퀼트, 퀼트
양선미 지음 / 현대문학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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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화음이 아름다운 건 아니다. 오히려 그 과정이 아름답다. 자신의 소리가 아닌 상대의 소리를 듣고자 하는 노력 말이다. 삶에 있어서도 다르지 않다. 관계라는 화음을 위해 누군가는 내 소리를 줄여야 하고, 누군가는 본연의 소리가 아닌 다른 소리를 내야 한다. 양선미의 소설집 『퀼트, 퀼트』이 그랬다. 화음이 아닌 불협화음이 가득했다. 10편의 소설은 하나같이 가족의 불화를 보여준다.

 

 소설 속 불화는 폭력에서 비롯된다. 교통사고 조서를 쓰는 장면으로 시작한 「조서」의 주인공 은수는 고등학교 논술 강사다. 어머니가 죽고 폭력을 일삼던 아버지를 피해 숨어산다. 그러나 아버지는 언제나 자신을 찾아낸다. 아버지와 은수 둘 중 하나의 삶이 끝날 때까지 불안과 공포를 떨쳐낼 수 없다. 때문에 목격자의 증언으로 은수가 조서를 쓰고 풀려나지만 진짜 아버지를 차로 친 건 은수였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일방적인 것이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화자는 가정의 강자인 부모부터 폭력을 당한 자녀였다. 장애를 가진 딸과 손자를 대놓고 무시하는 「홍시」의 할아버지, 삶의 유일한 목표가 개를 때리는 것인 듯 살아가는 「어디를 달리고 있을까, 해피는」의 아버지, 자신의 욕망을 쫓아 남편과 딸을 버린 「물고기들」의 어머니, 신체적 장애를 지닌 딸을 버린「산책 일기」속 어머니, 모두가 그러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늙고 병든 존재에 불과하다. 어떤 이유로 폭언과 폭력을 가했는지 기억조차 할 수 없을 정도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불쌍하다. 손자가 좋아했던 홍시를 따다 사고를 당한 할아버지, 딸이 풀어준 해피 대신 다른 개를 데려와 함께 자는 아버지. 하지만 자녀들이 그들을 용서하고 화해를 한 건 아니다. 그저 가족이라는 관계를 유지할 뿐이다.

 

 ‘방문 틈으로 보이는 아버지와 개의 모습이 평화로워 보였다. 당혹스러웠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어디선가 얻어 장롱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병원용 담요를 용케도 기억해내고 꺼내서 거실 바닥에 펼쳐놓은 아버지의 움직임은 풍을 맞았다는 사실도 잠시 잊을 만큼 산드러졌다. 꼬리를 흔드는 털북숭이 개마저도 아버지의 신호를 따르는 듯했다. 따뜻한 곳에 들어오니 새삼 한기가 드는지 온몸을 부르르 떨며 털끝에 매달린 물기를 털어낼 때에는 그 안에 바글대던 벼룩이며 진드기들이 집 안 곳곳에 박히겠지 싶었지만, 만사가 귀찮았다.’ (「어디를 달리고 있을까, 해피는」중에서, 85쪽)

 

 양선미는 가장 가깝다는 이유로 상처를 주는 존재인 가족을 낱낱이 해부한다. 치유나 용서를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드러나지 않는 삶의 단면을 보여줄 뿐이다. 가족뿐 아니라, 이웃과 사회, 공동체의 모습도 들려준다. 낡고 오래된 장미연립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담은 「풍경의 안쪽」는 특히 흥미롭다. 장미연립은 군수가 벌인 사업으로 단장을 한다. 도시가스가 들어오고 이름도 로즈빌로 바꾸고 새로 페인트도 칠한다. 주민들은 반상회를 통해 감시카메라도 설치한다. 겉으로는 깨끗하고 살기 좋은 빌라처럼 보이지만 주민들 사이의 교감은 점점 줄어든다.  집값이 올라가는 대신 사람 사는 냄새가 사라졌다. 감시카메라를 통해 서로가 서로를 감시한다. 제목처럼 풍경의 안쪽에는 삭막해진 삶이 있었다. 과연 그들이 원한 삶의 모습이 이런 것일까?

 

 ‘로즈빌은 점점 더 한가로워졌다. 주민들은 자신들의 주거지가 한결 쾌적해진 것을 실감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주민들은 빌라 주변을 걷거나 계단을 오를 때, 문득문득 근원을 알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낯선 감정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건 심심하달 수도 있고 섭섭하달 수도 있는, 어쩌면 허전하달 수도 있는 그런 것이었다.’ (「풍경의 안쪽」중에서, 203쪽)

 

10편의 소설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표제작 「퀼트, 퀼트」였다. 소설의 주인공 운혜는 기억을 잃었다. 현재를 잃어버리고 과거 속에서 살고 있다. 정작 운혜는 그런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돌아가신 엄마는 여전히 살아계시고, 시누이는 6년 전이 아니라 3일 전에 아이를 낳았다. 그런 운혜를 지켜보는 주헌의 말은 언젠가 기억을 잃을 모두에게 들려주는 듯하다.

 

 그때그때 닥치는 상황에 따라 움직이는 거야. 버스를 타고 가는데 펑크가 났어. 그럼 걷는 거야. 걷다가 지치면 길바닥에 주저앉아 있고. 그러다 힘이 나면 다시 걸어. 배가 고프면 아무데나 들어가서 눈에 띄는 걸 먹고, 재수 없어서 배탈이 나면 병원에 갈 수도 있고, 가게 한쪽에 쪼그리고 앉아 배를 움켜잡고 한없이 앉아 있을 수도 있겠지. 그러다 심심하면 다시 걸어. 걷는데 저쪽에서 버스가 오면 올라타. 올라탔는데 아까 탔던 버스의 승객들이 이번에는 다 이 버스에 있는 거야. 분명히 행선지가 다른데. 그런데 또 펑크가 나. 문득 시계를 봤는데 아까 펑크가 났던 시간에서 멈추어 있는 거야. 그럼 생각하겠지. 어떤 시간이 진짜이고 어떤 시간이 가짜일까. 하지만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 (「퀼트, 퀼트」중에서, 98~99쪽)

 

 어쩌면 우리는 상처로 얼룩진 삶의 시간이 끝날 때, 진짜 화음을 낼 수 있지 않을까? 그때까지 우리 삶은 여전히 가족이라는 불협화음을 만들며 살아갈 것이다. 누군가는 그것이 아름다운 화음이라 믿으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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