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내리는 눈은 그치지 않고 계속 내린다. 점심에는 캔맥주를 마셨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다. 그치지 않는 눈 때문이라고, 해두자. 긴 낮잠을 자려했으나 깨어 있다. 전화를 건 친구와 겨울 난방비 걱정과 반찬 이야기를 했고, 좋아하는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긴 통화를 했다. 그리고 시집을 주문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R 다섯 번째 정현종의 <견딜 수 없네>. 이 시집을 받는 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내 책장에서 시집을 본다.  방금 주문한, 이제 구판이 된 시집이다.

 

 

 

  새로운 시간의 시작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순간을 보아라

 하나둘 내리기 시작할 때

 공간은 새로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늘 똑같던 공간이

 다른 움직임으로 붐비기 시작하면서

 이색적인 선(線)들과 색깔을 그으면서, 마침내

 아직까지 없었던 시간

 새로운 시간의 시작을 열고 있다!

 

 그래 나는 찬탄하느니

 저 바깥의 움직임 없이 어떻게

 그걸 바라보는 일 없이 어떻게

 새로운 시간의 시작이 있겠느냐.

 그렇다면 바라건대 나는 마음먹은 대로

 모오든 그런 바깥이 되어 있으리니…… (27쪽)

 

 

  행복

 

 산에서 내려와서

 아파트촌 벤치에 앉아

 한 조각 남아 있는 육포 안주로

 맥주 한 병을 마시고

 지하철을 타러 가는데

 아 행복하다!

 

 나도 모르겠다

 불행 중 다행일지

 행복감은 늘 기습적으로

 밑도 끝도 없이 와서

 그 순간은

 우주를 온통 한 깃털로 피어나게 하면서

 그 순간은

 시간의 궁핍을 치유하는 것이다.

 시간이 기나긴 고통을

 잡다한 욕망이 낳은 괴로움들을

 완화하는 건 어떤 순간인데

 그 순간 속에는 요컨대 시간이 없다 (62, 63쪽)

 

 

  경청

 

  불행의 대부분은

  경청할 줄 몰라서 그렇게 되는 듯.

  비극의 대부분은

  경청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는 듯.

  아, 오늘날처럼

  경청이 필요할 때는 없는 듯.

  대통령이든 신(神)이든

  어른이든 애이든

  아저씨든 아줌마든

  무슨 소리이든지 간에

  내 안팎의 소리를 경청할 줄 알면

  세상이 조금은 좋아질 듯.

  모든 귀가 막혀 있어

  우리의 행성은 캄캄하고

  기가 막혀

  죽어가고 있는 듯.

  그게 무슨 소리이든지 간에,

  제 이를 닦는 소리라고 하더라도,

  그걸 경청할 때

  지평선과 우주를 관통하는

  한 고요 속에

  세계는 행여나

  한 송이 꽃 필 듯. (74, 75쪽)

 

 

  절망의 그림자

 

  순간순간 절망을 넘어서려고 그러는 거야.

  산보

  술 한 잔

  한숨과 눈물

  어떤 꽃

  어떤 웃음

  무책(無策)을 밀고 나가는 듯한

  힘찬 몸짓

  무슨 지껄임

  뒷모습만 있는 그림자. (55쪽)

 

 

  흰 종이의 숨결

 

  흔히 한 장의 백지가

  그 위에 쓰여지는 말보다

  더 깊고,

  그 가장자리는

  허공에 닿아 있으므로 가없는

  무슨 소리를 울려 보내고 있는 때가 많다.

  거기 쓰는 말이

  그 흰 종이의 숨결을 손상하지 않는다면, 상품이고

  허공의 숨결로 숨을 쉰다면, 명품이다. (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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