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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틀넥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권영주 옮김 / 엘릭시르 / 201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나를 증명하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갖가지 서류가 존재를 증명할 수 있을까. 어쩌면 가장 중요한 건 타인의 인정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나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 말이다. 가깝게는 가족, 멀게는 나와 관련된 모든 사람이다. 그들만이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나임을 존재를 증명해줄 수 있다. 어느 날 갑자기 나를 둘러싼 환경이 변한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나를 증명할 수 있는 이가 아무도 없는 그런 삶 말이다. 인기 미스터리 작가로 잘 알려진 요네자와 호노부의 소설 <보틀넥> 속 주인공 료가 처한 상황이다.
료는 2년 전 죽은 여자친구 노조미를 추모를 위해 절벽을 찾았다. 노조미가 생각하다 그만 절벽에서 떨어진다. 의식을 차린 료는 절벽이 아닌 집 근처 공원이라는 사실에 놀란다. 집으로 돌아가 벨을 누르니 낯선 여자가 맞이한다. 놀랍게도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죽은 누나 사키였다. 집 안에 놓인 사물의 위치와 부모님에 대한 기억을 비교하며 사키와 료는 서로를 인정한다.
“두 개의 가능 세계가 교차했다는 헛소리를 가설로 삼는다면, 단순히 합류한 게 아니라 네가 내 세계로 왔다는 게 확실한 것 같지?” (46쪽)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료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사키뿐이다. 사키는 료가 자신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깨어난 공원을 찾으며 뭔가 실마리를 찾으려 한다. 그런데 료가 공원에서 만난 건 살아 있는 노조미였다.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노조미는 죽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노조미는 료를 알아보지 못한다. 혼란스러운 료는 사키에게 노조미에 대해 묻는다. 사키는 자신을 잘 따르는 밝고 명랑한 후배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왜 자신의 세계에서 노조미는 죽은 걸까?
료가 존재하는 세계와 사키가 존재하는 세계는 너무 달랐다. 자주 가던 단골 분식집, 옷가게, 도로의 나무까지 전혀 다른 모습이다. 부모님의 관계도 나쁘지 않았고 따뜻하고 환한 기운이 가득했다. 료가 어둡고 부정적이었다면 사키는 밝고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료는 점점 자신이 아닌 사키가 태어났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사키와 같은 공간에서 살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료는 사키를 통해 이제껏 느끼지 못한 가족의 사랑을 경험한다.
‘사키를 꽉 붙들고 있으려니 기분이 무척 복잡했다. 할 수만 있다면 거리를 두고 싶은 상대방에서 어쩔 수 없이 딱 달라붙어 있다. 그럴 마음은 전혀 없었는데 어느새 호의에 기대고 있다. ……게다가 그러면서도 별로 열등감이 들지 않는다. 그렇구나. 꼭 가족 같다.’ (261쪽)
노조미의 죽음을 밝히는 추리적 요소와 시공간 이동이라는 판타지를 접합한 색다른 즐거움을 주는 소설이다. 더불어 자신의 존재 의미와 정체성을 찾아가는 성장소설이라 볼 수 있다. 누구나 한 번쯤 상상하는 ‘만약에’란 설정은 이 소설에서만큼은 결코 진부하지 않다. 오히려 특별하다. 내게는 료가 자신의 세계로 회귀했는지의 여부를 떠나 깨고 싶지 않은 꿈처럼 신비한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