쥘과의 하루
디아너 브룩호번 지음, 이진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어떻게 죽느냐가 아니라 죽음 그 자체에 대해 생각한다. 내가 사라진 후 나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나와 긴밀한 관계를 맺는 이들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남겨진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나 역시 남겨진 사람들이 되었지만 여전히 상상할 수 없다. 그럼에도 죽음은 삶과 다르지 않아서 영원한 숙제가 된다.

 

 작년 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한동안 우울했다. 우울의 근원도 모른 채 그저 아버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망연자실했다. 중환자실에서 아버지의 임종을 맞은 건 큰언니였다. 가족들 모두 오후 면회를 마치고 돌아오고 30여 분이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아버지를 땅에 묻고 우리는 마당에서 가족사진을 찍기도 했다. 화창한 날씨였고 돌아보면 가족 사직을 찍은 건 정말 잘 한 일이었다. 그리고 다시 그 봄을 지나 여름이 깊어가고 있을 때 큰언니가 아버지 곁으로 떠났다. 여름은 큰언니의 계절이 되었다. 임종을 지킨 작은 언니는 평온했다고 전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인정하는 일은 고통을 동반한다. 영원한 이별은 영원한 애도를 필요로 한다. 죽음과 함께 애도를 표현하는 건 용기가 있어야 한다. 알리스에게는 용기를 준비할 시간이 필요했다. 여느 날과 같은 겨울 아침, 알리스에게 쥘의 모습은 일상이었다. 눈 내린 창밖을 바라보며 앉아 있는 쥘의 모습에서 죽음은 감지할 수 없었다. 쥘은 죽었다. 그러나 알리스에게 쥘은 죽지 않았다. ‘쥘의 죽음이 그녀의 뼛속까지 스며들기 전까지는 그는 진정으로 죽은 게 아니다.’ (11쪽)

 

 노년의 부부에게 죽음은 예측 가능한 일이었을까? 아니다, 누구나 죽음은 낯설고 두렵다. 그래서 알리스에게 오늘 하루는 평소와 다르지 않은 하루여야만 했다. 10시에 체스를 두러 오는 자폐 소년 다비드의 하루처럼 말이다. 다비드의 방문은 피할 수 없는 일정이었다. 쥘과의 이별에 앞서 알리스는 먼저 다비드를 맞이한다. 단 하루만 쥘의 죽음을 유예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쥘과 이별을 준비하고 인정할 수 있는 최소의 시간이라고. ‘그녀는 먼저 쥘과 이별해야 했다. 그래야 비로소 그를 떠나보낼 수 있을 것이었다.’ (37쪽)

 

 다비드 엄마의 부탁으로 다비드와 온전히 하루를 보내는 알리스는 자신이 정해놓은 규칙대로 생활해야만 하는 다비드를 보며 오히려 어떤 편안함을 느낀다. 마치 쥘이 살아있는 것처럼 셋은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한다. 알리스는 점차 굳어지는 쥘을 마주하며 함께 한 삶 돌아보고 가슴에 숨겨두었던(쥘의 외도) 말들을 꺼내고 쥘이 떠난 후 삶을 생각한다. 쥘과 알리스가 같은 공간에서 호흡하며 살아온 시간이 아닌 이제는 알리스 혼자 해야 할 시간이 남았다.

 

 ‘천천히 떨어지는 눈송이들이 바깥세상을 두껍고 하얗게 덮고 있었다. 풍경이 그녀의 눈앞에서 회오리치고 있었다. 인적 없는 거리에는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 누구도, 어떤 움직임도 세상을 그 겨울잠에서 깨우지 못했다. 이것이 이별을 위한 완벽한 배경임을 그녀는 깨달았다.’ (106~107쪽)

 

 죽은 자와 산 자가 함께 공유하는 시간은 얼마나 허락될 수 있을까. 알리스처럼 완벽한 하루를 보낼 수 있다면 남편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쥘과의 하루가 지나면 내일이 온다는 것이다. 쥘과의 하루는 끝나고 알리스의 하루는 계속 이어진다.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다비드의 말은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삶이 지속된다는 걸 확인시킨다.

 

 “눈은 밖에 있고, 안은 따듯해요.” “밤이에요, 이제 자야겠어요.”(113쪽)

 

 죽은 쥘과 하루를 보낸 알리스가 그러하듯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를 실감하며서 살아간다. 어제가 아닌 오늘을 살아간다. 아침을 맞고 하루를 보내고 밤이 되면 내일을 위해 잠을 잔다. 나 역시 그러하다. 엄마 그 이상의 존재였던 큰언니가 떠난 지 한 달이 지났다. 큰언니의 집을 오가며 정리 중이다. 아직 곳곳에 큰언니의 자취가 남아 있다. 함께 마시던 커피를 혼자 마시고 큰언니가 좋아했던 나무가 자라는 화분에 물을 주며 혼자 중얼거린다. 중얼거림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애도 의식 중 하나다. 『쥘과의 하루』를 읽고 감정의 과잉을 정제하지 못한 이런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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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1 16: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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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2 07: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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