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사위는 던질 때마다 다른 숫자를 보여준다. 그것이 주사위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누군가에게는 숫자 1, 숫자 5로 기억될 수도 있다. 숫자1에서 숫자6까지 여섯 가지를 가진 물건, 소설가는 주사위를 닮았다. 매번 던질 때마다 같은 수가 나오는 주사위처럼 어떤 소설가는 소설에서 특정 서사나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다. 반면 어떤 소설가의 소설은 매번 다른 수를 보여준다. 고유성과 다양성이라고 말하면 좋을까. 좋고 나쁨을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김유진의 장편소설 『숨은 밤』을 읽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늑대의 문장』으로 만난 김유진은 기괴하고 공포스러웠지만 매혹적이었다. 잔혹스러운 동화 그 너머의 무언가를 상상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장편소설 『숨은 밤』은 단편의 확장인지도 모른다. 어른의 세계에 속하지 못하는 성장하는 아이들과 비주류로 살아가는 주변인과 이방인의 시선이 머무는 곳의 이야기.

 

 여관에서 보호자 없이 장기 투숙하는 화자 ‘나’와 그곳에서 일하는 소년 기(基)는 고아 아닌 고아다. 트럭을 몰며 장사를 하는 나의 아버지는 안(雁)에게 소녀를 부탁한다. 주변의 강으로 낚시를 하러 오는 이들과 여름 축제에 모여드는 곳이다. 안이 있다는 이유로 소녀는 이 마을에 온 것이다. 사람들과 교류하지 않고 어탁을 하는 안과 ‘나’가 친밀한 사이는 아니다. 한 번씩 안의 집에 방문하고 짧은 대화를 나누는 게 전부다. 소년 기와의 관계도 다르지 않다. 서로의 존재를 인식할 뿐이다.

 

 마을에서 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기와 친하게 지내는 사람도 보호자도 없다. 군청 직원만이 쌀과 도시락을 챙겨주며 작은 진심을 보였다. 기가 잠깐 학교에 다니게 된 것도 직원의 배려였다. ‘나’는 기를 이해할 수 없었다. 재활용 교복을 입고 자신보다 작은 아이들의 따돌림을 받으며 학교에 다니고 싶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어른이 된다는 건,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엄격하게 구별할 수 있는 데서부터 출발한다고 했다. 전자에서 후자로 흐르는 삶, 자신이 만들 수 있는 가장 크고 아름다운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들어가 자족하는 삶, 안은 그런 삶을 꾸릴 때야 비로소 어른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 말에 따르면, 기는 한낱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기는 자기 자신조차 잊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기에게서 뒤늦게 발견한 놀라울 정도의 유치함은, 거기서 비롯된 것이었다. 안의 말은 늘 옳았다.’ (95쪽)

 

 김유진은 여전히 불편하고 불투명하다. 걷어낼 수 없는 얇은 막으로 인물을 설명한다. 물론 기, 안, 장은 독특하다. ‘나’의 기억 속에 등장하는 장(薔)도 기와 안과 마찬가지다. ‘나’와 어떻게 만났는지 어떤 사이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그것이 김유진 소설의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해야 할까. 기가 어떤 이유로 분노와 함께 살아왔는지 모르겠다. 돌봄을 받지 않았다는 포괄적인 범위가 아닌 마을에 불을 지른 직접적인 무언가가 필요하다.

 

 ‘너는 누굴 싫어해?
 사람들. 거의 모든 사람들.
 그럼 누굴 좋아해?
 나는 너를 좋아해.’ (203쪽)

 

 사랑의 전조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김유진의 말은 이해받고 인정받고 싶은 뜻으로 들린다. 가장 가까운 이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보호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나’와 누구도 믿을 수 없었던 기가 서로의 바라보고 있으니까. 단 한 사람의 이해와 인정만으로 채워질 수 있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서툴고 퉁명스러운 기의 고백이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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