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레바퀴 아래서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2
헤르만 헤세 지음, 한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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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이 자기 자리를 찾아야만 완성되는 퍼즐이라면 그 과정을 견디기만 하면 될 것이다. 그것은 자리의 존재 여부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니까 인생은 그 자리에 대한 확신을 찾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그 자리를 스스로 찾아 나서고 누군가는 정해진 자리에 만족하기도 한다. 과연, 어떤 삶이 행복한 것일까?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는 한스의 짧은 생을 통해 무척 어려운 질문을 던진다.

 

 주인공 한스는 정해진 자리가 아닌 자신의 자리를 찾으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왜냐하면 한스의 생은 한스가 아닌 주변 어른들에 의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목사님, 교장 선생님은 그가 신학교에 입학하여 목사나 교사가 되어야 한다고 강요했다. 물론 한스에게는 충분한 재능이 있었다. 주변의 높은 기대와 관심이 한스를 짓눌렀지만 단 한 번도 표현할 수 없었다. 그들이 정해준 자리에 자신을 맞춰야만 했다.

 

 신학교에 입학하여 친구 하일너를 만나면서 한스는 조금씩 변화한다. 무엇이든 당당하고 자유로운 하일너와 단단한 우정을 키운다. 하지만 제도와 관습에 반하는 행동을 보인 하일너가 징계를 받았을 때 한스는 그를 옹호할 수 없었다. 한스의 마음에는 언제나 아버지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날품팔이꾼이나 하는 짓이야. 너는 모든 공부를 좋아서 자발적으로 하는 게 아니야. 단지 선생님들이나 아버지가 무서워서 하는 거라고. 1등이나 2등이면 뭐해? 나는 20등이지만 성적에 목을 매는 너희 공부벌레들보다 멍청하지 않아.” 95쪽

 

 성적과 대학 입시에 얽매였던 시간을 돌아보면 하일너의 말은 전적으로 옳다. 그러나 학생으로 공부에 주력하는 한스도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십 대라는 시기는 애매하다. 어떤 신념이나 자아가 확립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 시기를 보낸 어른들에게는 한스만이 옳았다. 하일너는 그 틀을 스스로 벗어던졌고 그곳에 남은 한스는 학업에 매진하지만 신경쇠약으로 집으로 돌아온다.

 

 아무도 그의 마음을 위로하거나 달래주지 않았다. 한스에게 기대를 갖는 이는 없었다. 이제 그는 마을의 희망이 아니었다. 거기다 사랑의 아픔까지 겪어야만 했다. 왜 그를 안아주는 이가 없었을까. 잠깐의 꾀도 부리지 않고 공부만 했던 한스에게 필요했던 건 서기나 기계공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괜찮다는 말이었다. 아니, 서기나 기계공이 얼마나 즐겁고 행복한 일인지 알려줘야 했다. 기계공이 되기로 하고 수습공의 길을 걷는 한스가 힘든 그 과정을 이겨 나갈 수 있도록 말이다. 한스는 어떤 것에도 삶의 의미를 찾지 못했다. 자연이 주는 평온만이 유일한 행복이었다.

 

 ‘겨울이 오기 전에 과일주스의 이 향기를 마시는 건 좋은 일이다. 이 향기를 마시면서 헤아릴 수 없이 많았던 멋지고 좋은 일을 감사한 마음으로 기억하기 때문이다. 소리 없이 내리는 5월의 이슬비와 좍좍 쏟아지는 여름비, 서늘한 가을 아침이슬과 봄날의 포근한 햇볕과 여름의 뜨거운 뙤약볕, 하얗게 또는 장밋빛으로 빛나는 꽃들, 수확을 앞둔 잘 익은 과일나무의 적갈색 윤기, 그리고 그 사이사이 한 해가 주는 갖가지 아름다운 일과 즐거운 일들을 말이다.’ 164쪽

 

 어쩌면 이토록 평범한 것들이 주는 즐거움을 너무 빨리 알게된 게 한스의 불행인지도 모른다. 아등바등하며 살아가는 것들이 허무하게 여겨졌을 테니 말이다. 한스에게 좋은 집과 높은 지위와 명예를 얻기 위한 삶이 아니라 하일너처럼 느끼는 대로 원하는 대로 살아야 하다고 말해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아버지나 목사, 교장 선생님 중 누구라도 한스에게 원하는 만큼 낚시를 해도 좋다고, 신학교에 떨어져도 괜찮다고 말을 해줬더라면 그는 그토록 불안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생이라는 자신만의 퍼즐을 잘 맞춰가고 있을 것이다. 아니 퍼즐 한 조각 잃어버렸다고 좌절하지 않을 것이다. 계절이 바뀌는 게 당연한 것처럼 분명 한스의 절망과 고뇌는 다른 이름이 되어 빛났을 것이다. 자신의 자리를 찾고자 방황하는 수많은 한스와 그들에게 걱정스런 시선을 걷어내지 못하는 어른들이 이 책을 읽기를 바란다. 우리는 더이상 또다른 이름의 한스를 잃어서는 안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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