훗날 훗사람 문학동네 시인선 39
이사라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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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해 가을 바다를 보러간 적이 있다. 늦은 오후 바닷가에는 사람들이 적었다. 굴을 따서 파는 아주머니가 말을 걸었다. 싱싱한 굴이라며 싸게 준다고 말했다. 완곡하게 거절했지만 아주머니에게는 그리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나는 당신이 될 수 없고, 당신도 내가 될 수 없다. 이사라의 시집 『훗날 훗사람』 속 이런 시를 읽으면서 그 바닷가를 생각한다. 어쩌자고 첫 시가 이런 시란 말인가. 아무 상관없는 아주머니의 얼굴에 피었을 검버섯은 내 어머니의 그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검버섯 피부의 시간이 당신을 지나간다

 

 시간을 다 보낸 얼룩이 지나간다

 

 날이 저물고 아픈 별들이 뜨고

 내가 울면

 세상에 한 방울 얼룩이 지겠지

 

 우리가 울다 지치면

 한 문명도 얼룩이 되고

 

 갓 피어나는 꽃들도 얼룩이 되지

 

 지금 나는

 당신의 얼룩진 날들이 나에게 무늬를 입히고

 달아나는 걸 본다

 모든 것을 사랑하였어도

 밤을 떠나는 별처럼 당신이 나를 지나간다

 

 그러다가 어느 날

 사라진 문명이 돌연 찾아든 것처럼

 내 벽에는 오래된 당신의

 벽화가 빛나겠지

 

 천년을 휘돈 나비가 찾아들고

 

 다시 한바탕 시간들 위로 꽃잎 날리고

 비 내리고 사랑하고 울고 이끼 끼고

 

 나의 얼룩도

 당신처럼 시간을 지나가겠지

 -「얼룩」 전문, 12~13쪽

 

 

 시간을 다 보낸 얼룩이란 무엇일까, 나에게 남겨진 얼룩도 그것과 같은 것일까. 시간이라는 얼룩, 혹은 시간을 견디는 얼룩일까. 알 수 없는 시어에 마음이 흔들린다. 살아가는 중이지만 누구도 감히 짐작할 수 없는 삶을 파헤치고만 싶다.

 

 오직 신만이 알 수 있는 생의 주기가 끝난 누군가를 향한 애도가 이어지고 평온히 잠들지 못한 영혼을 겨우 찾아냈다는 소식을 듣는 날들이다. 나는 잔인한 날들이다, 중얼거린다. 이런 시를 읊조리듯 읽는다. 그러나 결국 시에 체하고 만다. 내가 더 사랑해도 좋았을 그 사람은 이미 떠나고 없다. 그리워하는 날들만 남았다. 가슴을 치며 통곡해도 돌아오지 않을 그 사람, 더 많이 사랑해야 했던 그 사람...

 

 

 그 사람 죽었어

 

 벼락이 가슴을 치는 날이 있다

 내가 더 사랑해도 좋았을 그 사람

 나에게 말없이 떠날 수 있었던 그 사람

 그 사람 없이도 내가 살 수 있다고 생각한 그 사람이

 죽었다

 

 한 사람이 살다가 비 그치듯 사라지면

 그 주위에서 한동안 들끓던 시간이 잦아들며

 갑자기 고요해진다

 지상의 고요는 그렇게 시작되기도 한다

 살아남은 사람이

 그 고요를

 둥글게 둥글게 쓰다듬는다

 그와 나 사이

 빈틈이 없어지도록

 

 그러다 봄날이면

 영안실의 꽃처럼 뿌리 뽑혔던 그 사람이

 말없이 새순 돋듯

 빈틈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빈틈」전문, 111쪽

 

 

 또 한없이 느리게 햇살이 복도에 머문다

 시간은 사라진 지 오래고

 복도의 어디에도 복도의 그림자는 없다

 

 기다랗고 물기 없는 바게트를 손에 쥐고

 느리게 빵을 뜯으며

 게처럼 복도를 걷는다

 

 햇살이 펼쳐놓은 복도 속으로

 빵과 함께 들어가서

 복도를 품으면

 사라진 시간이 돌아올까?

 

 해 질 무렵부터

 집은 저 복도의 끝 어딘가에서 혼자 부풀겠지

 병원은 저 복도 끝 어딘가에서 혼자 부풀겠지

 복도도 그렇게 또 햇살을 건너가겠지

 

 햇살이 주무르던 모든 것들 멈추고

 세상은 밤새 발효가 시작되고

 

 사랑해서

 하루라도 못 보면 안 될 것같이

 마치 그렇게 하다보면 정말 만날 수 있는 것처럼

 느리게 정말 느리게

 사랑이란 정말 느리게

 안녕히 가라는 말 정말 느리게

 

 시간이 사라진 복도에서

 게걸음으로 느리게

 더 느리게 헤어지는 우리들

 -「느린 이별」전문, 52~53쪽

 

 

 그리하여 나의 이별은 진행 중이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별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살아내야 후회하지 않은 사랑을 배울 수 있을까. 아니, 후회하지 않는 삶 말이다. 그런 삶을 만드는 건 우리 자신이겠지. 둘이었다가 하나가 되는 시간, 함께였다가 혼자가 되는 시간을 견디는 일은 버틸 수 있을까. 느린 이별이 아니라 멈춘 이별이어도 좋겠다. 때로는 말이다. 어쩌면 시인은 시간이라는 약을 처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떠나온 골목에서

 피는 목련을 두고 왔다는 먼 소리가 들린다

 

 밤에는 얼고 낮에는 녹던 많은 기억들이

 묵묵히 걸어왔는데

 이제 기억이 터트린 말들이

 골목을 향해 간다

 

 소리의 끝에 매달린

 속말들이 문을 열고

 그 끝에서

 자신의 제단을 오른다

 

 골목은 그곳에서 떠난 사람이

 훗날 훗사람이 되어 오리라는 것을

 기다려왔던 것일까

 

 제단 위에 벌써

 바람이 불고 허공이 차려진다

 

 목련이 지면

 피는 목련을 두고 왔다는

 그 소리도

 제단 위에서

 구름빛으로 사라지겠지

 

 훗날 훗사람이 또 태어나길 기약하겠지

 -「훗날 훗사람」전문, 42~43쪽

 

 

 누군가 떠난 자리를 채울 그 사람, 훗날 훗사람을 기다린다. 빨리 오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안다. 그래도 우리는 기다린다.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저마다 시간을 지나가는 방법을 터득할 것이다.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어떤 날은 시도 읽고, 그림을 보고, 음악을 듣고 일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훗날 훗사람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괜찮다.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느리게 천천히 오더라도 말이다. 상처의 얼룩, 이별의 고통도 모두 회복될 테니까.

 

 

 가슴 위로

 이맘때쯤 배 한 척 지나가는 일은

 숨겨두었던

 푸른 눈물에 상처를 내는 일이다

 

 거품처럼 요란한 그 길에서

 기억은 포말처럼 날뛰고 뒤집어지는데,

 그 위를

 물그림자가 가고 있다

 

 눈물 속에서 뿜는 용암 덩어리가 스러지면

 

 모든 길은 떠나거나 흐르거나

 칼날 지나간 자국마다

 그것을 견딘 힘을 본다

 

 어느새 지워지는 흉터의 길들처럼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그 길의

 한순간이 잘 아물어 있다

 

 낯선 세계에 잠시 다녀온 듯

 낮잠에서 깨어난 듯

 - 「회복중이다」전문,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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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소녀 2015-04-02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좋아요.^^

자목련 2015-04-03 10:45   좋아요 0 | URL
음, 덧글이 더 좋아요^^

詩21 2015-04-02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인 약 처방이 의사 약 처방보다 약발이 좋다지요

자목련 2015-04-03 10:45   좋아요 0 | URL
맞아요, 때로는 한 알의 약보다 시 한 구절이 강력한 처방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