 죄의식 없이 살아가는 죄수와 그를 관찰하는 교도관 이야기 「474번」는 폭력 현장을 세밀하게 묘사할 정도로 잔인한 소설이다. 누나이자 어머니였던 이가 떠나 버리고 존재 자체가 거부된 듯 살아온 이에게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결국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의 이름이 된 ‘474번’을 호명하는 교도관에게 자신의 삶을 털어놓고 만다. 죽음으로 자신을 증명할 수밖에 없던 잔인한 생이다. 마지막으로 누나가 만들어주었던 푹 쪄낸 꽃게를 떠올리는 순간 그는 죄수가 아닌 한 인간에 불과했다.

 

 그런데 말이네. 자네의 이름은 뭔가?  글쎄요. 너무 오랫동안 사용하지도 들어보지도 못해 잊어버렸습니다. 지금은 474번이라는 이름이 생겼지요. ( 「474번」, 36쪽)

 

 농장에서 무참하게 개를 죽이며 살아가는 「개들」 속 ‘나’도 다르지 않다. 폭력을 행사하는 대상이 인간이 아닌 개일뿐 폭력은 계속된다. 자신을 키워준 아버지 같은 ‘곰’ 의 폭력 속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것과 맞서는 이의 삶은 분노와 울분으로 가득하다. 그리하여 결국엔 누군가를 죽이고 만다. 눈이 닿는 곳마다 죽음이 가득한 삶. 그 안에서 죽음이 아는 무엇을 볼 수 있단 말인가.

 

 죽음은 느닷없이 삶을 뒤흔든다. 비통한 죽음,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죽음이 그렇다. 베트남 참전 용사로 수없이 많은 사람을 죽인 아버지 앞에 군대에서 자살을 시도하고 사경을 헤매는 아들의 안타까운 모습 「이국의 소년」과  죽음의 이유에 대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는 군대 내 폭행으로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이야기「안부」는 여전히 우리 주변에서 여전히 벌어지는 죽음을 보여준다.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서 잊진 아들의 존재, 그것을 인정하고 놓을 수 없는 어머니. 어머니에게 아들을 보내주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없다.

 

 그렇다면 죽음으로 단절된 생은 다시 이어질 수 없을까? 어머니를 죽인 아버지를 다시 만난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속 ‘나’는 그것을 부정한다. 건강 악화로 가석방을 받은 아버지는 투석을 위해 ‘나’가 근무하는 병원을 찾는다. 그것은 하나뿐인 혈육을 만나기 위한 방법이었다. 곧 죽게 아버지를 향한 최소의 동정이나 연민은 없다. 아버지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지만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죽음으로 인해 누군가의 삶은 사라진다.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자연스러운 죽음은 없다. 그저 죽음을 온전히 이해하고 애도하려는 산 자의 절절함이 있다. 「미드원터」는 이 소설집에서 유독 돋보인다. 그러니까 뭐랄까. 따뜻한 애도라 말하고 싶다. 스웨덴에서 죽은 한국 친구 써니를 위해 한국에서 그를 애도하는 닐스. 써니가 말했던 털모자를 한 여름에 구입하며 닐스는 그를 간절히 이해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많은 이들이 스스로 죽어. 그건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태어나고 누군가는 늙어 죽는 것처럼 어쩐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 되어버렸어. 그런데 그가 낯선 나라에서, 그것도 내 집에서 죽었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 있어.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자연스럽지가 않아. 이상해. 정말 이상해.’ ( 「미드원터」, 92~93쪽)

 

 닐스가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가까운 이의 죽음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때로는 나 대신 죽은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리하여 남겨진 내가 그의 몫까지 잘 살아내야 한다는 다짐을 하게 만든다. 때로는 죽음과 죽음 사이에 내가 놓인 것만 같다. 죽음과 죽음 사이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만 할까. 무지한 나는 답을 찾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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