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 2판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평점 :
품절


 떠도는 이야기는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 소문 혹은 괴담이라 부르는 것들 말이다. 어떤 이가 본 것들, 어떤 이가 들은 것을, 어떤 이가 생각한 것들이 모여 누군가의 삶이 되는 건 아닐까. 때로 우리는 그것을 소설 같은 삶이라 부른다. 김영하의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를 읽으면서 저마다의 소설을 생각한다. 그러니까 나의 삶은 당신에게 소설이 되고, 당신의 삶은 나에게 소설이 된다.  

 

 오랜만에 만난 김영하의 단편은 아주 유쾌했다. 읽는 내내 소설 속 인물에게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특히 표제작인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는 드라마로도 즐겁게 보았기에 주인공 권해효의 표정이 겹쳐지기도 했다. 누구에게나 그런 날이 있다.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일들이 도미노처럼 발생하는 날 말이다.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벌어질까, 화도 나고 황당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가장 절망스러운 건 아무도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나를 제외한 채 세상이 돌아가는 것처럼, 나란 존재는 어디에 있든 막무가내로 닦아내는 먼지와 다르지 않다는 느낌 말이다.

 

 김영하는 이처럼 돌발적인 상황을 장치로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물론 누구에게나 돌발적인 상황이 되는 건 아니다. 「사진관 살인사건」의 주인공 형사에게 범죄는 일상이다. 사건이 발생하고 현장에서 누군가가 다치고 누군가는 죽는다. 사회적인 측면으로 형사는 강자에 속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보면 무정자증 병력을 지닌 남자에 불과하다. 사진관 주인이 살해당한 사건을 수사하면서 피해자 아내를 향해 형사는 욕망을 감춘 공적인 시선을 보낸다. 범인을 검거하는 과정이 아니라 형사와 피해자의 아내와 애인의 심리적 대치에 몰입하는 이유다.

 

 ‘개인적인 삶이란 없다. 우리의 모든 은밀한 욕망들은 늘 공적인 영역으로 튀어나올 준비가 되어 있다. 호리병에 갇힌 요괴처럼, 마개만 따주면 모든 것을 해줄 것처럼 속삭여대지만 일단 세상 밖으로 나오면 거대한 괴물이 되어 우리를 덮치는 것이다. 그들이 묻는다. 이봐. 누가 나를 이 호리병에 넣었지? 그건 바로 인간이야. 나를 꺼내준 너도 인간. 그러니까 나는 너를 잡아먹어야 되겠어.’ (「사진관 살인사건」, 68쪽)

 

 자신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분출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치기 어린 시절을 지나 누군가를 책임져야 하는 어른의 경우, 욕망은 어쩔 수 없이 사그라진다. 「비상구」에서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것처럼 보이는 주인공도 다르지 않다. 스스로 선택한 가출과 좋아하는 여자에 대한 사랑(책임)으로 살아간다. 자신과 애인을 보호하기 위해 폭언과 폭력을 사용한다. 거침없는 행동은 당당하다. 그것이 젊은 연인에게는 유일한 비상구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우리가 꿈꾸는 비상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말이다. 단지, 그곳에, 비상구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삼을 뿐이다. 무엇이든 비상구가 될 수 있다는 믿음만 존재한다면 그 얼마나 다행인가.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는 건 피곤한 일이다. 만나야 할 모든 종류의 사람들은 나는 오 년 전에 다 겪어버렸다. 그후로는 사람보다는 책이, 책보다는 음악이, 음악보다는 그림이, 그림보다는 게임이 나를 편안하게 한다.’ (「바람이 분다」, 244쪽)

 

 그리하여 누군가는 「흡혈귀」의 남편처럼 불멸의 존재가 되어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는 타인의 삶을 관조하거나 「피뢰침」속 벼락을 찾는 사람들처럼 죽음을 담보로 벼락을 받는 피뢰침이 되기도 한다. 그뿐인가. 과거를 숨기고 비밀을 만들거나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세상과 단절하며 살다 결국엔 사라지고 만다.

 

 그러니까 김영하식으로 우리 삶을 말하자면 소설(騷說)과 소설(所說) 사이에 존재하는 소설(小說)이라 할 수 있다. 누구나 보통의 삶을 살지만 우리의 삶은 보통일 수 없는 이야기가 된다. 그가 쏟아내는 유머와 욕설은 예측할 수 없는 순간을 사는 사람들,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를 그저 맞아야만 하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거나 우산이 된다. 그래서 김영하의 세련된 감각과 위로는 조금 낯설기도 하다. 낯선 여행지에 느끼는 반가움과 두려움 같은 것 말이다. 그곳이 어디든, 누구를 만나듯 말이다. 그러므로 김영하의 소설은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존재를 끊임없이 찾아가는 긴 여행 인지도 모른다.

 

 ‘너는 누구지?

   나는 달, 네가 기차의 속도로 달리면 기차의 속도로 따라가는,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2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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