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비처네 (양장) - 목성균 수필전집
목성균 지음 / 연암서가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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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중한 것들은 사라진 후에야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였는지 알게 된다. 언제나 내 손에 닿을 것 같은 사물, 내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 같았던 사람들, 언젠가는 모두 다 소멸되고 사라진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영원할 수 없다는 건 불변의 진리지만 때로 부정하고 싶은 순간과 마주한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인생이 주는 선물일지도 모른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저절로 사라지는 것들은 제외하고 의식적으로 떠올리지 않는 사물과 사람도 종내엔 그리움이란 틀 속에 갇히고 만다.

 

 목성균의 수필집 『누비처네』를 읽으면서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비가 오면 요란한 빗소리를 들려주던 양철 지붕과 흙집을 부수기 전까지 불을 지피던 아궁이, 작은 마당 입구를 지키던 두 그루의 나무를 꺼내온다. 지나온 삶의 기억 속에 고스란히 살아 있는 엄마의 부자연스러운 미소가 함께 한다. 한때는 매초롬한 얼굴을 지녔을 엄마.

 

 글이란 이렇게 놀랍다. 형식에 구해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쓴 글이라는 수필이라서 그렇까. 모든 수필이 다 감동적인 것은 아닐 터. 목성균의 시선으로 바라본 평범한 일상 속에 우리네 삶이 담겼기 때문일 것이다. 시골에서 나고 자란 덕분에 나는 글을 통해 내 어린 시절 속 나를 불러올 수 있었다. 「고개」란 글에서 목성균이 그랬듯 누군가를 기다리던 고개가 우리 동네에도 있었다. 읍내로 통하는 길, 시간에 맞춰 버스를 타기 위해 그 고개에 서 있던 사람들, 장에 나갔던 엄마를 기다리며 한 곳을 응시하던 아이들.

 

 목성균의 글에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이름을 지닌 물건들이 많이 등장한다. 고백하자면 제목으로 쓰인 ‘누비처네’도 무슨 뜻인지 바로 알지 못했다. 한때 누구에게나 소중했을 물건이다. 표지의 그림처럼 아이를 업는 누비로 된 이불이다. 손자가 태어나자 객지에 나간 아들에게 아기의 누비처네 사 올 값을 보낸 아버지의 마음이 애틋하다. 어디 누비처네뿐인가.  전깃불에 반해 버렸던 등잔에선 심지를 가는 방법을 알려주던 아버지를 떠올린다. 또한 「기둥시계」란 글은 내게 할머니를 추억하게 만든다. 태엽을 감아 생명을 이어가던 촌스러운 괘종시계로 이어진다. 추억을 선물하며 삶을 반추하게 만드는 아주 아름다운 문장에 반하고 만다. 꾸미지 않은 글이 갖는 힘은 정말 위대한 것이다.

 

 ‘우리 기둥시계 바늘이 시간을 돌리는 일은 꼭 소가 연자매를 돌리는 일과 같았다. 눈을 지그시 감고 되새김질을 하면서 꾸준히 연자매의 멍에를 지고 확을 도는 소의 끝없는 노역과, 고삐를 잡고 그 노역 뒤를 따라 도는 방아 찧는 사람의 시간에 초연함 같아서 경외스러웠다. 내 선대 어른들, 아버지 · 할머니 · 증조부 등등 저 청산의 일각의 무덤 아래 드신 생전의 삶들처럼.’ <기둥시계, 149쪽>

 

 우리는 삶이 끝날 때까지 욕망을 버리지 못한다. 빈손으로 태어나 쥐었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는 게 삶이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좀 더 좋은 것을 바라고, 좀 더 높은 자리를 원한다. 맑고 순수했던 어린아이의 마음은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나이가 들수록 넓은 아량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하는데 참 어렵다.

 

 ‘나는 하찮은 내 자리에서 꽃을 피우려 하지 않고 꽃을 피운 남의 자리만 선망한다. 사회 구성 밀도만 차지한 응집력 없는 사람에게 꽃이 필 자리가 아닌 자리에서 화사하게 핀 꽃이 시사하는 바가 가혹하다.’ <꽃이 핀 자리, 550쪽>

 

 먹고 사는 일이 참 쉽지 않은 세상이다. 비싸고 좋은 음식을 먹으려 하는 게 아닌데 그렇다. 내 몸 하나 누울 자리가 없어 비탄하며 살아간다. 그럼에도 희망을 놓지 않는 건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은 아닐까. 오랜만에 만난 따뜻하고 편안한 글이다. 수필 읽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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