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일락과 고래와 내 사람 문학동네 시인선 37
김충규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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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은 죽었고 그의 시는 남았다. 남겨진 시를 읽으면서 시인을 생각한다. 시집을 위한 시가 아니라 그런지(이건 내 생각일 뿐이다) 시인의 숨결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듯하다. 당신이라는 단 한 사람을 위한 시집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집 속 당신은 ‘내 사람’으로 명명된 누군가이겠지만 시집을 읽는 이는 모두가 단 한 사람이다. 그래서 시를 읽는 시간, 당신과 나만 존재한다.

 

 라일락과 고래와 내 사람

 

 라일락이 보일락 말락

 어디에 숨었니? 내 사람

 

 공기가 삭아내리는 소리

 

 라일락 향기 지독해서

 숨어버린 거니? 내 사람

 

 라일락을 가진 집의 지붕 위에

 찌그러진 심장 반쪽

 다급히 숨은 거니? 내 사람

 

 저 집은 죽은 고래

 저 심장은 고래의 각혈 덩어리

 

 내가 먼바다에서 잡아온 고래가

 라일락 향기에 죽었다

 

 내가 이 세성에 낳아보지 않은

 희미한 딸이

 멀리서 손짓하는 한참 오후

 눈 비벼보면 아지랑이

 

 삭은 공기를 질질 끌고 가는

 허파에 구멍이 뚫린 늙은 바람

 어디 숨어 우는 거니? 내 사람

 

 내 심장을 꺼내 먹이면

 고래가 숨을 얻어 허공을 헤엄쳐오를까

 그러면 나타날 거니? 내 사람

 

 라일락이 피기 전에 온다 해놓고 못 와서

 어둠이 징검징검 허공 딛고 오도록

 꼭꼭 숨어버린 거니? 내 사람

 

 내가 심장을 꺼내기도 전에

 심장에 불이 타도록

 

 라일락 다 지고 고래 다 썩고

 그런 뒤에 나타나려니? 내 사람 (10~11쪽)

 

 유리창과 바람과 사람

 

 유리창에서 바람이 미끄러진다

 먼 곳에서 우리집 쪽으로 하염없이 밀려와

 발코니 유리창에서 그만 미끄러진다

 저 바람의 숙박은 대체 어디여야 하는가

 한때 내가 나를 들판에 버려서

 어디 향할지 몰라 허둥거리는 영혼을 보는 듯

 기실 저 바람이란 누군가의 영혼이 떠도는 것인지 몰라

 유리창에 부딪혀 피 흘리는 바람의 영혼이 측은해

 눈길을 피한들 내 영혼의 숙박이 온전한 건 아니다

 영혼이 매일 변신을 거듭한다면 모를 일이나

 저리 미끄러진 바람은 절룩일망정 변신하지 못할 것이다

 바람의 육체가 수시로 변한다고 믿는 건

 사람의 어리석음일 뿐

 한번 얻은 육체는 바람도 사람도 어쩌지를 못하는 법

 하여 서럽기도 하고 생이 두렵기도 하고

 유리창에 미끄러지기도 하는 것

 저렇게 살다 죽더라도 바람이 묘비명을 남길 일은 없듯

 내 가련한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순간이 오더라도

 나는 묘비명을 남기지 않을 것이다

 그저 세상이라는 유리벽에 반복적으로 미끄러지다

 일생을 훌쩍 허비한 것에 불과할 테지만

 앞을 가로막은 유리창을 원망할 필요는 없는 것

 바람은 바람 없는 영원의 숙박을

 사람은 사람 없는 영원의 숙박을

 그나 나나 사후(死後)는 그리 고요하면 아주 그만 (24~25쪽)

 

 장맛비로 채워지는 날들, 밤새 바람은 강했고 비는 춤추듯 내렸다. 유리창에 부딪힌 바람은 누군가의 비명이며 간절한 목소리였을지도 모른다. ‘앞을 가로막은 유리창을 원망할 필요는 없는 것’ 이라니, 봄에 접어두었던 시를 다시 펼치자 지친 여름을 일으켜 세운다. 닫힌 곳에서 울고 싶었던 울음이 터져 나오고 사라진다.

 

 뭐였나, 서로에게 우리는

 

 서쪽으로 간다 당신은

 숨숨숨 숨을 놓겠다는 건가요 해가 저렇게 퍼런데

 벌레들도 용맹하게 잎을 갉으며 살아가는데

 그러고 보니 당신의 등이 굽었다 오래오래 지쳤다는 증거

 서쪽에 이르렀을 때 당신 앞에

 큰 의자가 놓여 있으면 좋겠다 침대면 더 좋다

 거기서 오랫동안 당신이 잠에 빠졌으면 좋겠다

 함께 갈까요? 하는 듯이 당신이 내 눈을 오랫동안 들여

다보았을 때

 함께 갈 수 없는 길이잖아요라는 듯이 나는 눈을 피했다

 하필 초록의 전쟁이 벌어진 이 봄날에

 당신은 서쪽으로 간다 그런 당신에게

 안 갈 수 없나요? 라는 물음은 부질없다

 서쪽으로 가서, 당신은 새로운 모습으로

 말을 타고 이곳으로 돌아올 수도 있을까

 내가 지켜본 평소의 당신이라면 어려울 듯싶은데

 희미한 미소를 마지막으로 남기며

 당신은 기어이 내게 등을 돌렸다

 암실이 돼 있는 서쪽으로 천천히 뚜벅뚜벅

 이후로 당신을 만나려면 사진으로만 만나야 한다

 그런데 불행히도 당신과 함께 찍은 사진이 하나도 없다

 이런 그동안 뭐했나

 뭐였나, 서로에게 우리는 (60~61쪽)

 

 언젠가는 모두와 이별할 시간이 올 것이다. 그러니 미리 짐작하고 미리 아파할 필요는 없다. 어떤 의미를 묻는 일도 부질없는 일이 되고 만다. 눈부신 봄, 닿는 곳마다 물색으로 변하는 여름, 낙엽처럼 쌓이는 상실의 가을, 새로운 기대를 품는 겨울을 함께 보냈다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그래도 헤어짐을 예고하는 마지막 밤은 슬프다. 하여 내일이 오지 말기를, 기다리는 마음은 같은 것이다. 어떤 내일이 내게 올지 모르지만 조금 천천히 내일이 오기를 기다리던 시간이 시와 오버랩된다. 밤과 하나가 되었던 시간, 밤을 채운 소리와 밤을 지켜준 것들 속에 이 시집이 있었다.

 

 내일이 오지 말기를, 중얼거리는 밤이다

 

 내일이 오지 말기를, 중얼거리는 밤이다. 살아온 날의 흔

적을 싹 긁어내었으면 하는 밤이다 어제도 없고 내일도 없

고 이런 생각을 하는 지금 이 순간만 약간 허락되었으면 하

는 밤이다 코가 뭉개진 바람이 지나가는 거리에서 떼로 돌

아다니는 고양이의 발소리를 듣는다 요즘 고양이는 잘 울지

도 않는다 사람을 별로 두려워하지도 않고 가까이 다가오

지도 않고 적절한 거리에서 노려보다가 등을 돌린다 너희

도 내일이 오지 말기를, 중얼거리며 돌아다니는 거니? 물어

보고 싶은 밤이다 거대한 사상은 이미 내게는 골칫거리다

장식된 책들을 솔직히 닷 불사르고 싶다 다 타고 남은 수북

한 재를 모아두었다가 심심할 때 물에 타 마시고 싶다 방이

아닌 큰독 안에 들어가 웅크린 채 잠들고 싶은 밤이다 나에

게 심각한 표정으로 질문하는 사람을 이해할 수가 없어 그

사람과 둘이 독 안에 들어가 웅크려 자는 것도 좋을 듯싶다

나는 아직 어른이 아니지만 백 살도 넘게 살아버린 느낌은

뭘까 난을 일으킨 묘청은 전생에 고양이였을까 이런 엉뚱

한 상상이 나는 더 좋다 묘청의 묘는 어디에 있을까 그 묘

를 고양이들이 지키고 있는 게 아닐까 내일이 오지 말기를,

중얼거리면서도 내일 고양이들은 다시 올까? 궁금한 밤이

다 야옹― (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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